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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후반부에 나오는 경제적 내용에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읽어주시고 공감하시면 퍼나르기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감람산 강론의 개요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신분으로 화요일 성전에서 행한 강론은 모두 마쳤습니다. 성전에서 나올 때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있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24:1,2). 주전 20년 짓기 시작한 헤롯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말씀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전에서 해야할 사역을 다 마치시고 임시 거처가 있는 감람산(올리브 동산)으로 왔습니다. 감람산은 무화과나무가 있는 벳바게 또는 종려나무(대추야자)가 많은 베다니 마을 부근입니다. 이 지역은 예루살렘 도성과 가까워서 안식일에도 오갈 수 있는 곳입니다(행 1:12).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역과 부활 직후 제자들은 감람산을 주거지로 삼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눅 21:37)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예수님이 마지막 고난주간 화요일 저녁에 제자들에게 한 가르침을 “감람산강론”이라고 합니다. 강론 장소가 성전에서 감람산으로 옮겨졌습니다. 24장은 재림에 대하여, 25장은 재림을 준비하는 삶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전강론은 왕이 제자와 백성, 그리고 지도자들에게 한 징계나 훈계성 가르침이지만, 감람산강론은 스승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훈적인 강론입니다. 성전강론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주요 대상으로 한 지도자의 잘못 바로 잡는 내용이지만, 감람산강론은 제자들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와 그 미래를 준비하는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미래와 재림에 대한 가르침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세상 끝에는 어떤 현상이 있을지를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마 24:34). 그런데 2천년이 다 되어도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이 말하는 미래를 눈여겨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미래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평소에 현실 경제문제를 살펴보는 것도 벅차서 미래나 종말은 연구할 역량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순서에서 마태복음 24장을 만나다보니 피할 수가 없어서 제 생각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글은 필자가 미래의일을 알아서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령이 주시는 지혜를 구하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정리입니다.
감람산강론에서 밝힌 미래의 사건과 재림에 대한 징조와 내용은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재림의 징조입니다(마 24:3~35).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은 각종 난리의 소문이 있고, 혼란스러운 현상들이 생깁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거짓 그리스도의 등장(4~5,11), ②전쟁과 재앙(6~7), ③믿는 자의 박해와 불법이 성함(8~13), ④땅끝까지 복음 전파(14), ⑤각종 자연재해(15~28), ⑥재림의 징조(29~31), ⑦재림의 시기에 대한 것입니다(마 25:32~35).
그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훈입니다(마 24:36~5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날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습니다(38,39). 재림도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임합니다(43). 그때는 두 사람이 한 장소에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구원은 남은 자만 받는다는 뜻입니다. 재림의 때는 그러함으로 종들은 갑자기 돌아올 주인을 생각하며, 종이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재림을 알려주는 의미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 24:44,45)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주는 재림의 의미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재림은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 초림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재림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예언이므로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징조나 해야 할 일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미리 알려준 예언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됩니다.
둘째, 재림은 때와 장소를 모르게 임합니다. 도적같이 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있으라고 합니다(마 24:42).
셋째, 재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사실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청지기의 사명을 되새기며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처럼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청지기의 역할입니다. 주인이 오시면 이 역할을 충실하게 한 청지기에 자신의 소유를 맡깁니다(마 24:47).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림에 대비하여 살아갈 방법을 마태복음 25장에서 비유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세 가지의 비유
마태복음 25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을 준비하는 삶에 대하여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말미에 기록된 '청지기의 비유'를 합하면 네 가지이지만, 이 비유는 세 가지 비유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24장에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청지기의 역할은 25장의 열 처녀·달란트·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모두가 해야하는 역할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와 재림의 준비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으니(마 25:1)
열 처녀의 비유는 재림에 대해서, 신랑을 맞이할 신부와 같이 늘 깨어 있고, 기름을 준비하라는 당부입니다. 유대인의 혼인 예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신랑이 신분 집으로 가서 신부를 취하고, 일정한 종교 의식을 행한 후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리고 와서 잔치를 계속합니다. 혼인 예식은 밤에 치릅니다. 우리나라 결혼의 옛 풍습도 밤에 한 것은 아니지만, 신랑이 먼저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 절차는 같았습니다.
