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분류하는 법, 중국의
백과사전
_김언희
a) 정육과 肉汁으로 사는 것
b) 애인의 아랫도리처럼 달콤한 것
c) 애인의 아랫도리처럼 구역질나는 것
d) 두고 보면 알게 되는 것
e) 두고 보면 모르게 되는 것
f) 어디가 입이고 어디가 항문이어도 좋은 것
g) 수세식 변기처럼 순결한 것
h) 똥을 먹일 수 있는 것
i) 끽 소리 없이 똥을 먹는 것
j) 이름만 불러도 깜짝깜짝 놀라는 것
k) 토끼잠을 자고 하루 스물세 시간 토끼씹을 하는 것
l) 더러운 곳을 피해서 무서운 곳으로 가는 것
m) 무서운 곳을 피해 더 더러운 곳으로 가는 것
n) 피가 모조리 구정물로 변해도 썩지 않는 것
o) 여분의 불알을 질질 끌며 문지방을 넘나드는 것
p) 혀가 깃발처럼 일렁이는 것
r) 웬만해선 숨통을 끊을 수 없는 것
s) 도끼를 맞아도 언제나 빗맞는 것
t) 전염병처럼 피해야 하는 것
u) 부를 때마다 틀린 얼굴로 돌아보는 것
보고 싶은 오빠
_김언희
1
난 개하고 살아, 오빠, 오빠 터럭 한올 없는 개, 저 번들번들한 개하고, 십년도 넘었어, 난 저 개가 신기해, 오빠, 지칠 줄 모르고 개가 되는 저 개가, 오빠, 지칠 줄 모르고 내가 되는 나도
2
기억나 오빠? 술만
마시면 라이터 불로 내 거웃을 태워먹었던 거? 정말로 개새끼였어, 오빤, 그래도 우린 짬만 나면 엉기곤 했지, 줄 풀린 투견처럼, 급소로 급소를 물고 늘어지곤 했었지,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니, 뭐니, 헛소리를 해대면서
3
꿈에, 오빠 누가 머리없는
아이를 안겨주었어, 끊어질 듯이 울어대는 아이를, 머리도
없이 우는 아이를 내 품에, 오빠, 죽는 꿈일까…… 우린
해골이 될 틈도 없겠지, 오빠, 냄새를 풍겨댈 틈도, 썩어볼 틈도 없겠지, 한번은 웃어보고 싶었는데, 이빨을 몽땅 드러낸 저 웃음 말야
4
여긴 조용해, 오빠, 찍 소리 없이 아침이 오고, 찍 소리 없이 저녁이 오고, 층층이 찍 소리
없이 섹스들을 해, 찍 소리 없이 꿔야 할 꿈들을 꿔, 배꼽
앞에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오빠, 우린 공손한 쥐새끼가
됐나봐, 껍질이 벗겨진 쥐새끼들, 허여멀건, 그래도
5
그래도, 오빠, 내 맘은, 내 마음은 아직 붉어,
변기를 두른 선홍색 시트처럼, 그리고 오빠, 난
시인이 됐어, 혀 달린 비데랄까, 모두들 오줌을 싸게 만들어, 하느님도 오줌을 싸실걸, 언제 한번 들러, 오빠, 공짜로 넣어줄게
***
김언희는 자신의 시가 (외국에
비한다면) 그다지 극단일 것도 없으며, 한국의 시단은 외려
더 깊어져야 하노라고 말한다. ‘밥 퍼주는 시인’이 마음의 양식과 위로, 사랑을 주는 시인이라면, 자신은 ‘똥 퍼주는 시인’이라고도 하였다. 그런 시인이 있어 다행이다. 아니,
이런 시인이 있어야만 한다. 매 편의 시를 제사요, 예배요, 애도요, 공부라 여기며 사는 시인이 있기 위해서는, 매 편의 시를 똥이요, 발정이요,
교접이요, 성기라 여기며 사는 시인이 있어야만 한다. 거짓말 못하는 똥 같은 시(인)이
있기에 거짓말 하는 가짜 똥 같은 시(인)도 시(인)이 되는 것이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로저 코만이 떠오른다. 그럴듯한 A급 할리우드 대작 한편에 끼워 넣기 식으로 상영하기 위해 초 저예산에다 초 스피드로 호떡 ‘찍어내듯’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찍어냈던 B급 영화가, (타란티노를 통해 적확히
드러나듯) 오늘날은 어찌된 영문인지 A급 영화에 생명줄을
던져주고 있다면, 그건 모두가 로저 코만의 덕이다. 스탠포드
출신에 누가 보아도 고급스러운 삶의 이력이 줄줄 새어나오는 그는 영화적 삶에 있어서는 아류(亞流)나 하류(下流)의 삶을 전략적으로 택하였고, 영화 속 이야기마냥, 실패할 수 없기에 성공해버린 전설전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람들은 그의 B급 영화를 보기 위해 A급 영화를 ‘끼워’ 보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는 사람들의 욕망 자체에 담긴 B급스러운 본성을 직시하였고 그
욕망을 한데 거두어 자신의 영화 안에 고이 모셔 들였으니, 욕망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그의 영화 안에
담긴 것은 당연히 폭력과 섹스 그리고 일탈과 방종이었다. 영화관 한편에서는 고급한 영화들이 애국이니
사랑이니, 거룩함이니 순수함이니를 떠드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들이 쏘아대는 폭력적인 볕으로 인해 생긴 삶의 낮고 천한 그림자들을 B급 영화들이 넝마주이가
되어 재빨리 주어 담고 있었던 것이다. B급 영화가 없(었)다면, 영화 자체가 허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은막 위라 할지라도, 아름다움과 선함만을 줄곧 설파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로저 코만의 슬하에서 자라며 그의 철저한 B급 본위 정신으로 영양을 공급받았던 이들 가운데서 탄생한 위대한 감독들(프란시스
포드 포콜라, 마틴 스콜세지, 조 단테 등등) 과 배우들(잭 니콜슨, 로버트
드 니로, 데니스 호퍼 등등)의 면면을 살펴보거나, 그이들이 일관되이 술회하는 로저 코만의 초인적인 창조력을 되짚어 본다면, 로저
코만은 사람들의 급소와 성감대만을 기가 막히게 짚어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여타의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던졌고, 그 답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얻어냈다. 사람은 욕망으로 산다. 성경 말씀처럼 ‘사람이 떡으로 만 살 것이 아니’지만, 사람은 떡이
있어야 산다는 사실! 사람이 욕망으로 산다는 사실을 대면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욕망을 넘어서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욕망에 천착하는 작업과 욕망 너머에 천착하는 작업은 언제까지나 짝패로서 서로의 등을 마주한 채 먼 길을 더불어
걸어야만 한다.
