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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龍珠寺)>
왕궁과 같은 구조를 가진 용주사, 백제에 미륵사가 있고, 신라에 불국사가 있다면 조선에는 용주사가 있다. 정조는 어쩌면 부친 사도세자에게 죽어서나마 편안하게 계시라고 왕궁을 지어 헌정했는지도 모른다. 유교왕조의 군주로서 불교 사찰을 지었지만 유교의 덕목인 효를 칭송하여 ‘효(孝)의 본찰(本刹)’의 이미지로서 불교와 유교의 화합을 꾀하는 한편 유교군주로서는 불교 지향의 논란을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종교에 대해 이처럼 열려 있는 마음이 천주교의 정약용을 용인하고 크게 쓰려 한 것은 아닐까. 불교에 대한 열린 자세에서 군주의 도량을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공인(公人)의 유교와 사인(私人)의 불교, 세종이나 세조처럼 왕이 가진 어려움을 이렇게 절묘한 조화로 넘어서려 한, 한 인간의 지혜로도 볼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올 때마다 도심에 있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그윽하게 느껴졌던 사찰이 오늘은 이상하다. 안도 밖도 모두 소란스럽다. 밖은 큰길을 내느라 어수선하고, 안은 공사와 더불어 현란하게 붙어 있는 현수막 때문에 어수선하다. 거기다 효행박물관이라고 이름붙은 보물창고는 코로나 덕분에 문을 닫았다. 정조의 흔적 덕분에 더 소중한 사찰의 이미지가 흔들리는 기분이다. 1년 전에는 호성전이 불타 정조 위패가 소실되었으니 사찰의 변화가 더 안타깝다. 그래도 정조의 애끓는 효심을 담은 이런 사찰, 어디 가서 만나나. 어지러워서 더 애틋한 사찰이다.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방문일 : 2021.12.13.
1. 둘러보기
정조의 꿈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의 여의주 '龍珠'寺라 했다고 전한다. 2020년 8월에는 1988년에 다시 지은 호성전에서 불이 나 전소되면서 사도세자와 정조대왕, 경희왕후(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비)의 위패가 모두 불에 탔다. 살아 생전 누구보다 힘들었을 세 분이 죽어서도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나 참담한 마음이 든다. 왕의 위패를 모신 절이어서 일주문 아닌 홍살문이 세워졌는데, 이를 지켜보았을 홍살문이 애처롭다. 6.25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묻는 권력에게 처절하게 죽어간 남노당의 거두 박헌영, 그의 아들인 원경스님이 6일 입적하여 바로 사흘 전 10일에 이곳에서 다비식을 치렀다.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안은 용주사, 부디 평온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위로해주길 빈다.
1)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854년(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년(광종 3)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1790년(정조 14)에 사일(獅馹)이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이 절은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다. 그 뒤 1900년에 용해(龍海)가 중수하였고, 1911년에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안성·남양·죽산·진위·음죽·용인·고양·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장전(地藏殿),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범종각, 법고각(法鼓閣), 봉향각(奉香閣)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天保樓), 나유타료(那由他寮), 만수리실(曼殊利室), 삼문각(三門閣), 일주문, 수각(水閣), 동별당(東別堂)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소장 문화재
*국보 : 용주사 동종 - 국보 제120호
* 보물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 보물 제1754호
화성 용주사 대웅보전 - 보물 제1942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용주사상량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전적수사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용주사병풍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
화성용주사오층석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화성용주사대웅보전목조삼세불좌상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화성 용주사 목조감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화성 용주사 지장전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일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3호
화성 용주사 삼장보살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5호
화성 용주사 중종 - 경기도 제226호
화성 용주사 남무대성인로왕보살번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화성 용주사 전답양안2건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경기도 문화재자료
용주사천보루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
화성 용주사 목조불패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화성 용주사 목조소대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2호
화성 용주사 청동시루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문화재 위키백과 인용)
사천왕문. 용주사라고 씌어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 일주문도 없고 사천왕문도 없던 것을 새로 건립하다보니 사천왕문에 용주사라 쓰게 된 거 같다. 일주문은 홍살문이 대체하기 때문이다.
용주사의 대문은 사찰 설계 시절에는 천보루가 맡았다가, 건립이 임박해서 삼문을 추가 설치하여 대문의 기능이 이동하였다. 이제 천왕문이 다시 건립되어 대문의 기능을 맡고 있다. 말하자면 신도는 용주사 대웅보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3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셈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주문 안에 있어야 하는 천왕문이 홍살문 밖에 있는 형국이 되어 기본적인 사찰의 설계와 다른 형식이 되었다. 궁중 설계와 사찰 설계의 개념이 혼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용주사 입구 사천왕상. 사천왕문이 용주사 입구 정문 기능을 겸하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이때부터 홍살문을 지나 천보루(天保樓)를 거쳐 대웅전에 이르는 길이 펼쳐진다.
