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 시 55:16-23, 요 6:66-71)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실적을 독촉하는 사업주, 정리해고의 태풍 속에서 어제 신문에 삼성전자 국내판매사업부 마케팅부장(40대)
우리나라의 남성의 사망률이 세계 제1위라고 한다. 아마 여러분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다 아실 줄로 안다. 잘살아보겠다고 무던히도 애를 써오던 40대 남성들의 사망률이 이렇게 높다고 하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굶어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업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이 없다든가, 입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특별한 문제이다. 국제기아기구의 보고에 다르면 세계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1년에 1,3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하루에 3만5천명이, 1분에 24명씩 굶어죽는 꼴이 된다. 이렇듯 양식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해결책은 있다. 양식을 주면 된다. 그러나 40대 남성들의 높은 사망률에 대해서는 어떤 해결책이 있겠나? 우리는 무서운 경쟁시대에 살고 있다. 그 피곤한 일들, 그 피곤해 하는 모습들,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누적된 정신적 피로감을 스트레스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젊은데도 완전히 삭았다. 간신히 걸어다니는 것 같다. 한 여름에 우리 교인들이 일에 시달려서 피곤한 모습보다 더하다. 이렇듯 피곤해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는 통계조차 없다. 40대 절은이들이 계속 쓰러지고 있다. 요즘은 정리해고나 부도가 나서 쓰러지기도 한다.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싸우고 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이 경쟁에 승자는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패자로 남게 된다.
또한 우리는 무서운 정보시대에 살고 잇다. 알아야 산다. 그래서 배우고 또 배운다. 정보를 찾아다닌다. 작은 pc에 많은 내용을 입력시키면 견디지 못하고 본체가 파괴되는 것처럼, 작은 머리 속에 너무 많은 정보를 입력시키다보니 이제는 지쳐서 급기야 터지고 쓰러지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그 많은 정보 속에서 확실한 것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피곤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개혁을 원한다. 때로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이번 김대중 당선자가 더 강하게 밀어부쳤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그러나 보장이 없다. 변화로 인하여 좋은 방향으로 변할지 나쁜 방향으로 변할지 알 수가 없다.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변화를 해야겠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몸도 정신도 영도 그대로 병들어 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강한 스트레스로 우리는 중압감에 빠지게 된다. 억압의 노예가 된다.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 무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상태가 심해지면 성격장애가 생긴다. 흔히 말하는 우울증이니 자폐증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러분, 병이라는 말과 장애라는 말은 다르다. 병은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올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라는 말은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눈병과 소경이 다른 것과 같다. 비록 지금 눈병을 앓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을 수 있다. 몰론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소경은 병이 멎은 상태이다. 이제는 더 기대할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장애이다. 성격장애가 문제이다. 어디까지가 본래의 자기 모습인지 알 수가 없다. 멀쩡한 사람인데 병신이다. 정신적으로 병신인 것이다. 이것을 장애라고 한다. 그래서 자살도 하고, 극단적인 자기 도피에도 빠지게 된다. 우울증에 빠져서 초조해 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하고, 스스로 깊은 절망 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도 한다. 마약을 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로운 줄 알면서 담배를 피워본다. 일시적으로 현실을 망각하기 위하여 발광을 하고, 사치를 해보고, 서슴없이 욕도 해본다. 이 모든 발광이 알고보면 스트레스의 결과이다. 때로는 이 스트레스로 인하여 공격적 행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사회에 대하여 공격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목적없는 반항이요, 이유없는 폭력이다. 완전히 병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더 이상 강건너 불구경일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일이 되고 말았다. 더는 기본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스트레스의 유형을 심리학적으로 몇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불안이다.
위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의식이다. 대상이 없는 걱정이다.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왜 걱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유를 모르는 근심이다. 대상이 있는 근심을 공포라 하고, 대상이 없는 근심을 불안이라 한다.
2. 좌절이다.
