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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진
부산 출생. 2012년 제8회 농어촌문학상 우수상 수상.
∥당선작
어떤 각본
그는 죽은 게 아닐 것이다. 각본에 따라 얼마 후면 내 앞에 불쑥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는 각본에 적힌 병명으로 마치 죽기라도 한 것처럼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내가 돈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할 무렵이었다. 환상인 듯 그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나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버스터미널이나 극장에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그가 감춘 각본을 빼앗아서 읽어보고 싶었다.
그 친구와 가깝게 지낸 건 두 사람 모두 하청업을 한 탓이었다. 두 회사의 종업원들은 자주 애를 먹였다. 납품을 하더라도 수금이 제때 되지 않았다. 원청 업체의 횡포는 나날이 수위를 높여갔다. 그 일로 포장마차에서 자주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 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졌다. 그럴 때 P는 걱정스런 마음에 그 친구를 찾아 술집으로 왔다.
그 무렵이면 두 사람의 얘기는 고갈되었다. P가 등장을 하자 한 바퀴를 돌렸던 테이프가 다시 돌았다. 술이 모자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사업 얘기에다 애들 키우는 문제까지 불거졌다.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범위가 넓어졌다. 그들은 술자리를 빌어서 다투기도 했다.
나는 그가 아내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친구의 아내 P는 간호사였다. 그걸 늦게야 알았다. 그래도 P의 병원에 일부러 가는 경우는 없었다. 애들이 아파 시간을 다툴 때 P를 찾아가면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서 좋았다.
P는 대명사를 자주 썼다. 그것이 무언가를 숨길 목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한 건 나중의 일이었다. 알고 보니 각본에 그렇게 적혀있었던 것 같았다. P의 말을 해석하려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게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되었잖아요. 그런 식의 문장을 나열했다. 그럴 때는 어려운 국어 문제를 푸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P의 얘기를 들고 있으면 멀쩡하던 머리가 아팠다. P가 친구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거기서 그거 한잔 할까요? 그 정도면 일차 함수에 속했다. 그때 그걸 그렇게 해서 그렇게 마무리 지었는데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그거 해요.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 P는 그 정도 문제를 풀어야 친구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절을 할 작정이 아니라면 P의 말을 귀담아 들으라는 눈짓을 했다. P는 자신의 언어 습관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럴 지경인데 그 친구는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했다. 각본에는 아마도 언어 소통이 되지 않으면 병이 걸리는 걸로 되어있을 것 같았다.
월급날이 다가오면 친구의 말은 빨라졌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전화기의 목소리에 비장함이 서려있을 때도 있었다. 납품한 회사는 물품 대금 지급 일자가 일정하지 않았다. 그 회사에 목을 매달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친구는 몇 번인가 월급을 늦춘 적도 있었다. 그는 그 일도 못할 짓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빛이 간절해 보였다. 형편이 된다면 그의 자금 사정을 해결해 달란 뜻이었다. 나도 자금 사정이 어려웠다. 은행 돈을 대출해서 겨우 회사를 꾸리는 형편이었다. 그가 궁지에 몰릴 처지라면 은행 대출계를 찾아가서 사정을 해볼 생각은 있었다.
여드름도 잘 나지 않았던 내게 종기가 생겼다. 부위가 목 뒤편이었다. 잘못하면 경추신경을 건드릴 지도 모른다고 주위 사람들이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일은 늦게 끝났으니 병원의 진료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아무런 처치를 하지 않고 있었으니 목의 종기가 점점 커졌다. 세수를 할 때도 목 근처가 욱신거렸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더니 솟아 오른 종기의 크기가 불룩했다. 살갗 속의 뿌리를 떠올리니 겁이 더럭 났다. 그 무렵엔 일이 밀려서 세 끼 식사를 밖에서 할 때였다.
