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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중·서부 지역 사찰의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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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률의 삶과 독립운동
1. 서언
김광식(동국대학교 특임교수)
일제하 한국불교는 일제 사찰령으로 억압을 당하면서도 불교 근대화와 독립운동을 위해 치열하게 활동하였다. 불교계의 독립운동은 직접적인 항쟁, 간접적인 저항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런 활동에 대한 학술적인 검토는 적지 않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주역에 대한 자료 수집 및 분석, 연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대상이 많다.
이렇듯이 그 실상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연유는 다음과 같은 측면을 거론할 수 있다. 첫째, 관련 자료가 부실하였다. 불교의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하여 발간한 자료집이 희소하여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다. 6·25 전쟁, 남북의 분단, 불교정화운동 등을 거치면서 희소한 자료도 산실되었다. 둘째, 독립운동의 터전인 사찰의 분규와 스님들의 이동이 있어 연구의 기반, 후원이 부실하였다. 셋째 불교학계에서는 사상, 신앙에 경도된 연구가 주류가 되었기에 불교 독립운동의 주제 연구는 희소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 흐름이 있었지만 한용운, 백용성, 백초월 등 명망가 중심의 연구만이 수행되었다. 이런 흐름이 있었기에 전국 각처의 사찰에서 수행된 독립운동, 헌신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한 승려들의 개요, 성격은 명쾌하게 파악되지 않았다.1)
이런 전제하에서 본 고찰에 다룰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봉률(1897~1947, 해인사 · 직지사) 삶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첫째, 김봉률 연구는 그간 전무하였다. 그가 출가하고, 소속된 해인사 3·1운동의 연구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정도이었다. 둘째, 김봉률의 문손과 세속의 후손이 노력하여 독립 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지정되었기에(1996년)2) 연구의 계기는 마련되었다. 문손과 후손이 노력하여 직지사에 행적비(1999년)를 건립하고, 3.1절 기념 추모재(2017.3.1)의 개최, 3) 추모선양회를 구성하여 추모 다례제(2019.8.11)를 거행하였다. 이런 구도에서 「포월당 봉률스님 행적기」(2019년)가 작성되었다. 셋째, 필자는 김봉률의 존재와 활동을 20년 전에 파악하였지만 연구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필자가 김봉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봉률과 인연이 있는 한용운, 최범술, 김일엽 등을 연구하였고 직지사의 고승인 관응스님 책(황악일지록』, 2018)의 원고를 집필하였기 때문이다. 김봉률은 3·1운동 당시 해인사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일제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1년간 투옥되었고, 출옥한 이후에는 직지사 주지를 수행하면서 만해 한용운, 최범술 등의 이른바 항일 비밀결사체인 卍黨(만당)의 활동에 관여하였다. 이런 구도에서 그는 김일엽의 아들(김태신, 일당스님)을 후원하였다. 때문에 김봉률의 삶의 궤적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시절 인연으로 구체적인 연구는 수행하지 못하였다. 위와 같은 전제와 배경
1) 임혜봉의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민족사, 2001)이라는 단행본과 필자의 「불교의 민족운동」(『종교계의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이라는 고찰이 있다. 그러나 미진하여, 보완할 측면이 많다.
2) 『불교신문』 1996.8.20, 「독립운동한 스님 독립유공자 훈장받아」, 『법보신문』도 1996년 8월 그 무렵에 「독립운동 앞장선 포월당 봉률스님 보훈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독립유공자 된 봉률스님 생애 재조명」이라는 제목으로 김봉률을 특집으로 보도하였다.
3) 『법보신문」 2017.3.3. 「황악산 직지사, 봉률스님 추모재 봉행」. 법등스님이 직지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3월 1일 추모 다례재를 개최하여,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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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10. 24; 재임 인가67)
위의 내용을 보면 김봉률은 1937년 중반부터68) 1945년 해방되는 그날까지 직지사 주지로 근무하였다.