이것은 목적지향적인 행동에 대한 실제적인 방해에서 비롯된다. 결과에 대한 불만과 동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런 경우 모든 것을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스트레스이다. 모든 사물은 언제나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뿐 면으로만 보려고 한다.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국 고사에 있는 기인우천(杞人憂天)의 약자이다. 기나라 사람 하나가 나무 밑에 앉아서 큰 걱정을 하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네,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나?’ 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저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입니다.’ 고래로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하늘이 무너지다니요.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걱정, 곧 기우이다. 요즘도 보면 이런 사람이 많다.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꼭 실패할 방향으로, 안될 방향으로만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자기도 괴롭히고, 모처럼 누린 남의 행복에도 시쳇말로 초치고 만다.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겁이 난다.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병이다. 그래서 자기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죄절시키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3. 갈등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목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때에 우리는 갈등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선택의 능력이란 아주 제한적인 것이다. 늘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미련하게 선택하려는 사람이다. 결정적 현실에 댜한 확실한 인정이 없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여기 이미 결혼한 사람이 있다. 결혼식도 끝났고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그런데 할 것 다해 놓고는 ‘아차, 결혼 잘못했구나. 안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후회를 한다. 뿐만아니라 좋은 점은 제쳐놓고 상대의 나쁜 점만 생각하면서 마치 이혼하고 다시 결혼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자신의 운명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가난하건 부하건 현실은 엄연함 현실이다. 우리의 선택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늘 모든 것을 다시 선택하려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선택을 뒤집어놓고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끝이 없다. 이것이 갈등이며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큰 병이다. 선택한 것에 대한 갈등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여기서 인지부조화의 현상이 비롯된다. 무거운 짐이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눌리고 있다. 정신적으로 억압을 받고, 빠져 나올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예전에 소달구지를 몰아본 적이 있나? 소달구지에 소 멍에 매어 보았나? 아마 구경은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소달구지를 갖다 놓고나서 소를 몰고와 달구지를 매려고 할 때에 보라. 소가 약아서 빈 달구지일 때는 잘 매인다. 스스로 다가와서 매인다. 그러나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실어놓고 소를 매려고 하면 무거운 줄을 미리 알고는 매이려 하지 않는다. 얼어맞으면서도 안매이려고 한다. 마침내는 두 사람이나 달라붙어 소를 꼭 붙들고는 간신히 멍에를 씌운다. 멍에를 씌우자마자 주인은 부리나케 목줄을 맨다. 목줄을 고리에 딱 매어놓으면 소는 꼼짝을 못하게 된다. 이제는 멍에를 벗을 수가 없다. 죽는다 해도 멍에를 메고 죽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소는 ‘이랴’ 하면 앞으로 간다. 그 무거운 달구지를 끌고 간다. 여러분, 인생도 그렇다. 이제는 벗을 길이 없다. 그대로 짐을 지고 죽어야 한다. 문제는 얼마가지 끌고갈 수 있느냐 뿐이다. 어디서 죽느냐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라. 다윗이 자신이 진 무거운 짐과 고생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책임이 무거운 사람이다. 왕된 자로서 국방과 안보를 책임져야 하고 경제를 챡임져야 하고, 심지어는 백성의 도덕성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 하나에 의해서 나라가 잘되기도 하고 백성이 복을 받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저주를 받기도 한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 앞에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책임까지 졌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가 쓴 시편이나 그밖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다윗은 때때로 왕의 지위를 내놓고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무거운 짐을 지고 40년 동안이나 고생할 게 무엇인가? 어쨌든 다윗은 왕으로써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또한 다윗에게는 죄책감이 있었다. 그는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의로운 일도 많았지만 불의한 일도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밧세바 사건으로,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댓가로 아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 나아가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욕보였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을 추방했다. 다윗 가까이 있던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힘을 모아서 다윗에게 대항했다. 아직까지 다윗은 남은 병사를 모아서 얼마든지 아들 압살롬을 죽일 수도, 몰아낼 수도 있었지만 이 역시 하나님 앞에 징계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에게 대항하지 아니하고 도망만 다녔다. 삼하 15:30절에 보면 다윗이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도망을 다녔다고 말씀하고 있다. 울면서 맨발로 도망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렇듯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광야를 헤매면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
나아가 다윗은 배반당하는 사람이었다. 자기의 밑에 있던 충신들이 하나둘 압살롬 편에 붙어버린다. 배반당하는 아픔이 그렇게 쓰릴 수가 없다. 충신 중의 충신인 아히도벨마저도 압살롬에게 붙어서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닌다. 이런 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어느날 다윗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에 충신 하나가 병문안을 왔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란 걱정을 해주고는 돌아갔다. 그 신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중에 소문이 들려온다. 그 소문에 의하면 다윗에게 그 신하가 인사하러 왔던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었다는 것이다. 그 신하가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하는 말이 ‘죽어가는데 뭐 손댈 것 있습니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하더란다. 이런 말이 들려올 때에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나?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하여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어서 말씀한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인가? 과거 자신의 충신이었던 많은 사람들의 억압 속에서 다윗은 무진 고생을 한다.