일요일이었다. 오후 세 시가 되자 일이 마무리되었다. 통증을 잊었던 목덜미를 누군가 당기는 것 같았다. P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게 그렇게나 그거 해요? P의 말은 목 뒤의 종기만큼이나 나를 답답하게 했다. 지금 병원에 가도 되겠느냐는 말에 P는 정 그거하면 일단 그거 하세요. 답답했던 나는 일방적으로 P와 약속을 정한 뒤 병원으로 갔다. P는 집에 있다가 급히 달려온 차림이었다. 아마도 가운을 입고 있었더라면 P에게 종기를 보여주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종기를 본 P는 이게 엄청 그거 했네요. 내가 그거해서 그거 하도록 할 테니 잠시 그거 하세요. 아픈 목덜미보다 속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수술을 하자는 말이었을 것이다. 누가 메스를 잡는지 알 수 없었다. 위험하지는 않은지 수술을 하면 활동에 지장은 없는지도 몰랐다. 돌아올 대명사들의 혼란을 생각해서라도 더 물어보질 못했다. 일단 병원에 왔으니 종기는 처치가 될 거라 믿었다.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P는 그 남자에게 반말을 했다. 그게 그거 해서 그거 할 수 없어서 그거 했나 봐. 그 말과 상관없이 종기를 보고 자기 손으로 충분히 해결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 같았다. 남자는 마취제가 든 유리관을 똑, 잘랐다. 일회용 주사기를 집었다. 유리관 속의 약물을 가득 빨아 당겼다. 주사기를 거꾸로 세웠다. 약물이 하늘로 솟구치도록 짰다. 내 목덜미에 주사기를 갖다 댔다. 따끔, 그 느낌 뒤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거 하면 그거 하는데 그거 되지 않을까. 내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목의 통증이 멎으니 귀에 와 닿는 목소리가 더 컸다.
수술이 끝난 것 같았다. 목덜미가 묵직했다. 목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이제 그거 했으니 그거 할거예요. 집에 가서 그거 잘하세요. 그 말에 나는 P와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천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곱씹어 생각한다면 그들이 P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각본을 왼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약봉지를 챙겼다. 집으로 온 나는 수술에 대한 사례를 잊었다는 걸 떠올렸다. P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거 아무런 그거 하지 마세요. 내가 그거 할 테니 그거만 잘하세요. 목덜미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마취가 풀린 거라고 여겼다. 나는 P에게라도 사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례를 생각하니 목은 더 아팠다. P에 대한 마음의 빚은 그때 생긴 것이었다.
친구와 사업 얘기를 했다. 그가 종합검진 예약을 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P가 간호사라서 좋겠다고 했다. 그는 내 말에 짜증을 부렸다. 개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난 일주일에 한 번씩 헌혈을 한다구. 혈액 검사 결과서가 일주일마다 집으로 날아와. 그래?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날 따라 그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그게 가면을 썼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생각했다. 애 아빠가 그걸 그거 해 보았더니 그게 그거 하다네요. P의 전화 내용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인 것 같아. 그렇게 자주 그걸 그거 해갔는데 그동안 그걸 그거 했다는 게 말이 돼! 친구도 P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 병명이 뭐야? 나는 친구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팔, 피를 그렇게 자주 빼 갔는데 피에 문제가 생겼대. 나는 그 말에 피를 너무 자주 빼서 그런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에게 생긴 문제를 물으려니 그의 심경을 건드릴 것 같았다. P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P에게 전화를 했다. 그걸 그거 해서 거기로 보냈더니 결과가 그거 하다고 하네요. P의 말투로 보아 그거란 게 종기보다 하찮은 걸로 들렸다. P의 말로 친구의 병명을 짐작하기는 더 힘들었다. 혼자서 이리저리 혈액에 관련된 병을 떠올려보았다. 마땅히 집히는 걸 찾아낼 방법은 없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회사 월급날이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전화기 건너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이었다. 한 달 내로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이 있다고 했다. 그걸 받고서 돈을 좀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라곤 없었다. 나는 친구가 직원들 월급을 맞추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라 생각했다. 형이 내게 골수를 주겠다고 하더라.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재생 불량성 빈혈을 에둘러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골수를 이식하면 그건 낫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온 날이었다. 샤워를 했다. 옷을 갈아입었다. 아내의 음성이 물소리에 섞였다. 바가지를 긁는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잠갔다. 집안일에 대한 짜증을 나를 향해 쏟아내는 중이었다. 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내는 입을 닫았다. 한번 닫힌 아내의 입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술이나 한잔 하려는 뜻이었다. 혼자서 술집에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불현듯 친구의 집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P가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 그거 하느라고 거기서 그거 하면서 그거 할 거예요. 나는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다. 차 한잔 하자며 P를 불러냈다. 대답을 듣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P는 간편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걸 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의 병에 대해 물었다. 그게 그거만 잘하면 그거 할거예요. 그걸 늘 그거 하니 그런 문제가 그거 하는 거 아니겠어요? 남편의 병은 P의 대답으로 본다면 심각한 건 아닌 듯했다.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엔 과일 맛이 났다. 입을 꽉 채우는 구수한 맛이 오래갔다. 혓바닥에서는 개미 서너 마리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트림을 해도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나는 한 모금을 맛 본 후 커피를 강하게 볶았을 것이라며 아는 체를 했다. P는 그거나그거나 그거 한 거 아니예요? 커피에 대해서는 나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P의 말을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었다. 원두를 볶는 요령을 설명했다. 커피 맛이 볶음에 따라 변하는 걸 P에게 설명했다. 꽤나 시간이 흘렀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거지를 하는 소리였다. 어쩌다 시간이 이렇게 늦었느냐며 내가 말했다. P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P의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서로의 삶이 고달픔을 이야기 한 걸 되뇌어 보았다. 둘 사이는 P의 옷차림처럼 편안해진 느낌이 들었다.
