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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보는 오성군 안우(鼇城君 安祐) 장군 실기
1. 출생
- 생년: 1305년 전후
- 본관: 고려사 열전에 탐진인 (고려시대 지명은 탐진현. 장흥의 속현). 세종실록지리지에 탐진현에는 최, 조, 유, 안, 하 등 6개 토성이 있었다. 토성은 향리를 배출시킨 지방 호족 성을 말한다. 좀 평범하게는그 지방의 토박이 성을 의미한다. 탐진에 사는 다수의 안씨 중의 한 명이 안우이다.
- 안우택은 읍성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원도 원주목에 나오는 변안렬(邉安烈, 1334 ~ 1390)은 원나라 심양에서 공민왕을 따라 고려로 와서 귀화하여 원주로 본향을 하사받아 원주 변(邊)씨 시조가 되었다. 이처럼 고려사의 변안열 열전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원주 성씨 기록에나 변씨가 원나라 심양에서 왔다는 것을 명기하고 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고려 안우의 기록에는 이런 표현이 전혀 없으므로 그는 원나라 출신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2. 어향사 (1343년)
- 안우는 1343년에 원나라 어향사로 고려에 파견된 기록이 있다. 이후 고려에서 무관으로 출사하여 군부에서 차곡차곡 승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향사는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요즘 시대의 특정 프로젝트의 실무자 정도로 보인다. 어향사 지공스님은 26세에 고려에 왔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에 기여한 성삼문과 정인지는 25세 정도에 요동을 여러 번 다녀왔다. 이들은 사신과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 조일신의 난에서 정3품 군부판서로 특별 승진 되었는 바, 툭별 승진은 보통 일품계 올라간다. 그 이전에 종3품까지는 고려 군부에서 순리대로 올라간 것으로 추정된다. 군부판서로 바로 품계가 올라 간 것으로 봐서는 고려인이 분명하다.
- 어향사로 임명된거로 봐서는 그 당시 안우는 엘리트 집단에 속했있었 던 거로 보인다.
- 그 당시는 원나라 벼슬은 고려에서 출세의 방편인 듯 하다. 중앙관료 동료 대신들인 염제신·유탁 등도 모두 원나라 관료에서 출발했다. 안향도 중간에 원나라 관료이었고, 목은 이색도 원나라 국자감유학생이었고, 이자춘과 이성계는 원나라 무장이었다.
-1352.1 공민왕은 1352년 12월에 시투르 태자의 보호를 받으며 노국공주와 원으로부터 귀국하였고 새해(1352년)에 즉위하였다.
3. 조일신의 난 (1352년)
- 1352.09.29: 조일신이 왕의 숙위 신하들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기철 일당 중에 기원만 살해하고 나머지는 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 1352.10.05: 위협을 느낀 왕이 정동행성에서 조일신을 베어죽이고 그 일당 28명을 가두었다. 최영, 안우, 최원 등이 반도들을 평정하였다.
- 1352.10.12: 안우 군부판서로 임명되다. 군부판서는 TO가 2인이다. 문신 1인,\과 무신 1인. 무신은 군부의 최상위급 대장인 응양군상호군이 된다.
- 안우가 군부판서로 특진된 것은 명목상으로는 조일신의 난을 제압한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공민왕이 원나라와의 친분이 있는 관료들을 중용했는데 같은 이유도 있는 듯하다. 기철 일당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원나라 입장에서는 반란에 해당된다. 공민왕의 자리가 위태롭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원나라와 친분이 많은 안우의 입각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 그 해 말에 내려온 원나라의 국문은 무사히 잘 마무리 되었다.
- 1353.05 밀직사 이에센테무르와 응양군상호군 안우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또 기황후에게 생일 하례물을 바치게도 하례함. 기황후에게도 조일신의 난에 대해 사죄하고 무사 마무리에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기황후 생일 하례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4. 원나라 파병 (1354년)
- 우리나라가 중국에 원조 파병한 경우는 두 번이다. 한 번은 원 간섭기에 원 황제의 명령으로 한족 반란군 토벌을 위해 고려군이 파병되었다. 다른 한 번은 명나라와 새로 일어난 청나라와의 전쟁이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시 수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도와 주었고 그 댓가로 김홍립 군대가 파병되었다.
- 1354.06.07: 안우 전리판서, 경천흥 군부판서.
- 1354.06.13: 원에서 유탁·염제신 등등 40여 명의 장군을 지정하고 서경의 수군(水軍) 300명을 차출하고 , 또한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까지 연경에 집결시켜 장사성(張士誠)을 토벌에 합류하라는 지시가 하달됨. 원 간섭기라 원과 고려의 구별이 별로 없었다.
- 1354.06.21: 원나라 파병장수들에게 봉군을 내려짐. 인당(석성부원군), 이권(오원부원군), 나영걸(금성군), 손불영(돈성군), 김경(의성군), 김용(안성군), 안우(오성군), 최원(용성군), 인안(연성군), 최안수(함성군), 구정(면성군), 조충신(상원군)
- 1354.07.04: 유탁과 염제신 등 40여 명의 장수가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으로 출병하였다. 이 후 연경에서 고려군 23,000명을 합처 고우의 장사성 토벌에 참여하였다.
