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사이 / 정현인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낮에는 완연한 봄이다. 매화꽃 소식을 접하는가 했더니 지고 있다. 봄이 왔다는 소식은 꽃소식이 아니더라도 피부가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피부는 진즉 겨울옷이 무겁다며 가벼운 옷을 달란다. 점심 먹고 나면 졸린다. 졸음을 참기 위해 진하게 커피를 타서 먹어 보지만, 졸리기는 매 마찬가지다.
잠도 쫒을 겸 후배들을 불러내 휴게실에서 차담을 하는데, 한 후배의 얼굴이 상기돼 있다. 또 화를 낸 모양이다. ‘짜식, 왜 티를 내고 다녀. 왜 도둑놈에게 휘둘리며 살아’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형님, 지금 뭐라고 하십니까. 나 흉보는 거는 아니지요”라며 금방 반격에 나선다.
아니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를 생각하고 있었어. 난센스 퀴즈인데 맞혀보겠어 라며 질문을 던졌다. 여자 후배가 “무관심한 사이요”라고 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야. “부부 사이. 아니면 사해(四海보)다 더 큰 오해(五海)사이 아닌 가요”라고 한다. 그 참 재미있는 답변이네. 상상력도 풍부하네.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뭔데요 라며 채근들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야. 뭐 그런 사이가 다 있어요. 화나 분노가 주인 행세를 해도 진짜 주인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이지. 놈들은 순식간에 총칼을 휘둘러 버리기 때문에 무섭다는 것이지. 옛말에 “아흔 아홉 가지 공덕을 베풀었어도 한 번 화를 내면, 그 공덕 모두가 불타버린다”고 했어. 그러니 도둑놈이 화를 날 때 까지 주인이 알지 못하면 큰 일 아니겠어. 하하 듣고 보니 일리 있다고 맞장구를 쳐 준다.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정말 끔직한 사이는 또 있어. 술 먹고 필름이 끊긴 사이야. 아침에 깨어나 보니 머리는 아프고,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무 기억이 안 날 때지. 밤 새 어떤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 또한 무서운 일 아니겠어. 근데 제일 무서운 사이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 그 사이가 몇 십 년이라면 어쩌겠어. 네, 정말 무서운 사이 네요 라고 맞장구를 쳐 준다. 엄밀히 말하면 화하고 필름이 끊긴 것은 달라. 화는 도둑놈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고, 필름이 끊긴 경우는 술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둘 다 의식이 없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네. 다른 점은 화는 주인이 도둑놈을 알아차린 순간 자취를 감춰버린다는 것이지.
화가 주는 피해는 어마 어마해. 그동안 사랑한다고 속삭인 여인사이도, 죽을 때 까지 함께하자며 의리를 맹세하던 친구사이도 멀어지게 하는 놈이야. 어디 그 뿐이겠어. 천륜이라고 하는 부자지간의 사이마져도 갈라놓기도 하지. 결국 화라는 놈은 주인도 상대방도 다 상처를 주지. 요즈음은 화내고 나면 소화도 안 되고 며칠간 몸이 아파. 그러니 화내지 말아야 하면서도 잘 안 돼.
진짜 무서운 건 다른데 있어. 화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찾아와 주인의 마음에 살고 있어. 엄밀히 말하면 주인이 화를 키우며 살지. 집을 지어주고, 밥도 주고, 격려도 해주는데, 그런지를 모른다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라고 묻는다. 화라는 놈은 나는 잘 났고, 너는 못 났다는 집 속에서 기대감, 욕망, 집착이라는 에너지를 먹고 성장한다네. 이들 에너지가 커지면 폭발을 하지. 이놈들은 숨어서 주인의 몸과 마음을 능수능란하게 부리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고, 물건까지 집어 던지게 해. 심할 때는 폭력까지 행사하면서. 고백하자면 나도 내가 쏜 독화살에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맞은 사람들의 상처는 어때 겠어. 그래서 늘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그 놈에게는 처벌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 천성이 그렇다며. 참 웃기지 않아,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야.
‘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올 해 화두를 무쟁(無諍)으로 정했어. 무슨 뜻인가요? 타투지 않는다는 말이야. 번뇌와 갈등 없이 고요한 마음으로 살자, 뭐 그런 뜻이지. 다툼의 원인은 갈등이고, 갈등의 원인은 번뇌와 망상, 탐욕과 집착이지. 마음에 갈등이 생기면 화를 내게 돼 있어. 화를 내지 않으려면 갈등 관리를 잘 해야 돼. ‘내 마음 나도 모르게 ’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보이지 않은 마음의 갈등을 관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잖아요 라고 묻는다. 물론 어렵지. 선배님의 실천 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요?
글쎄 방법은 간단해. 난센스 퀴즈의 답처럼 사이를 쪼개고 또 쪼개어 “나도 모르는 사이”가 없도록 하는 거야. 갈등이 생겨 화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야 이 도둑놈 봐라.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여기 숨었었네.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이 때다 싶으면 낚아채 가차 없이 회초리를 때려야지.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호통을 쳐야 해. 그래도 힘이 센 놈들은 놀라지도 않아. 그럴 땐 어떻게 해요라고 묻는다.
화라는 도둑놈은 항상 형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형성될 때만 작용을 하거든. 그러니 싫어하는 조건을 만드는 거야. 이놈은 어둡고 습한 기운이여서, 마음이 어두울 때만 나타나거든. 그러니 늘 마음을 밝게 가져야 해. 어쩔 수 없이 화라는 칼에 휘둘릴 것 같으면 얼른 피하는 것이 상책이야. 그리고 대꾸도 말고 무시해버려.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다음으로 미뤄나. 그렇게 상황을 바꾸면 사라지고 없을 거야. 상대가 없으니 싸움을 못하지.
그러면, ‘번뇌나 갈등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요’ 라고 묻는다. 번뇌나 갈등은 더 많이 가지려는 데서 생기기 때문에 비우고 도 비우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이웃들과 나누고.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냥 속없이 살면 되지 뭐. 잘난 체 하지 말고, 다른 사람 존중하면 돼. 그리고 늘 베풀면 되지 않을까.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 사주고, 두려움에 떠는 자에게는 위로해 주고, 길을 묻는 자에게는 친절히 안내해 주고. 그렇게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마음이 태양처럼 빛나 화가 살 곳이 없지 않을까 생각되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했지만, 내가 말한 대로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오늘도 ‘무쟁’이라는 화두를 들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음을 챙긴다. 미세 먼지도 없고 화창하다. 모처럼 창문을 열어 놓고 출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