바쁜 회사 일 때문에 몸살이 났다. 밀린 일을 집에 가져갔더니 아내가 화를 냈다. 엇비슷한 약으로 하루를 버텼다. 몸살은 낫지를 않았다. 퇴근길에 P에게 전화를 했다. P가 주사약을 가지고 왕진을 하기도 한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나는 주사 한 대를 놔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P는 그게 뭐 그거 한 일이냐고 쉽게 말했다.
만날 장소를 정하기가 어정쩡했다. 고민 끝에 P의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P가 내 차를 본 것 같았다.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히 P가 다가왔다. 내겐 흘린 땀 때문에 식초 냄새가 났다. P의 환자들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식초 냄새를 풍기며 엉덩이를 까 내릴 순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차는 시내를 벗어났다. 차는 모텔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열이 펄펄 나서 눈앞이 흐렸다. 주차장에 들어서다가 하마터면 남의 차와 부딪칠 뻔 했다. 모텔의 번쩍거리는 조명이 희미하게 보였다. P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주차장 계단을 오르자 방문이 보였다. 입구에 돈을 넣는 구멍이 있었다. 이런 곳에 처음 온 나는 설명서를 읽어야 했다. 우편함 같은 곳에 돈을 넣었다. 삐리릭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돌렸다. P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내 손이 P의 등에 닿자 깜짝 놀랐다. 손이 너무 뜨거웠던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기가 바쁘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급하게 샤워를 했다. P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샤워가 끝났다. P는 미리 준비해온 주사기로 엉덩이를 찔렀다. 그거만 하고 그거 하고 있으면 그거 할거예요. 핸드백에서 약 몇 봉지를 꺼냈다. 물 한 컵과 약을 내밀었다. 그걸 삼킨 나는 순식간에 곯아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전화기에서 요란스런 벨소리가 들렸다. 엉겁결에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방을 빼 달라는 소리였다. P는 동물의 왕국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주일이 흘러갔다. 약은 하루치만 먹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P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P가 생색을 내려고 전화를 한 것이라 생각했다. P는 지난 번 마신 커피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약속을 잡았다. 바쁜 일을 마무리했다. 커피숍 근처 골목에 들어섰다. 구수한 향기가 걸음을 당겼다. 이런 분위기라면 하루의 피로를 쉽게 날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내가 흡사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회사가 많이 그거 하나 봐요. 요즘 애 아빠 거기가 그거 해요. 황당한 이야기가 P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몇 갈래의 말로 대명사의 문장을 명사로 된 문장으로 고쳐야 했다. 회사가 어려워요? 친구가 발기가 안 된다구요? 그건 아니구요. 그게 그거 하다니깐요!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듣는 말을 나만 못 알아듣는다는 말투였다. P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나의 도움이 있어야 그의 어려움이 해결 될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게 아마도 미리 짜진 각본이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은 그게 좀 그거 해요. 일부러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뒤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걸 그땐 몰랐다. 나는 P에게 서서히 끌려들고 있었다. 각본에 있는 암호를 풀기 시작했다. P의 아픔을 어렴풋이 느끼도록 각본이 적힌 것 같았다. P의 아픔 때문에 가슴이 시릴 수밖에 없었다.
