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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석불사(상)
그 영광과 오욕의 이력서
세계적인 유물이란
어느 날 한 중년여인으로부터 아주 당돌한 전화를 받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독자
인데 꼭 만나서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귀찮기도 하고 시간 버리는 일 같아 전화로 말
하라며 딱딱하게 대했더니 여인은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따지듯 말하였다.
다름아니라 우리 문화가 고유한 특색을 갖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그것이 혹
국수적인 자기고집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일어나서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남편 따라 외국여
행할 기회가 많았는데요. 우리나라엔 마야의 제단 같은 것도 없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
의 꼴로쎄움, 중국의 자금성, 인도의 타지마할 같은 세계적인 유물과 비교하면 초라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요. 이 점을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요.
얼굴을 마주한 대화가 아닌지라 질문자의 자세를 읽을 수 없었지만, 어찌 생각하면 오만
하고 어찌 생각하면 자뭇 사려깊은 고뇌의 고백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동안 서구문화를 동
경하며 살아온 중년세대로서는 당연히 찾아옴직한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능글맞
게 그러나 당차게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우리에겐 피라미드도 타지마할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없는 나라가 왜
우리나라뿐인가요? 일본에 있습니까, 프랑스에 있습니까? 마야의 제국은 마야제국 이외의
나라엔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계에서 제일가는 유물만 골라서 우리와 비교하며 스스
로 비참에 빠집니까? 그런 불공평한 비교가 어디 있으며 그렇게 비교해서 견딜 수 있는 나
라와 민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의 다그치는 듯한 대답이 계속되는 동안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간혹 예예 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고개 숙인 채 끄덕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잠
시 후 여인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질문한 제가 부끄럽네요. 그러면 하나만 더 묻고 싶어요. 우리에게도 세계에 그런 식으로
내세울 문화유산이 있나요?"
"물론 있죠, 동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선 한글이 그렇고, 제 책에 쓴 에밀레종이 그
렇고, 팔만대장경이 있고, 무엇보다도 석굴암이 있습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우리의 모
든 문화유산이 다 사라진다해도 석굴암만 남아준다면 한민족이 쌓아온 문화적 긍지는 손상
받지 않을 겁니다."
"석굴암이 그렇게 위대한 것인가요? 지난 여름에 애들하고 갔었는데 유리장 밖에서 슬쩍
보아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던데요. 선생님 두 번째 책에는 석굴암을 쓰실 거죠. 꼭 읽고 다
시 가볼게요. 그리고...."
"그리고 뭐요?"
"그리고, 나처럼 멍청한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도 쓰실 수 있다면 써주세요.
실은 제 주위엔 그런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거든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후회했다. 나는 차라리 그 분이 내게 보낸 신뢰에 감사했어야 옳
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차라도 마시면서 사람 사는 정을 실어가며 대화를 나눌 일
이었는데....
종교와 과학과 예술의 만남
석불사의 석굴,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석굴암이라고 잘못 보르고 있는 저 위대한 존상에
대하여 내가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이 행여 하나의 오만이 아닐까 두렵다. 석불사
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의 최미이다. 거기에는 전세계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지
금도 석불사의 석굴 앞에 서면 숨막히는 감동과 살 끝이 저려오는 전율로 인하여 감시 아름
답다는 말 한마디조차 입 밖에 내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오직 침묵 속에서 보내는 최대의
찬미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석굴에 감도는 고요의 심연에서 끝도 없이 흐르고 있는 신비롭
고 장중한 정밀의 종교음악을 감지할 뿐인 것이다. 석굴에는 불, 보살, 천, 나한이 모두 마흔
분 모셔져 있다. 거기에는 절대자를 중심으로 한 천상의 질서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팔만
대장경으로 설명한 장엄하고 오묘한 불법이 이 하나의 석굴안에 요약되어 있다. 그 절묘한
만다라를 모두 해석해낼 학자는 아직 없다.
석굴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되었다. 석굴의 구조는 그 평면
과 입면이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수리 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
분의 통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 있다. 남천우 교수는 석굴을 측정하고서 그 엄청난 무게의
돌을 자르고 깍아 세우면서도 10m를 재었을 때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
시 말하여 1만분의 1의 실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 무서우리만큼 정확한 기술에는 우리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과학이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와 보수에 보수를
거듭하면서도 온전한 보존책을 아직껏 마련치 못하고 있는 것은 현대의 기술만 과신하고 고
대인의 과학을 무시했던 소치였다. 석굴은 제존상은 분명 종교예술품이다. 아무런 생명도 성
격도 없는 돌을 깎아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절대자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종교적 열정에
근거한 예술혼의 산물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예술성을 비판하거나 의심한 사람은 없
다. 그 어떤 독설의 비평가도 이 앞에선 입을 열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시인도
석굴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노래하지 못했다. 고은 선생은 석굴 앞에서 "모든 이
나라의 찬미 형용사는 그곳에 모여들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다른 것을 찬미하기 위하여 나갔
으니 석굴은 하나의 형용사로서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석불
사 석굴에 대하여 완벽한 인간공력이 이루어낸 경이로움만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 오직 한
마디만 덧붙일 수 있다.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시작하는 석불사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다만 그 신비와 신비를 밝히기
위한 노력들과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거기에 걸었던 소중한
인생들에 대한 증언, 그리고 20세기 한국사의 슬픈 굴절 속에서 석굴이 겪어야만 했던 쓰사
린 아픔을 말하는 석불사 석굴의 영광과 오욕의 이력서를 쓰는 일뿐이다.
