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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감리교 감독회의와 제21대 김선도 감독회장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21회 총회가 1994년 10월 25일부터 27일까지 광림교회에서 2,100여 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막을 했다. “민족과 세계를 영도할 한국감리교회”라는 주제로 열린 제21회 총회는 총회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총회의 중요한 안건인 장정개정과 감독 선출을 분리하여 장정 개정을 위한 입법의회를, 감독 선출을 위한 행정 총회를 개최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감리교 예복을 결정지었다.이는 감리교 최고의 의결 기구인 총회의 조직과 기능을 혁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어서 각 연회는 27일에 연회별로 모여 감독을 선거하였다. 서울연회는 배동윤 목사가, 서울남연회는 김선도 목사가, 중부연회는 최세웅 목사가, 경기연회는 백문현 목사가, 동부연회는 백명호 목사가, 남부연회는 이성순 목사가, 삼남연회는 박문순 목사가 각각 감독에 당선되었다.이어서 감리교회를 대표할 감독회장 선거가 있었다. 그 결과 김선도 목사가 1,403표를 얻어 감독회장에 당선되었다.
김선도(金宣燾, 호 杖泉) 감독회장은 1930년 12월 2일에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남산동에서 아버지 김상혁 목사와 어머니 이숙녀 전도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선천은 그 당시 기독교 복음화율이 50%를 넘어섰다. 모태에서부터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인 조부 김탁하의 영향 아래서 어머니의 철저한 기독교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고향에서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6년 선천상업학교 졸업하고 1948년 신의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노트에 기도문을 기록한 것 때문에 그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고 1950년 해주의학전문학교에서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은 김선도 의학생인 김선도를 강제로 군의관으로 임명하여 전선에 내 보냈다. 군의관 김선도는 월남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그가 속한 부대가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것을 기회로 삼아 그는 환자를 챙기는 척하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하여 국군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결국 그는 국군과 맞닥뜨렸다. 생사의 기로에 선 그에게 국군 장교는 아군의 환자가 많으니 환자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는 등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김선도는 그 자리에서 국군 1사단 11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이 일은 불과 5분 만에 이루어졌다. 간부끼리 논의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북한군이 한국군으로 신분이 바뀌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국군이 된 김선도는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중공군과 대치 상황에 놓일 때 삶과 죽음의 선을 넘나드는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그는 하나님이 살려주심으로 ‘평생 주의 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전쟁 이후 군의관 신분인 김선도는 외출이 가능했다. 이때 부친과 의형제로 맺은 사람들을 만났다. 헤어졌던 가족들이 전북 군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군산으로 갔던 김선도는 그리운 가족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그 후 김선도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홀몸으로 상경하여 의무사령부로 들어가 군의관으로 일했다. 의정부 유엔 종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재직하면서 의정부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어 감리교회와의 첫 인연을 시작되었다. 이후 1954년 4월 감리교신학대에 입학하여 감리교신학을 공부하였다. 1957년 신학생 시절에 전농교회를 담임하면서 목회를 경험했다. 이때 그는 군목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듬해 1958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 196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2년 공군기술교육단 군목으로 복무했다. 이때 헤롤드 디울프 미국의 웨슬리신학대학장이 이 부대를 찾았는데 김선도의 열정에 감명을 받고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김선도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롱비치 선교연구원을 수료하고 미국 위싱턴 D.C.에 있는 웨슬리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종교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고 1970년 2월에 유학생활을 마치고 김선도 목사는 공군사관학교에서 군목으로 임무를 다했다. 1971년 11월에 9년의 군목 생활을 마치고 광림교회의 간청에 광림교회 제5대 담임자로 부임하였다. 1978년 광림교회를 현재의 위치인 강남구 신사동으로 옮겨 1979년 성전을 봉헌했다. 1980년 한국목회연구원장, 1982년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웨슬리복음주의협의회 회장, 1987년 사회복지법인광림복지재단 이사장, 1988년 사단법인기독교선교횃불재단 이사, 1992년 감리교지도자양성후원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93년 애즈베리신학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선도 목사는 1994년 10월 25일~27일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총회에서 제3대 서울남연회 감독 및 제21대 감리회 감독회장에 당선되어 감리회유지재단 사장, 학교법인 감리교학원 이사장을 맡았다. 김선도 감독회장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힘을 다해 전통 있고 위대한 감리교회를 섬기며 또 십자가를 지고 헌신해 갈 것”을 다짐했다. 또한 “21세의 문을 열고 세계 선교의 주도권을”가지고 “아시아와 세계 선교의 뜨거운 사명”, “웨슬리의 복음주의와 경4건주의의 위대한 신학과 신앙”을 통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는 감리교회가 될 것을 선언했다.
