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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사시고(賜諡誥)
정의
중국 황제가 훙서(薨逝)한 조선 왕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는 명령문.
내용
사시고문(賜諡誥文)은 훙서한 왕의 훈업과 행적을 기리고 이를 선양하기 위해 시호를 내린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이다. 고(誥)는 황제의 말 중의 하나이다.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교훈과 행적을 밝게 전하는 황제의 말이 ‘고’라고 하였다. 1408년(태종 8) 9월에 처음으로 명나라에서 조정 사신 기보(祁保) 등이 태조에게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사시고문을 가지고 왔다.
용례
祁保林觀 奉賜諡誥至王宮 百官分司至太平館 以公服前導 上以冕服 率群臣出迎于大門外[『태종실록』 8년 9월 29일]
사시의(賜諡儀)
정의
중국의 조문사절이 황제가 내려준 시호(諡號)를 조선 조정에 전달하는 의식.
개설
죽어서 받는 이름이 시호이다. 왕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와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를 받았는데 사시의는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를 받는 의식이다. 시호는 왕의 일생에 대한 평가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왕이 죽으면 먼저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지었고 이를 토대로 시호를 결정하였다. 부고를 받은 중국에서는 조선에 조문 사절을 보냈다. 이들이 국상(國喪)을 애도하는 제문과 부의 물품 및 조선에서 요청한 시호와 후계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문서를 가져 오면 부의 물품을 전달하는 사부의(賜賻儀)를 행하고, 이후 길일(吉日)을 정해 혼전(魂殿)에서 시호를 전하는 사시의(賜諡儀)를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에 사시의 의례 절차는 전 시기에 걸쳐 큰 변화가 없으나 의례를 거행할 때 입는 옷에서 일부 차이가 있었다.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동일하게 익선관(翼善冠), 백포(白袍),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라고 별도로 예복을 정한 반면, 조선후기 영조 때에 편찬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왕이 일상적인 집무를 볼 때 입는 시사복(視事服)으로 되어 있어 기록에 차이가 난다. 이 의례는 조선의 국가 전례(典禮)가 제후의 예를 준용하기 때문에 행하는 절차였으므로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 시기에는 시행하지 않았다.
절차 및 내용
중국의 조문사신이 가져온 시호를 전달받는 의식이다. 의식을 거행하기 1일 전에 충호위(忠扈衛)에서 혼전 대문 밖에 왕이 임시로 거처할 장전(帳殿)과 사신의 자리를 관직 등급에 맞게 설치한다. 왕명의 전달 등을 맡은 관서인 액정서(掖庭署)에서 황제가 보낸 문서인 고명(誥命)을 놓을 책상과 사신의 자리 및 왕이 대신하여 고명을 받는 자리, 종친과 문무백관 및 집사자(執事者)의 자리를 설치한다. 의식을 거행하는 날에 왕은 익선관을 쓰고, 흰색의 백포에 검은색의 오서대를 착용하고 흰 빛깔의 가죽신[白皮靴]을 신는다. 만약 의식이 졸곡(卒哭) 전에 거행되면 최복(衰服)을 입는다. 문무백관이 사신을 맞이하러 갈 때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의식에 참여할 때는 상복(喪服)인 최복을 입는다[『태종실록』 8년 9월 24일].
의식은 곡하면서 사신을 맞이한 뒤 시호를 받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먼저 문무백관이 중국 사신이 묵고 있는 태평관에 나아가 사신을 혼전 문 앞으로 인도한다. 왕이 곡하면 종친과 문무백관도 함께 곡하고, 왕이 곡을 그치면 함께 곡을 그치고 4번 절한다. 신주(神主)인 우주(虞主)를 자리에 설치하면 왕이 다시 곡하고 그친다. 혼전 대문 앞에서 왕이 사신을 영접하고 황제의 고명을 미리 설치한 책상 위에 놓는다. 왕이 절하는 자리로 나가 4번 절하고 일어나 대수위(代受位)로 나간다. 왕이 사신에게 받은 고명을 근시(近侍)가 영좌(靈座) 앞에 놓는다. 왕이 엎드렸다가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4번 절하면 문무백관도 따라한다. 왕은 사신을 혼전 대문 밖까지 배웅한다. 이때 우주는 다시 들여 놓는다. 배웅을 마치고 왕이 곡하면서 들어간다. 왕이 재전으로 들어가 곡을 그치면 신하들도 곡을 그치고 4번 절하고 나간다[『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사시의].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안희재, 「조선시대 국상의례 연구-국왕국장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사위(嗣位)
정의
조선시대 선왕이 승하함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는 의절.
