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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칠십이인은 고려의 유신인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이곳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며, 또 일설에는 동두문동과 서두문동이 있어서 동두문동에는 고려의 무신 48인이 은거하였는데 산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후 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서부터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문불출'이란 말 자체가 원래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며 같은 표현은 조선 시대 이전의 기록에도 이미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두문불출이라는 데서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새 임금 태조는 그들을 미워해서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선비의 학업은 닦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후에 유명해진 개성상인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300년 이래로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명단(휘諱)
호와 이름, 간략한 인물 소개를 함께 적었다. 이들은 이성계의 협박으로 출가한 황희를 빼고는 1397년 이성계가 불을 지르자 안 나오고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당했다고 전해진다.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 농은유집에 갑골문으로 된 천부경문을 남겼다.
방촌(厖村) 황희(黃喜) : 뒷날 두문동에서 나가 출사. 세종 대에 영의정을 지냄.
유충유효난 有忠有孝難 충이 있으면 효가 있기 어렵고
유효유충난 有孝有忠難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이자기운득 二者旣云得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가졌었건만
황우살신난 況又殺身難 하물며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 상촌공 김자수의 자진을 애도하는 영의정 황희의 만사 -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 좌정언. 하빈이씨 시조 사열부원군(沙熱府院君) 시중 이거(李琚)의 손자. 저서 이우당실기(二憂堂實紀)가 규장각 도서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송은(松隱) 박익(朴翊) : 귀은제(歸隱第)에 은거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 정몽주(鄭夢周)의 제자.
김사렴(金士廉) :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평장사(平章事) 김방경(金方慶)의 손자이다. 죽음에 임하여 “고려의 구신이 고려와 함께 순국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죽어 선왕과 선인들을 대하리오. 내가 죽거든 심산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평무덤으로 하라”고 유언하였다.
송은(松隱) 구홍(具鴻) : 창왕때 우정승 역임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 두문동에 든 다음해 평산(平山)의 다의현(多義峴)에 옮겨 집을 ‘다의당’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 : 조선 태조에게서 두문동에 들었다는 이유로 유배형 중의 본향안치(本鄕安置)의 벌을 받았다. 뒤에 풀려나자 다시 두문동에 들었다.
양대(養大) 임선미(林先味) : 양대(養大)는 호가 아닌 자이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 : 정도전(鄭道傳)과 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 첩의 후손)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록한 까닭에 그들에게서 원한을 사서 가족과 일당 8십여 명과 함께 암살당했다.
한천자(漢川子) 신아(申雅) : 딸(창왕의 정비)의 행실과 지위 탓에 모함을 자주 받았다.
이석지(李釋之)
박심(朴諶)
이맹운(李孟芸)
조의생(曺義生)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 두문동에서 나온 후 남원 두동방에 두곡(杜谷)을 지어 들어갔다.
남원시 송동면 두곡리에 형 두계공 휘 김충유가 자리잡고, 동생 수은공 휘 김충한이 아랫마을 영촌에 자리잡아 경주김씨 두계공파와 수은공파의 본산을 이루고 있다.
김주(金澍)
이존오(李存吾)
정추(鄭樞)
최양(崔瀁)
길재(吉再)
남을진(南乙珍)
상촌 김자수의 효성의 영장(靈場)으로 이름이 높아진 묘막을 위문한 친구 남을진(南乙珍)은
다음과 같이 시한수를 옲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견거려자(來見居廬子) 묘막 사는 자네를 찾아보니 엎드려 있는
고전비례명(苦前飛禮明) 거적자리 앞엔 제사 범절이 분명하네
순생성의절(筍生誠意切) 자네 정성으로 땅에선 곧은 대순이 솟아 있고
백고효심경(柏苦孝心傾) 송백나무 가지들도 효성에 귀 기울여 꾸부러져 있네
원천석(元天錫)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고.
굽을 절개라면 눈 속에 푸를쏘냐.
아마도 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 원천석(元天錫) -
맹유(孟裕)
도동명(陶東明)
도응(都膺)
이사지(李思之)
김자수(金自粹)
공의 휘는 자수요 ․ 자는 순중 ․ 호는 상촌이니 신라국성인 경주김씨이시다.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를 지낸 인관공은 8대조이시고 고조는 종성(예빈성승) 증조는 예(합문지후)이며 조부는 영백(삼사부사)이다. 공은 부친 오(합문부사 지제고)와 손홍량(판삼사)의 따님인 모친사이에 2남4녀 중 막내로 충정왕 3년(1351년)에 태어났다.
