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형한테서 편지가 왔다. 몇월 며칠에 신체검사가 있고 신병교육대를 가야한단
다. 시골에 엄마한테 내려가신체검사를 받고 11사단 화랑부대에서 4주간 훈련을
받았고 총도 쏘고 수류탄도던지고 유격훈련도 마쳤다. 학력미달로 산림청(홍천국
유림관리소)에서 28개월 근무를 했고 5,6급 공무원들이 A4용지에 대충 도면을
그리고 준공검사서를 써서 주면 난 컴퓨터로 그대로 작성해 팩스로 북부지방산림
청 춘천국유림관리소로 팩스를 보내는 일을 했고 봄,겨울엔 산불감시원으로 근
무했다. 군복을 입고 출퇴근하면서 엄마와 나의 정들었던 초가집을 농사짓는 친구
를 불러 허물고 다시 짓는 공사를 했다. 기름보일러를 놓았고 전기도 끌어와서 세
탁기도 놓고 방바닥 미장도직접 했다. 튼튼한 스레트로지붕을 덮고 경운기로 강에
서 모래를 퍼와 벽체와 기둥들을 세멘트로 탄탄하게 미장했다. 벽돌을 쌓아 목욕탕
도 만들고 엄마 혼자 계실 때에 찜질도 하시라고 찜질방도 만들었다. 온 몸이 안 아픈데가 없으니 항상 염려
스러워서이다. 원주에서 산불이 나서 삐삐를 보니 3838이 찍혀있었다. (산불산불이란 암호다) 군화를 신
고 택시를 잡아타며 영림소로 향했다. 홍천에서 내 고참 둘과 헬기를 타고 원주 치악산에 도착했다. 이미 많
은 산이 타버렸고 바람이 역방향이다. 근처 군부대와 결합하여 진화선을 긋고 갈퀴
로, 괭이로 낙엽을 1m씩 걷어 흙이 보이도록 긁어낸다. 불이 그 진화선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방독면이 땀과 습
기가 차 앞이 안보이고 숨쉬기도 곤란해 벗어버렸다. 뉴스에도 원주 산불의 심각성
이 보도됐다. 산림청 헬기와군용 헬기가 연신 강에서 물을 퍼와 쏟아붓고 우리는 아직 4월달인 추위에 물벼
락을 맞으며 등짐펌프로 야간 근무를 서면서 불씨를 곡괭이로 파 물을 충분히 적시었다. 산불은 밤에 잡아야 한다. 낮엔 숨어있다가 캄캄할 때에 바람에 불꽃이 나무등성이에서 깜박이기 때문이며 바람이 불어 낙엽에 불이 붙으면 앞산으로 날아가
기 때문이다. 나와 고참들의 얼굴은 숯검둥이가 됐고 5박 6일을 산에서 안 내려오고 라면도 산불에 직접 끓여
먹으며 고생한 기억들이 지금 이순간 뇌리를 스쳐간다.
드디어 집은 완성되었고 엄마는 내 친구에게 연실 고맙단 인사를 하신다. 새집에서 엄마가 조금이나마 편히 지
낼 생각을 하니 맘이 놓였다친구와 둘이 계곡에 빠루와 족대, 비료포대를 들고 겨울개구리를 잡으러 갔다. 큰 바위를 들추니 주먹보다 큰 암개구리와 숫개구리들이 스무마리쯤씩 기어나왔다. 겨울잠 자고 있을 때가 가장깨끗하고 맛있다. 한포대를
잡아와서 엄마랑 친구랑 셋이서 개구리를 화로에 굽고전골을 끓이면서 소주도 한잔씩 했다. 꿀맛이었다. 엄마한테 5백만원이 든 새마을 통장을 하나 장만해 드리고 제대했다. 숲가꾸기 영림단을 모집해서 신청을 했고강릉가서 기계톱안전교육을
이수했다. 숲가꾸기사업에뛰어들어 잣나무, 낙엽송, 활엽수등 가로세로 2m 간격을 두고 간벌을 해야한다.
그래야 너무 촘촘하지 않아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다. 햇빛도 보고 칡넝쿨도 올라타지 않기때문이기도 하다. 목재로써의 가치가 생기고 시내의 아파트 짓는 현장에서 목수들이 쓸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락을 매일 싸가지고 안전화에 아이젠을 차고 미끄러져서 기계톱사고나 나무가 넘어지는 방향을 미리 예측하는 시야가 꼭 필수였다. 겨울에 일이 많다. 아랫동네 아저씨는 대낮부터 술이 취하셔서 비틀거린다. 기계톱 안전사고가 예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전화가아닌 장화를 신은 아저씨는 다른 사람이 "넘어간다!"
소리를 지르며 위험을 알리는데 미처 피하지 못하고 깔리고 말았다. '박씨아저씨'는돌아가셨다. 안전모도 쓰지 않으시고 머리에 정확히 맞고 피범벅이 되었다. 그당시월급은 150만원이었는데, 요즘 시세로 800만원쯤 했다.
난 속으로...'돈이 뭔 소용이냐?' 갑자기 집에 계신 엄마가 보고싶어졌다. 난 숲가꾸기 사업을 8달 하고 다시 서
울로 올라갈 생각을 했다."엄마, 전화기도 놓았으니까 자주 전화할께? 아프지마.."추석 때 내려올게. 엄마..."!
다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