개설
사위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정상적인 왕위 계승의 형태로 선왕(先王)의 승하(昇遐)에 의한 즉위 형태이다. 사위는 선왕의 상중(喪中)에 행하기 때문에 오례 중에 흉례(凶禮)에 속하여 행해졌다.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문종, 단종, 성종, 연산군,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18명의 왕이 사위의 형태로 왕위에 올랐다. 선왕이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왕위를 잇는 경우 선위(禪位)라 했고, 반란을 일으켜 선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 오르는 경우 반정(反正)이라 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나라를 개창하여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사위에 의한 즉위 의례는 전(殿)이 아닌 문(門)에서 거행하는데, 이는 선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차마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문을 통과해야만 전에 나아갈 수 있으므로, 선왕을 돌아가시게 한 불초자가 왕위에 오르는 의례를 ‘전’에서 편히 치를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위 의례를 행할 때에는 상중임에도 잠시 상복(喪服)을 벗고 의례에 참여한다. 종친과 문무백관은 조복(朝服)으로, 왕이나 왕세자는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의례에 참여한다. 장악원(掌樂院)에서는 악대를 동원하여 전정(殿庭)의 남쪽에 벌여 놓지만 상중이므로 연주는 하지 않는데, 이를 진이부작(陳而不作)이라 한다. 선왕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한 것으로, 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예를 표한다.
사위 의례는 조선시대 내내 큰 변화가 보이지 않으나 시기별로 관서 개편에 따른 명칭의 변화와 관직 명칭의 변화, 시행 장소의 변화가 수반된다. 세종대에 배설(排設)을 담당했던 ‘충호위(忠扈衛)’는 성종대에 ‘전설사(典設司)’로 바뀌며, 음악을 담당한 세종대의 ‘아악서(雅樂署)’는 성종대에 ‘장악원’으로, 세종대의 ‘통찬(通贊)’은 성종대에 ‘찬의(贊儀)’로 바뀐다. 아울러 세종대에 20인이었던 사금(司禁)의 숫자는 성종대 이후 16인으로 바뀐다. 또 시행 장소도 조선전기에는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예를 행했으나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으로 바뀐다.
절차 및 내용
사위 의례는 성복례(成服禮)를 치른 후 선왕의 관을 모셔둔 빈전(殯殿)의 문 밖에서 거행하는데 왕위를 계승하는 사왕(嗣王)이 전왕(前王)의 유교(遺敎)와 대보(大寶)를 받은 후 문에 놓인 어좌(御座)에 오르는 절차로 구성된다. 『세종실록』「오례」에 보이는 사위 의례의 절차를 보면 먼저, 참여자의 자리를 각각의 지위에 맞추어 배설하고 도승지(都承旨)는 선왕의 유교를 담은 유교함(遺敎函)을 진설해 놓고, 상서관(尙瑞官)은 대보(大寶)를 진설한다. 종친과 문무백관,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예조(禮曹) 판서(判書)가 각각 자리에 나아가 부복하면 왕세자가 면복을 입고 나오며, 사왕이 욕위(褥位)에 나아간다. 사향(司香)이 향을 세 번 올리는 삼상향(三上香)을 한 후 사왕 이하 모든 참석자가 네 번 절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행한다.
모든 호위 관원이 자리하고 악대가 배열되어 왕의 위의를 갖추고, 유교와 대보를 받는 의례를 행하면 왕은 비로소 문에 마련된 어좌에 올라 선왕을 이어 새로운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왕이 어좌에 오르면 향로를 피워 올린다. 이어 모든 신하는 사배례와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고두례(三叩頭禮)와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치는 산호(山呼)와 재산호(再山呼)를 외쳐 왕의 즉위를 경하한다. 다시 사배례를 행한 후 의례를 마치는데, 의례를 마친 후에는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상중에 행해야 하는 일에 임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춘관통고(春官通考)』
김문식 외, 『즉위식, 국왕의 탄생』, 돌베개, 2013.