공은 19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한지 일 년도 못되어 편모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하 니 국왕께서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정려를 명하시고 화공에게 「출거여도」를 그리게 하여 이를 「동국삼강행실록」에 기록하여 귀감으로 삼게 했다. 공민왕 2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를 제수 받았고 우왕 원년에 정언에 올랐는데 이때 경상도 도순문사 조민수에 대한 전공축하 회교의 칙명을 쓰라는 왕명을 거부하여 전라도 돌산수로 유배되었다가 일 년 만에 풀려나 전교부령 ․ 판사재시사 ․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공양왕대에 성균대사성 겸 세자좌보덕 ․ 판전교시사 ․ 좌우산기상시를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공은 민생안전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주의와 성리학의 정명사상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고자 직언으로 왕을 보필했고 수차 상소를 올려 당면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려 말 정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했는데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사헌을 내려 불렀으나 고사했고 태종이 또다시 형조판서 부임을 강요하자 탄식하여 이르기를 「내 평생 충효를 기약하며 살아왔는데 만약 몸을 굽힌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를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 하시고 아들과 길을 떠나 경기도 광주 추령에 이르러 「평생토록 지킨 충효 ․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 하랴만 ․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라는 절명사를 짓고 「내가 죽거든 이곳에 장례지내고 묘갈을 세우지 말라」 유명하신 후 자진하시니 태종 13년(1413년) 11월 14일 향년 65세였다.
장안세(張安世)
국유(鞠襦)
정광(程廣)
한철충(韓哲沖)
나천단(羅天瑞)
조열(趙悅)
김약시(金若時)
정온(鄭溫)
맹희도(孟希道)
신덕(申德)
서견(徐甄)
최문한(崔文漢)
허징(許徵)
이사경(李思敬)
성박(成溥)
이명성(李明誠)
이색(李穡)
이고(李皐)
정지(鄭地)
하자종(河自宗)
이양중(李養中)
김진양(金震陽)
안성(安省)
김약항(金若恒)
배상지(裵尙志)
이행(李行)
변숙(邊肅)
김선치(金先致)
이연(李涓)
이종학(李種學)
이양소(李陽昭)
민유(閔愉)
문익점(文益漸)
상촌공의 여묘(廬墓)살이를 생각하며 지은 문익점(文益漸)선생의 시
시견안동거악자 始見安東居堊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부빙구리자회회 剖氷求鯉自恢恢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자득(自得)해 하더구만
순생설리성심후 筍生雪裏誠心厚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심이 지극함인데
치하고전효열개 雉下苦前孝烈開 거적자리 앞에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임탁(林卓)
조희직(曺希直)
송인(宋寅)
곽추(郭樞)
조철(趙鐵)
윤충보(尹忠輔)
유순(柳洵)
채왕택(蔡王澤)
송교(宋皎)
최칠석(崔七夕)
김자진(金自進)
김승길(金承吉)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조유(趙瑜)
김제(金濟)
전조생(田祖生)
전귀생(田貴生)
오상덕(吳尙德)(황희의 자형으로 호는 두암공(杜庵公), 소부시소감 역임, 출처: 두산백과, 함양오씨 족보, 황희의 풍계서원 전북문화재자료)
상촌(桑村)선생 김자수(金自粹)
상촌선생 와비[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상촌선생의 사상(思想)
(문학박사 신천식 한국 교육사연구 한국 민족사(공저)에서 발췌)
상촌선생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우뚝한 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당시 그와 교유한 선, 후배의 석학들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고, 또한 앞으로 유도(儒道)를 일으킬 거목(巨木)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그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하였고, 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상제(喪制)를 치루었다.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은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조선에는 사환(仕宦)하지 않았고, 태종의 부름을 거부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 23년(1374)의 과거에서 장원(壯元)으로 합격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이미 그 기반은 닦여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받은 감화가 컸을 것이다.