용주사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비석과 소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들어서는 이 길은 속세에서 법세의 길로 들어서는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사도세자의 세상으로 들어서는 길인지도 모른다.
*홍살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홈피)
홍살문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어 따로 일주문을 세우지 않았다. 이참에 홍살문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본다.
홍살문은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부른다. 홍살문(紅-門)의 살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이다. 홍전문(紅箭門)의 箭은 화살이므로 홍살문과 홍전문의 뜻은 사실상 같다. 언중이 화살을 외자로 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에 끌어다 써서 홍살문이라고 부른 것이다. 홍살문의 살의 한가운데 태극 문양이 있는데, 청적황의 3색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 위는 3개의 살로 되어 있는 삼지창의 모습으로 되어 있다. 삼지창이 아닌 2지창의 경우도 있으나 대개 삼지창이다. 태극은 있지만 삼지창은 없는 경우(필암서원)도 있다. 태극도 청적의 2태극(필암서원)도 있다. 3태극의 청적황 3색은 천지인을 상징한다. 하늘의 뜻을 땅이 받아 응하고 인간이 그 뜻을 이어받는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홍살문의 홍살과 삼지창은 모두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려는 무기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쫓는 의미와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의미가 있다. 정월 대보름 마을제를 지내는 곳에서는 대부분 전날이나 일주일 전부터 제당 앞에 붉은 황토흙을 뿌리는데 같은 의미이다. 홍살문도 신성구역 표시와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려는 의도에서 세운다. 대개 능(陵)·원(園)·묘(廟)·궁전·관아(官衙) 서원 향교 등의 앞에 세웠다. 따라서 사찰에 홍살문을 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용주사는 궁전의 개념으로 접근했다는 말이 된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은 나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기둥 위에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당간지주 사이에 세웠다. 꼭 사찰이어서 그런 것은 아닌 거 같다. 수원 향교의 홍살문도 당간지주 안에 세웠다. 홍살문의 지지를 위해 선택한 방식일 뿐이다. 홍살문에는 하마비를 같이 세워 신성구역 표시를 확실히 한 곳도 많다. 수원향교 홍살문에도 하마비가 있다.
홍살의 갯수는 꼭 지정되어 있지는 않다. 왕릉의 경우에도 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의 건릉은 12개, 태조의 건원릉, 수릉 등은 10개이다. 개별 왕릉의 앞에 있는 홍살문은 일반적으로 규모가 좀 작고, 전체 동구릉 입구에 세워진 것은 규모가 곱절이나 커서 홍살이 20개이다. 포은정몽주 선생 릉 앞의 홍살문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홍살이 16개다. 입구라고는 하나 왕릉보다 많은 갯수이다. 왕릉과 개인릉 사이의 차이에 대한 규정도 없는 것 같다. 필암서원은 9개, 수원향교는 18개이다. 화성행궁 앞 홍살문은 24개이다. 홍살의 갯수에 특별한 원칙은 없고, 주변환경과 구조물 전체의 구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삼문(三門)
이어 만나는 삼문은 한옥의 솟을대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문짝이 없는 사찰의 문 대신 문짝이 있는, 그것도 솟을 3문이다. 왕이 능 행차를 위해 용주사에 머무르는 경우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용도도 있다. 용주사의 건립에는 조정의 많은 신하가 의견을 내었고, 찾아와 과정을 감독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신하의 의견을 받아들인 건축양식이다.
-일성록에 '삼보루 앞에 삼문과 행랑을 두어 가마와 말 및 수행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조윤식의 의견이 있었다.’라고 채제공이 아뢰는 기록이 있다. 공사 책임자인 조윤식의 의견을 들어 삼보루 공사가 끝나고 추가로 설치한 것이었다. - (김관수, 용주사 삼문과 행랑, 2017.4.26.기사 인용)
삼문 앞의 주련은 용주사불('龍珠寺佛')을 운자(韻字)로 삼아 쓴 것이다.
용문사 삼문 앞의 해태석상.
