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조와의 만남 / 조주환 | | | |
향토시인순례 | | | | | |
현대시조 1988년 여름호 | | | | |
| | | | | | |
내가 교직에 첫발을 둔 67년 3월, 굽이도는 개울길 산길을 따라 저물녘 |
겨우 찾아간 곳은 6학급 벽지학교였다. | | | |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 쳐진 산들 그 산등의 긴 그림자가 손바닥만한 |
교정에 내려앉고 가슴을 짓누르는 땅거미가 덮쳐오던 그곳의 밤은 |
스물두 사링었던 나에게는 유배지의 첫밤과도 같았다. | |
산촌 골바람은 노송을 흔들고 나를 흔들어 댔다. | | |
그 속에 간간이 섞여오는 부엉이 울음 소리들이 나를 견디기 힘들게 했고, |
토요일 오후에서 일요일까지의 일숙직을 모두 내게 맡기고 동료들이 떠나간 |
텅 빈 교정은 참으로 먼 먼 고도(孤島)의 적막감만이 휘감겼다. | |
그러던 중 며칠에 한 번씩 집배원이 날라다 주는 중앙일보 〈중앙동산〉이란 |
시조란을 보고 그 고적감을 시조로 담아 투고한 것이 68년 4월 17일자에 |
활자로 처음 박혀나와 첫 인연이 되었다. | | | |
그 뒤 입대하여 육군병원에 근무하면서 김영수(金榮守, 在美) 상병을 만났고 |
그때 이 중위(李相範詩人)의 신춘문예 당선 이야기도 들었다. | |
제대 후 복직과 함께 무언가 인생을 좀 뜨겁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
행정고시를 준비하면서 마음의 갈등이 올 때나 신춘문예 모집이 있을 때면 |
무작정 투고해 봤으나, 심사평에 몇 번 이름이 비칠 뿐 번번이 실패였다. |
시인이 되는 길은 신춘문예뿐인 줄 알았고, 나는 능력이 모자라는구나 하고 |
생각하며 그만두려고 했다. | | | | |
교사들의 월간잡지에 추천란이 있어, 보낸 작품이 박경용 시인께서 두 번, |
황금찬 시인께서 또 한 번의 추천으로 천료했으나 그것은 시인으로 |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 | | | |
나는 허탈감에 빠졌다. | | | | |
어느 날 서점에서 《월간문학》이란 잡지를 보고 뒤적이다가 20회 신인상 |
모집이란 광고를 보고 작품을 보내었다. | | | |
그런데 몇 개월 뒤 우연히 또 서점에 가서 《월간문학》을 뒤적이다가 |
〈가작, 길목, 조주환(심사 장순하ㆍ이근배)〉이라는 발표를 보고 |
이렇게 하는 것이 시인이 되는 길이구나 싶었다. | | |
그러다가 《시조문학》 한 권을 구하게 되었고 그 속에 신인추천제도가 |
있는 것을 알고 보낸 작품들이 월하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
이제는 원고청탁도 오겠지 하고 기다렸으나, 청탁은 커녕 내가 먼저 |
작품을 보내도 어느 월간지에서도 실어주지 않았다. | | |
그 뒤 〈洛江〉에서 백수 선생님을 만나 문인협회에 가입했는데, |
《월간문학》에서 조차도 작품을 받아주지 않았다. | | |
그러던 중 어느 심사평에서 《시조문학》은 신인을 양산하는 예비잡지(?) |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천료될 때는 나 혼자뿐이었는데 ㆍㆍㆍㆍㆍㆍ |
라고 생각도 했으나, 무언가 나의 자부심을 무참히 짓밟는다는 생각과 |
내 작품수준이 모자라 실어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
객관적으로 내 작품에 대한 평가를 다시 받아보고, 되지 않으면 작품 생활을 |
그만 두겟다는 각오로 일곱 살 난 아이 이름으로 내 작품을 받아주지 않던 |