그러나 다윗은 해결의 길을 얻었기에 다시 소망을 찾는다. 먼저 다윗은 기도한다. ‘오직 하나님 전에 나아갈 때에만 그 결국을 알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만난다.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다. 장수의 비결 가운데 말을 적게하고, 적게 들을수록 오래 산다는 것이 있다. 통계학으로 보아도 듣지 못하는 자, 말 못하는 자가 오래 산다. 특별히 은둔자나 수도사 같은 분들은 경제적으로나 위생적으로 더 나은 속세 사람들보다 오히려 오래 산다. 오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도시 사람들보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 왜냐면 아주 단순하게 아무 생각없이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마음 하나만 있다. 걱정 근심이 없다.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이다. 여러분, 요즘 사람들은 누구할 것 없이 많이 돌아다니고 구경 많이 하려고 하는데 그게 병이다. 적게 듣고 적게 말하라. 대신 하나님과 이야기하라. 사람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대신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라.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다. 이제 다윗은 기도하면서 과거에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라고 고백한다. 그렇다, 그 많은 전쟁과 사건 속에서 건져주시고, 그 많은 죄를 사해주시고, 그 많은 고통 속에서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게 될 때에 비로소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처음 시작될 무렵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나와서 선교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자동차가 거의 없었다. 그 미국인 선교사는 선교를 보다 빨리, 많이 하기 위해서 지프차를 타고 다녔다. 어느 날엔가 지프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다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를 보았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그 모습이 너무 안스러워서 차를 세우고 여기에 타시라고 권했다. 그 할머니, 몇 번을 사양하다가 고맙다며 올라탔다. 얼마쯤 운전을 하고 가다보니 그 할머니가 보따리를 그냥 머리에 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선교사가 ‘할머니, 무거우실텐데 그 짐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 대답이 재미있다. ‘내가 자동차에 탄 것만도 죄송스러운데 어떻게 보따리까지 올려태워유!’ 여러분, 생각해 보라. 벌써 몸은 자동차 안에 있다. 그러니 몸 위에 있는 것도 자동차 안에 있는 것이지 않은가? 벌써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러니 우리의 근심 걱정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홀로 웅크리고 있나?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생명을 주께 맡겼듯이 내 근심도, 내 걱정도, 내 의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아니 이미 맡겨져 있다. 다윗은 이를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 존재와 본래성을 깨닫게 된다. 그 과거의 삶은 ‘나’로서 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도 바울은 늘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한탄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새로운 비결을 깨닫는다. 보라. 사도 바울은 롬 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나?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생각했다. ‘내 의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당신의 필요에 의하여 들리어 쓰임받았을 뿐’이라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스스로를 향하여 선포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라고 외치고 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다윗은 ‘내 짐’이러고 하지 않고 ‘네 짐’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이것은 곧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요,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요,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 4:6-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내 마음을 내가 지킬 수 없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평안할 수 있고,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들 모두가 다 짐을 하나님게 맡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