김봉률이 주지를 하였던 기간은 일제 식민통치가 더욱 더 기승을 부리던 시기이었다. 이 기간에 그가 수행한 사업, 불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내용이 주목된다. 그러나 전하는 기록은 흔치 않다. 그러나 그의 은사인 퇴운에 대한 정성, 추모의 사업을 한 것이 있다. 1937년 5월 7일(음력 3.26) 퇴운을 위한 壽宴會를 성대하게 직지사에서 개최하였다.
直指寺 尹退雲 禪師는 約 四十年間當禪院을 爲하야 獻身的인 奉事를 하였음은 이 共知 하는 바이지만 一生을 淸淨한 法身으로 修行하는 雲水袖子이며 當寺의 重創主이며 斯界의 慈善 敎育 布敎에 大熱誠家이외다. 今年 回 三月二十六日이 右禪師의 回年임으로 門徒 及 各 信徒의 設備로 左 記 順序와 如히 盛大한 壽宴會를 舉行하였다더라.69)
위와 같이 여법하게 수연회를 개최하였다. 70) 동참한 대중이 2천여명, 축하시가 300여수가 나왔고, 전강선사가 찬조 연설을71) 하였으며, 김봉률은 개회사와 답사를 하였다.2) 이는 그의 은사이어서 거행한 것도 있지만, 직지사의 중창주로 여법한 수행을 한 퇴운선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퇴운이 1939년에 입적을 하자, 4년 후인 1943년에는 오대산 상원사의 선사인 방한암의 글을 받아서,73)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1943년 5월 6일에 개최된 그 제막식은74) 직지사 고승인 제산선사와 퇴운선사의 공적비75) 제막식을 함께 하였다는 성격을 갖는다. 즉 1930년에 입적한 제산선사의 비석도 함께 세워 제막식을 거행했음은 직지사의 선 전통을 수립하려는 의지가 강렬함을 뜻한다. 그의 행적기에는 그가 주지로 있으면서 직지사 천불전을 보수하였으며, 천불선원의 조실인 탄옹을 외호하면서 선풍진작 및 선학원을 후원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76)
한편 김봉률은 주지로 근무하는 8년동안 많은 고뇌를 하였을 것이다. 그가 수행한 독립운동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도 간단치 않았을 것이고, 식민통치에 협조하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 식민통치에 협조하였지만,77) 그의 내면은 민족정신과
67) 1년 후에 재임 인가를 한 연유는 알 수 없다.
68) 『매일신보』 1938.5.30, 「지방인사」. 金奉律氏(直指寺 住持) 합천 해인사 여행길에 본사 선산 지국을 방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수연회의 개요는 「불교시보」 24호
69) 『불교』 신6집(1937.8), p.45,「直指寺退雲禪師壽宴會」.(1937.7.1). p.7,「直指寺 尹退雲師의 壽宴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보도하였다. 보도하였다.
69), p.1에서는 「退雲禪師沐라 하여 목향식으로 표현하여,
70) 『경북불교』 12호(1937.871) 전강선사는 직지사에서 용맹정진 수행을 하고, 오도 인가(만공선사)후 첫설법을 하였다. 『전강선사일대기』, 용화선원, 2023, pp.42-49, pp.225-228. 전강선사가 용맹정진후 직지사를 떠날 때에 윤퇴운이 여비를 주었다.
72) 위의 『불교」 신6집의 p.46, 보도기사.
73) 지관, 한국고승비문총집』,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pp.1018-1019, 「김천直指寺 退雲堂 圓日禪師碑文」. 비석의 문도질에 은법제자로 抱月 奉律이 나온다. 그리고 주지로도 포월봉율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김봉률의 아들인 光潤과 光基가 출가하지 않았는데 佐로 나온다는 점이다. 霽山退雲 兩禪師功績碑除幕式」.
74) 『불교시보』 105호(1944.4.15), p.6. 「直指寺故, 2010,
75) 두 비석 비문의 지은이는 한암이다. 한암일발록』 상권, 오대산 월정사pp.444-450. 그 비석은 제산정원선사 비명, 퇴운원일선사 비명이다.