그 잡지에 투고했는데 당선 통보가 왔다. | | | |
공교롭게도 예비잡지 운운하던 그 분과 김제현 선생께서 뽑았다는 심사평을 |
보고는 씁쓸했다. | | | | | |
나중에 김 선생께서도 전혀 모르는 신인인 줄로만 알고 뽑았다고 하셨다. |
나의 시조와의 만남은 끝없는 절망속에 엉겅퀴 같은 길이었다. |
성공한 작품이 있는지는 모르나, 20여 년 거의 매일같이 둔한 머리로 |
후회없이 써왔다. | | | | | |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 | | |
보잘것 없는 내 작품을 늘 받아 준 《시조문학》과 《현대시조》에 감사드린다. |
| | | | | | |
| | | | | | |
'87-工團 | | | | | |
조주환 | | | | | |
| | | | | | |
숯덩이 햇발로 타는 | | | | |
이 공단의 굴뚝 아래 | | | | |
한 접시 소금기로 제 온몸을 다 태우며 | | | |
서늘히 밤잠을 놓친 | | | | |
눈시울이 붉더니, | | | | | |
| | | | | | |
싼 임금 거친 노동의 | | | | |
그 피멍을 꺼내 들고 | | | | |
오늘 저 강둑을 넘어 해일로 와 솟는 함성 | | |
목놓아 먹빛을 떨구며 | | | | |
시가지를 흔든다. | | | | | |
| | | | | | |
흡사 불덩이같은 구호들이 흩날리고 | | | |
힘줄을 불끈대는 낯선 저 대자보가 | | | |
부둥켜 받아들 하늘 | | | | |
그 창세의 울음 같다. | | | | |
| | | | | | |
먼 뒷날 이 강둑에 새로 돋을 풀잎이여 | | | |
무한 창공에 묻혀 푸르름을 흔들어라. | | | |
가끔은 네 까만 뿌리 쪽 | | | | |
햇살 몇 점 떨궈 주며. | | | | |
| | | | | | |
| | | | | | |
歸省 | | | | | | |
| | | | | | |
Ⅰ. | | | | | | |
흩는 눈발을 쓰고 귀성 열차를 탄다. | | | |
두고 온 먼 강둑 길 풀꽃 같은 얼굴들이 | | | |
성에 낀 차창을 흔들며 눈시울로 떨며 온다. | | |
| | | | | | |
낯선 간이역(簡易驛) 들엔 불빛 몇 소슬히 떨고 | | |
여윈 뒷꿈치로 옛 이름을 불러 가면 | | | |
몇 대궁 달롱개꽃도 핏줄인 듯 와 닿는다. | | |
| | | | | | |
회억의 가지끝에 눈꽃은 내려 쌓여 | | | |
목화송이로 피는 그 낱낱의 불길 속에 | | | |
감감히 체온을 데우며 그 어디로 떠간다. | | |
| | | | | | |
Ⅱ. | | | | | | |
어느 빌딩의 숲에 두 발 절룩여 살다. | | | |
불현듯 길을 나선 아, 천만의 인파들로 | | | |
기적은 진땀을 쏟고 한 길마저 비틀댄다. | | |
| | | | | | |
핏줄을 떠올리는 선물꾸러미 몇과 | | | |
덧니 사이 얼비친 깃이 빠진 사투리들 | | | |
그 모두 새는 날 어디쯤 제 뿌리에 가 닿겠네. | | |
| | | | | | |
| | | | | | |
바다새 멧새되어 | | | | |
| | | | | | |
흩는 눈발을 쓰고 멧새로 오신 스님 | | | |
잊고 산 인연의 실밥 | | | | |
그 한 끝을 떠올리자 | | | | |
불현듯 두 눈의 별빛은 | | | | |
이슬로 와 구른다. | | | | | |
| | | | | | |
물포래 허공을 흩던 영일만 외진 굽이 | | | |
어촌 두어 채 갯바람에 흔들리고 | | | |
하늘 밑 단 한 점 핏줄도 | | | | |
다 끊기어 울던 새. | | | | |
| | | | | | |
두 손 부둥켜 울던 그 바다를 절며 나와 | | | |
까만 열네 살로 어느 먼 설산에 묻혀 | | | |
핏금진 이승의 먹물을 | | | | |