김대성의 창건설화
석불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성이 두 세상 부모에게 효도하다
>뿐이다. 위대한 명작에 대한 기록으로는 너무 빈약한 것인데, 그나마도 지방에 전하는 옛
기록인 '고향전'과 절집에 전하는 기록인 '사중기'가 다르다면서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
어 모두 소개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로서는 더더욱 미궁속에 빠진다. 더욱이 일연 스님의 서
술방식은 현대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전설을 천연덕스럽게 풀어간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
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항은 어느 것 하나 거짓이 없다는 사료의 정확성과 신빙성도 지
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읽을 때는 그 설화 속에 깃들인 상징과
은유를 잡아내야 한다. 석불사의 석굴 또한 그런 노력 속에서 신비의 베일을 벗길 수 있다.
모량리의 한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성
과 같으므로 대성이라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아이를 키우기 어려우매 부자 복안의 집에 품
팔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밭 몇이랑을 주어 먹고 입고사는 밑천으로 삼게 되었다. 이때에
덕망있는 스님 점개가 육륜회를 흥륜사에서 베풀고자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하기를 권하니
베 50필을 바쳤다. 이에 점개 스님이 축원하기를 단월(독실한 신도)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시
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의 이를 얻게 하고 안락장수하게 하리로다
하였다.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들어와 어머니께 "내가 문에서 스님이 축원하는 말을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데 우리가 전생에 닦은 선도 없어 이와같
이 곤궁하니 지금 보시치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용해서 얻은 밭
을 법회에 시주하여 뒷날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매 어머니가 좋다고 하
여 밭을 점개에게 보시하였다. 그 뒤 얼마 안되어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는 하늘로부터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집안 사람들이 놀라 모량리를 검사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고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던 한날 한시에 김문량의 집에서는 아기를 배어 이윽고 출산하였다. 아이
가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이레 만에 펴니 '대성'이라 새긴 금패쪽을 쥐고 있었으므로 이
로써 이름을 삼고 모량리 어머니를 이 집으로 맞아 함께 봉양하였다. 대성은 장성하여 토함
산에서 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시비해 가로되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으리라" 하였다. 대성이 두려워하여 용서를 빌자 "네가
나를 위하여 능히 절을 지어주겠는가" 하므로 대성이 맹세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고 꿈
을 깨니 땀이 흘러 자리를 적시었다. 이후 들판의 사냥을 금하고 그 곰을 잡은 자리에 장수
사를 세우고 이로 인하여 자비로운 결심이 더하여갔다. 이에 현세의 부모님을 위하여 불국
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하여 석불사를 세우고 신림과 표훈 두 스님을 청하여 각각
머물게 하였다.
이상은 '고향전'에 나오는 기록이라며 일연 스님은 이어 말하기를 "이에 불상설치를 성대
하게 하여 길러준 은공을 갚으니 한 몸으로 2세의 부모에게 효도하였음은 옛적에도 드문 일
이며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은 그 목석에 조각한 공교로운 기술이 동부의 여러 사찰 중
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절에 전하는 기록을 옮겨놓았다.
'사중기'에 의하면, 경덕왕 때 대상인 김대성이 천보 10년 신묘(751)에 불국사를 세우기 시
작하여 혜공왕대를 거쳐 대력 9년 갑인(774) 12월 2일에 대성이 죽었으므로 나라에서 이를
완성하고 처음에 유가의 대덕인 항마를 청하여 이 절에 거주케 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하였
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 설화 속의 주인공 김대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 실체를 밝힌 분은 이기백 교수였다.(<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이기백 교수는 <삼국사기>에 김문량이라는 사람이 중
시로 있다가 711년(성덕왕 10)에 죽었으며, 또 김대정이라는 사람은 6년 동안 중시로 있다가
750년(경덕왕 9) 1월에 그만둔 사실이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문량과 김대성
과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며, 그것은 당시 고유어의 이표기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이것을 통
해 우리는 김대성이 혹 가난한 집안 자손으로 재상을 지내는 명문집안에서 길러진 것이 그
런 전설을 낳게 되었고 김대성 자신 또한 재상을 지냈고, 재상자리를 물러난 바로 그 다음
해에 불국사와 석불사 창건을 추진하다가 24년이 지나도록 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완성했다는 사실로 인식하게 되었다.
