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의 발견 / 복향옥
광양문화도시센터에서 일하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봄 행사를 준비하는 데 작가가 필요하단다. 내 성향을 잘 아는 그녀인지라 알아서 낙점했겠지 싶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삭 승낙했다. 그러다 팀 회의에 참석한 다음에야 사정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다. 작가도 작가지만 사회자가 필요하다며, 나를 쳐다봤다. 사업비가 넉넉지 않아 제대로 된 진행자 구하기가 어려운 탓에 고민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랬는데, 상사가 나를 추천하더란다. 몇 년 전, 그림책 관련 마을공동체 사업 발표장에서 봤던 내가 인상적이었다나. 진행자로서 경험은 없지만, 큰 공연이 아니어서 나 정도의 수다 성향이면 괜찮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싱어송 라이터 세 명을 초대해 노래와 연주와 비건 이야기로 한 시간 40분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보다, 녹화된 영상이 국가유산청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면 좀 실수를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쨌든 난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안 그래도 주변에는 할 일이 널렸는데 덜컥 새 일을 하겠다고 받았으니 내가 생각해도 갑갑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게 아니라 흥미롭게 다가왔다. 갑자기 삼십몇 년 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에 출연자들의 자료를 모으고, 전화로 인터뷰하고, 이야기 주제를 고민하고 노래와 순서를 정하고 하는 일이, 더구나 지금은 예전처럼 혼자인 것도 아니고 다만 ‘방송작가’로서의 일만 하던 옛날이 아닌데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자투리 시간을 아껴 일하는 게 재밌었다. 인터넷과 신문과 잡지 등등 그들의 기사가 있으면 다 읽었다. 자료로 남기고 싶은 건 프린트해서 묶어 두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서 큐시트를 몇 번 수정하고, 대본도 여러 차례 고쳤다. 잠을 설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원고를 만져야 할지 몰라 노트북이며 자료 든 가방이며 읽어야 할 책 보따리들까지 들고 낑낑거리던 며칠이 행복했다. 책가방 둘러메고 다니며 공부하던 옛날이 생각나 가끔은 희열에 차기도 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오프닝 인사를 하는 2,3분 사이에 입술이 다 말라버려 잠깐 했다. 아찔하기까지 했다. 원고대로라면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얼른 출연자들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질문했다. 가끔 농담도 하고, 대본에 없는 질문도 하면서 그야말로 화기애애하게 공연을 마쳤다. 중간쯤에서는 옛날 얘기를 하는 여유도 부렸다.
“가수 김현철 씨, 혹시 아시나요? 현철 씨 말구요. 지금은 50대 중반의 중후한 아저씨가 됐는데요, 그가 스물몇 살 시절 처음 ‘김현철의 디스크 쇼’를 진행할 때였어요. 첫날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다음날부터 "제발 원고를 읽지 마라, 그대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 요점만 외워서 말하는 것처럼 해라" 하면서 툴툴거렸던 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지는 거 있죠. 저는 지금, 제가 써놓고도 읽고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김현철 씨 만나면, 새삼스럽지만 사과해야겠어요. 그러면서 이 일로 깨달은 게 있는데요, ‘아,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다’는 거였어요.”
공연을 많이 기획했던 후배의 조언대로 평소보다 낮고 느리게 말하니 실수를 덜 하게 되는 게 느껴졌다. 좋은 경험이었다. 후배는, 진짜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좋았다며 칭찬했다.
처음엔 괜한 욕심을 부렸나 후회도 되고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에 불만이 있기도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데서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 나를 그 자리에 세워준 광양문화도시센터가 고맙다.
첫댓글 대단하세요. 우리 봉강면의 재주꾼이시네요.
하하하. 선생님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실수한 얘긴 빼고 자랑만 늘어놨어요. 부끄럽습니다.
평소보다 낮고 느리게, 대단 하십니다. 멋진 재능 선생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일에 욕심 냈어요.
와, 찾아봐야겠어요. 전 가까이 살면서도 왜 몰랐을까요?
그런 자리였으면 초대 좀 하시지는. 아쉽습니다.
부끄러워서요. 하하
대단하십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차분하고 예쁜 목소리로 멋지게 해내셨을 거 같아요. 참석 못 해 아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