다 삭히고 오신 새. | | | | |
| | | | | | |
| | | | | | |
불현듯 네 생각에 | | | | |
| | | | | | |
땅거미 내려앉듯 | | | | | |
네가 탄 막차는 가고 | | | | |
모가지 허공에 둔 뻐꾸기 먹물만 남아 | | | |
해종일 산등을 적시며 | | | | |
눈을 감고 떨었었다. | | | | |
| | | | | | |
달무리 우는 밤은 은하별을 흔들다가 | | | |
라일락 꽃잎이 흩는 | | | | |
너의 봄 언덕에 서면 | | | | |
오색실 회한의 불티가 | | | | |
해일로 와 넘친다. | | | | | |
| | | | | | |
불현듯 네 생각이 벌판으로 쏟아질 땐 | | | |
눈발이 창을 흩는 낯선 이 해안에 와 | | | |
천만 길 파도를 쓰고 | | | | |
먹바위로 울었었다. | | | | |
| | | | | | |
| | | | | | |
가을 강둑 | | | | | |
| | | | | | |
연두빛 잎새로 와 | | | | |
이 강둑을 흔들던 | | | | |
저 수만 병정들은 | | | | |
귀성행 열차를 타고 | | | | |
몇 대궁 길 잃은 풀꽃만 | | | | |
미아(迷兒)로 와 서성인다. | | | | |
| | | | | | |
계절이 스치고 가는 이 강둑의 어깨 위로 | | |
감감히 다가와서 글썽이는 하늘을 봐라 | | | |
부둥켜 흐느낄 푸르름 | | | | |
그 한장을 펴드느니. | | | | |
| | | | | | |
검붉은 물굽이가 시리도록 푸르기가지 | | | |
통곡도 그 분노도 휘청이며 다 막아낸 | | | |
그 날 그 먹빛 탄흔이 | | | | |
火印으로 찍혀 온다. | | | | |
| | | | | | |
무한 청공을 흔든 | | | | | |
황소굴레 그도 가고 | | | | |
텅 빈 강바닥처럼 | | | | | |
보내고 다 용서하고 | | | | |
쓸쓸히 여윈 몰골로 | | | | |
버려진 듯 누운 강둑. | | | | |
| | | | | | |
| | | | | | |
新綠 | | | | | | |
| | | | | | |
깃털 부비며 떨던 연두빛 물서슬이 | | | |
가지 끝 실핏줄에 햇살처럼 쏟아져 와 | | | |
일순에 한폭의 바다로 산과 들이 출렁인다. | | |
| | | | | | |
보랏빛 잔 물결이 하늘에 가 닿을 때면 | | | |
내 꿈은 등이 푸른 아, 한 마리 물고기로 | | | |
온 몸에 빛살을 퉁기며 물포래를 흩는다. | | |
| | | | | | |
비늘 진 그 바다의 잔 물결을 베고 누우면 | | |
하늘의 별빛들도 내 가슴에 살푸시 떠 | | | |
녹물 밴 우주를 휘감고 푸른 넋을 깨운다. | | |
| | | | | | |
| | | | | | |
조주환 | | | | | | |
1946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하였다. | | | |
1976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시조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
한국문인협회 회원('79)이며, 한국시조시인협회감사('85~'86), | |
영남시조문학회 부회장('83~'85), 비화시조문학회 회장('78~'85) 등을 |
역임하였다. | | | | | |
시조집으로는 《유성이 흐른 강건너('74)》, 《길목('86)》이 있으며, |
제5회 중앙일보 제정 〈중앙시조 대상〉을 수상하였다. | |
한국시조시인협회 경북지부장이고 | | | |
현재<1988년> 포항여자고등학교에 재직중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