석불사 석굴의 유래
석불사는 암자가 아니라 석굴사원이다. 석굴은 인도에서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 챠이티야
라고 하여 암석을 파고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도량을 세우는 방법이다. 이는 장방형의 전실
과 원형의 주실로 구성되며 주실 중앙에는 스투파(탑)가 있어 참배자들이 이 스투파를 돌며
예배하게끔 되어 있다. 석불사의 석굴도 기본구조는 이 챠이티야와 같다. 챠이티야는 기원전
무불상시대에서 기원후 불상시대로 넘어오면서 주실에 불상도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도
의 아잔타, 중국의 돈황, 운강, 용문 석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석굴사원을 조영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산은 노년기 지형으로 단단한 화강암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처럼 쉽게 굴착될 수 있는 사암이 없다. 그래서 이를 변형하여
백제의 서산 마애불처럼 바위에 새기거나 고신라의 감실부처님처럼 작은 규모로 바위를 깎
거나, 통일신라 이후 군위의 삼존불처럼 자연석굴을 이용한 석굴사원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
이 석불사의 석굴에 이르러서는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공석굴을 조영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주실의 천장이 궁륭을 이루는 돔으로 설계된 것이다. 모르타르가 없던 시대
에 낱장의 돌을 쌓으면서 서로의 힘을 의지하며 반구형의 돔을 형성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
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역학관계가 어긋나도 안쪽으로 쏟아져내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통일신라 사람들이 돌을 다룸에 있어서 얼마나 탁월한 기술이 있었고 또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첨성대, 석빙고, 불국사의 돌축대 등
을 축조했던 경험이 있다. 또 수많은 석실 무덤의 축조에서 천장을 - 비록 궁형은 아니지만
- 마무리했던 기술을 갖고 있었다. 석불사의 인공석굴 계획은 이런 기술과 문화능력을 바탕
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장을 돔으로 만든다는 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대단한 구상
인데, 김대성은 여기에서 '팔뚝돌'이라는 버팀돌의 힘을 창안하였다. 석굴의 천장은 반구형으
로 올라가는 것이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다. 석굴 안으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보면 아래쪽
제 1단과 제 2단은 평판석 12개, 13개를 호형으로 다듬어 이어나갔는데 천장덮개돌을 향한
제 3, 제 4, 제 5단은 모두 10개의 평판석과 그 사이마다 끼워 있는 돌출된 삐침돌을 볼 수
있다. 이 삐침돌을 보통은 '동틀돌' 또는 '리벳(대갈못)형상'이라고들 부르고 있으나 남천우
교수는 아주 적절하게 '팔뚝돌'이라고 표현하였다. 팔뚝돌은 실제로 주먹을 구부린 팔뚝모양
으로 되어 있다. 그 길이는 대략 2m이다. 이것을 바깥쪽에서 빙 둘러가며 비녀를 꽂듯이 수
평으로 끼워 아래쪽 평판석을 눌러줌으로써 낱장의 천장석들은 역학적 균형 속에 안정을 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팔뚝돌의 구조는 지금 경주에 있는 '신라역사과학관'에 모형으로
만든 분해도를 통하여 확연이 이해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 토목기술, 특히 석조기술의 놀라
운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 난 사연
모든 신비로운 유물은 저마다 조그마한 흠집과 함께 미완성의 전설을 갖고 있다. 석불사
의 석굴은 마지막 마무리단계에서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 나고 마는 사건과 함께 그 미완성
의 전설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 난 것을 이렇게 증언하였
다.
대성이 장차 석불을 조각코자 큰 돌 하나를 다듬어 덮개돌을 만들다가 갑자기 세 토막으
로 갈라졌다. 대성이 통분하여 잠도 채 들지 않고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서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에 올라 향나무를
태워 천신께 공양하였다. 이로써 그곳을 향령이라고 한다.
석불사 남쪽의 봉우리를 향령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지금 주차장자리가 거기라고 한다.
천장덮개돌의 안치는 곧 석굴의 마지막 마무리를 의미한다. 덮개돌을 눌러줌으로써 천장의
낱낱돌이 힘의 평형을 이룬다. 천장덮개돌은 지름 2.5m, 높이 1m 되는 홈통을 끼우는 꼴로
되어 있다. 간단히 마무리하자면 둥근 원기둥을 아래쪽은 크기를 구멍에 맞추고 dnlWHr은
좀 더 크게 마들어 끼우면 빠뜨릴 일도, 떨어뜨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욕이라고 할
까 아니면 완벽주의의 소산이라고 할까? 김대성은 그것을 아름다운 연꽃이 두겹으로 피어나
는 모습으로 디자인하였다. 그래서 석굴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구멍을 막은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연꽃이 본존불의 머리 위에처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
했던 것이다. 측량기사 요네다는 이것을 태양으로 생각했고 고유섭 선생은 광배의 이동으로
보았다. 김대성이 설계한 천장덮개들은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손잡이 없는 찬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화문 지름이 2.5m, 높이 1m, 바깥쪽 지름이 3m 되는 크기로 무게만
자그마치 20톤 짜리였다. 이것을 떨어뜨려 세 동강 내고 만 것이다.