사제문(賜祭文)
정의
중국 황제가 조선 왕의 죽음, 혹은 조선의 왕이 사망한 신하나 사후 신하의 묘 등에 제사를 내리면서 하사하는 글.
내용
중국 황제가 조선 왕의 죽음에 내리는 사제문의 형식은, 두사(頭辭)에는 ‘유(維) 연호 월일 황제는 아무개를 보내어 고 조선왕 이모의 영령에 제사를 내린다[維年號年月日 皇帝遣某 賜祭于故朝鮮國王李某之靈].’라 하고, 미사(尾辭)에는 ‘이에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희생(犧牲)과 예제(禮制)로 왕에게 제사하니, 구원에 영령이 있으면 흠향하기 바란다[玆特遣使 以牲醴祭王 九原有靈 庶幾享之].’라고 했다. 미사는 제문마다 표현상의 차이가 약간 있다. 본문은 보통 왕의 공덕을 칭송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어로 읽으면 선왕의 영령이 알지 못할 것이므로 조선 음으로 읽도록 했다. 제사가 끝나면, 사제문은 요소(燎所)에서 불에 태웠다.
한편 조선의 왕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사제문 역시 유사한 형식으로, 두사와 미사에 문구의 차이가 있다. 대체적인 형식을 보면, 두사는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왕은 아무개를 보내어 아무개의 영령에게 유제(諭祭)한다.”고 하고, 미사는 “이에 근신을 보내어 제물을 바치노니 영령이여 이르러 와서 이 제사에 흠향하리라.”고 하였다.
용례
傳旨 今後賜祭文 用行信寶[『세종실록』 8년 1월 26일 ]
참고문헌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사친(私親)
정의
조선 시대에 입후(立後)하여 즉위하거나 후궁 소생으로 즉위한 왕의 친부모 또는 왕비와 후궁의 친부모.
개설
주자학은 부계위주(父系爲主)의 친족조직에 바탕을 둔 정치·사회사상이었다. 따라서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주자학의 윤리가 명실상부하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이 확립되어야 했다.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이성혼(異姓婚)도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한국사에서 명실상부한 부계위주의 친족조직은 조선 건국 이후에나 가능했다.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및 고려 시대에는 부계와 모계가 다 같이 중시되는 양측적(兩側的) 친속제도가 온존하였으며, 동성(同姓) 친족 간의 족내혼도 빈번하였다. 고려 시대의 경우 대부분의 친족집단은 거주지와 본관이 일치하였으며, 각 지역의 토성(土姓)들은 동성동본(同姓同本) 간의 혼인이나 딸자식을 주고받는 교환혼(交換婚)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혼인의 경우 사위가 장인의 집에서 처가살이 하는 솔서제(率壻制)가 흔하였고, 여성들의 재혼도 관념상이나 제도상으로도 금기시되지 않았다. 이 같은 친족제도에서는 적서(嫡庶)의 차별이나 처첩(妻妾)의 차별이 별로 없었으며 가문을 계승하기 위한 양자제도나 입후제도 역시 없었다.
