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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장미의 도전 -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어가는 혁명적 페미니즘
오연홍 엮음, 김요한 양동민 양준석 오연홍 전해성 옮김, 숨쉬는책공장 2023.
생산과 재생산: 자본주의는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여성 노동 인구는 점점 더 증가했다. 여성들은 처음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성 노동자가 ‘부족’해서 임금노동자가 됐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결여됐다는 모순을 드러냈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시장으로 진입해야 했다. 여성이 삶의 한편에서 경험하는 새롭고 상대적인 ‘평등’ 덕분에 법에 규정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자리한 부당하고 낡아빠진 불평등은 지속 불가능해졌다. 이 모순은 영국과 그 밖의 선진국에서 교육받은 여성들이 주도했으며 여성 노동자 상당수가 동참한 여성의 권리와 참정권을 향한 투쟁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자본주의 국가의 여성이 투표권 같은 가장 기초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동안,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이행기의 노동자국가는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촉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여성이 가정에서 고립된 상태를 종식시키고 공적·정치적 생활에 참여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볼셰비키 여성해방 정책의 기본 요소 중 하나였다. 이 사회화 정책은 내전 발발과 심각한 경제위기 때문에 완벽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나중에 스탈린 체제는 전통적 성역할을 장려하면서 이 정책을 박살냈다.
1970년대에 2세대 페미니즘은 사적 영역과 정치역 영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했다. 여성들은 20세기 중반 이후 자본이 제도화하고 안착시키려 애썼던 것, 즉 정치적 영역(생산·임금노동)과 사적 영역(재생산·무급노동) 사이의 분할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가사노동의 역할에 대한 첫 번째 논쟁이 시작됐다. 가사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 가사노동으로 유지되는 가부장제 생산방식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과 구별되는가? 아니면 재생산 노동이 교환가치 생산에 따라 결정되고 종속되는 단일한 자본주의적 가부장 체제가 존재하는가?
1972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자인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와 셀마 제임스는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Community》이라는 책을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동시 출간했다. 그들은 재생산 노동이 자본주의에 필수적이지만, 무급 노동이기에 그 중대한 역할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뉴욕의 실비아 페데리치, 파리의 브리지트 갈티에와 함께 국제페미니스트연합을 결성했다. 이는 위 관점을 옹호하고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을 위한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나라의 실천을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즈 보걸은 1983년에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단일 이론을 향하여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Toward a unitary Theory》를 썼는데, 이때는 대중이 급진화했던 시기가 끝나고 신자유주의의 첫 번째 반격이 시작되던 시기다. 보걸은 자본주의 젠더 질서가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노동자계급 가정의 사회적 연결에 기반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와 완전히 구별되는 가내 생산방식의 관점뿐만 아니라 초역사적 가부장제와도 대조를 이룬다.
최근 수십 년간 놀라울 정도로 노동력의 여성화가 진행됐는데, 이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 노동의 불안정성이 증대하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와 동시에 여성들은 민주적 권리 차원에서는 비교적 성과를 얻었다. 대부분의 선진국과 많은 반식민지 국가에서 다양한 젠더를 가진 시민 사이의 평등을 주장했다. 이것은 ‘법 앞의 평등’과 ‘일상의 끊임없는 불평등’ 사이에서 극명한 모순을 경험하는 여성들의 열망을 고조시켰다.
이 모순은 미국에서 이주민사회와 연대해 트럼프 행정부의 외국인 혐오 정책에 맞서 시위를 벌인 국제적 여성운동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성운동이 임신중지권을 위해 투쟁 중이며, 스페인에서는 국가가 조장하는 여성 폭력에 맞선 거대한 대중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은 최근 여성운동이 조직한 대중 행동의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이 새로운 물결은 ‘여성 파업’과 ‘우리 삶이 아무 가치가 없다면 우리 없이 생산해 보라’와 같은 구호를 통해 노동자 운동의 언어와 형태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21세기 노동자계급의 성장하는 계급의식(다만 여성의 얼굴을 한)을 예고하는 것일까? 새롭게 여성화된 노동자계급은 아직 국제여성운동의 작은 분파에 불과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여성 노동자 대중을 조직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인가? 우리는 그 과정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으며, 이를 앞당기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새로운 여성운동의 성과와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이 1970년대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나타난다. 따라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관계, 그리고 여성이 압도적으로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에서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간 오래된 논쟁을 갱신해야 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대한 이 논쟁은 다시 활기를 띠면서 보걸의 대표 저작이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99%를 위한 페미니즘’을 건설하려는 미국 학자들과 활동가들에 의해서 말이다. 보걸은 이렇게 지적했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은 두 가지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채 여성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우선 자본주의사회의 틀 안으로 제한된 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을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 계급투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경제적 사안으로만 보는 관점에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이 종속돼서는 안 된다.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여성해방에 헌신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정치권력을 향한 장기간의 페미니즘 투쟁과 사회변혁을 연결할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제주의와 사회주의를 내건 페미니즘 단체 빵과장미에 우리 활동이 반영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임금의 가부장제》(이 책에는 새로운 논쟁에 대해 그가 쓴 최신 글이 포함돼 있다)라는 스페인어 문집의 분석에 착수했다. 이 기사는 그 논쟁의 모든 측면을 다루려는 시도가 아니라 첫 번째 기고가 될 것이다.