김대성은 얼마나 낙심했을까? 일연 스님은 "분하고 억울했다"고 표현했다. 어찌하면 좋을
까. 그 고민중에 김대성은 잠이 든 것이다. 그리고 잠든 사이에 천신이 와서 설치하고 갔다
는 것이 설화의 내용이다. 설화는 항시 사실에 기초한다. 심지어는 꿈도 사실에서 연유한다
고 한다. 혹자는 이 꿈을 김대성이 꿈에서 천신의 계시를 받아 마무리했다고 해석한다. 그렇
게 해석하려면 깨진 것이 아니라 새로 깎은 덮개돌이어야 한다. 김대성이 자기 손으로 마무
리했다면 20여 년이 걸린 대역사를 깨진 덮개돌로 얹을 리가 있겠는가. 나는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완성시켜놓았다고 해석하고 싶다. 그들은 20개의 쐐기돌을 박아 천장덮개
돌을 얹은 것이다. 그것은 이 지루한 공사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던 석공들의 욕망의 표현
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무게 20톤이나 되는 2.5*3*1m의 돌을 채석해서 복판연꽃을
새긴다는 일 자체가 한심스러웠을 것이다. 일이란 마무리단계에 오면 더욱 그런 법이다. 생
각해보아라, 25살에 이 공사를 시작한 석공은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것이 겨
울날이었다면 또 어떠했을까 미루어 알 만하다.
석공들은 그들의 고집대로 또는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후딱 해치웠는데 김대성의 꿈에는
그들이 천신으로 현몽했던 것이리라. 나는 1년간 미국에 연수차 가 있은 적이 있다. 이국의
밤은 언제나 쓸쓸했다. 그 고독을 달래려고 침대에 누워 텔레비젼을 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곧잘 잠이 들었다. 그런 어느 날 꿈에 그리운 나의 아내가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드
니 아내는 손을 저으며 우선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부르겠노라며 애잔한 목소리로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를 불렀다. 20년 전 대학생 때 애청하던 너무도 황홀한 노래
여서 깜짝 놀라 깨어보니, 켜놓은 채 잠든 텔레비젼에서 존 바에즈 리싸이틀을 방영하고 있
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때 김대성 꿈의 천신과 내 꿈속의 아내가 같은 종류의 현몽이라고
생각했다. 미완성의 전설은 언제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것으로 인하여 실패작이라는 혐의
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비함을 더해주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
자>는 5%의 미완성으로 그 신비로움을 더해가듯이 석불사 석굴의 세 동강 난 천장덮개돌
은 석굴의 난공사를 더욱 실감케 해주는 아름다운 상처인 것이다.
잊혀져가는 석불사
김대성이 세운 석불사의 석굴사원이 그 자체로서 어떤 역사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우리는 아무런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와서 일
연의 <삼국유사>에서 그 창건의 신화와 천장덮개돌이 깨진 전설만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석불사는 아무런 증언 없이 세월이 흐르다가 일연 스님의 증언 이후 400여
년이 지난, 창건 뒤 근 1000년이 되는 조선왕조 숙종 때 한 답사객의 기행문 속에 나온다.
그 기행문은 민영규 선생이 발굴한 우담 정시한의 <산중일기>이다. <산중일기>는 조선시
대의 드문 고사순례 기행일기로 나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그분이 밟았던 그 길을 그대로
답사해보고픈 희망을 갖고 있다. 그중 1688년 5월 15일자로 나오는 석불사 답사기는 석굴의
원형을 잘 설명해주므로 전문을 인용해본다.
(불국사에서)불존을 담당하고 있는 국행이라는 스님과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고 나니 또
꿀물과 엿 그리고 곶감을 먹으라고 가져오므로 얼마 동안 더 앉아 있다가 안내하는 스님을
따라 석굴암(승방을말함)으로 향했다. 뒤쪽 봉우리로 오르니 자못 험하고 가팔랐다. 힘써 십
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고 1리 정도 내려가니 석굴암에 다다랐다. 암자의 스님 명해가 맞이
하므로 잠시 앉아 있다가 석굴에 올라가니 모두 사람이 공력을 들여 만든 것이었다. 석문
밖 양변엔 큰 돌에 각각 4, 5명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교묘함이 마치 하늘이 이룬 것
같았다. 석문은 돌을 다듬어 무지개 모양을 했다. 그 안에 큰 석불상이 있는데 엄연히 살아
있는 듯하다. 좌대는 반듯하고 아주 정교하다. 굴 위의 덮개돌과 여러 돌들은 둥글고 반듯하
게 서 있어 하나도 기울어지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불상들은 마치 살아 있
는 듯한데 그 신기하고 괴이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 이러한 기이한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
다. 두루 완상하다 얼마 뒤 내려와 암자에서 잤다.