감독회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지면을 통하여 그가 밝힌 메시지는 21세기에 대한 준비인데 이것은 먼저 신앙과 신학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이후 그는 통일선교, 세계선교를 위한 전지 기지, 지도자양성, 사회봉사하는 교회 등의 주요 내용을 담은 구체적인 선교적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이후 김선도 감독회장은 자신이 공약한 내용들을 대부분 실행하였다. 개혁과 변화를 통한 신뢰성 회복을 위하여 광화문 빌딩의 본부 사무실을 여의도 정우빌딩 11층으로 이전하여 운영비를 절감하였다. 선교의 지방화를 꾀하기 위하여 본부에서 각 연회롤 1천만 원씩 선교 협력비 지원하였고, 통일 선교를 위하여 개체교회가 주관하는 통일선교 헌금 구좌 예금을 시작했다.l 또한 사회복지재단 수립을 통한 사회봉사활동, 교단 지도자 양성을 위해 인우학사 재건축, 세계교회와 와 협력을 위한 세계감리교회 감독회의 개최, 재산관리법 재정을 위한 위원회 구성, 기독교 유선 TV 방송회사 설립과 기독교 남북통일 촉진 위원회 및 타교단과의 연합 사업을 추진했다.
1995년 학교법인현등학원 이사장, 1996년 세계감리교협의회(WMC) 회장, 사회복지법인한국선명회 이사장, 미국 애즈베리신학대학원재단이사, 사회복지법인한국월드비전이사장, 1997년 아프리카짐바브웨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98년 국제월드비전이사, 사단법 국제기독교언어문화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김선도 감독은 2001년 3월 15~16일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서울남연회(홍안의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광림교회는 자녀들 가운데 유일하게 목회하는 아들 김정석 묵사에게 물려주었고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2001년부터 학교법인서울현대학원 이사를 맡았다. 2005년에는 미국 애즈베리신학교 석좌교수로 취임하였고 2006년에 호서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느니라”(빌 4:13)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 주가 주시는 능력 안에서 살아온 김선도 감독은 2022년 11월 25일 향년 91세에 별세하였다. 아내 박관순과 슬하에 3남 1녀(정은, 정운, 정석, 정신)를 두었으며 3남 김정석 목사는 2024년 10월 30일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감리회 제37회 총회에서 감독회장에 당선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자가 감독회장이 되는 명예를 가졌다;
김선도 감독은 제6회 서울남연회(1995년 3월 15일~17일, 광림교회 개최)와 제7회 서울남연회(1996년 3월 11일~13일, 광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또한 제21회 총회 입법의회(1995년 10월 24일~26일, 광림교회 개최), 제22회 행정총회(1996년 10월 29일~31일, 광림교회 개최)를 ‘영적 각성으로 21세기를 열자’(롬13:21)라는 주제로 이끌었다.
배동윤(裵東允, 호 和巖) 감독은 1933년 8월 29일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포산외리 4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54년 숭일고등학교를, 1958년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을, 1960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시절에 구천교회(현 천호제일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1963년 성민교회, 1967년 청량리교회를 담임하였다. 그가 부임할 당시 청량리 교회는 200명 수준의 교회였는데 그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열정적인 목회로 10년 만에 교인 1,000명으로 부흥하였고 1979년에 연건평 460편 규모의 성전을 건축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과 풀러신학대학과의 공동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970년~80년대에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강사로 활동하였으며 서울 연회 및 한국감리교회 부흥단 단장과 한국 기독교부흥협의회 회장 역임하는 등 국내외 교회를 순회하면서 수많은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74년 경동지방 감리사, 1980년 제14회 세계감리회평의회 한국대표, 1981년 한국기독교구라회 회장, 1982년 감리회부흥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984년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5년 동대문지방 감리사, 1987년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회장, 1988년 88세계복음화대회장, 1989년 북한선교회장을 역임하였다.
배동윤 목사는 1994년 10월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총회에서 제8대 서울연회 감독에 당선되고 선교국위원장, 국제성서보급선교회 총재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감독에 취임하면서 연회 사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침체되어 가는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고 질과 양이 균형 잡힌 성숙한 교회가 되도록 선교교육에 힘을 쓸 것이며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앞장서는 연회가 되도록 하겠다. 또한 인간의 존업성 회복과 도덕성 회복을 위해 황폐화된 자연을 다시 원상으로 회복시켜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도록 일하겠다.”