조선왕실의 경우 나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주자학에 입각한 친족제도와 친족윤리를 솔선하여 실천하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왕실에서의 족내혼은 물론 왕실 이외에서의 동성혼도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부계혈연 가족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가문을 계승하기 위한 양자제도 또는 입후제도가 확산되었고, 그 결과 입후된 사람과 그 사람의 친생 부모 즉 사친에 관한 의례문제가 중요시되었다. 아울러 혼인한 여성의 사친에 관한 의례문제 역시 중요시되었다. 이 같은 사회적 현상이 왕의 사친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시대에 사친에 관련된 핵심 개념 및 의례는 『주자가례』상례(喪禮)의 “남의 후사가 된 남자나 시집 간 여자는 그 사친을 위해 모두 상복을 한 등급 내리고, 사친도 역시 그렇게 한다.”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사친은 입후되어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의 친부모 또는 시집 간 여자의 친부모를 지칭한다. 양자가 된 남자는 양부모를 위해서는 정복(正服)의 상복을 입지만, 정작 친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는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자신을 양자로 들인 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시집 간 여자 역시 시부모를 위해서는 정복의 상복을 입지만, 친정 부모를 위해서는 상복을 한 등급 내려 입는데, 이 역시 자신의 친부모보다는 시부모를 우선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선건국 이후 유교문화의 확산으로 부계 혈연가족이 더욱 확대되고, 조선 중기까지도 유지되던 자녀간 균분(均分) 상속과 윤회 봉사(輪回奉祀)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장자(長子) 위주의 재산상속과 종가(宗家) 위주의 제사상속 문화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봉사조(奉祀條)전민(田民)의 장자에의 계승과 관련하여 나타나는데, 이 결과 봉사조 전민은 종가의 세거지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되었고, 또 덧붙여 세거지 주변의 전민을 종가에서 대대로 물려받음으로써, 종가 일대의 전민 대부분을 종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종가를 중심으로 지차(支次) 자손들이 모여 취락을 형성하는 동족부락 역시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 후기 족계나 동계 등의 결사 역시 한 동리에 거주하면서, 봉사하는 선조가 동일한 사족의 후예를 중심으로 결성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후(立後)하여 즉위하거나 후궁 소생으로 즉위한 왕에게 사친 문제는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왕들은 의례 추숭을 통해 사친을 왕이나 왕비 또는 그에 버금가는 존재로 만들곤 했다.
물론 왕의 사친 추숭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다. 예컨대 성종의 사친인 의경세자, 선조의 사친인 덕흥군 등에 대한 추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의경세자의 추숭이나 덕흥군의 추숭은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조선 후기에는 부계위주의 친족조직 확립과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왕의 사친 추숭이 곧 왕권의 정통성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그 같은 사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인조의 사친 추숭이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장자였는데,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인조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 왕의 손자로서 왕이 되었다. 이에 인조는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였는데, 원종 추숭에는 인조반정 직후의 여러 정치적 동기와 정파의 대립이 함께 개재해 있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의 입장에서는 추숭을 통해 종법적(宗法的) 정통성을 확립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해 나가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반면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명분과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려는 전통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일부 훈척들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은 왕권에 기생하여 왕권을 높임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을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대다수 사림계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선명성을 강조하는 도학정치의 여러 원칙들을 들고 공론을 무기로 하여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원종이 추숭되기까지 12년 간의 논쟁을 겪어야 했다. 원종이 추숭됨으로써 예학적으로 『주자가례』 중심의 보편주의 예론이 전통적 분별주의 예론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인조의 왕실권위와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사림 세력에 대한 훈척 세력의 우세, 조정의 공론에 대한 국왕의 독단이 우세해져 갔다. 인조의 사친 추숭 이후로 왕의 적자가 아닌 처지에서 즉위한 왕들 역시 인조의 사례를 따라 사친을 추숭하였다.
변천
18세기 들어서면서 조선왕실에서는 후궁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경우 왕은 자신의 생모 즉 사친을 추숭함으로써 종통(宗統)을 확립하고자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추숭이었다.
영조는 즉위 초에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에 모실 수 없었다.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사당의 부지를 선정하게 해서 이듬해인 1725년에 경복궁 서북쪽 북악산 아래에 숙빈의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영조는 1753년(영조 29) 기왕의 숙빈묘를 육상궁(毓祥宮)이라 하였으며 숙빈 무덤이었던 소령묘(昭寧墓)는 소령원(昭寧園)으로 하였다. 본래 조선 시대에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은 묘(廟)로, 무덤은 묘(墓)로 불렸는데, 이 같은 묘묘(廟墓) 제도를 영조가 궁원(宮園) 제도로 바꾼 것이었다.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의 무덤을 능이라고도 하고 원(園)이라고도 하며, 제후왕의 무덤 역시 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덤의 명칭을 묘(墓)에서 원(園)으로 바꾼 것은 의례상 크나큰 격상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위해 이 같은 궁원 제도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영조 이후 후궁의 아들로 즉위한 순조도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친을 추숭하였다. 이 결과 영조의 사친을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위시하여 추존왕 원종의 사친을 모신 저경궁(儲慶宮),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모신 대빈궁(大嬪宮), 추존왕 덕종의 사친을 모신 연우궁(延祐宮), 사도세자의 사친을 모신 선희궁(宣禧宮), 순조의 사친을 모신 경우궁(景祐宮), 영친왕의 사친을 모신 덕안궁(德安宮) 등 7궁이 출현하였다.