이 당시 모습을 그려보면 지금처럼 목조건축의 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역사상 양옆
으로 팔부중상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깨져버렸고 사천왕이 늘어선 비도 앞에 무지
개 형상의 돌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시한은 그 다음날 봇짐을 진 한 거사를
만났는데 그는 아내를 데리고 전주에서 불국사, 석굴을 다니러 오는 길이라 했다 하니 당시
에도 여전히 탐승객, 참배객이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로 들어서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사들이 새로운 중창의 시기를 맞이하듯이 석불사도 중수를 맞게 된다. 1740년에 발
간된 <불국사 고금창기>를 보면 "1703년에 종열이 석굴암(승방)을 다시 짓고 또 석굴 앞에
돌계단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석굴에 어떤 이상이 있었다는 말은 없다. 그 후 손영기
라는 사람이 쓴 <석굴암 중수상동문>에 의하면 1891년에 석굴은 조씨 성을 가진 순상에 의
해 크게 중수되었다고 하였는데 그 중수의 내용과 규모는 확실치 않고 다만 "불국지석굴"이
라고 한 것을 보아 이미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음만은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기록만이 전해진다는 것은 이 유물의 위대함에 비할 때 너무도 가난하다. 어쩌
다 조선시대 문인의 탐승 시구에 서너 번 오른 적이 있다 하나 그것으로 석굴에 예의를 다
해싿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빈약한 기록은 결코 오욕의 상처나 쓰라림은 아니
었다. 이제 우리는 일제시대로 들어서면서 그 아픔의 역사를 더듬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소네 통감의 도둑질
잊혀져가는 명작, 석불사의 석굴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1907년 무렵이었다. 때
는 1905년 11월 일제의 군사적 협박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이후 이른바 보호정치의 명분
으로 조선통감부가 서울 남산, 지금의 안기부자리에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또오 히로부
미가 부임해왔을 때이다. 내 언젠가 다시 증언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또오 히루부미는 이 땅
에 도굴을 조장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무수한 고려청자를 일본 천황과 귀족사회에 선물하였
다. 그로 인해 고려시대 고분이란 고분은 모조리 파괴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곳곳에서 의
병운동이 일어나면서 산사의 스님들은 이른바 '산중치안의 불안'으로 산에서 내려와 공사
로 남아 있는 절이 많았다. 이 틈을 타고 도굴꾼과 문화재 약탈범 들은 사찰문화재를 마구 탈
취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아직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던 때인지라 궁핍한 절
에서 몇푼의 돈으로 사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토함산 높은 산중에 있는 석불사 석굴이 세
상에 늦게 알려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1902년 8월, 동경제대 조교수이던 세끼노 테이
가 고건축 실태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던 일이 있다. 명색은 대한제국 초청이었으나 내막은
청일전쟁 이후 식민지지배를 위한 전국 토지조사사업을 준비하려고 보낸 각 분야 전문가에
의한 조사단 일원이었다. 그때 세끼노는 황폐한 불국사는 보았지만 석불사의 석굴은 존재조
차 몰랐다. 1906년 어용사가인 이마니시가 고적 답사차 불국사에 왔었는데 그도 역시 석불
사의 석굴을 몰랐다. 그리고 1907년에 "토함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는 소문이 일
본인 사이에서 퍼져 있었다고 한다. 이 소문은 한 우체부가 우연히 발견하고 이를 우체국장
(일본인 관리)에게 말한 것이 그렇게 과장되게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석굴이 알려지
자 드디어 도굴꾼이 이 높고 험한 산중에까지 닥치게 되었다. 이때 도굴꾼들은 석굴 내 감
실에 안치된 불상 중 두 개 - 아마도 10개의 감실상 중 가장 아름다운 것 둘을 훔쳐갔다.
운반상의 문제 때문에 그들로서는 둘밖에 못 가져갔던 모양이다. 이때 이들은 혹시 본존불
밑바닥에 복장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본존물 궁둥이 부분을 무참하게 정으로
찍어 깨뜨렸다. 그때 깨진 파편은 땅에 묻혀 있다가 보수공사 때 다시 붙였지만 그 상처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고, 모두 40개의 불, 보살, 수호신상으로 구성되었던 석굴의 조상은
두 개를 잃어버린 채 38개만 남아 있게 되었다. 바로 이때 불국사에서는 다보탑에 있는 네
마리의 돌사자 중 상태가 좋은 3개를 잃어버리게 된다.