이 비유에는 10명의 처녀가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래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가 각각 한 사람씩이어야 합니다. 혼인 예식에 함께하는 들러리가 약 10여명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비교하기 위해서 10명을 동시에 등장시켰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예정보다 늦게 옵니다. 신랑이 늦게 오므로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들이 모두 졸게 됩니다. 여기까지 10명의 신부는 행동이 같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10명의 신부에서 서로 대조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10명 중 5명은 졸고는 있으나 기름을 준비하였고, 나머지 5명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졸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게 와서 기름이 떨어졌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신부는 기름을 구하러 가는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그래서 5명은 신랑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24장에서 재림을 대비하여 깨어있으라고 하신 말씀의 연속입니다. 신랑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뜻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는 것은 재림이 늦어질 수 있음에 따른 준비를 알리고 있습니다. 24장에서는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면서 재림(종말)이 곧 임박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마 24:34).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는 재림이 생각보다 늦어질 수 있음을 알리면서, 그러할 경우도 깨어있어야 할 필요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밤을 밝히는 등은 마태복음 5:15에서 말하는 등불(헬, 뤼크논)이 아니고, 야외에서 높이 들고 있는 횃불(헬, 람파스)입니다. 이 횃불은 약 15분마다 횃대에 기름을 묻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횃불은 오래 사용하려면 기름을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미련한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천국 잔치에 참여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비유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요일 2:27). 영적으로는 믿음과 성령의 충분함이며, 생활로는 말씀의 무장과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더디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깨어있어야 하지만, 살면서 졸 수가 있습니다. 졸리는 잠은 장수라도 이기지 못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우리가 방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것을 준비를 해두는 것입니다. 횃불이 어둠을 밝히려면 기름이 필요합니다. 기름은 쓰면 줄어들고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나 정신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기도와 영적인 무장과 말씀의 훈련이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기름은 쓰면 쓸수록 줄어들기 때문에 계속 보충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과 성령, 말씀의 훈련도 시간의 흐름에서 줄어들지 않게 보충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성령, 말씀의 무장이 현재의 충만(fulled)으로는 부족하고, 지속적으로 보충될 수 있도록 충분해야(filled)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비유를 보면 기름이 떨어졌을 때 빌려달라고 해도 빌려주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팔라고 해도 파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충전과 말씀의 훈련은 누가 대신하여 주지 않으며, 돈을 주고 팔고 사는 거래의 대상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림의 준비는 개개인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만 잘하고 있으면, 신랑은 일찍 오든, 늦게 오든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열 처녀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재림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와 재림의 준비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마 25:4)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고 살펴야 하는 말씀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재림에 대한 준비지만,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교훈입니다.
주인은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깁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자가 가진 재능대로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 한 사람은 두 달란트, 또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납니다. 때가 되어 주인이 돌아와서 맡긴 것을 되돌려 받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져왔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두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만 받은 자는 받았던 한 달란트만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 종들은 하나님의 재산을 위탁받은 청지기(수탁자)들입니다.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타국에 간 것은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고, 그래서 자기 소유를 그리스도인들에 모두 맡겨놓은 것입니다. 종들은 초보자가 아닙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물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배운 자들입니다. 청지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기록하고 가르쳐주는 경전(성경)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재능’은 능력(ability)을 말합니다. 달란트는 화폐 단위입니다. 달란트라는 단어는 배우를 ‘탤렌트’라고 하듯이 재주나 솜씨를 뜻하는 말이며, 여기서는 화폐의 단위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재산, 재주, 은사(고전 12:8~10) 등을 말합니다. 한 달란트는 34.27kg(신약시대는 약 20kg)이므로 금 여덟 달란트는 엄청 큰 금액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은, 누가복음은 므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금이냐 은이냐보다 비유가 말하는 나의 작은 재산, 재주, 그리고 받은 은사가 금 달란트보다 더 중요합니다.
청지기는 가진 달란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주신 달란트를 자기의 욕심대로 쓰지 않고, 주인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할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보여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달란트는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달란트를 주인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더 큰 것을 되돌려 받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 필요한 은사는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쓰여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 전도와 봉사, 구제와 이웃 사랑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가정에서는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일터에서도 사람은 인적 자원으로, 물질은 물적 자원으로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합니다.