참고문헌
『朱子家禮』
이영춘, 「潛冶 朴知誡의 禮學과 元宗追崇論」, 『청계사학』7, 1990.
신명호, 『조선초기 왕실편제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문숙자, 『조선전기의 재산상속』,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삭망전(朔望尊)
정의
왕이나 왕비의 상중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전(奠)을 올리는 의례.
개설
전은 사람이 죽은 뒤부터 장례를 치르기 이전까지 죽은 자에게 드리는 제사이다. 상중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조석전(朝夕奠), 흉례 절차에 따라 시행되는 소렴전(小殮奠)·대렴전(大斂奠), 명절인 속절에 올리는 별전(別奠) 등의 제사가 있는데, 이와는 별도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삭망전다. 삭망전은 한 달을 단위로 한 절기의 변화에 맞추어 국상(國喪) 중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제사로, 왕의 친제(親祭)를 기준으로 설정되었다.
연원 및 변천
국장 중의 삭망전이 언제 시행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에 인종이 즉위했을 때 예종의 국상에 조석전(朝夕奠)에 참여해 곡용(哭踊)하였고, 또 고려시대 예종 이후 유교적인 국상 의례를 채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상중의 삭망전이 시행되었을 가능성은 크지만 확신할 수 없다.
조선시대 삭망전의 시행 기록은 1408년(태종 8) 태조의 상중에 시행된 것이 처음이었다. 태조는 이해 5월 24일에 사망했는데, 이후 국장을 치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전을 올렸지만 삭일이나 망일에 시행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해 9월 1일에 삭전(朔奠)이 시행되었고[『태종실록』 8년 9월 1일] 이후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전을 올리면서 제사가 상설화되었다. 이러한 삭망전에 태종은 친히 여러 차례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실상부한 삭망전은 세종대에 이르러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1426년(세종 8) 5월 10일 태종이 사망했을 때 바로 3일 후에 예조(禮曹)에서 삭망전의 의식을 제정·보고하였고, 이를 근거로 이틀 후인 15일에 왕이 빈전에서 망전(望奠)을 시행하였다. 이후 국상 중의 삭제와 망제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정기적인 행사로 시행되었다.
절차 및 내용
삭망전의 의식은 『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흉례 의식에 실려 있는데, 양자의 의식은 거의 동일하다.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이를 정리하면 의식은 다음의 3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준비 절차는 왕을 비롯한 참석자들의 자리를 해뜨기 전에 마련하고 행사 2각전에 예찬(禮饌) 및 각종 예기(禮器)를 설치하며, 1각 전에 왕을 비롯한 참가자 전원이 자리로 나가는 3단계로 구분된다. 1각은 약 15분이다.
본격적인 행례는 2차례의 곡(哭)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곡은 먼저 왕이 꿇어앉고 [跪]→엎드려[俯伏]→곡(哭)을 시행하면 대군 이하 및 왕자가 좇아 시행하고, 이후 찬의(贊儀)의 창(唱)에 따라 종친과 백관이 좇아 곡을 하였다. 곡이 끝나면 종친과 백관은 일어나[興]→네 번 절하고[四拜]→일어나[興]→몸을 폈다가[平身]→다시 엎드리는[跪] 예를 시행한다. 대전관(代奠官)이 향안(香案) 앞에 나가 북쪽을 향하여 3번 향을 올리고 영좌(靈座)에 3차례 잔을 올리면 다시 곡이 시행된다. 이때에도 왕이 곡을 하면 대군 이하 및 왕자가 따라하고 찬의의 창에 따라 종친과 백관이 곡을 하였다. 왕의 곡이 끝나면 대군 이하 및 왕자들은 곡을 그쳤다. 반면에 종친과 백관들은 이후에 흥(興)→사배(四拜)→흥→평신(平身)의 예를 추가로 시행하였다. 이러한 의례가 끝나면 왕이 먼저 여차로 돌아가고, 이후에 대군 및 왕자, 다음에 종친과 백관이 돌아감으로써 의식이 종결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연구』, 일조각, 1991.