76) 이런 내용은 근거에 의해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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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살필 것은 그가 주지로 있었던 기간에 그가 양아들로 삼은 김태신(1922~2014: 김일엽 아들, 화가, 출가,78) 일당스님, 직지사 중앙)을 매개로 전개된 만해 한용운의 활동에 개입된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전후 사실을 입증할 일당스님은 입적했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그의 일기와 구술을 바탕으로 나온 1991년에 출간한 회고록(소설)인 라훌라의 사모곡』(한길사)에79) 그 내용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때문에 그 정황은 이해되지만, 김일엽 문도들의 거부감도 있어80) 역사의 기록으로 활용할 때에는 주저되는 바가 많다.81)그러나 직지사의 근대사와 김봉률의 역사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그 전후사정을 역사 자료로 인식하여 들추어 내고자 한다.82)
우선 만당의 개요를 제시하겠다. 만당은 1930년 5월 경, 만해의 정신을 따르던 불교청년들이 항일불교, 불교대중화를 기하기 위해 만든 비밀결사 조직체이다.83) 처음에는 당원 18명으로 시작되었으나 전국적으로 당원이 증가하여 80명에 달하였다. 초창기 18명의 당원 명단은 파악되었지만, 80명에 달하는 당원은 알 수 없다. 해인사 출신인 강재호, 장도환, 박근섭, 이용조 그리고 김법린, 허영호, 박영희가 당원이었다.84) 직지사를 무대로 전개된 김태신의 활동에는 당원인 최범술, 만해의 동지인 박광 등이 나온다.85) 당시 직지사 주지인 김봉률이 당원이라는 문헌 증거는 전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를 만당의 당원인지, 아니면 외호자인지를 단언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보다 면밀한 검토,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현재는 당원으로 보고자 한다.
이런 전제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김일엽의86) 아들인 김태신과 김봉률이 인연을 맺은 시점은 김봉률이 직지사 주지를 맡았던 1937년 직후로 이해된다. 그 당시 직지사 서전에서 수행을 하였던 김일엽을 찾은 김태신을 김봉률에게 소개하였다.
당시의 직지사 주지는 김봉률(金奉律)씨였다. 그분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온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김봉률 주지스님에게 나와의 관계를 설명했고, 도움을 청했다. 김봉률 스님은 언젠가의 만공스님처럼 나를 떠 맡았다.87)
77) 『경북불교』 43호(1941.2.1) p.3, 「直指寺 國防獻金」. 여기에는 직지사 주지인 金山奉律을 비롯한 승려 15명이 인근 부락을 돌면서 시국을 홍보하여 얻은 보시 금액 200원을 당국에 헌금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78) 관응을 은사로 1988년에 출가하였다.
79) 지은이는 김태신으로 나오지만, 실제 문장을 만든 당사자는 정형(현재, 혜월스님)이라는 소설가이다. 그는 "김화백의 일기와 구술(口述)을 토대로 그의 초고를 정리, 『라훌라의 사모곡』이 출간될 수 있도록 도왔다”고 기술하였다.
80) 경완, 「일엽선사의 생애와 사상」, 『한마음연구』 11, 2023, pp.169-176. 이 글에는 일엽문도회의 입장(허구, 오류 등) 지침(의문점, 문도들이 입장을 제기하지 않은 이유)이 있어 참고된다.
81) 그래서 필자는 그 작가(정형)를 만나고자 의도하였으나, 현재까지는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서울대 국문과 출신으로 기자 생활을 하였는데, 현재는 혜월스님(충남, 서산)이라고 한다. 김봉률의 딸, 김죽자와 성재헌의 증언.
82) 김일엽 문도(수덕사 환희대)들은 이 책의 내용, 그리고 김태신의 존재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 뚜렷한 입장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문제점(허구, 오류)이 많다고 한다.
