제 4 길 : 두물머리 나루길 : <두 강이 만나 하나가 됨을 느끼는 치유의 길>
비가 내린다. 하지만 우리 땅을 걷고 싶은 욕망은 일기예보의 비 소식을 아랑곳하지 않고 2시간여를 전철을 타고 운길산역으로 달려왔다. 어쩌면 배낭을 촉촉이 적셔주는 비는 오늘 걷기를 한결 가볍게 발걸음을 인도할 것이기에 이 이상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랬다.
이곳은 운길산이 솟아 있어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역 앞에 세워진 운길산 – 예봉산 등산 안내도를 바라본다. 수년 전 운길산에서 예봉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타고 팔당댐까지 종주한 적이 있고 그 아름다운 정경을 못 잊어 아내와 함께 예봉산까지 종주하였지만, 오늘 안내도를 바라보니 또다시 종주하고 고 싶은 충동이 인다.
가슴이 뛰는 충동을 억제하고 오늘의 걷기의 들머리를 확인하고 동행들과 약속 시각을 기다렸다. 약속 시각은 운길산역에 09시 30분까지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10분 전이면 어김없이 도착한다.
성인께서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가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느니라 ’하셨는데 1 대간 9 정맥을 종주하신 보기 드문 산 사나이이며 우리 땅 걷기의 전도사와 함께 평해 길을 걷고 있으니 어찌 자긍심이 일지 않을까?
다행히도 비는 내리듯 마는 듯 하였지만,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북한강 철교로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금까지 남양주의 길을 걷었다면 오늘부터는 양평군의 땅을 걸어간다.
양평군에서는 ‘ 발 가는 데로 마음 가는 대로 ’ 걸어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무엇이 양평군이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말을 할 수가 있게 하였을까? 겸양謙讓이 미덕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성인께서 “ 하늘의 도道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것을 더해주며, 땅의 도道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고 겸손한 데로 흐르며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주고, 사람의 도道는 가득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하니, 겸謙은 높고 빛나며 낮되 넘을 수가 없으니 군자의 끝마침이다” 하였다.
과연 양평군의 땅은 동양 미덕인 겸손할 수 없는 아니 겸손해서는 아니 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것일까 ? 그 아름다움을 평해 길을 걸으면 느낄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을 담고 이른 곳은 양수대교 북한강 철교였다. 이제껏 기차를 타고 건넜던 철교를 두 발로 걸어간다. 철교를 걷노라니 마치 물 위를 걸어가는 듯한데 바람마저 불어와 강바람을 타고 걸어가고 있으니 신선이 아니겠는가 !
좀 더 길게 이어지기를 바랬던 북한강 철교의 자전거길과 작별하고 강변으로 진입하였더니 양수리 생태 공원이었다. 본래 아파트를 건설하려 했으나 지역 주민의 반대로 인하여 생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생태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인도표지가 없을 때는 강변에 최대한 가까운 쪽의 길을 선택하여 이르니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태백산 금대봉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하나가 되어 한강의 머리가 되었다는 두물머리에 이르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하나가 된 망망대해의 가장자리에는 고만고만한 산봉우리가 올망졸망 솟아 있고 강 가운데 떠 있는 족자도는 신비스럽기만 하였다. 비록 빗방울이 떨어지는 흐린 날씨로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의 전경이나 붉은 노을이 가득히 비친 맑고 깨끗한 정경은 연출하고 있지 않지만 거무스레한 어둠에 빗소리 조차 용해되어 고요한 정적이 감도니 묵은 때가 씻겨나듯 가득히 쌓인 번뇌가 가라앉는다.
우리의 자연은 그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감탄사 절로 나오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풍광에 젖어 내면의 고뇌를 말끔히 씻어주는 성인의 진리를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언제와도 다시 또 오고 싶은 곳 두물머리를 어찌 한두 번 온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토해낼 수 있을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비가 오는 날씨에도 두물경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두물머리 나루터의 보호수에서 자연의 무한한 생명을 느끼며 세미원 입구에 이르러 예전 아내와 이곳에 이르러 맛을 봤던 연 핫도그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금 맛을 보니 예전의 맛이 남아 있는 듯하였다.