가치 있는 노동과 노동의 가치
페데리치는 생산적 노동을 교환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본 마르크스의 정의에서 ‘남성적’ 편견을 발견한다. 그는 이 정의가 대부분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결여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재생산 노동은 자본주의에서 유일하게 진정 유용한 것으로 취급되는 임금노동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적으로 ‘저평가’된 노동이다. 페데리치는 이렇게 썼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 과정에서 농민들이 토지에서 분리됐을 뿐만 아니라, 생산 과정(시장을 위한 생산, 상품 생산)이 재생산 과정(노동력의 생산)에서 분리됐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생산과 재생산은 물리적으로 분리됐으며, 이를 서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수행하기 시작했다. 생산은 주로 남성이, 재생산은 주로 여성이 수행했다. 생산에는 임금이 지급됐지만, 재생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자본론》에서 ‘생산적’ 또는 ‘가치’라는 표현은 도덕적 가치판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어떤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노동이 쓸모없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사실 마르크스는 무역과 금융의 비생산적인, 즉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속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자본 순환이 필수적이지만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따라서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누구도 《자본론》의 저자가 자본주의에서 무역과 금융(이들 부문은 가사노동과 달리 확실히 엄청난 수익을 창출한다)의 필수 역할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을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확실히 독창적인 것으로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분석에 기초한다.
“생산적 노동이란 노동의 특정 내용, 또는 그것이 드러낸 특정한 유용성 또는 특정한 사용가치와는 그 자체로 전혀 무관한 노동의 질을 뜻한다. 따라서 동일한 내용의 노동은 생산적 노동일 수도, 비생산적 노동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재생산 노동의 특징을 특별히 다루지 않았지만 “그 외형적 분리를 넘어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필수적인 연결고리를 확립”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생산, 순환, 경제적인 자본 재생산으로 구성된 자본주의 경제의 범주를 훨씬 폭넓은 사회적 물질대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 사회적 물질대사는 사회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이것은 오로지 시장에만 주목하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외면하는 주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방식에서 가사노동이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가사노동은 교환가치는 되지 못하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사노동은 자신이 수행되는 바로 그 사적 영역 안에서 ‘생산적 소비’로 행해진다. 이 과정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인 티티 바타차리야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인간 노동을 ‘모든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전제’로 본다.
“자본주의는 (…) 시장을 위한 생산적 노동만을 정당한 ‘노동’의 유일한 형태로 인정한다. 반면에 노동력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 계속되는 엄청난 양의 가족과 공동체의 노동, 더 구체적으로는 여기에 투입되는 여성의 노동력은 당연하다는 듯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무급 재생산 노동으로 추방했는데, 오늘날에는 여성 대다수에게 더 무겁게 재생산 노동의 짐을 지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이뤄지는 이 무급 노동에 의존한다. 비록 이 활동이 교환가치를 창조하지는 않기 때문에, 즉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기 때문에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재생산 노동은 꼭 필요하지만, 가치나 잉여가치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본의 논리로는 비생산적 노동이다.
재생산 노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 꼭 잉여가치를 창출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반면 어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재생산 노동이 노동력 상품을 ‘생산’한다면 생산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억압은 여성이 경제적 보상 없이 개별 가정 내에서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을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다니엘 벤사이드는 이렇게 지적한다.
“시장에서 실제로 자본의 지배를 받는 노동과 사적 행위를 측정하는 각각의 기준을 비교하기란, 예컨대 부엌일과 호텔 노동을 테일러주의 식으로 계량화하기란 어렵다. 측정 수단은 동의하기 힘든 자의적 선택에 달려 있다. 즉 어떤 사람이 가사활동을 하는 기간에 노동시장에서 일했다면 벌 수 있었던 소득이 얼마인지, 시장에서 동일한 서비스를 받기 위해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시장에서의 구입 가격)를 계산에 포함시킨다.”