배동윤 감독이 임무를 수행하는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남북교회가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희년의 해’ 선포하고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이 준비된 해였다. 감리교회도 이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90년대에 들어선 전개하고 있던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선교하는 교회’로서 그 위상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배동윤 감독은 감독의 임기를 마친 후 1996년 감리교사회복지관재단 이사, 1997년 감리교서울여자신학원 원장, 1999년 국제시민봉사회한국본부 부총재, 엘림장애인선교회 이사장, 2001년 21세기감리교성장선교회 총재, 2002년 행복한 가정사역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주안에서 할 수 있다고 믿으라 그대로 되리라”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 목양일념으로 달려온 배동윤 감독은 2004년 4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4회 서울연회(김진호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도 부흥사회에서 활동하여 2011년 12월에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대표회장에 선임되어 한국 교회 부흥사회를 주관하였다. 현재는 아내 김혜실 사모와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현재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고 있다.
저서로는 《교회성장에 있어서 목회의 역할에 관한 연구가 있으며 논문으로 《인구조절 문제와 기독교의 책임》, 설교집으로 《불행의 언덕을 넘어서》《승리의 인생》, 《새하늘 새땅 새 사람》, 《잃은 양을 찾아서》 등이 있으며 이후에 설교전집을 발간하여 총 10권의 설교집《광야의 소리》가 있다.
배동윤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15회 서울연회(1995년 3월 28일∼3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16회 서울연회(1996년 3월 12일∼14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최세웅(崔世雄) 감독은 1937년 9월 24일에 인천시 동구 송림동 224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56년 배재고등학교 졸업, 1961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해병대 자원입대하였다. 전역 후 1963년 강화 당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64년 강화홍의교회, 1965년 강화중앙교회, 1966년 강화석모교회, 1967년 시흥지방 성천교회를 담임했다.
1967년 4월 5~9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6회 중부연회에서 변홍규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9년에 계산중앙교회로 부임하여 2008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1979년 인천북지방 감리사, 인천도시산업선교 위원장, 1984년 중부연회부흥단장, 인천교도소종교지도 위원장, 1987년 인천북구지역기독교연합회장, 1989년 인천기독교목회자협의회 초대회장, 1990년 감리교신학대학 총동문회장, 1991년 감리교신학대학 재단이사, 1993년 인천해병대목우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최세웅 목사는 1994년 10월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감리회 제21회 총회에서 제22대 중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그는 감독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우리 모두 베옷을 갈아입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새 출발합시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믿고 좌우로 치우지지 말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찾아가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겠다.”
1995년 기독교텔레비전방송국 이사, 배재대학재단이사, 1996년 계양경찰서 초대경목위원장, 사회복지법인 이사, 인우학사 이사, 1997년 감리교신학대학 재단이사장, 계양구기독교연합회 초대회장, 1998년 인천생명의전화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9년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경인지역 이사장, 2000년 전도의 씨 만들기 운동 대표로 활동했다. 그 후 최세웅 감독은 2008년 4월 26~27일 인천 숭의교회에서 개최된 제66회 중부연회(김승현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아들 최성신 목사가 담임하는 계산중앙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
“준비된 지도자, 최선을 다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 목양의 길을 달려온 최세웅 감독은 2020년 5월 24일 목회에세이 출간감사예배를 마친 후 2020년 6월 25일 별세하였다. 아내 김정자 사모와 슬하에 1남 2녀(신성, 신영, 신혜)를 두었다.