둘째,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사장시키면 문제가 생깁니다. 잘해야 원금이 남아있고, 자칫하면 원금도 보존하지 못합니다. 달란트로 받은 것이 주택이나 도구라면 이것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두면 낡아지기 때문에 원금마저 잃습니다. 내가 가진 은사나 기능은 쓰지 않고 묵히면 시간 흐름에서 쇠하여 버립니다. 지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런 원금 손실이 두려워서 기계를 맡겨도 그 기계를 사용하지 못하고 땅에 묻어둔 것과 같습니다(마 25:25).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때는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천국에서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소유는 그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로 다르게 맡깁니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이 기록한 므나의 비유를 보면 공평하게 주었어도 결과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눅 19:13), 그러므로 달란트를 능력에 따라 차등을 두고 맡긴 것이 자원의 배분 방식에서 합리적입니다. 능력에 맞지 않는 자원 배분은 자원의 낭비를 초래합니다. 자원의 사회적 배분이 그러했습니다.
넷째, 받은 달란트가 많든 적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결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산에서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가져온 자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같은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베푼 잔칫상에서 같은 자격으로 예우를 받고 있습니다(마 25:23). 오히려 두 달란트르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에 비하면 책임이 가벼웠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칭찬과 예우를 받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보여주는 경제적 의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마 25:16,17)
달란트의 비유는 신앙공동체와 생활공동체 구분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을 준비하는 교훈으로 주어졌습니다. 이 비유는 주인의 소유를 종들에게 나누어주고, 각자 재량으로 관리하게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주인이 돌아오면 그 맡긴 소유에 대한 경제적 결산(회계, 계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경제생활과도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마태복음 23:33~41절이 말하는 경작자의 비유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포도원을 위임받은 자의 신분은 종과 경작자로 다릅니다. 또 경작자의 비유는 유대의 지도자나 부자들에게 한 경고성 의미가 있지만, 달란트의 비유는 제자들에게 미래를 준비하는 생활 지침으로 준 교훈입니다. 경작자의 비유는 낮에 성전에서 한 강론이고, 감람산강론은 저녁에 숙소에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소유를 맡겨두고, 시간이 지나서 결산의 시기가 오면, 그 대가를 받는 것은 모두 비슷합니다. 이때 경작자나 종이 합당한 몫을 내어놓을 때, 주인은 그 소유를 다시 맡기는 것도 같습니다(마 21:41, 25:23).
두 비유는 소유자(위탁자)와 수탁자, 사이에 상호 권리와 의무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는 권력자들에게는 과거에 잘못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달란트의 비유는 제자들에게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그 준비에 따른 상급을 주기 위한 교훈이었습니다. 비유를 연구한 학자들(다드, 예레미야스 등)도 달란트의 비유와 경작자의 비유가 주후 30년경 이스라엘 토지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약의 경제 규례는 약속의 땅에서 백성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면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토지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종은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지를 경작하는 방식과 거래 방식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주인이 타국에서 돌아와서 결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달란트의 비유는 구약 경제생활을 다룬 희년법과 관련시켜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1) 달란트의 비유는 주인이 가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어준 소유는 자유롭게 관리, 운용,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입니다.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소질과 능력에 따라 배분한 것이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보여주는 므나의 비유는 평등하게 분배한 자원도 각자의 능력에 따라 결과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토지를 분배하면서도 그 토지는 므나의 비유처럼 지파별, 가족별로 제비를 뽑아서 평등하게 분배를 했습니다(민 26:54,55). 그리고 가족별, 개별생산제체로 자유롭게 경작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분배된 토지의 면적은 지파별로 크게 달랐습니다. 기업을 분배 받은 순위도 다섯 지파는 먼저 받고, 일곱 지파는 받지를 못했습니다(수 18:1). 주인이 분배하여 준 개별 토지 역시 청지기가 어떻게 관리하고 경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땅은 원래 토지별 생산성이 다르고, 그에 따른 관리나 사용방식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의 차이가 나게 됩니다. 사람도 사람마다 서로 소질과 능력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결과도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다름을 인정해야 시장경제가 돌아갑니다. 이 사람과 가진 자원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경제는 그 자원을 스스로 나누지 못하고, 정부가 개입하여 자원을 배분해야 합니다.