1) 의리론(義理論)
상촌선생은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정명사상(正命思想)과 의리(義理)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관로(官路)생활에서도 일관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행동강령이기도 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대의명분과 의리의 실천을 평생의 지침으로 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서 조선에 사환(仕宦)하지 않았다. 또 태종의 부름에 대하여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세상을 마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2) 벽이론(闢異論)
고려 후기에 와서 안향(安珦),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성리학이 보급 발전되었고, 또 불교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수 백년동안 인습에 젖어 왔던 당시 사회에서 비록 성리학이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었다.
상촌이 성균대사성으로 불교와 무속(巫俗)에 대한 배척, 왕실과 관리들의 부조리한 기강, 윤리의 쇄신을 강조하며 개혁적 시무론을 편 것 등은 모두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사상과 유교윤리에 그 기반을 둔 것이었다. 유교의 경우, 원시유학이 주로 효제충신(孝弟忠信) 등 윤리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송대의 성리학은 원시유학의 심성도덕(心性道德)의 문제를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한층 강고하게 제고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보다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에서 탐구하는 이른바 궁리진성(窮理眞性)의 학문이었기 때문에, 자연 종교와 의례면에서 불교와 양립할 수 없는 상충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고려 말 사회에서 불교는 지도이념이나 윤리면에서 많은 폐해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성리학을 체득한 일군의 신진사류들이 성리학사상과 유교적 통치윤리에 의해 새로운 고려로 소생시키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은 물론 학문, 문화, 풍속 등 각 분야에 걸쳐 ‘혁구종신(革舊從新)’의 일대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상촌은 고려 말 성리학이 도입된 후 그 학문과 정신을 체득한 제3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관료로서 기우는 국운을 유교적 개혁으로서 붙들어 되돌리고 바로 세우기 위해 온건개혁론자로서의 온갖 경륜을 건의하는 등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성계, 정도전 등 급진적인 혁명노선의 역성혁명파들이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시점에서, 1392년(공양왕 4) 4월 온건개혁론자로서 절의파 신진사류의 지도자 포은이 격살(擊殺)되고, 그 해 6월 불안한 정국 속에서도 41세의 상촌은 형조판서에 임명되어 허물어지는 고려의 사직을 위해 최후까지 헌신하게 되었다.
상촌선생 순절비각과 절명시비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상촌선생의 여말선초 행적과 절의(節義)정신
(최홍규박사 ‘桑村 金自粹의 忠孝思想과 그 脈'에서 발췌)
상촌은 19세 때 성균관에 수학한 이래 이색,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업하고 관료생활을 해오는 동안에도 그들과 학문적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거의 같이하면서 계속 사우(師友)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문익점, 남을진, 길재, 조계생(趙啓生), 김진양(金震陽, 호 草廬, ?~1392), 이문화(李文和, 호 烏川, 1358~1414) 등 주로 절의파 인물들과의 교우가 특히 깊었다.
그는 학문적, 정치적으로 이색,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의 노선을 따라 이성계, 정도전, 하윤(河崙, 호 浩亭, 1347~1416), 조준(趙浚, 호, 齋, 1346~1405) 등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급진역성혁명파, 곧 개국파와는 노선을 달리하고, 정면으로 대치하는 입장에 있었다. 성리학이 갖고 있는 의리지학으로서의 본질적인 특성과 이념, 그리고 정치, 사회윤리의 척도로서 주자학적 예론의 준법(遵法)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상촌은 고려왕조에 대해 시종일관 의리를 지키는 대표적인 절의파의 지도적 인물로서 활동하였다.
1392년(공양왕 4) 7월 급진 역성혁명파 세력은 신흥 무장세력인 이성계를 추대,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때 상촌을 비롯한 이른바 두문동(杜門洞) 72현으로 불리는 일군의 온건개혁파 세력들은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에 반대, ‘애국충군(愛國忠君)’,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며 새로 건국된 조선왕조로부터 등을 돌렸다. 여말선초에 현실을 우선시하는 급진적 혁명세력인 사공파(事功派)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서 이상적 지치(至治)를 실현하려는 온건개혁세력인 절의파(節義派)의 대립, 갈등은, 한국의 성리학이 성립, 정착되고, 또 향후 유자(儒者)가 지향해야 할 학문, 사상의 목표 문제와 관련하여 큰 분기점을 이루었다.