- 1355.05 권겸, 원호, 인당이 원에서 귀국하여 "중국 남쪽 지방의 적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으며, 우리 군대는 육합성(六合城)을 함락시킨 후에 회안로(淮安路)로 이동해 방어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안우는 전장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1356.05.07 전 밀직 안우가 황제가 왕에게 하사한 의복과 술을 가지고 원에서 귀국하였다. 원나라 파병 1년 10개월 만에 귀국. 기황후를 만났을 가능성 있다.
5. 부원배 기철 척결 (1356년)
- 1356.05.18: 대사도 기철, 태감 권겸, 경양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고 나머지 친당은 도망을 갔다. 기철과 그 일당의 척결은 원나라로 부터 고려의 독립선언의 시작임. 3년 후에 안우는 일등공신으로 기록되다.
- 1356.07.09 안우 지추밀원사
- 1356.11.03 안우 지문하성사
6. 지역 방위사령관 (1358년)
- 1358.02.28 안우 참지중서정사(종2품)로 임명되다.
- 1358.05.14 안우 동강병마사(겸임)로 임명되다.
- 1358.06.16 참지정사 안우를 안주군민만호부 만호로 임명(겸임) 되다.
- 1359.06.26 남양후 홍언박, 참정상의 경천흥, 참정 안우, 지문하성사 정세운, 판추밀원사 황상, 지추밀원사유숙, 상장군 목인길, 장군 이몽고대(이뭉구다이)를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7. 제1차 홍건적 침입 (1359-1360년)
- 1359.11.30 경천홍 서북면 원수, 안우 서북면 부원수로 임명되다.
- 1359.12.08 제1차 홍건적 칩입: 평장 모거경이 총 4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다.
- 1359.12.11 철주에서 안우·이방실 등이 홍건적 격퇴하다.
- 1359.12.16 안우에게 금대 하사하다.
- 1359.12.28 서경이 함락되다.
- 1360.01.19 서경 탈환: 총 2만여명의 고려 군사가 서경 탈환전을 벌여 적들은 용강·함종으로 퇴각하였다.
- 1360.01.29 안우는 안주군민만호부 도만호로, 이방실은 상만호로, 김어진은 부만호로 임명되다.
- 1360.02.15 함종대전: 아군이 함종에서 힘껏 싸워 적군 2만여 명을 죽이고 적의 원수인 심자와 황지선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홍건적 10,000 여 명이 증산현으로 퇴각하다.
- 1360.02.16 안우·이방실 등이 선주까지 추격하여 수백 급을 베었지만, 나머지 적 300여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1360.03.01 경천흥·안우·김득배가 전(箋)을 올려 승첩을 보고하다.
- 1360.03.25 안우에게 추충절의 정난공신 중서평장정사 (정2품) 내려주었다. 무신으로서는 최고 품계이다. 뒤에 다시 참지정사(종2품)로 나오는 거로 봐서는 중서평장정사는 어디까지나 포상의 의미가 있는 듯 하다.
8. 제2차 홍건적 침입 (1361-1362년)
- 1361.10.20 홍건적의 평장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20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로 침입하였다.
- 1361.10.26 참지정사 안우를 상원수로, 정당문학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 정휘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았다.
- 1361.11.03 안우와 이방실이 지휘사 김경제와 함께 각기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개주·연주·박주 등에서 적과 계속해서 싸워 이들을 격파하여 300여 명을 죽이자 왕이 안우를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 1361.11.16 절령의 목책 방어망이 격파되어 아군이 크게 무너져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로 도망쳐 돌아왔다.
- 1361.11.24 개경이 함락되었다.
1361.12.15 왕이 안동에 도착하여 김용을 총병관에서 내리고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였다.
- 1362.01.18 개경 탈환: 고려 군사 20만이 경성을 공격하여 적의 괴수 사류와 관선생 등을 베어 죽였다. 숭인문과 탄현문 2개의 문을 열어두어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이 도주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을 갔다.
9. 총병관과 삼원수 피살
- 1362.01.22 삼원수(안우, 이방실, 김득배)에게 총병관 정세운 살해하라는 공민왕의 교지가 내려졌고 이에 정세운은 피살되었다. 정세운은 제2차 홍건적 전쟁에서 김용의 총병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고, 안우는 조일신의 난에서 김용의 응양군상호군 자리를 차지했었다.
-1362.01.25 공민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정세운을 살해한 죄를 용서한다는〉 유지(宥旨)를 반포하였고, 곧 이어 왕이 머무는 행재소(行在所)로 나올 것을 독려하여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안동에 있는 공민왕이 불과 3일만에 어떻게 알고 유지를 반포할 수 있을까?)
- 1362.02.29 안우가 돌아와 행재소(복주)에 출두하니 김용이 문지기를 시켜 그를 살해케 하였고,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방실과 김득배를 각기 체포하게 하였으며, 만호 박춘이 용궁현에서 이방실을 살해하였다. 김득배는 상주에서 참수당했다.
