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인이 서흥인에게 길을 묻습니다.
종원 한 분이 대제학가문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터라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3대 대제학 4대가문을 주제로 한 책, 명문가탐방시리즈가 인터넷을 통해 서점에 나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터넷구매를 하려 했으나 책이 없었습니다. 부득이 서점에 나갔습니다. 명문가탐방1권과 2권은 절판된 상태였고 교보문고에도 없었습니다. 문중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다니 정말 의외였습니다. 이제 도서관을 찾아가야 할 판입니다.
그러던중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에 3대 대제학을 배출한 4대가문과 3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분들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여민천하’라는 이름의 블로그로 3명이상의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도 18가문에 이릅니다.
☞ ‘여 민 천 하’
광산김씨(光山金氏)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家門 (김만기-김진규-김양택)
전주 이씨(全州李氏)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家門 (이민서-이관명-이휘지)
연안 이씨(延安李氏)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家門 (이정귀-이명한-이일상)
달성서씨(達成徐氏) 약봉(藥峯) 서성(徐渻) 家門 (서유신-서영보-서기순)
조선시대 3명 이상의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은 광산김씨(7명), 연안이씨 (7명), 전주이씨(7명), 안동김씨(6명), 달성서씨(6명), 의령남씨 (6명), 덕수이씨(5명), 풍양조씨(4명), 안동권씨(3명), 남양홍씨 (3명), 여흥민씨 (3명), 경주이씨(3명), 연일정씨 (3명), 해평윤씨(3명), 양주조씨(3명), 고령신씨(3명), 청풍김씨(3명), 해주오씨(3명)
서점에서 관련 책들을 찾던중 “서흥김씨 한훤당 김굉필 종가”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된 ‘명문종가를 찾아서’(이연자 지음|컬처라인刊)를 읽게 되었습니다.
☞ ‘명 문 종 가 를 찾 아 서’
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한훤당의 출생지는 서울 정릉동(지금의 정동)이 되었다. 증조부가 현풍 곽씨 부인과 혼인하면서 후에 그의 할머니 친정인 현풍에 들어가 지금의 종가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열아홉살 때 경남 합천군 야로현에 있는 순천 박씨와 혼인하면서 선생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선생은 처가의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란 당호를 붙였는데, 이것이 후에 그의 아호가 됐다. 여기서 그는 많은 책을 읽고 현풍과 처가인 야로 등지를 오가며, 그곳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 글을 읽으며 다음의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녕군 고암면 감리 문씨 문중의 어느 한 분이 자신의 홈피에 ‘한훤당후손에게’라는 제목으로 쓴 글입니다.
☞‘양 반 으 로 살 아 가 기 - 한 훤 당 후 손 에 게’
“불과 50년 전만 해도 한훤당 후손이면 남자는 어릴 때 외갓집 덕으로 결혼해서는 처갓집 덕으로 창녕군과 달성군 에서는 살아갔었답니다. (중략). 예전에는 나라에 벼슬을 해야 양반이며 벼슬한 집안과 인연이 닿아 있어야 같이 행세 했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도 서흥 김씨 종손 따님인 큰집 할머니를 돈으로 사서 모시어 왔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 종친이 운영하는 ‘人間國家事 必日 小學童子何知大義’라는 제목을 붙인 소학동자 블로그에는 우리 문중을 알리는 좋은 자료들이 많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중에 ‘명문가(名門家) : 문묘배향 가문(文廟配享家門)의 위상(位相)’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니 대제학을 지낸 가문보다 문묘종사 가문의 위력이 더 크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명문가(名門家) : 문묘배향 가문(文廟配享家門)의 위상(位相)’
“삼왕비 불여 일정승(三王妃不如一政丞)
삼정승 불여 일선생(三政丞不如一先生)
왕비 셋을 배출한 집안이 한 사람의 정승을 배출한 집안을 당하지 못하며,
세 명의 정승을 배출한 집안이 한 분의 선생을 배출한 집안을 당하지 못한다”
또 이어지는 글입니다.