지두환, 『조선전기 의례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정종수, 「조선초기 상장의례(喪葬儀禮)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산릉친제(山陵親祭)
정의
치장(治葬) 이후 산릉에서 왕이 친히 드리는 제사.
내용
국상(國喪) 기간 중에 거행되는 행사이므로 왕과 종친, 문무백관, 집사자들의 복식은 시기에 따라서 최복(衰服)이나 연복(練服) 혹은 담복(禫服)이다. 장소는 산릉의 정자각(丁字閣)이다. 행례 절차는 길례인 제사와 유사하지만, 참신(參神) 전에 먼저 곡을 하며 강신(降神)에는 삼상향(三上香)을 행하나 좨주는 없다는 점이 다르다. 종헌례가 끝나면, 다시 곡을 하고 사신한다. 이처럼 두 번 행하는 곡은 연제(練祭) 곧 소상(小祥) 뒤에는 행하지 않는다. 이 제사에서는 헌폐례(獻幣禮)와 음복례(飮福禮)를 행하지 않으며, 길례에서 사용하는 풍악도 쓰지 않는다. 슬픔이 더욱 간절하기 때문에 풍악을 울리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곧 ‘곡(哭)을 한 날에는 노래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산릉친제에 사용하는 술잔은 1437년(세종 19)에 그 제도가 정해졌다. 봉상시(奉常寺)에 소장하고 있던 은 술잔[銀瓚]을 도둑에게 잃어버린 것을 계기로 즉시 박연(朴堧)에게 명하여 다시 주조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찬(瓚)은 은, 작(爵)은 구리를 쓰고, 섭행에는 작은 구리, 찬은 나무를 썼다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 옛 제도를 참고해서 친향할 때의 찬과 작은 모두 은을 쓰고, 대행할 때의 찬과 작은 모두 구리를 쓰며, 친향할 때의 아헌과 종헌도 역시 은작을 쓰기를 항식(恒式)으로 하도록 했다. 찬작의 잔받침도 목점(木坫)에서 구리로 바꾸어 만들어서 사용토록 했다.
용례
詣仁陵山陵親祭 又行夕上食[『철종실록』 9년 8월 11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산재(散齋)
정의
제사 전 제관(祭官)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재계(齋戒)를 이르는 말.
내용
재계에는 산재와 치재(致齋)가 있는데, 제사 3일 전에 한다. 산재는 2일 동안 하고, 치재는 제사 전날 하루 한다. 산재는 며칠 동안 슬픔 일을 묻거나 듣지 않고 즐기는 일을 하지 않으며, 행동과 마음을 삼가는 것이다. 치재는 산재 뒤에 제사 전일까지 오르지 제사의 일에만 마음을 전념하는 것이다.
국장 때 능지가 정해지면 표목을 세우고, 관상감(觀象監)의 관원이 표목 왼쪽에서 후토신(后土神)에 제를 올린다. 제사지내기 전 3일 전부터 제관들은 2일 동안 산재하고, 하루 동안 치재한다. 종묘와 사직제처럼 왕이 친히 행하는 대사(大祀)에는, 왕은 4일 동안 별전에서 산재하고, 3일 동안 치재를 하는데, 2일 동안은 정전에서 하고, 하루는 재궁(齋宮)에서 한다. 산재할 때는 조상과 문병을 하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유사(有司)가 형살의 문서를 올리지 않으며, 치재할 때는 제사에 대한 일만 아뢴다.
용례
行社稷祭 前此大祀 獻官諸執事誓戒後 散齋四日 治事如故 今獻官諸執事權免衰服 以吉服誓戒 不可復着衰服 故皆令以吉服齋戒[『세종실록』 4년 8월 4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