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신경림
출:우리 교육
<북쪽 동무들>
북쪽 동무들이
어찌 지내니?
겨울도 한 발 먼저
찾아 왔겠지.
먹고 입는 걱정들은
하지 않니?
즐겁게 공부하고
잘들 노니?
너희들도 우리가
궁금할 테지.
삼팔선 그놈 땜에
갑갑하구나. -권태응-
<제철소의 풀잎>
제철소의 쇳덩이 옆에
짓밟힌 풀잎들은
겁도 내지 않고
바람에 흔들린다.
쇳덩이가
녹슬고 있는 동안
풀잎들은
조그만 꽃잎들을 매달고
바다로 나아간다.
바다 속에는
눈부신 금화나
굼함이 녹슬고 있다
미역잎이나
불가사리도 산다
제처소의 빈 자리
가금 바닷바람들은
녹때 벗긴
해감내를 나눠먹으며
풀잎 끝에서 잔다.
이슬에 맺혀 있는 금화나
군함 얘기..... (양채영)
<개망초꽃>
묵밭에는 쑥구기가 울었다
화전민이 떠나고
개망초꽃들이 구역구역 피었다
일원짜리 백동전 만한
개망초꽃들이 떼지어 모인 곳엔
개망초꽃 향기가
산맥의 구름보다 일렁거렸다.
슬쓸히 더돌아 간 것이
유월 장마 같기도 하고
죄없는 혼백 같기도 하여서...... (양채영)
경제 논리만 따라 소규모 농촌 학교를 페쇄하는 일은 말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양채영의 바람이다.
<축우지변>
이상국
힘이 든다
소를 몰고 밭을 갈기란
비탈밭 중간 대목 쯤 이르러
다리를 벌리고 오줌을 솰솰 싸면서
소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바뀌면
내가 몰고 너희가 끌리라
그런 날 밤
콩 섞인 여물을 주고 곤히 자는 밖에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불러 나갑니
그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월정리에서>
남들이 모두 신록을 찾아서
남쪽으로 떠날 때
나 홀로 북족으로 길을 잡았다
눈 덮인 산야에는
오랑캐꽃 한 송이 피지 않았고
철종망을 사이에 두고 길 잃은 노루가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그리운 고향은
백설의 산마루 저편이 있었다.
흰 저고리에 감색 치마
애젊은 누이가 탄불을 갈아 넣고
아들을 떠나보낸 늙은 어머니는
동구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민 영)
<무릉 가는 길 1>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해야 한다.
가가운 길이 있고 먼뎃길이 있다.
어디로 가든 처마끝에
등불 달린 주막은 하나지만
가는 사람에 따라서 길은
다른 경관을 보여준다.
보아라 길손이여.
길은 고달프고 골짜기보다 험하다.
눈 덮인 산정에는 안개 속에 벼랑이
어둠이 깔린 숲에서는
성깔 거친 짐승들이 울고 있다.
길은 어느 곳이나 위험 천만
길 잃은 그대여 어디로 가려 하느냐?
그럼에도 나는 권한다.
두 다리에 힘 주고 걸어가라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찾아가라고
길은 두려움 모르는 자를 두려워한다고
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고
...... 헌데, 어디에 있지?
지도에도 없는 꽃밭
무릉
* 삼연이 교훈적으로 보이나 마지막 연에서 어디에 있지? 지도에도 없는 꽃밭/무릉으로 반전시키면서 교훈적인 기술이 오히려 반어였음을 보여주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어머니를 찾아서>
조태일
이승의
진달래꽃
한묶음 꺽어서
저승 앞에 놓았다.
어머님
편안하시죠?
오냐 오냐
편안타 편안타
*삶고 죽음은 이어져 있다.
ㆍ‘오를레앙 시의 불행’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드가가
“사상도 감정도 이렇게 머릿속에 쌓여 있는데 시가 써지지 않는단 말야” 하자
‘목신의 오후’의 시인 말라르메가
“시란 말로 쓰는 것이니까”답했다. 상징주으이 특성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되는 일화다, 상징주의자들이 시에서 얼마나 말을 중시했는가를 말해주며 시인에게 삶조차도 말로 경험, 재구성됨으로써 비로소 뜻을 갖는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울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 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으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함......
<재 한 줌>
조오현
어제, 그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어리는 그 울음도 날려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한 줌 재뿐이네
<못난 사과>
조향미
못나고 흠집 난 사과만 두세 광주리 담아 놓고
그 사과만큼이나 못난 아낙네는 난전에 앉아 있다.
지나가던 못난 지게꾼은 잠시 머뭇거리다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 짜리 한 장 꺼낸다.
파는 장사치도 팔리는 사과도 사는 손님도
모두 똑같이 못나서 실은 아무도 못나지 않았다.
*삶이란 한 곳에 머물 수없어 여기저기 옮기다 보면 한동안은 여기에 없는 거기의 것만 생각나지. 그러다 또 새로 둘러보면 거기서 못 보던 게 여기에선 보인다“고 진술하고 있는 ‘위치’는 이 신의 삶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재미있는 시다.
<30년 전>
서정춘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초로>
서정춘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가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고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장미의 기도>
이해인
피게 하소서
주여
당신이 주신 땅에
가시덤불 헤치며
피 흘리는 당신을
닮게 하소서
태양과 바람
흙과 빗줄기에
고마움 새롭히며
피어나게 하소서
내보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이 되지 않게 하시며
나를 위한 고뇌 속에
성숙하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주여
당신 한 분
믿고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마음 가다듬는
슬기를
깨우치게 하소서
진정
살아 있는 동안은
피흘리게 하소서
죽어서 다시 피는
목숨이게 하소서
<기차를 타요>
이해인
우리 함께
기차를 타요
도시락 대신
사랑 하나 싸들고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서 길어지는
도 하나의 기차가 되어
먼 길을 가요
<풀꽃의 노래>
이해인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시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그 밥집>
안도현
뜨근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중앙시장 그 밥집
어물전 아줌마도 수선집 아저시도 먹고 가는 그 밥집
누구 하집 밥 먹고 난 뒤에는 노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을 그 밥집
<비 그친 뒤>
안도현
담장 밑 텃밭 상추 푸른 냄새가
3층 교실까지 올라온다
딱정벌레같이 엎드려 사는 슬리브 지붕집 빨랫줄에
누군가 눈부시게 기저귀를 내다 넌다
저 아기도 자라면 가방 들고 딸랑딸랑 이리로 걸어올 것이다.
*여름내 쉬는 시간에는 물을 주었고, 애호박이 먹기 좋게 매달렸을 때는 날을 잡아 호박전을 부쳤다. 개나리도 심고, 해바라기도 심었다. 틈이 날 때마다 산 길을 걸었다. 여기서 자연의 리듬을 익히고 시의 리듬을 깨우쳤으리라. 시의 리듬이란 자연스러움이고 자연과의 호흡의 일치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