83) 김광식, 「조선불교청년총동맹과 만당」,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민족사, 1996.
84) 효당 최범술 문집』 1권, p.402.
85) 김광식, 「만당(卍黨)과 효당 최범술」,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도피안사, 2007.
-------------, 「박광의 삶과 한용운」, 「만해학보』 19, 2019.
-------------, 「박광」, 「만해 한용운의 기억과 계승』, 인북스, 2022.
86) 김광식, 「김일엽 불교의 재인식」, 『불교학보』 72, 2015.87)
87) 김태신, 라훌라의 사모곡』 상권, 한길사, 1991,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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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술이 김봉률, 김태신, 김일엽 인연의 서막이다. 그런데 김일엽이 어떤 인연, 사연으로 자기의 내밀한 사정을 김봉률에게 터 놓고, 부탁을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88) 하여튼 김태신은 그 무렵부터 김봉률의 양아들로 소개되었다. 그때 김봉률은 김태신을 자신이 일본 동경에 머물렀던 시절에 얻은 친자식으로 소개하여 부인, 아들, 딸도 김태신을 가족과 같이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김태신의 라훌라의 사모곡』에 나온 김봉률, 한용운, 최범술, 박광, 독립운동 자금 전달, 만당 활동의 내용을 제시한다. 1939~1942년의 정황이다.
사례 1: 우리는 대구로 오기전 지난 여름에도 하룻밤 신세를 진 진주의 최영환 선생 친구 집에서 일박했다. (중략)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그는 진주지역에 살고 있는 유지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 (중략) 박광선생은 대구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던 분이다. 요리집을 차려 놓은 것은 자금을 마련하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파출소의 주목을 받지 않고 쉽게 출입할 수 있도록 위장한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 어림해 보았다.
이튿날 아침, 수 많은 편지 봉투를 한지에 싼 다음 가방에 넣고 있는 박광선생에게 물었다. (중략)나는 편지 운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편지 운반 건에는 이당 아버지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났을 때 최영환 선생이 나에게 말했다. “피곤하지만 나하고 한 군데만 더 갔다 오자꾸나”
이당 아버지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 와룡동을 나와 최영환 선생은 성북동으로 갔다. 성북동 언덕을 걸어 올라가 한 솟을 대문 앞에 섰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 댁이다."
한용운 선생은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흔들거렸다. 나는 최영환 선생의 소개로 한용운 선생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는 편지봉투가 든 가방을 한용운 선생에게 건넸다. “앞으로는 마사오가 종종 편지 심부름을 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어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했다.
"언제든지 심부름 시키실 일이 있으면 저를 시키십시오"
한용운 선생이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사이 그늘이 스쳐갔다. 아마도 그 그늘은 철없는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자책감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는지, 그 편지 봉투 속에 편지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로부터 모은 돈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서야 들었다.89)
사례 2; 하루는 김봉률 아버지가 나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지난 방학 때 네가 최영환씨와 함께 대구에서부터 경성까지 편지 심부름을 했었다는 애기 들었다. 바
쁜 일이 없으면 올 해도 편지 심부름 좀 하겠느냐?"
“바쁜 일은 없습니다. 심부름 해드릴께요"
"옳지 착하구나"
김봉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대구의 박광 선생 댁으로 갔다. 다음날 한지에 싼 봉투 뭉치가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김봉률 아버지와 나는 박광 선생 댁을 나왔다. 대구역에서 밤 기차를 탄 것도 작년과 똑같았다. 기차 안에는 특무계 형사가 오락가락 하면서 의혹이 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몸이나 짐을 수색하고 있었다. 2인조 형사가 김봉률 아버지와 내가 앉아 있는 좌석 곁으로 다가왔다. (중략) 김봉률 아버지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경성역에 도착한 우리는 선학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탄옹
88) 이에 대해서 『라훌라의 사모곡』을 지은 혜월스님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로 언급했다. 즉 김일엽은 일본유학을 거친 신여성으로서의 비구니 스님이었고, 김봉률도 일본 견학을 거친 인물이어서 상호간에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리고 김봉률은 호탕한 인물로 김일엽의 어려움을 받아준 것으로 볼 수 있다.