지난 몇십 년간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논쟁에서 우리는 벤사이드의 견해를 지지해왔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고유의 분야 밖으로 무분별하게 전용(轉用)한 것은 문제를 모호하게 했다. 교환가치 및 생산적 노동의 개념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 것이 실증하듯이 말이다.”
가족의 (재)생산
자본주의적 생산적 노동에 대한 정의가 ‘남성적 편견’이라고 독특하게 해석하는 페데리치는 같은 맥락에서 “임금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매일 매세대 노동력을 생산하는 주방과 침실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 발전의 역사가 어떤 모습일지”를 궁금해한다. 이 질문을 던지며 그는 노동력 재생산과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재생산에서 여성 지위에 관한 마르크스(이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더 정확히는 무지)이라고 간주한 것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자본론》에서 노동력이 상품으로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 속성을 파헤치지 않은 건 맞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가부장제 사회의 특징인 성별 노동 분업이 (자본주의의) 시초 축적 시기에 처음 등장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본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가부장제는 이미 존재했다. 자본주의가 한 것은 가부장적 관계를 자기 고유의 논리로 변용하고, 그것을 자신의 필요에 종속시킨 것이었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란 유기적 총체, 즉 교환가치의 창조와 잉여가치의 생산을 중심으로 한 체제를 뜻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독특하고 특별한 상품인) 노동력 착취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본주의는 임금노동의 착취에서 이득을 얻는다. 그러나 이 말은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중심 구조에 포함된 다른 형태의 비임금 노동에서 이득을 얻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바타차리야는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이런 두 번째 순환을 이론화하지 않고, 다만 ‘노동자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자본 재생산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남는다’라고만 간단히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보걸 역시 가족, 즉 자본주의보다 앞서지만 특출한 ‘재생산 단위’인 가족의 역할을 강조한다. 보걸은 노동자계급 가족, 즉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또한 “노동자 가족 형태의 내부 구조와 동학에 최우선으로 몰두하는 대신, 그것이 자본의 재생산과 맺는 구조적 관계로 시야를 돌릴”것을 주장한다.
가족을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의 맥락 속에 두는 것은 과거부터 있었던 이 제도의 역할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그 가족은 자본주의적 기능과 가족 내부 동학이 분리되지 않은 채 성과 나이의 위계가 작동하는 특수한 형태의 노동자계급 가정으로 변형된 것이다.
모순 속에 가능성이 있다
페데리치는 19세기 후반 이후로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계급 가정은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착취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으면서도 여성이 노동의 세계로 들어가는 걸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지적했다. 즉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가부장제의 새로운 형태, 가부장적 위계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개조의 과정”이 진행 중이란 점을 깨닫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임금의 가부장제》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19세기 후반부터 남성 노동자 임금에 가족 임금제가 도입되면서(1860년부터 1910년대까지 임금이 두 배 올랐다), 여성은 작업장에서 추방돼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사노동이 여성의 첫 번째 직업이 됐고,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하게 됐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갈수록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노동자계급 가정을 창조한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을 좀 더 생산성 높고 다루기 쉬운 집단으로 만들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계급투쟁의 모순적 전개 과정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반(半) 음모론적인 관점에 따르면, 지배계급은 착취의 조건뿐만 아니라 아무런 장애·저항·모순 없이 노동자계급을 재생산할 수 있는 조건도 강제할 무한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페데리치가 기술한 변화는 남성 가장과 그의 월급에 의존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정주부로 상징되는 핵가족의 성립 부분에서 정점을 찍는다. 페데리치에게 이 변화는 다음의 역사적 과정 없이 나타난다. 즉 임금 인상 투쟁, 노동시간 단축 투쟁, 부분적 승리와 패배, 계급 간 힘의 균형이 허용하는 최선의 상태에서 임금노동의 착취를 계속하기 위해 자본가들 역시 할 수밖에 없는 양보 말이다. 이 과정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발생하는 다른 과정과 마찬가지로 모순적이다. 한편으로 여성은 생산적 세계에서 추방되는데, 이는 여성이 오로지 무급 재생산 노동에만 전념하도록 해 노동력 가격을 줄일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것은 착취 가능한 인구, 즉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얻어낼 인구가 감소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노동자계급이 남성·여성·성인·아동을 가리지 않고 착취하는 산업의 탐욕에 맞서 가족관계를 착취로부터 보호한 것은 그들의 생활 조건을 향상하기 위해 자본과 대결한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학교·병원 등과 같은 공공서비스를 대중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노동자의 생활 조건이 개선되고, 재생산 노동의 무거운 부담 일부가 가정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이전됐다. 