로저 코만에게 있어 한 가지 아쉬움은 그가 남성이라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사실인데, 욕망을 향한 그의 전략적인 선택이나 태도가 결국은 여성주의적 시각에서라면 ‘몹쓸
것’으로 쉬이 치부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의 남성 작가들은 어떤 극단을 밟아 보는
일이 예전만큼 수월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이 상상력의 문제라 할지라도, 이제 지식인 남성들은 자신의 마초이즘을 자가 검열해야 하고, 그
결과 우디 앨런이나 홍상수 풍의 작품들만이 양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물론, 가끔 김기덕(들)이 있기도
하겠으나, 김기덕(들)은
김기덕(들)일 뿐, 그
이상으로 번져나가기가 역시나 정황상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여성 로저 코만의 등장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라캉이니 들뢰즈니 하는 한물간 프랑스 이론을 등에 업은 채 욕망/몸의 문제를 보란 듯 (이제야!) ‘쎄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지식인 여성이 아니라, 조금은 능글맞게 조금은 맹렬하게, 숨겨진 몸을 잽싸게 파고들고 가려진 욕망을 처절하게 물어뜯을 수 있는 여성적인 솜씨가 필요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그간 닫혀 있던 관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일 수도 있다. 여태껏 관능의 객체로 머물렀던 여성이 새로이 호출하고 호명하여 일깨우는 관능은 무엇인가, 여성 로저 코만(들)은
바로 이 질문을 이제라도 던지고 답해야 한다.
이 점에서, 김언희의
시들은 한계인 동시에 가능성이다. <시를 분류하는 법, 중국의
백과사전>은 보들레르이거나 김기덕이다. 시인은 지금 자신의 시적인 혀로 말한다기보다는 누군가의 입술을 빌어 말하고
있고, 그 복화술 속에서 김언희의 시들이 갖는 묘한 이격효과의 한부분은 태어난다. 시인은 지독한 남성의 몸을 빌어 지독한 여성의 말을 한다. 서로에게
고통스럽게 교접해 있는 상태의 자웅동체가 뱉어내는 신음이 바로 시인의 언어다. 좁고 편편해진 세상 속에서
이 드문 언어가 갖는 미덕은 그 존재가치만으로도 묵직하겠으나, 시인의 혀가 지닌 있는 그대로의 매력이
빛을 발하는 곳은 아무래도 그이가 <보고 싶은 오빠>라고
말 할 때다. “언제 한번 들러, 오빠, 공짜로 넣어줄게”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폐병쟁이 내
사내>를 읊조렸던 20대 중반의 어린 허수경을 순식간에
불러일으킨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
너무도 다른 시인들과 시들이 기이하게도 서로를 일으켜 세운다는
사실이 단순히 ‘진주’라는 동향(同鄕)으로 가닿는다면 기운 빠질 노릇이다. 물론, ‘진주’라는 장소가 지닌 그 특유의 관능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깊이 생각한 바 있지만, 지금 여기서 장소의 관능성을 이야기하면 앞서 힘이 빠지고야 말 일이니 피해가자.
<보고 싶은 오빠>와 <폐병쟁이 내 사내>의 화자들은 분명 좁아질 대로 좁아지고
편편해질 대로 편편해진 세상을 한 뼘은 더 넓고도 깊게 만든다. ‘산가시내’ 손아귀 속 ‘독오른 뱀’마냥, ‘백정집 칼잽이’의 시퍼렇게 날 선 칼 마냥, ‘줄 풀린 투견’의
허연 이빨 마냥, ‘변기를 두른 선홍색 시트’의 아찔함 마냥, 시
속의 물질성은 그 나신(裸身)을 한껏 희번덕이며 시를 가로지른다. 이토록 치열한
물질이 되어 줄달음치는 욕망 앞에서, ‘혀 달린 비데’가 되어 ‘공짜로 넣어’주겠다는 말은,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이겠다는 말만큼이나 놀라운 관능이 되어 시의 그 붉디붉은 혀로 타자를 핥고 어루만진다. 더 나아가, <보고 싶은 오빠>가 '어디 내 사내 뿐이랴'! 이 관능의 혀는 모두를 향해 침샘을 열어 놓는다.
어쭙잖게 A급을 모방하는
이들 보다는 질기게 B급을 고수할 수 있는 이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숨쉬기도 바쁠 정도로 B급 영화를 정신없이 제작하는 동안에도, 베르히만, 트뤼포, 펠리니의
영화들을 배급했던 로저 코만처럼, 고급한 욕망들의 건재와 솔직한 욕망들의 건강이 둘이 아님을 깨단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폐병쟁이 내 사내>가 <보고 싶은 오빠>가 되어, 그 그림자가 소리 없이 사립 안으로 스윽 하고 들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