-총병관과 삼원수의 피살은 멸망있는 장군들의 죽임으로 고려 멸망의 시작이라고 보여진다.
삼원수를 살해시킨 후
- 1362.03.01 공민왕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토록 용납할 수 없는 바로서, 그 경중은 너무나 명백하여 도저히 덮어줄 수 없는 것이니, 이 자를 석방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써 〈옳고 그름을〉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이방실·민환·김림 등을 법에 따라 처벌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옛 노고를 생각하여 처자식에게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지휘하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모두 유사에게 명령하여 공로를 헤아려 서용(敍用)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성수복 공신록에 배제
- 1363.11.07 경성수복 공신에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없다. 안우의 시호(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가 문충공이라는데 언제 받았는지는 확인이 안된다. 시호는 못 받은 거로 추정된다. 고려16공신을 배향한 숭의전에도 '중서평장사'로만 나온다. 이게 정확한 기록이다. 추충절의 정난공신 중서평장정사라는 단어는 최대의 칭송이고 적합하다.
10. 고려 16공신에 선정
- 1451년 조선왕조 문종 원년에 고려 16공신에 선정되었다. 춘추관에서는 건국공신이거나 백성에게 중대한 공을 세운자 즉 전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공을 세운 자를 선정하였다.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을 격퇴한 공이 선정의 배경이다. 만약 이 전쟁에서 졌다면 조선은 없었을 것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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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안우 관련 역사성 코멘트
- 안우의 입각: 안우는 연경호종공신이 아니다. 조일신의난을 최영과 직접 진압에 앞장 선거로 나온다. 응양군상호군 김용이 잘 대처하지 못하고 방어를 하지 않았다. 조일신 난의 일등공신이고 장수 중에 가장 신망이 안우를 김용을 대체하여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으로 입각시켰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안우가 원나라 어향사 배경도 있어 추후 원나라 문책을 완화 시키는 역할도 필요했을 것이다. 이 때부터 김용과 안우는 악연이 아니었을까?
- 안우는 조일신의 난, 부어백 척결, 제1차 고려-홍건적 전쟁을 통해 장수로서의 입지가 아주 탄탄해진다. 제2차 고려-홍건적 전쟁을 통해서 도원수까지 올랐으나 안우의 공왕에 대한 과신이 안우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총병관을 죽이지 말고 사로 잡아서 왕에게 갔었어야 했었다.
- 삼원수의 피살은 공민왕과 김용의 합작품으로 보인다. 무장들의 귀환을 공민왕이 반겼을 리가 없다.
- 총병관 정세운과 도원수 안우, 원구 김득배, 이방실, 민환, 김림 등의 피살로 충성스러운 고려 장수들이 사라지고 고려 멸망의 시작점이 된다.
12. 안우 관련 인적 코멘트
- 고려사 안우 열전이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안우는 탐진인을 명시. 빈면에 공민왕을 따라온 변안열은 심양인으로 명시. 안우는 탐진인 확실하다.
- 봉군 오성군(鰲城君)에서도 오성이 오산(탐진)임. 봉군은 일반적 무관의 봉군은 주로 O성군이나 O산군이라는 명칭으로 주어짐. 에를 들어 죽산이나 죽주는 죽성군, 공주인은 공산군이나 공성군. O진군으로 내리는 경우는 아직 본적이 없음. 일부에서 주장하는 탐진안씨의 탐진군은 오성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 당시 여러 상황를 고려해보면 안우의 출생년은 1305년 전후로 추정된다.
- 안우의 실제 활동 품계는 참지정사 (종2품). 전공으로 받은 최고 품계는 제1차 홍건적 전쟁의 '추충절의 정난공신 중서평장정사 (정2품)'. 전장터 최고 사령관 직위는 제2차 홍건적 전쟁에서의 '도원수'이다.
- 사위 황보림은 홍건적 격퇴 일등공신이 되다. 안우 외손자 황보인은 1414년 안지와 동시에 알성친시에 급제하였고 문종조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계유정란 때 피살되었다.
13. 문중 관련 코멘트
- 안우는 구국영웅 반열에 오른 분이다. 성웅 이순신을 떠 올리면 거부감이 없는 것 처럼, 안우장군도 그런 추앙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 아래 조중운의 '시족 원류'에 보이는 탐진안씨 여러 계파 파조 중에는 제일 연장자이다. 안우 장군의 직계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 세종조 예문관대제학 안지는 조선왕족실록에 50년간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안지의 기록에 안우는 없다. 그래서 아래 씨족원류 기록이 맞다. 이 경우 안우와 인지는 탐진의 안씨 토성을 가진 느슨한 인척으로 판단된다.
- 홍건적 난의 삼원수 중 이방실의 동상은 함안에 세워져 있고 김득배 출생 표지석은 상주에 세워져 있다. 탐진안씨 후손예들은 강진에 오성군 안우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표지석 하나는 세워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고려시대 사료 DB (https://db.history.go.kr/goryeo.main.do) → 고려사, 고려사 절요
세종실록지질지, 신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