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상징의 세계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는 시각적인 부호이자 사상을 교류하는 도구이며, 또 언어를 공간적·시간적으로 멀리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 매개체이다. 인류사회에서 사상 교류의 필수적인 도구인 언어는 어느 민족이든 보유하였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문자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문자는 특정 사회의 문화 성숙도를 나타내는 표지가 될 뿐만 아니라, 축적된 문화를 후세에 전하는 주요 도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자는 바로 중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기록하는 부호 시스템이자, 한자문화권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후세에 전달하는 주요 기능을 수행하며,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인류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어떤 모양으로 변화·발전하였을까? 아래에서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한자의 기원 고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하나는 고대 전적에 기재된 한자 기원에 대한 학설을 귀납 정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발굴된 고대의 문자학 자료를 연구 분석하는 것이다.
전국(戰國)시대부터 한자는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역사편수관)인 창힐(倉頡)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사람들의 사고를 널리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순자(荀子)』·『여씨춘추(呂氏春秋)』·『한비자(韓非子)』 등을 비롯하여 문자학의 경전적인 저작인 동한(東漢)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漢)나라에 와서는 창힐을 신격화시키기까지 하였다.
특히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창힐이 태어나면서 새의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쓸 줄 알았다고 치켜올리면서, 창힐이 한자를 창제하자 하늘에서 서속비가 내리고 천지신명이 밤새 울었다고 하였다(昔者蒼頡作書而天雨粟, 鬼夜哭). 이는 문화의 표지인 문자를 갖게된 중국인의 환희를 극대화한 허구적인 것이지만,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동감할 수 있는 감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승상인 이사(李斯)가 지은 글자공부책의 이름이 『창힐편(倉頡篇)』인 것으로 보아도 창힐에 대한 중국인의 관념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자는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또 어느 한 사람에 의해 갑자기 창조될 수는 없고, 축적된 문화의 구체적인 산물이다. 순자는 창힐이 한자를 창제하였다는 학설에 대해 문자는 '약정속성(約定俗成)'의 결과물이며 창힐은 그저 당시 통용되던 문자를 정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약정속성'이란 문자의 창제과정에 수반하는 부호에 대한 약속과 사회적 승인을 축약한 말로 문자의 탄생과 사회적 공인에 대한 개념을 가장 합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창힐조자설(倉頡造字說) 외에도 팔괘기원설(八卦起源說)·도화기원설(圖畵起源說)·결승설(結繩說)1)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학설들은 현대에 와서는 이미 그 의미가 많이 희석되었다. 왜냐하면 한자의 기원 고찰에 보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유물이 속속 출토되어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태껏 가장 이른 시기의 한자로 인식된 갑골문은 기원전 약 1,384년 상나라 반경(盤庚)이 은허(殷墟)로 도읍을 옮긴 이후의 길흉을 점친 기록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갑골문의 개별자는 약 5,000자에 이르며, 상형·지사·회의뿐만 아니라 형성·가차도 발견되고, 또 어법이 구비된 문장으로 볼 때 상당히 성숙한 문자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한자는 갑골문 이전에 오랜 시기 동안 발전과 변화를 거쳤으며 어딘가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는 한자 기원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출토 자료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의를 한자 기원 각도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한자의 기원을 고찰할 때 흔히 거론되는 자료는 중국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앙소(仰韶)문화의 유적지인 서안(西安)의 반파(半坡)와 임동(臨童)의 강채(姜寨)에서 출토된 도기에 새겨진 부호이다.
반파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기는 탄소 동위원소로 측정한 결과 약 6천 년 전에 제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만약 도기에 새겨진 부호가 문자2)라고 한다면 한자의 역사는 최소한 6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한 고문자 학자인 궈모뤄(郭沫若)는 반파 도문은 문자 성질을 띤 부호라고 단정하며 중국문자의 기원이거나 중국원시문자의 잔류라고 하였다. 그러나 반파 도문의 부호가 과연 문자의 구비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는 향후 더 연구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또 산동(山東) 거현(莒縣) 능양하(陵陽河) 유적지에서 발견된 대문구(大汶口) 문화 후기에 제작된 도기에 새겨진 부호가 있다.
대문구 문화는 산동성 주위에 형성된 신석기 문화의 하나이며, 이 도기의 부호는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연대는 약 4,500년 전의 것이다. 학자들은 도기에 새겨진 ①·②·③·④를 각각 '斤'(자귀)·'戉'(큰도끼, 銊의 상형자)·'炅'(빛나다)·'炅山' 등으로 고석하였다. 그 가운데 ③은 윗부분은 태양(日), 아랫부분은 불(火)로 구성되어 있다. 이 학설은 탕란(唐蘭)이 주장한 것이고, 위싱우(于省吾)는 '旦'(日+山)3)으로 고석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③이 '炅'이든 '旦'이든 관계없이 이 부호가 대문구 문화와 시간과 공간상으로 인접한 양저문화(良渚文化)의 기물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는 ③이 이미 부호의 범위를 벗어나 문자의 기능인 전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원시문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하고 있다.
종합하면 3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갑골문은 이미 성숙한 단계의 한자임이 확실하고, 또 후대에 발견된 각종 기물에 새겨진 부호가 문자일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면 한자의 기원은 5천 년 혹은 6천 년 혹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4) 그러나 한자의 기원에 관한 결론은 더 많은 관련 유물이 출토되어 한자가 변화 발전한 궤적을 체계적으로 꿸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 함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