전 세계에서 노동자 대중이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와 폐지에 저항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에 재정 타격을 주며, 가정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의 필요량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의 형태를 띤 자본주의는 착취를 증대하기 위해 노동조합과 기타 노동자계급 조직을 공격해왔다. 그것은 또한 다음을 통해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기업의 민영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축소, 공교육과 보건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긴축 정책, 대중교통 및 기타 필수 서비스의 요금 인상, 이런 긴축은 노동자 민중의 가정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제국주의에 억압받는 나라들의 외채 문제를 규탄할 때, 우리는 빚을 갚기 위해 취해지는 긴축 정책으로 여성들이 경제적 보상 없이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이 증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본의 공격에 맞선 투쟁은 또한 “‘문명의 몫’을 요구하는 계급의 노력”이기도 하다. ‘임금의 가부장제’에 규율되는 가족이 자본주의적 기능을 취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는 가족이 자본과 노동의 투쟁으로 각인되고 계급투쟁으로 정의되는 모순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 생산은 임금노동을 착취해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 없이 그런 착취도 불가능하다. 민중 대다수를 점차 임금노동자로 전환하면서, 자본은 재생산 과정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낸시 프레이저가 주장하듯이 이것은 다음의 모순을 반영하는 반복적 위기로 이어진다. “(이 모순은) 자본주의 경제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재생산이 동시에 분리되고 연결되는 경계에 있다. 경제 내부도 아니고 가정 내부도 아니며, 자본주의사회의 두 가지 필수 구성요소 사이에 위치한 모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핵심 기능은 페데리치의 주장과 달리 ‘주방과 침실’에서 찾을 수 없다. 비록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따라 만들어지더라도 말이다. 벤사이드의 표현으로는 “임금 결정에서 가사노동의 간접적 통합은, 잉여가치 추출이라는 특정한 의미의 착취관계 대신 개인화된, 때로는 법으로 명시된 의존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관계는 현대의 계급관계보다는 위계적 지배관계에 더 가깝다. 이것은 바타차리야가 ”임금노동 관계가 일상의 무임금 영역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거의 격언처럼 정의한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연결 고리는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이 반자본주의, 더 정확하게는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여성 억압에 맞선 행동 강령 없이는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서는 노동자계급 투쟁도 있을 수 없다. 이 체제에서 여성 억압은 노동력의 무급 재생산을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만든 데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을 향해 나아가기
생산과 재생산의 모순 관계에 대해 논쟁하면서 다음의 중요하고 새로운 발전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세계 임금노동자의 약 40%를 차지한다. 여성 경제활동 인구의 54%가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13억 명이 넘는 이 여성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무급 노동의 부담 역시 지고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수가 자신이 노동시장에서 착취당할 수 있도록, 즉 재생산 노동의 양을 줄이기 위해 자기 임금을 사용해서 유급 가사노동을 이용하고 있겠는가?
세계 차원에서 노동력 구성의 경이로운 변화는 노동자계급 가정에도 급진적 변화를 가져왔다. 전적으로 여성의 임금만으로 유지되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싱글맘이 유지하는 가족은 얼마나 될까? 경제적 보상이 있든 없든, 다른 여성 임금노동자를 위해 가사노동과 돌봄을 수행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처럼 새롭고 복잡한 현실은 경제적 조합주의의 계급 환원론이 설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남성, 특히 백인, 정주민, 이성애자 노동자계급을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성을 가정주부의 고정된 상에서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 제한돼서는 안 된다. 여성의 생활 조건은 최근 수십 년간 계속 변화해왔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이처럼 노동력의 새로운 여성화를 포함하는 유기적 총체로 봐야 한다. 재생산 영역에서 여성 투쟁은 점차 여성화되는 노동자계급 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세계 차원에서 페미니즘의 재등장으로 여성이 힘을 얻은 것은 착취당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또 노동자계급의 가장 억압받는 부분을 통합할 수 없는 남성 노동조합주의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모든 종류의 가부장적 억압에서 여성을 해방할 열망을 가진 페미니스트라면 자본주의가 만든 장애물을 피해갈 수 없다. 무엇보다 명확한 건 오늘날 8명의 남성이 35억 명의 사람(이들 중 70%는 여성이다)이 가진 것만큼의 부(富)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에 고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재생산 노동이 수행되는 조건과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 없이, 성 불평등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8명에 여성 4명이 포함될 수 있도록 싸우자는 건가? 아니면 가장 가난한 사람끼리 성평등을 이루자는 건가?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핵심, 즉 자본 축적이라는 문제를 제쳐두고 여성해방을 이론화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물론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투쟁과 사회적 재생산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투쟁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지배계급이 강제한 분열과 반목에 맞서는 길,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갈라놓은 것을 통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우리는 이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왜냐면 우리 여성은 아마 처음으로 그 과제가 우리, 즉 노동자계급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133-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