1909년 가을, 이또오에 이어 2대 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께가 초도순시차 수행원을
거느리고 경주에 왔다. 소네 또한 엄청난 문화재 약탈자였다. 그의 관심사는 주로 불교미술
품과 고문서였다. 그는 1년도 못되는 통감 재임시 고가, 사찰, 서원에 소장된 우리 고문헌을
무더기로 갈취하여 황실에 헌납했다. 그것이 한일협정 때 반환문화재로 돌아오기 전까지 일
본 궁내청 서룡료에 '소네 아라스께 헌상본'이라는 이름으로 보관돼왔던 것이다. 경주에 온
소네 통감은 그 귀하신 몸으로 어려운 등산을 감내하고 토함산 석불사에 올랐다. 이 고관대
작이 다녀간 이후 석굴 11면 관음보살 앞에 놓여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5층석탑이 온데간데
없이 증발해버렸다. 소네 통감이 사람을 시켜 가져간 것이 분명했다. 본래 석굴은 인도의 챠
이티야에서 기원한 것이므로 추측컨대 본존불 앞과 뒤에 소탑 한 쌍이 안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존불 뒤쪽, 즉 11면 관세음보살 발 아래 있던 대리석 소탑은 소네 통감
이 훔쳐갔고 앞쪽에 있던 소탑은 부서진 잔편만 남아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지금 석
굴 안에는 인왕상 양쪽에 네모난 사리공을 하늘로 드러낸 석탑 받침돌만이 쓸쓸히 그 옛날
을 말해주고 있다. 이 소네 통감의 도둑질과 감실불상의 실종에 대하여는 야나기 무네요시
가 전언을 인용한 것도 있지만 두 사람 일본인 관리의 증언이 더욱 생생하다. 하나는 경주
박물관 초기에 촉탁으로 관장을 대리했던 모로가가 유인물로 남긴 <경주의 신라유적에 대
하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지금 석굴암은 9면관음(11면관음) 앞에 남아 있는 대석 위에 불사리가 봉납되었다고 구전
되는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 탑이 있었는데 지난 메이지 41년 봄(42년 가을의 착오, 1909)
에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간 뒤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
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또 하나의 증언은 통감부 설치 때 조선에 건너와 경주군 주석서기로 있으면서 소네 통감
의 석굴암 관람을 안내했던 키무라가 <조선에서 늙으며>(1924)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구절
이다.
나의 (경주군) 부임을 전후해서 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되어 내지(일본본토)로 반출돼 있는
석굴 불상 2구와 불국사의 다보탑 사자 1대(한 쌍)와 등롱(사리탑)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
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다.
이로써 소네 통감의 도둑질은 다름아닌 일본인의 증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일본인의 증언을 읽으면서 "애석하기 짝이 없다"와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라는 구절을 깊이 음미해보았다. 얼핏 생각하기에 증언자들은 우리 문화재
를 노략질해간 일본인과 동족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의 분개가 허사이고 위선이란 말인
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조선에 대한 - 야나기류의 - 동정적 시각
에서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일본 관료정신의 발현이었던 것이
다. 식민지의 재산관리를 맡고 있던 실무자들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노략질보다도 더 무서운 식민지지배의 힘이었다. 석불사의 석굴을 탐
방하고 소탑까지 훔쳐간 소네 통감은 서울로 돌아간 다음 미술사가 세끼노를 현지에 보냈
다. 석굴의 문화재적 가치를 "동양무비의 작품"이라며 최고로 평가한 세끼노의 보고를 들은
소네 통감은 석굴의 보수와 보존을 검토하면서 그 결론으로 석굴의 불상을 모두 서울로 옮
겨간다는 구상을 하였다. 석굴을 헤체하여 모든 석재를 동해안 감포로 끌고 와 거기서 인천
항으로 운반한다는 계획이었다. 조선통감부는 즉각 경상도 관찰사에게 이 계획을 현지 군수
에게 알리고 소요경비의 견적서를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정으로는 거의 무모
한 계획이었고, 키무라의 <조선에서 늙으며>에 의하면 현지 여론도 심상치 않았는데, 소네
통감이 해임됨에 따라 그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석굴의 운명은 곧 이은 한일합방
과 함께 테라우찌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테라우찌 총독의 보수공사
1910년 한일한방과 동시에 첫 총독으로 부임한 테리우찌는 식민지의 통치와 재산관리를
위하여 무단정치를 실시하면서 토지조사를 비롯하여 문화재관리에도 치밀하고 철저한 조사
작업에 들어간다. 세끼노 테이를 단장으로 한 조선고적 조사사업도 해마다 발간하는 보고서
와 연차사업으로 간행된 <조선고적 도보>만 보아도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일제는 이제 우리 문화재의 노략에서 관리체제로 들어간 것이다. 즉, 식민지 재산이란 곧 일
본정부의 재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에서는 석굴을 포함한 경주 주요 고적
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케 하였는데 1912년 6월 25일자 복명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
다.
