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소재 고령 신씨 시조공 申成用의 묘소이다.
한 가문의 시조공 묘소답게 용맥과 조안산이 대단히 화려하고 묘역관리도 훌륭하다.
다만 가장 중요한 점혈은 실혈을 하였다. 현 묘소에서 백호방 쪽으로 조금 내려와야한다. 그래야만 청룡쪽 계곡에서 불어오는 살풍을 피할 수 있으며 안산 매화 꽃봉우리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수백년간 묘소를 실전한 것이 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정확하게 점혈을 했다면 묘소를 실전 할리가 없다고 본다.
이 곳은 용맥이 급하게 내려오기 때문에 그것을 잡아주는 지각이 있어야 결혈이 가능한데 지각이 없는 대신에 선익사의 바위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혈처 앞의 전순 바위 등의 혈증이 그 곳이 진혈임을 암시하고 있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신라 왕족의 후예로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했다. 선조들이 고령에 살면서 대대로 호장(戸長)을 지내 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시조의 현손 신덕린은 고려 말 우왕 때 예조판서를 지냈고, 글씨에 뛰어나 그의 글씨를 덕린체라 일컬었다. 『해동필첩(海東筆帖)』에도 명필로 기록되어 있다.
신덕린의 아들 신포시는 고려 공조참의를 지냈고, 신포시의 맏아들 신장(申檣)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세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신포시의 둘째 아들 신평(申枰)은 세종 때 사간원정언을 지냈고, 셋째 아들 신제(申梯)는 벼슬이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문충공 신숙주(申叔舟)를 포함한 신장의 아들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이후 정승을 비롯한 91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유좌 묘향



현 묘봉에서 보면 매화 꽃봉우리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午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