89) 위의 책, 상권 pp.17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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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와 있었다. 적음스님도 계셨고 또 한분 부산 범어사의 하동산(東山)스님이라는 분이 함께 있었
다. (중략)
선학원에서 아침을 먹고 김봉률 아버지와 나는 성북동의 한용운 선생을 찾아갔다. 한용운 선생은 나를 보고 반색했다. “작년에 봤을 때보다도 아주 의젓해졌구나"
나는 두 번째 심부름을 하면서도 편지봉투 속에 독립운동 자금이 들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주와 상해에 가 있는 독립투사에게 그 가족들이 안부 편지를 보내는 것이려니 여겼다. 편지가 경찰에 발각되면 독립투사 조직이 발각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편지를 운반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90)
사례 3: 최영환 선생이 나를 무등산으로 데리고 간 것은 허백련 선생에게 소개를 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목적이 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김봉률 아버지가 나를 최영환 선생에게 보낸 것부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허백련 선생이 한지에 싼 봉투를 내놓았다. 그것을 가방에 넣었고, 나는 그 가방을 들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허백련 선생이 주축이 되어 전라도 광주 지방에서 각출한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최영환 선생과 나는 광주에서 대구로 갔다. 박광 선생 집으로 간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식사후에 일찍 잠을 잤다. 여행에 피로한 탓이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던 나는 자정쯤해서 눈을 떴다. (중략)
최영환 선생이 허백련 선생에게서 가져온 자금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이야기를 했고, 독립운동 자금을 걷는데 동지들이 보다 열성적으로 임해 주어야 하겠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운반해주고 있는 편지 묶음이 독립운동 자금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략)
이튿날 박광 선생은 두툼한 한지에 싼 봉투 뭉치를 내놓았다. 그것을 허백련 선생 댁에서 가져온 것과 합해 가방에 챙겨 넣었다. 내가 그것을 들고 앞장 섰고 최영환 선생이 뒤따라 왔다. 우리는 밤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아침에 경성에 도착하여 선학원으로 갔다. 적음스님은 지난 해와 다름 없었다. 그곳에서 조반을 먹고, 성북동 한용운 선생 댁으로 갔다. 한용운 선생도 내가 대학생이 되어 나타나자 반겨 주었다.91)
사례 4; 어머니와 나는 견성암을 나와 만공스님이 계시는 초당을 향해 걸어 갔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너 한용운 선생 댁에 간 일이 있느냐"
“네, 김봉률 선생과도 갔었고, 최영환선생과 함께 간 일도 있습니다. 편지 뭉치를 전해 드리느라고..."“나무 관세음보살”
(중략)
“너 올해도 편지 심부름을 해 주어야 하겠다”
“알겠습니다.”
최영환 선생과 나는 이튿날 진주로 나왔다. 촉석루 근처의 호국사에서 일박했다. 그의 속가 친구가 다녀갔다. 이튿날 호국사를 떠날 때 나의 가방 속에는 꽤 많은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대구의 박광 선생댁에 오니까 그곳에 김천의 김봉률 아버지가 함께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지.”
“어서 오너라,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성엘 나와 함께 가기로 하자"
"네"
우리는 다음날 바로 대구를 떠나지 않았다. 미루어 짐작컨대 독립운동 자금 준비가 채 안되었던 것 같
90) 위의 책, pp.193-194.
91) 위의 책, pp.21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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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중략) 이튿날 최영환 선생은 다솔사로 돌아 갔다. 김봉률 아버지와 나는 경부선 밤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선학원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했다. 성북동 한용운 선생 댁에 도착한 것은 점심 때였다. 한용운 선생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악화되어 있었다.