그 구조의 진기함과 조각의 정미함은 당대의 최우수 유물이라 하겠는데, 현상은 반구형
천장의 3분의 1정도가 추락하여 동혈이 되어 그 안으로 산 위의 흙과 모래가 유입되어 불상
을 더럽히고 있으며, 현상태로 놔두면 천장의 3분의 2도 추락하여 주벽 불상을 상하게 되고
중앙에 있는 석가모니 대상을 파괴하여 동양 무비의 미술품을 멸망시킴에 이른다.
그리하여 테라우찌 총독은 그 해 직접 토함산 석굴에 올라 현장을 답사하고 대대적인 보
수공사를 지시하였다. 초독부 토목국 기사인 쿠니지를 현장에 출장 보내 보수계획을 수립하
게 했다. 1913년 4월 8일자로 된 그의 복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을 일단 전부 해체하고, 주위의 석벽도 모두 다시 쌓아서 뒷면에 두께 3자 균일로 콘
크리트를 박으며, 천장도 되도록 구석을 사용하고 부족한 것만을 보충하여 그 위에 두께 3
자의 콘크리트를 박아 다시 추락하지 않게 한다. 전면입구 상부는 원래 천장이 있었던 것이
중세에 파괴된 것이므로 이것도 철근콘크리트로 덮으면 석상의 보존상 크게 유효한 것이 될
것이다. 이에 예산을 계산한바 대략 별지와 같다.
이 복명서에 따라 설계도면과 예산조서가 작성되고 9월 12일에 토목국에서 내무부 앞으로
'석굴암보존공사 설명서 및 동설계도면' 각 3통이 송부되고 9월 13일 이 서류에 세끼노 테
이의 의견서를 첨부하여 공사착수를 위한 테라우찌 총독의 결재가 이루어졌다.
해체되는 석굴
이로 인하여 석불사의 석굴은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 해체되는 비극적인 대수술을 받게
된다. 1913년 10월, 석굴 해체공사를 위하여 천장덮개돌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목제 가구를
설치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12월에 이 작업을 완성하고는 철조망으로 출입금지케 한 다
음 한 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인 1914년 5월 21일부터 공사를 재개하여 6월 15일에는 지붕돌
을 다 들어내고, 8월 17일에는 굴 내 조각을 다 들어냈으며 9월 12일에는 완전 해체하였다
고 현장감독을 맡았던 이시지마 기사의 보고서에 나와 있다. 9월 27일 부터는 콘크리트벽을
세우기 위한 굴토작업을 시작하여 10월 9일부터 콘크리트를 부어넣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
에서 이들은 석굴 뒤쪽 암반에서 두 개의 샘물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샘물이
석굴밑의 암반을 관통하여 지금 석굴암 공터에 있는 감로수로 흘러내리는 오묘한 뜻을 이해
하지 못하고 아연관으로 배수로를 만들어 밖으로 빼어내었다. 그 오묘한 뜻이란 훗날 이태
녕 박사가 밝혀내게 된다.
1914년도 석굴 해체작업 때의 인부를 보면 석공과 연직 목수는 모두 일본인이었고 한국인
은 잡역부로만 일했는데 석공의 임금은 2원 10전임에 반하여 한국인 인부는 45전이었고 같
은 인부라도 일본인은 1원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콘크리트 배합은 암반기초에는 시멘트
1, 모래 1, 돌가루 4의 비율이었고, 돌의 결합은 시멘트 1, 모래 1의 모르타르로써 견고하게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3차연도인 1915년 5월에 석굴 재조립공사가 시작되었다. 본래 석굴의
외벽은 "지름 5자의 옥석 또는 절석으로써 이중으로 쌓아올려" 내벽을 두껍게 포장하여 석
굴 내부의 공기가 숨을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기술, 아니 이 시대의 기술
로는 그렇게 재조립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외벽에 3자 정도의 석재를 쌓아 버팀판을
만들고는 두께 2m의 콘크리트 외벽으로 싸발라버렸던 것이다. 석조물의 보수공사에서 시멘
트를 사용한 것은 석굴 보존에 치명상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
와 칼슘의 해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는 시멘트의 모르타르 기능만 생각하고 석불
사 석굴, 분황사 석탑, 미륵사지 석탑 등의 보수에 모든 시멘트를 무지막지하게 발라버렸던
것이다. 특히 석굴에서의 치명적인 손상은 석굴 내부가 콘크리트벽으로 인하여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런 결정적인 손상을 입으면서 석불사의 석굴은 1915년 9월
13일에 3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성대한 준공식이 거행된다. 이때 총공사비는 2만 2726원이었
다. 남천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때의 공사는 천장 앞부분만 수리하면 간단히 끝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총독부가 완전해체에 2m짜리 콘크리트 외벽쌓기, 그리고 286
개에 달하는 석재를 교체하는 방대한 공사를 시행하게 된 것은 테라우찌 총독의 방침 때문
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즉, "너희 조선사람들은 이 위대한 문화유산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미개한 민족이다. 그러나 이제 황국의 보호를 받게 되어 이처럼 최신식 설비와 재료
로 완벽하고 말끔하게 보수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일합방의 뜻이니라"라는 대국민 과시용이
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굴의 개수공사는 1200년을 유지해온 석굴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
만 주었다. 그리고 외형상에도 무수한 변조가 가해져 야나기 무네요시는 장문의 <석불사의
조각에 관하여>라는 글을 <예술>지 1919년 6월호에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통탄의 비판
을 가하였다.