물소리 길을 따라 두물머리 물레길을 따라 양수역에 이르렀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는 그쳤다. 해가 나오지 않아 더운 날씨도 아니어서 걸어가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경의 중앙선의 굴다리를 지나니 물소리 길을 알리는 표지기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이곳에서부터 평해 길은 물소리 길과 겹쳐지어 길을 잃을 염려는 완전히 사라지었다. 평해 길의 표지기가 매달려 있지 않으면 물소리 길의 안내판이나 표지기를 따라 진행하여도 오차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전에 물소리 길을 걸을 때는 양서면 생태 학습장을 지나 용담리를 향하여 진행하여 도시화 되지 않은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길을 걸어 월계 골을 지나 정찬손 선생의 묘소에 이르렀는데 물소리 길의 문화 유적 숲길에서 정찬손 묘소를 제외하였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면서 누누이 외쳤던 ‘ 길에서 배우자’라는 표어로 역사적인 현장을 스쳐 지나갈 때 길을 걷는 백미를 느낀다고 하였는데 비록 정찬손이 사육신과 생육신의 반대편에 섰지만, 영의정을 지낸 역사적인 인물인데 무엇 때문에 제외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사는 찬란한 업적과 만인의 본보기만을 기록해서는 아니 된다. 부끄러운 치욕스러운 역사도, 부정적인 삶의 자취도 있는 그대로 후손에 남겨야 한다. ‘ 부끄러움은 들추어내어야 교훈이 되고, 감추면 치욕이 된다. ’
평해 길과 물소리 길이 정찬손을 추모하는 동산재로 향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며 가정천변을 따라 걸어가는데 상수도 보호구역이라고 팻말을 세워놓았다. 상수도 보호구역답게 맑은 물이 흘러간다. 물소리 길을 걸을 때는 두루미가 서식하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은 볼 수 없었다.
왼쪽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앞에는 겹겹이 포개진 산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물소리 길을 걸을 때 이곳에서 처음으로 물소리를 들었던 천변길은 부용 2교를 지나면서 더욱 깊은 산골짜기로 진입하는 듯 하였다.
깊은 산골짜기답게 예전에 고시 공부를 할 때 공부를 하던 고요한 산사나 고시 학원을 대신한 독학 기숙학원인 에듀설파가 산 중턱에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 중 하나가 목숨을 걸고 공부에 빠져보지 못한 것이기에 나 같이 뒤늦게 후회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를 바랬다
부용 2교에서 헤어진 계곡물과 다시 만나 또다시 헤어지며 산길로 진입하여 이덕형 신도비가 세워진 곳에 이르러. 평해 길 스탬프 함에서 인증 도장을 찍고 있을 때 길을 걷는 사람이 경기 옛길 패스포트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스탬프 함에서 구했기에 함을 열어보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인증 도장만이 있고 패스포트는 없었다. 평소 길 관리를 잘하고 있는 경기 문화재단에서도 간혹 소홀히 할 때가 있는가보다고 웃었다.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면 묘소와는 분명 지척의 거리에 있을 것인데 묘소를 알려주는 어떠한 표지기도 없어 물소리 길을 걸을 때처럼 오늘도 묘소를 참배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관산에 뜬 달 바라다보니 통곡이요 / 慟哭關山月
합록강의 찬바람을 맞으니 마음 쓰리도다 / 傷心鴨水風
조정의 신하들은 금일 이후에도 / 朝臣今日後
오히려 서인이요 동인이요 나뉘어 싸울 것인가? / 尙可更西東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서도 오히려 각성하지 못하고 파당 싸움이 치열했을 때 비록 남인에 속했지만, 세자를 세워 국본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광해군이 후사로 책봉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면서도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했을 때는 의연히 반대하여 의로운 일에 몸을 굽히지 않았던 이덕형 선생을 재야 사학자 이이와 선생은
“사람의 성품이 너무 예리하고 재주가 있다고 하여 지도력을 갖춘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타협할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인간형은 서로 어울리기 어렵다. 정치가로서 원만한 성품과 인간관계가 지도력 향상에 중요한 요소가 됨을 이덕형과 그 동료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라고 평했고.