저서로서는 《끊을 수 없는 사랑》, 《아브라함의 믿음과 축복》, 《행복을 찾는 지혜》, 《빛을 갚는 인생》, 《죽도록 하면 사는 길이 열린다》, 《전도폭발의 뇌관이 되라》, 《종말에 대비하라》, 《목회엣세이》
최세웅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54회 중부연회(1995년 3월 14일∼16일, 숭의교회 개최)와 제55회 중부연회(1996년 3월 20일∼22일, 계산중앙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백문현(白文鉉) 감독은 1940년 8월 17일에 전라북도 김제군 공덕면 산제리에서 출생하였다. 1957년 이리상업고등학교 졸업, 1961년 감리교대전신학교를 졸업하고 둔내교회에 부임했다. 1965년 3월 16일~22일에 배화여교강단에서 걔최된 중부 동부 남부 연합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0년 대전 신흥교회, 1975년 충남경찰국 경목실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 안양교회에 부임하여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1984년 안양지방 감리사, 1990년 감리교전국부흥단단장, 세계성령화대회 강사단장, 1993년 21세기세계복음화 상임회장을 역임하였다. 목원대학 교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필리핀 유니온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4년 10월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감리회 제21회 총회에서 경기연회 제3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그 후 1998년 중부지역부흥협의회 총재, 군성교회 이사장, 감리교만나신학원 이사장, 베트남선교회 이사장, 21세기선교협의회 총재, 감리교성장협의회 총재, 목원대학교 이사장, 북한선교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북한교회세우기연합 공동대표회장을 역임했다. 그 후 2009년 4월 16~17일 오목천교회에서 개최된 제20회 경기연회(정판수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평생“정직하게 살자”는 좌우명을 가지고 살아온 백문현 감독은 2014년 2월 4일 별세하였으며 입관예배는 5일에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발인예배는 6일 오전 9시 안양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아내 김정자 사모 슬하에 1남 3녀(승혁, 영미, 은미, 정미)를 두었다.
백문현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6회 경기연회(1995년 3월 20일~22일, 여주중앙교회 개최)와 제7회 경기연회(1996년 3월 26일~28일, 여주중앙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제3회 국외선교연회(1995년 4월 26일~27일, 캐나다 광림교회 개최)와 제4회 국외선교연회(1996년 4월 9일~11일, 뉴욕 세계선교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저서로서는 《주님을 바라보자》, 《광야를 극복하는 방법》,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 《성령의 물결이 흐르는 곳》, 《이만한 사람 이만한 믿음》, 《내게 와서 쉬라》등이 있다.
백명호(白明浩) 감독은 1930년 1월 17일에 황해도 수안군 연암면 율리 70번지에서 태어났다. 1952년 감리교 신학교를 입학하고 충북 삼청교회, 1953년 봉양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이 때 1956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릉송정교회에 파송 받고 1958년 울진교회, 1959년 평해교회에서 목회했다. 1961년 삼척흥전교회에서 목회할 때 1963년 3월 12~16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중부 동부 남부 연합연회 중 동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67년 장성교회를 담임하면서 1968년 삼척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70년에 영월중앙교회를 담임할 때 1971년 영월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78년 영월대교회를 담임하고 은퇴할 때까지 목회를 하였다. 이 때 1983년과 1993년에 영월지방 감리사로 일했으며 1993년 동부연회 감리사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1994년에 미국 임마누엘 침례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백명호 목사는 1994년 10월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총회에서 제22대 동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기본재산관리위원장, 감리교홍보출판국위원장, 감리교신학대학 재단이사, 감리교재단이사, 감리교 총회실행부 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외에도 1970년~1990년 동안 영월군 행정자문 위원, 강원도 교경협의회 부회장, 영월군․읍 기독교연합회 회장, 영월경찰서 경목실장, 영월 희망유치원 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세계 선교와 농어촌 광산촌 선교에 적극 대처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는 목회하면 동안 봉양교회를 시작으로 송정, 화광, 영월중앙, 청강, 공기, 영월대교회 성전 등 7개의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오직 예수”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백명호 감독은 2019년에 별세하였다. 서종원 사모와 슬하에 4형제(낙천, 낙영, 낙성, 낙현)를 두었다.
백명호 감독은 1986년 11월 27일에 강원도 경찰국장상, 2005년 9월 5일 원주시장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감독 재임 시 제46회 동부연회(1995년 3월 21일∼23일, 원주제일교회 개최)와 제47회 동부연회(1996년 3월 19일∼20일, 충주남부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이성순(李成淳, 호 峯岩) 감독은 1928년 4월 18일에 황해도 신계군 적여면 목전리 회동에서 태어났다. 1957년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졸업, 1975년 목원대학 교역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6년 예산죽림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57년 태안교회, 1958년 당진삼화교회, 1961년 당진삼봉교회, 1963년 춘천중앙교회, 1964년 춘천우두교회, 1967년 예산양막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이때 1970년 예산지방 감리사를 역임하고, 1975년 합덕교회를 부임하여 1999년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1988년 충남경찰청경목위원장, 1991년 합덕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이성순 목사는 1994년 10월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감리회 총회에서 제10대 남부연회 감독에 당선되고 사회평신도국 위원장, 감리회 유지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1995년 남부연회 장학재단설립 및 이사장, 1996년 감리교사회복지관재단이사, 목원대학교 법인이사로 활동했다. 1999년 3월 23일 매봉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충청연회에서 정년 은퇴하고 충청연회 원로목사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76년부터 은퇴할 때(1999년)까지 충남 경찰청 경목으로 활동했고 1988~1989년에는 충남 경찰서 경목 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평생 6개의 상을 수상했다. 1973년 윤창덕 감독으로부터 감리사로서 지방 확장에 공로를 세운 공적으로 표창패를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1977년 성전건축 공헌(김순경 감독), 1986년 교육관 건축 봉헌 공로패(김승호 감독), 1996 남부신문창간 유관순 기념예배당 긴축기공 공로패(김영웅 감독), 1996년 성전건축 공로패(김영웅 감독), 1999년 장학재단 설림 공로패(이유식 감독)을 수상했다.