“옛말에 한 집에서 정승이 셋 나오면 명문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집도 대제학(大提學)이 한 명 나온 집보다는 못하고, 대제학이 세 명이라도 문묘배향 한 분 나온 집안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 서흥문중의 위상과 자부심이 한껒 고양되었기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이성무외 한국학 학자 11명이 본 명문가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라는 책을 서점에서 구해 읽고 있습니다. 금년 6월 발간된 이 책에 소개된 10개 가문의 면면입니다.
“영일정씨 포은(圃隱) 정몽주 가문, 광주이씨 동고(東皐) 이준경 가문, 진성이씨 퇴계(退溪) 이황 가문, 광산김씨 사계(沙溪) 김장생 가문, 연안이씨 분봉( 盆峯) 이주 가문, 진양하씨 각재(覺齋) 하항과 송정(松亭) 하수일 가문, 안동권씨 탄옹(炭翁) 권시와 유회당(有懷堂) 권이진 가문, 영일정씨 하곡(霞谷)
정제두 가문, 예안이씨 외암(巍巖) 이간 가문, 벽진이씨 화서(華西) 이항로 가문”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 '왜 가문인가?'라는 서문에 나오는 글은 이 책의 출판 동기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조 선 을 이 끈 명 문 가 지 도’
“양반이라는 용어 자체가 벼슬에서 기인함은 다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학자보다는 관료의 사회적 지위가 높기 마련이었고, 16세기 이후 도학을 숭상하여 학자를 존중하는 시대에 이르러서도 양반들은 벼슬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명가의 일차적 요건은 벼슬이라 하겠지만, 벼슬만 이어진다고 그 조건이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명가가 되려면 가풍과 저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당대인에게 모범이 되거나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무언가여야 했다. 가령 청백이나 효열이 그런 예일 수 있고, 도학이나 문한 혹은 절개나 의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서흥문중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서흥인이 서흥인에게 길을 물어봅니다.
“가문에 대한 이해는 족보를 아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는 책의 글귀에 잠시 시선을 멈췄습니다. 어렵게 만들어진 우리 대동보를 보는 우리 문중의 시각은 어떤지? 우리 문중의 시조1세이신 중랑장공 휘 보(始祖一世 中郞將公 諱 寶) 시조님과 시조2세 정용장군 휘 덕인(始祖二世 精勇將軍 諱 德仁) 선조님께 봉향되는 첫 제향이 지경존성(持敬存誠)의 예로 문중의 힘을 모아 열과 성으로 준비되고 있는지?
미주지역에서 발간되는 KoreaMonitor(2009년7월31일)에 게재된 소학동자(小學童子)라는 제목의 글을 종친 홈피에서 읽었습니다. 이 글을 쓴 분은 컬럼니스트로 소개된 변완수씨였습니다. 서흥김씨에게 답을 주는 것 같아 내용 일부를 옮겨봅니다.
☞‘KOREA Monitor(2009.7.31.)-변 완 수 의 小 學 童 子
“小學은 소년들만을 위한 저급한 수양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평일의 不遜(불손)을 끝내 씻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小學은 만인의 修養書(수양서)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남녀나 노소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가까이 해야 할 人倫(인륜) 전반에 걸친 Reader's Digest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진부한 봉건사상이라 일축하기에는 너무나 귀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마음을 다스리고 뜻을 기르는 책이요 당당한 인간을 키우기 위한 만대의 기본 倫理書(윤리서)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제 七十客(칠십객)의 書生(서생)으로 늦게나마 다시 小學에 入門키로 했다. 작고 가까운 것은 외면하며 크고 먼 것만을 좇아 얼마나 虛妄(허망)한 迂廻(우회)를 해 왔던가.
大를 논하기 전에 小를 익히는 謙虛(겸허)한 ‘小學童子’가 되어 볼거나. 21 世紀의 小學童子로 同道爲朋(동도위붕)할 사람은 없는가.”
첫댓글 2011년 7월11일서흥김씨대종회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