*천보루(天保樓)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
국립공원 입장료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는 국회의원에 대한 항의글을 현수막으로 걸어놓았다. 점잖은 사찰에 어울리는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런 문제가 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의사표현을 하면 어떨까. 현수막이 필요해도 사진을 많이 찍지 않는 다른 곳에 걸어두었으면 좋았을 거 같다. 천보루 사진이 필요한 사람은 다시 와야 할 거 같다. 국난도 아닌데, 이런 도전적 이미지는 지금까지 불교에서 별로 보아오지 못하던 것이다. 어쨌든 원만하게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제루. 천보루 뒷면이다. 같은 루각에 이름이 두 개다. 홍제루는 나중에 붙은 이름이다.
불음각. 국보 동종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1985년에 새로 건립하였다.
*천보루와 오층석탑(세존사리탑) 사리탑에는 석가여래 진신사리 2과를 봉안하여 세존사리탑이다.
전면에는 천보루 현판이, 후면에는 홍제루 현판이 걸려 있다. 후대에 홍제루라는 이름이 추가된 것이다. 천보루의 석제기둥은 궁궐 양식과 유사하다. 왕실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관음전
지장전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이 호성각인가.
대웅보전. 보물 제1942호. 왼쪽에 정조가 용주사 중창 때 심었다는 회양목이 보인다. 수령 200년이 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노쇠하여 훼손이 일어나고 있어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전각의 주련은 대부분 이덕무가 썼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이 50세 경술년의 기록이다.
"27일에서 30일까지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에 갔다. 이 절은 화성부(華城府)에 있는데 이해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공이 명을 받들어 용주사의 호성전(護聖殿)ㆍ대웅보전(大雄寶殿)ㆍ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ㆍ극락대원전(極樂大願殿)ㆍ천보루(天保樓) 전후면(前後面)ㆍ만수리실(曼殊利室)ㆍ나유타료(那由他寮) 주련(柱聯) 등 도합 16구(句)를 지어 올렸고, 이어서 몸소 가서 각자(刻字)하는 것을 감독하고 그것을 달았다.
또 명을 받들어 금불(金佛)이 완성되는 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상량문(上樑文)을 읽었다. 판부사(判府事) 채공 제공(蔡公濟恭)이 지은 것이다.
10월 초1일ㆍ초2일, 용주사에 갔다. 초3일, 용주사에서 돌아왔다"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8개 전각의 주련 16구(句)를 이덕무가 쓰고, 대웅보전의 상량문은 채제공이 썼다고 되어 있다. 대웅보전의 금불(金佛)이 완성되는 날 무차대회(無遮大會) 때 채제공의 상량문을 이덕무가 읽었다. 이덕무는 주련을 각자하는 것까지 용주사에 직접 가서 감독하고 달았다. 이외에도 수시로 용주사에 들러 건축과정을 살펴봤음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 사찰의 건립기금만 지원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신하들이 동원되어 건축과정 하나하나를 지도감독한 것을 알 수 있다. 용주사는 현륭원의 능사로서 여러가지 기능을 담당했는데, 조포사(造泡寺)의 역할도 했다. 조포사는 제릉(諸陵)과 제원(諸園)에서 올리는 제향에 필요한 두부를 만들어 바치는 사찰을 말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 후불탱화(龍珠寺大雄殿後佛幀畵). 경기도 유형문화재 16호.
그동안 1790년에 김홍도가 제작하였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상과 같은 양식적 특징에 의해 볼 때 1910년대 용주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되었을 당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을 배치하고, 무릎 아래로 아난존자와 가섭,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마주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그러나 여전히 김홍도 그림이라는 견해도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 북경에서 돌아온 김홍도를 감동관으로 발탁하여 궁중화원 이명기, 김득신과 더불어 민관, 상겸, 성윤 등 25명의 스님과 함께 살아계신 부처님을 그리는 일을 처음 시도했다. 이렇게 탄생된 불화가 용주사 삼세여래불화로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동쪽에 약사여래를, 서쪽에 아미타불을 모셨다.
... 용주사 삼세여래불화는 이음새가 없는 특수 제작된 가로 3.50m, 세로 4.40m로 1폭의 비단으로 만들어져 놀랍다. 어떻게 이런 비단을 짤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효심이 만들어낸 결과로 불가사의 하다. 특히 삼세불의 얼굴엔 광대뼈가 나오고 콧날이 오뚝하며 가슴은 팽팽하여 부처님이 숨을 쉬니 입주변의 수염이 움직이는 듯 풍부한 표정과 외곽의 명암에 의해 살아계신 삼세여래가 실제로 용주사에 나타난 듯하다."(권중서, 불교신문, 2021.06.30)
신선도를 많이 그려온 김홍도여서 김홍도 설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대웅전 내부. 석가여래, 동방 약사여래, 서방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모시고 있다.