“약속을 지켜라 반드시 성공하리라”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 목양의 길을 걸어온 이성순 감독은 아내 김복순 사모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그는 남부연회 감독 재임 시 제41회 남부연회(1995년 3월 29일~31일, 대전중앙교회 개최), 제42회 남부연회(1996년 3월 27일~29일, 대전선화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박문순(朴文淳, 호 忍誠) 감독은 1929년 8월 21일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 1955년 중앙신학교, 1975년 목원대학교역대학원, 1992년 미국 랜드막 신학대학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무산지방 청학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50년 번영로교회를 담임하였다. 번영로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고려신학대학기성회 이사, 삼남연회 부흥선교단 초대회장, 부산남부경찰서경목, 부산기독교방송국운영 이사, 부산신학교후원 이사, 부산동지방 감리사, 기독교21세기 운동중앙위원, 한국기독교가정생활위원 총재로 활동하다가 1994년 삼남연회 제8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박문순 감독은 세계화 시대를 맞아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감리교 감독회의(1995년 8월 20-26일)와 8월 27일 열리는 감리교 선교축제를 강조하며 삼남연회가 복음의 기원지, 선교의 기원지로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선교의 사명을 다하자고 강조하였다.
박문순 감독은 1980년 지방감리사 업무에 대해서 감독의 표창을 받았으며 1985년에는 5개 처 교회를 개척 공로에 대해서 감독표창을 받았다. 1972년 군복음화 및 정신교육에 대한 육군 20사단장 공로패, 1984년 경찰행정 발전에 대한 경찰국장 공로패, 1991년 범죄 예방과 지역 발전에 대한 기동대장 공로패를 받았다.
“순박한 사람”이란 좌우명으로 살아온 박문순 감독은 2000년 3월 14~16일에 익산 영생교회에서 개최된 제20회 삼남연회(최타권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2021년 향년 92세에 별세했다. 김용희 사모와 슬하에 아들과 손자가 3대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박문순 감독은 삼남연회 감독 재임 시 제15회 삼남연회(1995년 3월 30일∼31일, 대구제일교회 개최), 제16회 삼남연회(1996년 3월 27일∼29일, 대구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또한 박문순 감독은 제3대 서부연회 관리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1995년 5월 15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제2회 서부연회를 개최하고 은희곤 목사를 제1대 연회총무로 인준하였으며, 1996년 5월 13일에 감리교 일영연수원에서 제3회 서부연회를 개최하였다.
김선도 감독회장은 취임하면서 이제 한국 교회가 21세기의 문을 열고 세계 선교의 주도권을 가져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들이 이끌고 가는 감리교회는 세계적인 규모의 큰 행사들을 개최하였다. 1995년 8월 27일에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95 세계감리교서울희년대회’가 그것이다. 이것은 1995년이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로서 통일의 희년을 준비해온 감리교회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행사였으며 ‘교회와 민족의 세계를 새롭게’라는 주제로 전국 감리교회가 벌린 축제의 한 마당을 열었다.
또한 세계감리교감독회의를 1995년 8월 22일부터 27일까지 광림교회 세미나하우스에서 개최하여 한국 감리교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이 회의는 1994년 한국을 방문한 감독회의 준비위원장 우드로우 헌(J. W. Hearn) 감독이 한국의 놀라운 성장을 목격하고 감독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한 것을 김선독 감독이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성사된 것이다. 세계 감리교 최고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진행된 큰 행사인 만큼 한국 감리교회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귀중한 회의가 되었다.
김선도 감독회장(서울남연회)
배동윤 감독(서울연회)
최세웅 감독(중부연회)
백문현 감독(경기연회)
백명호 감독(동부연회)
이성순 감독(남부연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