(2) 달란트의 비유는 이자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자원을 땅에 묻어둔(원금의 소유만) 것에 대하여 강하게 꾸짖으며, 있는 것마저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면서 그 돈은 취리하는 자에게 맡겨서 이자를 취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취리하는 자는 헬라어로 “트라페자”이며, 환전상(마 21:12)을 말하는데 오늘날 은행(bank)이 되었습니다.
(3) 달란트의 비유는 예수님도 생산활동을 해야 부(富, wealth)가 발생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천지의 창조자요, 천지만물의 상속자 되신 예수님 자신도 곡식은 심어야 거두고, 키질을 해야(쭉정이를 분리시켜야) 모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경제생활에서 마태복음 25:26이 밝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심고 거두는 것은 부를 생산하는 경제활동의 근본정신이며,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년법에 담긴 시장원리기이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뒤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4) 달란트의 비유는 재물에 대하여 소유와 원금에만 집착하고, 생산활동을 하지 않아도 소득이 생길 것으로 여기는 자에 대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가진 원금도 빼앗기며, 천국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리새인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외식으로 지키고, 자기 의만 드러내어 예수님께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재림에 대한 준비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경제생활을 가르친 교훈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주인의 토지를 분배받은 백성들은 희년법을 지켜야 분배받은 기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를 어긴 자는 기업을 잃게 됩니다. 사회적으로도 기업을 잃은 현상이 많아지면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북왕국이 남왕국보다 먼저 바알 신과 제도를 받아드렸고 그래서 먼저 패망했습니다. 받은 기업과 나라를 잃어버리는 순서도 주인의 뜻을 어긴 순서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주인의 소유는 청지기(수탁자)가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가족과 기업, 사회와 나라의 흥망성쇠가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좌우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그 믿음에 합당한 행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이런 점에서 그 신분과 쓰임에서 차이가 납니다. 바울은 신앙공동체에서 필요한 일꾼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와 가정에 필요한 복음만 한정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공동체는 물론, 생활공동체와 천국경제에서 필요한 것까지 모두 가르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은 구원의 원리와 방향성이 같기는 하지만, 그 구원의 대상과 차원이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 대하여 비유를 연구한 신학자 최갑종 교수는 “달란트의 비유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비유 연구가 윤승은 장로도 양과 염소의 비유는 자비를 행한 자의 의를 기록했고,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를 기록했다고 하여 그 차이를 구분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바울 서신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입니다.
주)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연구,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211쪽.
주) 윤승은, 예수님의 비유들 연구, 성광문화사, 1997, 625쪽.
이자에 대한 바른 이해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히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마 25:27)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레 25:35~37)
우리는 구약의 경제법, 곧 희년법이 이자를 금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고, 그래서 오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자의 금지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성 대여금에 대한 이자를 금하고 있습니다(레 25:35~38). 그리고 선지자 아모스는 궁핍한 자에게 신 한 켤레까지 받아내려고했던 악덕 고리채업자를 규탄했습니다(암 2:6).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학파는 "말은 새기를 낳지만, 마차는 새끼를 낳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이자를 부정했습니다. 이슬람은 지금도 이자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중세에 유럽에서는 성경을 오해하여 이자 금지법을 제정하여 금융시장을 어렵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금융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유대인들은 이자보다 더 높은 환차익 투자기법을 개발하여 금융 부자가 됩니다. 이자율을 환율로 바꾼 사실상의 금융 대부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배운 세겔화 환전기법으로 금지한 이자보다 더 큰 외환 매매차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이자 금지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에 속하는 힐렐 학파는 안식년이면 해야 하는 부채 탕감을 회피하기 위하여 프로스블(prosbul)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율법 준수에 충실하려고 했던 바리새인들마저도 경제 부분만은 스스로 어기고 율법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구약 경제에도 이자는 있었습니다. 희년법은 이자가 있어야 거래가 성립합니다. 모든 자본재와 원금의 거래는 이자가 있어야 시장이 돌아갑니다. 아니면 공산주의나 정부가 하는 것처럼 자원과 자금을 배급제로 배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금융거래와 이자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은 희년까지 팔고 사는 토지거래(레 25:15,16)는 수익과 수익률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합니다. 이것이 시장이 가진 경제원리입니다. 여기서 수익은 토지에서 생산될 미래의 임료 수익이며, 이것이 이자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 수익은 미래에 나올 가치물이므로 현재는 이자(수익)를 원금으로 환산하는 비율이 필요합니다. 이 비율이 바로 이자율입니다. 곧 레위기 희년법은 금융거래를 말하고 있고, 이러한 금융거래는 원금가격과 이자율이 시장기능으로 결정되는 거래입니다. 희년법에서 말하는 종이나 품꾼의 품삯에 대한 일시불 가격, 곧 몸값도 이자율에 따라 결정된 원금이고, 가격입니다.
