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 정길생
과학자는 확고한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인류사회의 복지에 기여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과학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상찬과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처럼 존경스러운 과학자들과는 달리 과학자로서 지켜야 할 연구윤리는 망각한 채 과학자의 사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연구 결과를 표절하거나 날조하기도 하고 금기된 연구를 수행하여 인류의 삶에 해악을 끼치는 과학자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내세워 생체실험과 같은 비윤리적 만행을 자행한 일본 과학자들을 들 수 있다. 또 독일 민족의 세계지배라는 나치의 사명 의식을 내세워 홀로코스트(Holocaust)나 레벤스보른(Lebensborn)과 같은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른 독일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처럼 윤리의식의 뒷받침이 없는 사명 의식은 그것이 강할수록 인류에게 더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과학사를 되돌아보면 한때 추앙받던 저명한 과학자가 뒷날에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핵폭탄을 만든 미국의 과학자들을 들 수 있다. 세계 최초의 핵폭탄은 미국 정부와 물리학자들의 협력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발단은 시카고 대학의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 교수와 프린스턴 대학의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 교수 등에 의해 작성된 한 통의 건의서였다. 그들은 1939년 10월 핵에너지의 군사적 이용을 권유하는 건의서를 당시의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대전에서 승리를 위한 결정적 전기가 절실했던 대통령은 곧바로 과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940년 핵폭탄 제조를 명령한다. 그때 핵폭탄 제조의 이론과 기술적 측면을 총괄한 사람은 버클리 대학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 교수였다. 당시 미국의 물리학자들이 핵폭탄의 제조에 앞장섰던 동기와 명분은 분명했다. 독일의 나치(NaZi, Nationalsozialist)를 중심으로 하는 적들이 핵폭탄을 먼저 개발해서는 안 된다. 핵폭탄이 그들의 손에 먼저 들어가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살상이 자행될 것이다. 그 만행에서 살아남는 사람들도 결국은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는 투사로서, 인류 전체를 책임지는 수탁자로서 적들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훌륭한 사명 의식에 근거한 명분이었다.
그처럼 과학자들의 건의와 미국 정부의 호응에 의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2개의 핵폭탄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뒤를 이은 트루만(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1945년 8월 일본의 하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되었다 그때 히로시마에서는 14만 명이,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이 일시에 목숨을 잃었다. 핵폭탄의 위력을 지켜보던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무서운 살상력에 경악했다. 핵폭발의 처참한 결과를 목도한 그들은 나치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개발한 핵폭탄이 인류에 대해 나치보다 더 무서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핵폭탄의 개발을 통해 당시의 혼란스럽던 국제질서를 정상으로 되돌리고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는 기여를 했다. 그러나 연구윤리의 측면에서 보면 용납될 수 없는 과오도 범했다. 그러한 과오를 뒤늦게 인지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자기는 세계의 파괴자, 인류의 학살자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핵폭탄을 만들라고 부추기는 건의서에 서명한 일이라면서 그 죄책감 때문에 감내하기 힘든 고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실토했다.
그들 과학자를 그처럼 심각한 자책감에 빠지게 한 윤리적 과오는 핵폭탄이 갖는 가공할 살상력에 관한 판단 착오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부족이었다. 다시 말해 연구를 수행한 동기와 사명 의식은 정당했지만 자신들이 수행하는 연구가 초래할 가공할 결과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던 것이다. 또 연구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고양하고 인류의 복지증진과 미래지향적 문명의 창조에 기여해야 한다는 연구윤리의 중요한 측면도 간과했던 것이다. 그러한 과오 때문에 핵폭탄 제조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그들이 성취한 놀라운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 국민을 비롯해서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핵폭탄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러한 공포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처럼 과학자가 연구 상의 실수를 저지르면 그 과오는 전체 인류에 대한 죄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세월이 흘러도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예측하는 선견지명과 확고한 연구윤리의 소중함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들 물리학자가 저지른 실수와 과오는 다른 분야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과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리적 특성까지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하는 생명공학 분야의 과학자들이 그런 과오를 범할 개연성이 높다. 또 국가와 산업계로부터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지능과 외모 그리고 체력 등 모든 면에서 자연인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지능형 로봇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과학자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생명공학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는 현대과학의 최첨단 분야이므로 연구 결과가 초래할 파급효과도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첨단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들이 연구윤리는 무시하고 국익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 명의식을 앞세워 반인륜적 연구를 자행한다면 그러한 연구가 초래하는 결과는 핵폭탄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현생 인류의 소멸을 재촉하거나 인간을 로봇의 노예로 만드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 연구에 관여한 모든 과학자는 인류에 대한 공공의 적이라는 역사적 지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불명예를 원치 않는다면 과학자는 과학자로서의 사명 의식을 앞세우기 전에 먼저 올바른 연구윤리를 체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를 이성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냉철한 지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격을 길러야 한다. 또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의 결과를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혜안과 연구에 대한 부당한 유혹이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도 함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윤리를 평소의 연구 활동 속에서 엄격하게 실천할 수 있는 내공을 길러야 한다. 그러한 내공이 빛을 발할 때 비로소 연구에 대한 사명 의식도 연구 결과도 정당성을 인정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연구윤리는 과학자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무형의 자산이요 양보할 수 없는 양심의 보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학에 있어서 연구윤리에 관한 교육은 매우 미흡하다. 대학마다 연구윤리에 관한 교과목은 설강되어 있지만 교육의 내용은 매우 부실하고 형식적이다. 또 해당 교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저조하다. 전공과목에 매몰된 그들에게 연구윤리에 관한 강의는 졸업학점을 채우기 위한 사족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 있어서 연구윤리에 관한 교육이 그처럼 형식적이어서는 연구의 창의성이나 인격 면에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과학자를 길러낼 수도 없고 우리나라를 과학 선진국으로 발전시킬 수도 없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 대한 연구윤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과학의 불모지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오늘의 수준에 까지 이끌어 온 “한국시니어과학기술인 협회(KASSE)” 회원들은 매사에 우선하여 대학에서 수학 중인 학생들이나 사회에 갓 진출한 젊은 과학자들에게 과학자로서 견지해야 할 올바른 사명 의식과 함께 엄격한 연구윤리를 고취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후학들을 존경받는 과학기술자로 육성하고 우리나라를 세계가 선망하는 진정한 과학기술의 선진국으로 발전시키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전) 건국대학교 총장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한국시니어과학기술인협회 고문
국가과학기술 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