조선왕조실록의 사가는 “ 전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졸하였다......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李恒福)과 대등하였으나, 덕형이 관직에서는 가장 앞서 나이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난리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중국 사람이나 왜인들도 모두 그의 성명(聲名)에 복종하였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 외구(外舅)인 이산해(李山海)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하였다.“<조선왕조실록 광해군 5년 10월9일> 고 기록하였다.
이제 부용산 기슭의 산길을 걸어간다. 이제 비는 완전히 멎어 우리의 발걸음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비가 내린 탓인지 계곡에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저 소리, 아무리 들어도 싫지 않고 또다시 듣고 싶은 것은 어디에서 분출하는 힘일까 ?
이곳의 풍광을 한음 선생은 ” 물은 흘러 온갖 근심 떠나 보내고 구름은 복록따라 일어난다네....“라고 읊었다. 길고 깊은 골짜기로 진입하기를 기대하였던 계곡 길은 아쉽게 길이 끊어지어 아스팔트 길의 목왕 2리에 도착하였다.
깊은 산속에 나무가 많아 목왕리가 되었다는 이곳은 고급 전원주택 단지였는데 동행한 김 총무는 이곳은 일찍이 전원주택을 조성하여 부동산 투자자들의 선망지로 소문이 났다고 하였다.
꽃으로 단장한 담장만 보아도 전원주택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었지만 평해 길은 자연에 파묻혀 자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부용산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산길의 오르고 내리는 길이 되어 숨을 헐떡이는 길이 될지라도 그 길을 걷고 싶은 것은 왜일까?
마스크를 잠시 벗고 숨을 헐떡이며 부용고게? 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고개는 사거리로 오른쪽으로 오르면 부용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었고 왼쪽으로 가면 청계산에 가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예전에 청계산에서 부용산까지 종주 산행을 할 때 분명 이곳을 지나갔을 텐데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어 처음 와 본 것 같았다. 산의 변화무쌍한 다양한 모습을 한번 와보고 기억이 생생함을 바라는 것 자체가 아마 산을 모른다고 스스로 인정하고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전의 기억은 없었지만, 물소리 길을 걸을 때는 이곳에 이를 때 약수터에서 부용산의 전설을 들으면서 약수를 마시고 산림 욕장에서 산림욕을 하며 이곳에 이르렀는데 오늘은 약수터와 산림욕장을 만날 수 없어 아쉬웠다.
물소리 길의 진행 방향이 또 바뀐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좋을 듯 싶다는 생각을 하며 부용산을 하산하여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생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기념관을 조성한 몽양 생가에 이르렷다.
몽양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데 광복 후에는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에 온 힘을 쏟았지만 좌, 우의 대립 속에 암살당한 뒤 공산주의자란 이유로 그의 공적이 올바르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좌, 우 합작을 추진하였을까 ? ”좌, 우 합작 운동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의 추진에는 내외의 조건으로 따져보아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을 당장에는 막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극좌, 극우 노선에 의해 양극화된 민족 내의 대립을 중화시키고 약화시켜 상호 간의 증오와 살상을 최소화하여야 하는 판단도 작용했다 “ 한국현대사 민족운동연구<서중석>에서 밝혔다.
남한과 북한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지도자였지만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의 사망한 지 70년이 지난 2005년에 비로소 독립운동가의 지위가 회복횔 수 있었고 묘골 사랑하는 나의집<妙谷 愛吾窩>이 복원될 수 있었다.
”제군들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베를린 올림픽에 참석하는 우리의 선수들에게 던진 축사를 다시금 읊조리며 신원역에 이르렀다.
● 일지 : 2021년 5월 1일 토요일 비
● 동행 : 조용원 회장님. 김헌영 총무
● 목적지
- 09시 17분 : 운길산역
- 10시 13분 : 두물경
- 11시 11분 : 양수역
- 12시 17분 : 한음 이덕형 신도비
- 13시 17분 : 부용산 사거리
- 13시 41분 ; 몽양 생가
- 13시 49분 : 신원역
● 소요시간 및 거리
- 거리 : 15.2km
- 시간 : 4시간3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