대여금 이자와 자동차 사용료는 같은 것
자동차를 빌리면 자동차 사용료로 렌트(rent)를 내어야 합니다. 이 렌트에는 자동차의 원금(감가상각비)과 사용 기간에 따른 이자가 들어있습니다. 곧 자동차 사용과 렌트에서 이자가 들어있지 않으면 자동차 렌트가 있을 수 없으며, 자동차를 생산하거나 소유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동차 사용에서 발생하는 이자분이 없다면, 차를 만들어 타고 다니거나 자동차 없이 걸어다니거나 경제적 효과는 같다는 뜻입니다. 생산활동에서 자금이란 자동차와 같은 자본재의 대용물 가치입니다. 자동차가 생산 효율이 있어서 이자가 붙는다면, 그 자동차의 대용물(청구권)인 자금 대여에도 이자가 있어야 합니다. 빌린 자원(車)에 대한 이자는 빌린 자금(돈)의 사용료와 같은 성격이라는 뜻입니다.
빌린 자원 = 빌린 자금
빌린 자원의 사용료 = 빌린 자금의 이자
자동차 렌트의 경우 이자 상당액 = 자동차 사용료 - 감가상각비(원금 보상분) - 렌트 업자의 각종 비용
그러므로 희년법에서 금지한 이자는 가난한 자에게 빌려주는 대여금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구제성 소비 자금에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땅과 몸이라는 자본(재)거래는 이자와 이자율이 있어야 거래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안식년이면 빚을 탕감하는 것도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성 대여금에 대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토지거래에서 발생한 부채는 안식년에도 탕감되지 않고 희년까지 그대로 존속합니다. 그리고 땅과 몸을 담보로 빌린 부채는 평소에 무르기를 하여 원리금을 상환하거나 안식년 또는 희년이 되어야 자유하게 됩니다. 안식년 또는 희년이 계약의 종료 기간이므로 그동안 땅과 몸이 생산활동으로 이자를 다 갚았기 때문입니다.
이자는 자원의 사용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나누어준 자원(달란트)을 받은 자가 직접 활용하여 수익을 내든지, 아니면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원은 놀리지 않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곳에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경제원리이고, 금융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이 이자를 취하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년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가난한 백성들은 프로스블 같은 제도로 인하여 피해를 보거나, 이자를 금지한 유럽 사회처럼 실정법이 금지한 이자보다 더 큰 이자(환율차익)를 채권자에게 물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사회에서 일부 계층은 이자를 부정하거나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래서 시장의 정상기능에 따른 정당한 이자마저도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거나 이것이 빈부격차를 일으키는 원인자로 봅니다. 그러나 정상경제에서는 목재 하나도 손으로 깎는 것보다는 대패라는 도구가 훨씬 더 낫습니다. 그래서 대패는 생산성 효율 증대에 따른 이자(사용료)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람의 몸도 사용하면 몸이 생산에 기여한 대가로 사용료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임금입니다. 이런 것이 가치의 생산이며, 사회에서 부를 증대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킵니다.
