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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 시 141:1-10, 고전 1:10-17
지난 주에 대통령과 3당 대표가 영수회담을 하므로 안기부법 노동법은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한국노총과 민노총은 개악된 법안이 발표될 때까지 계속하여 부분적으로 파업과 농성을 하기로 하였다. 국회에서 다시 심의하기로 했는데 개악된 법은 완전 무효로 하고 새롭게 노동자를 위한 법으로 개정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서울대 입학시헙 발표가 있었다. 수능 320점 이상인 고득점 수험생들이 2백여명 떨어졌다 한다. 서울대 합격자의 대부분이 괴외공부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의 경우 과외비가 보통 남자는 5-60만원대, 여자는 3-40만원대 였다고 한다. 서울의 다른 대학에서는 수석합격자를 발표하지 않기로 한 학교도 있다. 수석합격자가 서울대로 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전북대는 300점 이상이 80여명 떨어짐. 또한 등록금은 보통 6-9%안에서 결정된 것 같다. 학부모들의 부담이 클 것으로 보여진다. 부산에서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교도소를 탈옥한 무기수 이야기가 아니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며느리가 반평 정도 되는 연탄 광에다 가두어 놓고 굶겨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아들과 손자들도 모른체 했다는 것이다. 사망신고와 화장까지 다해서 장례를 마쳤는데 동네 사람들이 신고해서 사건이 드러난 경우이다. 이런 비정한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기독교인들이 정신 차리고 일어나서 인간회복운동을 벌여야겠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윤리를 바로 세워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 주민 8명 망명, 충남 태안 격렬비열도, 안기부 사건 개입 작품. 선박이 격렬비열도까지 오는 동안 해군과 해경이 몰랐다면 동해안처럼 서해안도 경비망이 구멍뚫린 것. 이날 강풍으로 소형 선박은 항해 불가능, 4시30분쯤 해경구출, 안기부-3시 50분 언론 보도자료 배포, 여당에 불리한 여론을 돌리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는 발칸반도의 남쪽 펠로폰네수스 반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헬라의 광채요 장식이라 불리던 이 도시는 로마에 항거하다가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뭄비우스 장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그후 약 100년 동안 페허로 방치되었다가 기원전 46년경에 시저에 의하여 재건된 도시이다. 고린도는 바울 당시 60만 인구(자유인 20만, 노예 40만)를 가진 대도시였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선원들이 들끓었고 매춘과 향락이 성행했다. 또한 각처에서 몰려든 이주민들 중에는 자기들이 섬기던 신상을 가지고 왔기에 고린도는 우상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곧 이시스, 세라피스, 브루기아의 여신 마그나마터, 수리아의 신 아스타르테, 에베소의 아데미, 그리고 헬리오스와 아프로디테 등 많은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수천명의 직업적인 창녀들이 사랑과 정욕의 신인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제사장 노릇을 했다고 하니 그들의 방탕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종교적 타락과 부패의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신학자 벵겔의 말처럼 기쁘고 놀라운 일이다. 고린도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때는 기원 50년 경으로 본다.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면서 복음전파에 전력하여 많은 신자들을 얻으므로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후 바울은 고린도교회 목회를 아볼로에게 맡기고 에베소로 떠났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다음 에베소에 가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고린또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그곳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소식은 바울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고린도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로 분쟁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1. 교린도교회의 문제들
고린도교회가 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바울 사도의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1-4장의 파당분쟁, 5장의 음행에 대한 문제, 6장의 소송문제, 7장의 결혼과 이혼문제, 8장의 우상제물문제, 11장의 성찬문제, 12-14장의 영적 은사문제, 15장의 부활문제 등에 대한 논란과 시비로 교회는 동요가 끊임없었으며, 그중에도 교회 내의 파당분쟁은 본문에서 다룰 만큼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고린도교회가 여러 분파로 분열되어 분쟁을 하고 있다는 불쾌한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졌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창립에 대하여 간직하고 있던 기쁨과 감격이 컸다면 컸던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슬픔과 실망이 컸을 것으리고 짐작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걸었던 기대와 신뢰감이 컸다면 컸던 만큼 패배감과 배신감을, 그가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애정이 컸다면 컸던 만큼 노여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가 바로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이고 오늘 본문은 그 첫부분이다.