나는 이것(보수된 돌담)을 보았을 때 그 몰취미한 행위에 크게 놀랐다. 무슨 이해가 있다
고 거의 터널의 입구로 잘못 보는 그러한 건설을 해놓았을까? 나는 이것이 석불사의 수리가
아니라 새로운 파손행위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기사는 비록 과학적인 수리를 했다 하더
라도 아무런 예술적 수리는 알지 못한 것 같다. ....될 수만 있다면 저 돌담을 파괴해서 그
수리는 조선인 자신에게 맡기고 싶다. ....석불사는 다행히도 왜구의 화를 면했다. 그러나 수
리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모욕을 당했다. ...만약 그 수리가 단순히 천장을 덮고 각 돌담의
위치를 제자리에 갖추는데 그쳤더라면 얼마나 아름답게 되었을까? 나는 파손된 채로 있는
그때의 사진과 수리 후의 사진을 비교해보면서 예술을 모르는 죄많은 과학의 행위를 미워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이끼
그러나 미관보다더 더 큰 문제는 이 신식 기술과 재료 사용으로 인하여 석굴이 극심한 누
수현상을 일으킨 것이었다. 준공 2년 뒤인 1917년에는 하는 수 없이 빗물누수 방지공사를
위하여 천장돔 외부에 하수관을 묻는 보수공사를 하게 된다. 2차 보수공사 뒤에도 석굴의
누수현상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0년 9월 3일부터 1923년까지 4년에 걸친 대대적인
제 3차 보수공사를 시행하게 된다. 천자웁분의 콘크리트벽에 방수용 아스팔트를 바르는 작
업과 석실 지하수의 아연관 배수로가 샘물을 다 감당하지 못하므로 오른쪽으로 빼돌리는 공
사를 하였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이 1차 공사의 70%가 넘는 1만 6980원이었다니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3차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석굴의 습기문제는 역시 해결되지 못했다.
석굴에는 푸른이끼가 끼며 육안으로도 그 손상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27년 증기사용에 의한 세척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한 보일러를 제작 설치케 하였
다. 이끼가 끼는 원인을 조사하여 그것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작동에 의하여 처리하
는 강제방법을 동원한 것이었다.
수증기 분무에 의한 세척작업은 석굴의 돌들이 풍화작용을 일으키는 데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일이었다. 이것을 함부로 할 수 없음은 일본인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
제의 기술을 과시하려고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3차에 걸쳐 시행한 총독부로서는 또다른 새로
운 기술설비, 사실상의 흉기로 석굴의 모든 조각상에 증기를 뿜어대었다. 증기세척이란 핀란
드식 사우나탕에 들어가 앉는 목욕법이 아니다. 그 뜨거운 증기를 샤워꼭지로 뿜어대는 것
이다. 그들은 경주역에 있는 기관사를 불러다 기름보일러에 불을 때서 스프레이식으로 석굴
을 세척했다. 낙숫물도 돌을 깨뜨리는 힘을 갖고 있는데 하물며 물총을 쏘듯이 뿜어대는 증
기로 인한 피해란 비과학도의 상식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927년 증기세척으로 일
단 푸른 이끼를 제거하였으나 시간의 경과 속에 이끼는 또 피어났다. 1933년 8월 16일 경북
도지사가 총독부 학무국장 앞으로 보낸 <석굴암 석불 및 주위 불상의 보존에 관한 건>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종래에는 약간의 푸른 이끼가 끼고 있었던바 이번 여름에 들어 장기강우로 말미암아 이끼
가 격증하여....습기가 굴 내에 가득하고 또 천장으로부터 물의 점적이 끊이지 않고 떨어져....
이대로 방임할 때에는 부식작용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지급 전문기술원을 파견하여....지
시를 바라는 바이다.
이리하여 1934년, 석굴 옆에 설치한 흉기, 보일러가 다시 가동되며 증기세척으로 분무세례
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15 해방을 맞으면서 석불사 석굴의 제문제는 우리에게 넘
어오게 되었다. 일제 36년을 통하여 일제가 석굴에 남겨준 유산이란 두께 2m의 콘크리트
벽과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푸른 이끼, 그리고 가공할 흉기, 증기세척 보일러뿐이었다. 그
것은 석불사 석굴이 겪은 오욕의 역사에 첨부된 증거물이었다.
유흥준의 "우리문화유산답사기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