정몽주, 김자수, 길재를 비롯한 두문동 72현으로 상징되는 온건개혁파와 이방원(李芳遠), 정도전 등 급진혁명파와의 대립투쟁은 마침내 현실지향적인 혁명파의 승리로 끝났다. 개혁파의 주도자인 정몽주는 새 왕조의 건국 3개월 전인 그 해 4월 혁명파의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고, 상촌을 비롯한 두문동 72현으로 상징되는 고려 충신들은 개국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유배 또는 희생되거나 절의를 지켜 은거의 길을 택하였다. 이때 조선 건국 후 상촌은 유신(遺臣)으로서 고려에 대한 충의와 지절(志節)을 지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은거하던 상촌은 향리에서 농사를 돌보면서 독서와 수학, 그리고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와 함께 살아남은 절의파 인사들과의 교우로 만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새로 창업한 조선왕조가 태종대에 이르자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고려 충신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과 예우책이 마련되는데, 그것은 태종 원년 권근의 구언상서(求言上書)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권근은 이 상소에서 “대업이 이미 이루어져 수성(守成)할 때에는 반드시 전대의 절의를 다한 신하에게 상을 주어 후세의 인신(人臣)의 절의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 이후 이를 수용한 태종은 고려 충신인 정몽주, 길재, 김약항(金若恒, ?~1397) 등을 절의지사(節義之士)로 포상, 추증하였다. 이밖에도 두문동 72현으로 상징되는 고려의 절의파 인사들의 충성과 의리에 명분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회유, 정권에 적극 참여시키려 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고려 말 절의파의 대표적인 관료이자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상촌에 대한 각별한 예우와 함께 사환(仕宦)을 직, 간접적으로 적극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상촌에 대한 일련의 움직임은 아마도 고려 말 성균관 수학시대 이래 관료로 함께 활동하며, 상촌의 강직한 지절(志節)을 잘 알고 존경하던 권근 등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아무튼 태종 즉위 후 태종은 세 차례나 신하를 보내 상촌의 출사(出仕)를 적극 종용 하였다. 그러나 절의를 숭상하는 성리학의 이념과 예론의 실천에 철저했던 상촌의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과 의리, 특히 ‘신불사이군’의 유교학인으로서의 신념을 꺾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태종은 세 번째로 상촌에게 형조판서를 제수하고 이를 받들기를 요구하면서, 불응할 경우 중죄로 벌할 것을 위협하였다. 이에 상촌은 자손에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신하로 나라가 망하면 충의도 더불어 망하는구나. 내가 평생에 충효로 스스로를 기약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만약에 내가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뵐 수 있을 것인가. 내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
하고 경기도 광주 추령(秋嶺, 현 오포면 신현리)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내 평생에 바친 충효의 뜻을
오늘 뉘 있어 알리요
내 한번 죽음 한하지는 않나니
저승의 구원에는 알아줄 이 있으리라.
(平生忠孝意 今日有誰知 一死吾休恨 九原應有知)
상촌의 비장한 순절(殉節)은, 일생동안 고결한 인품으로 의리지학으로서 성리학의 정명사상을 탐구 실천해온 유학자이자 고려의 유신으로서 택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절의의 실천이자 최후의 저항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상촌의 묘가 있는 광주 추령에서 얼마 멀지 않은 용인 모현면에는 상촌이 생전에 사우(師友)로서 존경하던 정몽주의 묘가 위치해 있어서 두 사람은 죽어서도 충의의 상징처럼 이웃하게 되었다.
상촌의 자결 소식을 들은 후학 황희는 평소에 존경하던 상촌의 만사(輓詞)를 지어 스승의 순절을 조상하였다.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하물며 살신성인의 어려움까지 얻으셨네.
(有忠有孝難 有孝有忠難 二者旣云得 況又殺身難)
상촌의 최후를 충절과 효행, 살신성인으로 애도한 황희는 고려 말 상촌이 성균대사성으로 유학교육을 총괄할 때 성균학록(成均學錄)으로 재직했던 후학이며, 조선왕조에 출사하여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까지 오른 현달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상촌의 행적을 잘 알고 있던 그가 순절 직후 상촌을 충효대절의 상징으로 찬양한 것은, 이 역시 상촌이 조선왕조에서 벼슬했다는 일부 관찬기록이 조작과 오류임을 명확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무튼 여말선초에 상촌이 보여준 성리학적 이념과 예론, 실천적인 절의정신은 당대는 물론 16세기 이후에 대두된 조선중기 사림파(士林派)와 그 후손들에게 크게 주목되어, 의리지학을 중시하는 조선 성리학의 특성으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포은, 상촌, 목은 등의 절의와 학풍은 조선 성리학의 기본정신으로 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각 역사시기마다 이상과 정의의 입장에서, 학문은 물론 국가와 사회가 위태롭거나 불의와 부조리한 현상을 드러낼 때마다 이를 견제 비판하는 정신사적 전통으로 작용하는 데 그 연원을 이루었다.