다만, 자본에서 발생하는 이자의 축적은 빈부격차를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해두었습니다. 희년법은 이런 격차에 대해서 무르기 속량법을 두어서 근본에서 해결하게 해두었고, 이것이 안되는 경우는 십일조를 중심으로 한 구제로 해결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발생한 실업과 빈곤의 문제를 세금 한 푼 거두지 않고, 100%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경작자의 비유대로 하면(마 20:1,9,14,15, 마 21:41), 경제는 사유재산을 침해하지 않고, 발생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과 자본재가 가지는 생산성의 가치, 곧 시장거래에서 발생하는 이자(지대, 사용료, 임금)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경제법은 탁월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달란트의 비유에서 가르친 교훈은 경제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제에서 생산활동과 비생산활동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부(富)의 착각 현상과 부의 바른 이해(생산활동과 비생산활동)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키질도 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사역)
주인에게 한 달란트 원금만 내어놓은 자에게 예수님은 심지 않고 거두고, 헤치지 않고 모으는 줄로 아느냐고 반문합니다. 이 말씀은 경제활동에서 곡식은 심어야 거둘 수 있고, 키질을 해야 거둔 곡식을 선별하여 저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헤치다(헤치지 않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스콜피조”입니다. 이 말의 원어는 타작마당에서 곡식과 검불(잎, 줄기, 찌꺼기 등),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작업을 할 때 쓰는 단어로 ‘키질하다(to winnow)’, ‘체질하다(to sift)’, ‘분리하다(to separate)’라는 뜻입니다. 순수 우리말로는 '까부르다' 또는 풍구나 바람에 곡식을 '젓다'가 있습니다.
주) 개역개정 성경은 마태 25:24,26에서 '헤치다(헤치지 않은)'로 번역하여 문장의 뜻이 모호하다. 킹제임스 성경도 '뿌리다(뿌리지 않은)'로 번역하였다. 두 성경 모두 틀린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타작마당에서 알곡을 선별하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므로 '키질하다(키질하지 않은)'로 번역을 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로는 이사야 41:16에서 '자다'(זדה)가 이에 해당하며, '까부르다'로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곡식을 심지 않고 거둘 수가 없고, 키질도 하지 않고 모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인도 추수할 때는 곡식을 거두어 마지막 작업으로 키질을 합니다. 그래서 쭉정이는 골라내어 불에 태워버리고, 알곡만 골라서 곳간에 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추수의 원리로 세상 끝을 말하고 있습니다(마 13:30, 눅 3:17, 약 5:4, 계 14:15).
하나님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40년간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수 5:11,12). 예수님은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000명이 넘는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요 6:5~14). 이러한 큰 능력을가진 하나님도 현실 경제생활에서는 심고 거두는 노력과 투자, 그리고 생산과정이 동반되어야 생산물이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는 것은 생산의 시작이고, 키질하여 알곡을 모은 것은 생산의 종결 작업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것이 경제활동이고, 가치의 생산활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생산과 비생산(가치의 有와 無)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경제활동 전체에 적용하면 경제활동에서 생산물이 있는 활동과 생산물 없는 활동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경제활동에서 노동과 자본의 투입 없이는 생산활동이 있을 수 없고, 생산활동이 없이는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성질은 곡식은 물론, 음악과 스포츠 등 각종 서비스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화의 생산, 보관, 운반, 진열, 매매, 서비스의 교환과 거래도 모두 생산활동입니다.