“마사오가 올해에도 수고를 했구나" (중략)
이것이 내가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해 준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다음 방학 때에 조선에 돌아왔을 때는 김봉률 아버지도 최영환 선생도 독립운동 자금 운반을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생각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하지 않게 된 것이거나,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상이 국내에 알려져 회의를 갖게 된 우국지사들이 독립운동자금 모금이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중단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구심점이 되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신병이 심각한 상태로 악화되면서 활동이 위축된 것으로 추측된다.92)
이상과 같은 사례 4건에서 여러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독립운동 자금 모금의 최종책임자는 만해 한용운(심우장)이었다. 둘째, 모금활동의 실무 책임자는 최범술(최영환), 박광, 김봉률, 허백련이었다. 셋째, 모금 활동의 터전이 된 대상은 직지사, 다솔사, 호국사, 박광 요리집(대구), 선학원 등이었다. 넷째, 한용운을 정점으로 하였던 독립운동 모금의 최종적인 루트는 상해 임시정부로 비정된다. 한용운은 임정의 김구와 비밀 채널을 갖고 있었는데,93) 그 채널을 활용하여 최범술과 김봉률이 모금한 재원도 임정으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만해에게 자금을 제공한 대상처로 통도사(구하, 경봉)와 94) 수덕사(만공)가 거론되었다. 이제는 경북(직지사, 김봉률), 경남(다솔사, 최범술, 진주), 대구(박광), 광주(허백련)에서의 대상처가 추가되는 것으로 본다. 다섯째, 만당 및 만해의 독립운동 구도에 간접적으로 포괄되었던 김은호, 김일엽, 적음, 탄옹, 하동산 등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들의 민족의식도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만해, 만당,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에 김봉률은 깊숙이 개입되었다. 물론 그 활동의 단면에는 김일엽의 아들 김태신(일당스님)이 부가되었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김봉률의 독립운동 모금 활동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는 김일엽의 문도(김태신 존재 부정, 배제), 직지사에서의 관심 하락 등에서 나왔다. 이제는 적극적인 인식으로 김봉률의 민족운동 발굴을 해야 할 것이다.
6. 결어
이제 본 고찰의 맺는말을 제시하겠다. 그는 필자가 위에서 서술한 내용을 유의하면서 추후 김봉률 연구에 유의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하겠다. 그를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봉률에 대한 자료 수집의 문제이다. 김봉률의 연구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진일보한자료수집, 분석을 통한 자료집 제작이 요청된다. 혹은 김봉률의 동지(박달준, 김장윤, 김경환등)를 포함한 경북불교 불교운동의 자료집으로도 검토할 수 있다.
둘째, 김봉률 연구의 심화, 다각화를 위해서는 미시적인 탐구가 요청된다는 점이다. 그는 해방공간 당시 입적의 비밀, 유족의 증언 채록, 라훌라의 사모곡』의 분석, 김일엽과 일당스님(김태신) 관계의 해석 등이다.
셋째, 김봉률은 직지사 주지를 역임했고, 그의 비석은 직지사에 서 있다. 즉 김봉률과 직지
92) 위의 책, pp.217-224.93)
93) 김광식, 「만공 · 만해 ·김구의 독립운동 루트」, 『대각사상』31, 2019.
94) 김광식, 「경봉의 삶과 만해 한용운」, 『정토학연구』 3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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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중서부 지역 사찰의 3.1 운동
사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때문에 직지사 근대사의 구도에서 김봉률을 바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직지사가 갖고 있는 역사인 선학원 연고, 선사(제산, 퇴운, 탄옹 등), 현대 고승(관응, 녹원) 등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
넷째, 직지사는 지금은 본사이지만 예전에는 해인사 말사이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즉 직지사 자료, 역사, 문화는 해인사와 밀접하다. 이런 내용을 유의해서 자료 발굴, 역사 서술을 해야 한다.
지금껏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김봉률과 근현대 직지사 탐구의 진일보한 연구를 위한 제언을 하였다. 필자의 의견이 이 방면의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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