대웅보전 외부. 현판은 정조가 직접 쓴 것이다. 낙성식날 밤 정조의 꿈에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했다고 한다.
용주사 동종 국보 제120호 범종각.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범종을 모신 누각이다.
2) 용주사 동종. 국보 120호. 상원사 동종과 경주 국립박물관의 에밀레종과 함께 걸작으로 꼽힌다.
몸체 두 곳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854년에 주조되었다고 하나 이 명문은 후대에 새겨진 것이다. 상대에는 반원형의 문양을 중심으로 연주무늬와 여의두무늬가 장식된 문양대를 돌렸고, 비천상은 구름 위에 앉아 천의를 휘날리며 날고 있는 자세이다. 삼존불상은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한 채 옷자락이 날리고 있는 모습이다.
국보(1964.03.30 지정). 높이 144㎝, 입지름 87㎝. 몸체 두 곳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854년(문성왕 16)에 주조되었다고 하나 이 명문은 후대에 새겨진 것이다. 종의 정상에는 용뉴와 음통(音筒)이 있는데, 음통의 표면은 연주무늬를 돌려서 6단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연판과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다음백과 전재)
비천상. 구름 위에 앉아 천의를 휘날리며 날고 있는 자세이다.
종의 앞뒤로 비천상과 삼존상이 보인다. 삼존불상은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한 채 옷자락이 날리고 있다.
천불전
천불전 내부
법고각(法鼓閣).
법고각 내부 법고.
나유타료(那由他寮)
2. 관람 후 : 용을 좋아한 정조
용은 민간신앙의 상징물이기도 하지만, 왕이 쓰면 그 자체가 왕의 상징이 되었다. 왕이 입는 옷은 곤룡포이고, 앉는 의자는 용상이다. 용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런 일반적인 상징을 넘어 정조는 유난히 용과 인연이 많았고, 용을 좋아하여 인연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용꿈을 꾸고 사찰 이름을 용주사라 했는데, 부친 사도세자가 꾼 정조의 태몽도 용꿈이었다. 수원화성에서도 곳곳에 용의 흔적이 있다. 아름다운 용두정(방화수류정) 아래 아름다운 연못도 용연(龍淵)이다. 수원화성의 동문도 창룡문(蒼龍門)이다. 용연은 방화수류정 아래 용머리 바위, 용두바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방화수류정은 용두각으로도 부른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흘러나가는 출수구에는 용 전단계 이무기의 상을 새겨놓았다. 용연에 비친 달을 용지대월이라 하여 화성의 아름다운 경치로 꼽는다.
화성행궁의 한 건물 잉름은 경룡관이다 당나라 태종 때 임금과 학사들의 시 화답을 본따 정조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경룡관은 당 태종 궁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어렵게 왕위에 올랐지만 독살설이 있을 정도로 불안한 왕위에 있었던 정조로서는 하늘이 내린 왕으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른다.
"내청룡에서 꾸불꾸불 돌아서 재실(齋室)의 담장 터에 이르기까지는 조금 낮고 평평하게 느껴진다.... 이곳의 지형이 대체로 평탄하기 때문에 파낸 곳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아서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며 단청룡(單靑龍)과는 다르게 또 두 번째 청룡이 그 외면을 빙 둘러싸고 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조포사(造泡寺) 뒷산이 본신(本身)으로부터 맥(脈)을 나누어서 접혀진 어병(御屛)과 옥궤(玉几)의 형상을 한 채 웅건하게 버티고 널찍하게 펼쳐져 외청룡(外靑龍)이 되어 겹겹으로 가리어 막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1790) 10월 1일조에 현륭원(顯隆園) 관원 및 지방관인 수원 부사(水原府使)에게 유시(諭示)한 내용이다. 사도세자의 현륭원의 풍수에 관한 내용이다. 현륭원의 지형이 청룡의 모양새이고, 용주사는 외청룡의 지형임을 말하고 있다. 조포사는 용주사를 말한다.
조선조 세종을 이어 가장 영민하고 뛰어났다고 알려진 정조, 평생을 아버지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번민해야 했던 정조가 이면에 가져야만 했던 왕으로서의 고통을 '용(龍)' 선호의식이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능침을 보위하고 왕실을 보위하려 세웠던 그 사찰 용주사의 호성전에서 불이 나 위패가 불타버리는 참담함을 죽어서까지 겪어야 하는 정조의 신산한 운명이 참람하게도 남의 일로 보이지 않아 가슴이 아프다. 용주사가 오늘의 어지러운 모습을 얼른 정리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능침사찰의 당당함을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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