여기서 소득이란 부(富, wealth)를 뜻하며, 수익(profit), 이익(income), 부가가치, GDP 총액을 말합니다. 생산활동이 없으면 이런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산활동이 없으면 소비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창조질서이자, 경제활동의 기본입니다.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대헌장입니다. 이런 경제원리가 성경 희년법에 들어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경제복음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산활동이 없으면 소득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50년간 사람이 발을 디딘 적이 없는 산골 임야에서 토지의 공시지가가 매년 커지고 있습니다. 30년간 묵혀놓은(나무 몇 그루 심어 방치한) 농지가 거래될 때마다 매매차익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경제활동에 속하지 않습니다. 임야는 50년간, 농지는 30년간 아무것도 심지도(눈가림으로 심어놓고), 거두지도, 키질도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입자가 땅을 사서 자금을 30년, 50년간 묵혀둔 상태입니다. 지금도 부자들은 감가되지 않는 토지가 제일 안전하다면서 부동산 투자(투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산 없는 임야, 도시의 나대지나 유휴 농지를 매입하여 방만 경작 또는 위장 경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산활동 없는 경제 행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그 땅을 내어놓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한 달란트 받아서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원금만 내어놓은 것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원금(실제는 커지고 있는 원물)만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 그 땅(자원)을 땅에 묻어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땅은 경작을 해도, 곧 농부가 심고, 거두고 생산활동을 하였어도 토지원금(원물)이 스스로 커지는 값(원금 성장액)은 사람이 지금 쓸 수 있는 생산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원금 성장액은 실물이 아니므로 그 값은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원금이 스스로 커진 것은 생산이 아니면 생산물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구로 존속하는 자본재에서 발생하는 원금차액은 영원히 심고 거두고, 먹고, 소비하고 사용하는 생산활동이 아니므로 생산물이 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 말씀이고, 경제과학이며, 창조세계에서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토지, 주식, 선물, 외환, 가상화폐 등에서 생산활동이 아닌 매매차익은 영원히 아무것도 없는 허구가격입니다. 경제 공황과 금융위기, 물가상승과 불경기의 주기적 반복 현상은 이런 금융물이 실물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부의 쏠림 현상도 이런 실물 없는 금융가격이 급등할 때 현저하게 커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ㄱ. 원금이 커지는 원금의 변동, 성장하는 현상과 ㄴ. 그 원금이 생산활동으로 커지는 실물 성장을 혼동하거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ㄱ과 ㄴ이 같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은 학자 뿐 아니라 지구촌 모든 인류가 가진 가치에 대한 착각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학자와 지성인, 성인 남여 구분 없이 모두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불변의 眞理> 달란트 비유에서 심거나 거두어야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경제원리(마 25:26)
<불변의 物理> 자연계, 물질계는 씨와 손, 도구가 사용과 희생으로 새로운 가치를 낼 수가 있다. 경제계는 생산없이 소득없고, 소득없이 사용 없다.
가. 쌀을 생산하는 땅은 영원히 쌀(부산물 포함)만 생산하고, 그 외에는 어떤 가치도 생산하지 못한다. 곧 땅값 성장액(또는 토지 매매차익)은 숫자만 커진 것이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가치)의 생산이 아니다.
나. 포도주를 생산하는 공장은 영원히 포도주(부산물 포함)만 생산하고, 그 외에는 어떤 가치도 생산하지 못한다. 곧 포도주 공장의 주식 성장액(또는 주식 매매차익)은 숫자만 커진 것이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포도주(가치)의 생산이 아니다.
이것이 달란트의 비유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말씀이고, 경제복음입니다. 그래서 경제생할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 검증과 상세한 설명은 필자의 책 [한가위 희년나라]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달란트의 비유와 재림의 교훈
우리는 내가 받은 달란트가 그것이 물질이든, 기능이든, 받은 은사이든, 그것을 가지고, 공동체(교회, 직장, 가정)를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직업상 필요한 달란트는 대가를 받으면서 일하고, 직업이 아니면 재능 기부와 같은 봉사로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합니다. 땅과 재산, 내가 노력하여 배우고 익힌 지식이나 기능이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특히 땅과 기업은 하나님이 만들고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으로, 이것은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고유한 소유물입니다.
그리고 그 소유물은 생산활동 없이 가치물을 내지 않고, 가치물을 내지 않으면 그 물질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생산활동(생산, 보관, 수송, 판매활동) 없이 거래만 있는 것은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원금을 땅에 묻어둔 것과 같은 허구거래입니다. 그러므로 달란트의 비유는 재림에 대비하여 이런 자원에 대한 소유와 사용, 위탁과 수탁, 자원의 활용과 낭비에 대한 바른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받은 재산(달란트)을 주인의 뜻을 따라서 바르게 활용하고, 긍극적으로는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 주인이 오시면 더 큰 재산을 되돌려 받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사명이고 역할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이런 교훈이 들어있는 재림의 준비입니다. 누구든지 재림에 관심이 있지만, 그 재림에 대한 준비는 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적같이 임하는 재림의 때가 되면 우리는 기회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 혹시 마태복음 25:26에서 "헤치지 않은 데서"를 "키질하지 않은 데서"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의견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은 재림을 준비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와 재림의 때와 시기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