상촌선생 유허비 [경북 안동시 안기동]
고려말의 주도세력과 고려충신 두문동 72현
조선시대의 사림파(士林派)라 불리는 정치 세력은 오늘날 야당과 같은 세력이었다.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는 뿌리가 같다. 이들 모두가 고려 말기에 나타난 신흥사대부 세력의 후예들이다. 신흥사대부는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새로운 정치세력이었고, 권문세족들은 대개가 친원(親元)세력이었다.
원이 고려를 속국으로 삼자 이 이민족에 아부하여 권세를 누리는 세력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고려 말의 권문세족들이다. 이 때 등장한 개혁 정치세력이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이 신흥사대부는 권문세족의 등살에 허리가 휘는 일반 농민들에게는 떠오르는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다. 고려말 부패한 권문세족과 싸울 때에 이 신흥사대부들은 하나였다.
신흥사대부들의 고려에 대한 생각은 고려를 타도하자는 급진 세력과 고려 자체를 존속시키자는 온건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고려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자는 혁명파와 고려 자체는 존속시킨 채 개혁만을 수행하자는 개혁파이었다.
신흥사대부 중 대표적인 인물은 역성혁명파로서 이성계라는 거목이 강력한 무력적 기반을 형성한 가운데 정도전, 하륜, 조준이 핵심 인물이었고, 고려개혁파는 오로지 문신관료들로서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려충신으로서 정몽주, 길재, 이색을 비롯한 두문동 72현 중 절명사를 짓고 자진한 충신 김자수 등이다. 강경파가 항상 득세해온 한국 역사의 흐름처럼 이 두 세력 중에 주도권을 장악한 세력은 역성혁명세력이었다.
이 혁명파가 신흥 무장 세력인 이성계와 손을 잡고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인 조선을 개국한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혁명파와 개혁파의 처지는 갈라지게 된다.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정몽주는 혁명파인 이방원에게 타살되고 고려충신 김자수는 절명시를 읊고 자결하게 된다.
정몽주는 개혁을 통해 고려왕조의 발전을 기대하였고, 이성계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둘 다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현을 바라고 있었지만 이성계는 혁명적 사상으로서 새 왕조를 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결국 유교의 충절을 중시하던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김자수는 고려왕조 몰락과 충성심에서 절명사를 짓고 자결하게 되어 고려왕조의 충절로서 조선선비들에게 충절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이 때 김자수 이외에도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은 신하들이 많았다. 이른바 두문동 72현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두문동으로 찾아들었다. 그들은 동네의 동서쪽에 문을 세워 걸어 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이성계가 주는 그 어떠한 관직도 받지 않았던 두문동 72현은 김자수(金自粹)를 비롯하여 임선미, 조의생, 성사제, 박문수, 김충한, 이 의 등의 이름이 후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선 정조때에 와서 왕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서 1783년에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72현의 충절을 기리게 됨으로써 그들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로 남게 되었다. 비록 고려왕조는 비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절의를 꺾지 않은 김자수 등 충현들의 충성심이 결국은 새로운 조선왕조의 유교사회가 신하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 있는 사림정신으로 승화되어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고려말 국운이 쇠퇴할 때에 성리학이 크게 일어나 이제현의 문하에서 이색을 비롯한 정몽주, 김자수, 이승인, 정도전 등의 명유(名儒)가 나왔고, 다시 정몽주의 문하에서 권근, 길재 등의 명유가 나왔다. 이때 성리학의 기초가 다져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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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란다 넘어에 우산쓴 모습들이 비를 실감케 하네요?.
오늘은 빗길 운전조심 하셔서 무시태평 하시길 바라며 즐겁고 행복 하시길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