2. 교회 내의 분쟁
교회 안에 분쟁(싸움)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요즘 세계에서는 어디서나 교회 안에서 싸움이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이살할 것도 없고, 놀라운 일도 아닌 것 같다. 면역이 생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기독교인 당사자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형편이다. 교회 밖 세상에서도 교회란 곳에서 싸움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 안에서 싸움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교회란 다 그렇고 그렇다는 말이 들린다는 것은 물론 전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가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의 아버지가 애들을 보고 ‘야 이놈들아, 여기가 어디 교회인줄 아니? 왜 싸우는거야?’라고 야단을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랑의 공동체인교회, 사랑과 화해와 용서를 가장 많이 말하는 교회에서 싸움이 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하긴 초대교회인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싸움이 있었으니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다. 고린도교회가 왜 싸웠나? 어떤 문제로 그들은 싸웠나? 대개의 경우 대수롭지 않은 문제, 또 경우에 따라 지저분한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많고, 또 때로는 신앙의 노선을 둘러싸고 싸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싸움은 어떻게 보면 인맥간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크게 네파로 나누어져서 싸우고 있었다.
1) 바울을 추종하는 자들의 모임
바울파는 실상 이방인파라고 본 사람이 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 교회를 세웠던 바울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없다는 유대교의 율법을 배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특히 율법의 옛 시대는 끝이 나고 은총의 새시대가 왔다고 역설한 사람이었다. 이에 고린도교인들 중에 비유댜대들인 이들 이방인들이 율법의 철폐와 함께 바울이 설교했던 자유의 복음을 내세워 율법은 물론 모든 도덕적, 윤리적 규범도 부정하고서 기독교인들에게 어울리기조차 어려운 방종적인 생활을 했던 것 같다.
2)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학문이 높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를 따르는 자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학자이고 지도자였다. 본래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면 당시 세계에서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이 아볼로는 학문이 뛰어나고 구약성서에 아주 능통하며 달변인 사람으로 알려진 지도자였다. 기독교를 믿고 받아들였던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지식, 학문,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자연히 기독교 신앙을 철학화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런데 이 아볼로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고 유명한 신학자요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사용한 파가 생겨난 것 같다. 그러니까 아볼로당이란 기독교 신앙을 철학과 지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인간의 지혜로운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의 주장과 관련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3) 게바를 따르는 자들
이 파는 율법주의파라고 할 수 있다. 게바는 베드로의 별명으로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베드로가 고린도에 왔었느냐는 사실은 의문스럽지만,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적지 않게 있엇다. 이들 유대인 고린도 교인들이 유대적 기독교의 대표적 인물인 베드로를 내세워서 율법적 기독교 신앙의 노선을 주장하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율법보다 은총을 강조하는 바울과는 달리 율법을 강조했던 것 같다.
4) 자칭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일컫는 자들
교회 안에서 바울이나 베드로나 아볼로라는 인간 지도자를 내세우면서 파당을 짓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 어떤 인간들을 내세우거나 그들에게 속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또는 우리만이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진짜 기독교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한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속한듯이 행동하는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이 네 사람이 서로 싸웠거나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또한 이들이 어떤 모양으로도 이들 고린도 교인들의 싸움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개입되지 않았고, 또 그럴 의사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인간적인 선호도를 따라 파당을 이루었으며 그들은 각기 자기 파에서 교회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헐뜯으며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서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을 보게 한다. 우리 한국교회의 초창기 교단은 선교사들의 배경에 따라 교파가 형성되었다. 11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한 교파 안에서도 수십개의 교단으로 분열되어 대내외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 교회 안에서도 분쟁의 소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교회도 인간이 모인 곳이기에 인간을 앞세우면 항상 분쟁의 소리가 그치지 않게 된다. 바울 사도는 본문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책망하고 있다. 저는 신앙의 노선이 다른 사람들이 한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는 이것이 교회의 건강을 위해서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끼리 어떻게 조화와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느냐라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엡 4:5-6절상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우리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먼저 찾아 그뜻대로 순종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만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이 십자가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심정으로 살아갈 때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가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위에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 (1997-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