출장길에 열이레 달빛을 보았다. 달빛은 창백했다. 그건 P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달빛에 최면이 걸린 것 같았다. P는 내가 쓴 편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게 그건 아니고 그거일 거라고 얘길 할 것이다. 나는 결심을 바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한가해지면 P의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하얀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가면을 썼더라도 내가 벗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P와 한적한 바닷가에 갔다. 밤늦은 시간이었다. 인적이 없었다. 차창을 내렸다. 파도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다는 어둠에 싸여있었다. 차는 바다를 향해 세웠다. 경사가 15도는 될 것 같았다. P는 내 팔을 꽉 잡았다. 센 바람이 뒤에서 불었다. 차는 휘청거렸다. 차 안으로 바람이 밀려들었다. 바람에 P의 머리가 날렸다.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덮쳤다. 머리를 걷어 P에게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내 코가 그녀의 얼굴과 부딪쳤다. 그녀의 입에 내 입술이 닿았다. 이러시면 그거 해요. 나중에 그거 하면 어떻게 그거 하실래요. 그 말을 내 입술이 눌렀다. 여린 팔이 내 등에 닿았다. 주먹이 등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런 뒤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P가 숨을 쉬는지 알 수 없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P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각본에는 저항이라든지 거부의 지문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건 집에 와서야 떠올린 것이었다.
P의 이름으로 차용증서를 작성해 달라고 했다. P는 단 한 번도 차용증서를 써 보지 않았다고 했다. 몇 번이나 적는 법을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인터넷을 뒤졌다. 차용증서 양식을 P에게 보냈다. 저녁이 되었다. 두 사람은 찻집에서 만났다. P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친필로 차용증서가 적혀있었다. 나는 날이 밝으면 은행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P의 계좌로 돈을 보내기로 했다. 틀림없이 그거 할게요. 나를 그거 하세요. 커피의 쓴맛은 지독했다. 잔 속에 친구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요즘은 좀 어떠냐고 물었다.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답 대신 P에 대해 어떤 감정이냐고 물었다. 말투는 단호했다. 나는 친구의 아내인 P를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느냐고 했다. 내 목소리는 높았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란 표현이었다. 그러면서 알리바이를 만들 궁리를 했다. 나는 업무용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거기에는 하루 일과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시간대 별로 이동 경로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그를 만나 나의 행적을 낱낱이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호프집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오백시시 맥주가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나는 가져갔던 업무용 수첩을 내밀었다. 친구는 그걸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종잇장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출장길에 내가 P에게 썼던 편지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게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차용증서를 달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친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다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마침 가방에는 차용증서가 들어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차용증서를 내밀었다. 그는 차용증서를 낚아챘다. 그걸 쥐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나는 그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쓰레기통에 넣을 때까지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P를 만났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보낸 편지를 왜 친구가 갖고 있느냐고 했다. P는 거기에 넣어둔 걸 그거 하게 그거 했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눈망울만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차용증서 쓴 건 그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냐고 물었다. P는 그걸 회사에 그거 했더니 화를 내면서 그거 하더라고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는 차마 P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차용증서를 그가 찢었으니 다시 써 줘야 한다고 했다. 내 목소리는 또렷했다. P는 자기도 돈을 벌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친구가 갚지 못하면 자기가 틀림없이 갚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알아듣는데 족히 이십 분이 걸렸다.
친구가 입원을 했다. P의 병원이었다. 무언가 추가 검사를 받기 위해서라고 했다. 친구의 목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P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차용증서는 친구의 입원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졌다. 나는 사태가 진정이 되길 기다려야 했다.
지금부터의 내 목숨은 보너스라 생각할 거야. 불쑥 내게 그 말을 던졌다. 나는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의 말에 P는 아무런 표정도 변화가 없었다. 그의 형이 정밀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형제이긴 하지만 유전자가 달랐다는 것이다. 골수를 이식할 수가 없게 되었다.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표정에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친구의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연기에 몰두하는 친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P를 멀리했다. P와 자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 피도 주사기로 빼 갈 것 같아서였다.
하는 수 없이 P의 병원에 갔다. 차용증서를 받기만 하면 발길을 끊으리라 생각했다. P는 병원에 없었다. P가 근무하는 책상 옆에 친구가 앉아있었다. 친구는 약을 타 가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머쓱해 하며 친구의 시선을 피했다.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있지?”
“아니!”
나는 정색을 하며 친구를 쳐다보았다.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려면 세 달치 통화기록을 내게 갖다 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걸 어디서 떼는지 몰랐다. 그걸로 어떤 결과가 빚어질 지는 더욱 몰랐다. 친구의 눈빛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머나먼 하늘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되물을 수가 없었다. 친구가 얘기한 보너스가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없었다. 오래 그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휴대폰 대리점에 갔다. 통화 기록을 받아냈다. 친구는 내 손에서 서류를 낚아채 갔다. 나는 침대 곁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는 빨간펜으로 P와의 통화 기록에 밑줄을 그었다. 통화 시간이 기록된 곳에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별달리 문제가 없을 만한 곳에도 빨간펜으로 두 줄을 그었다. 갑자기 신경이 곤두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세 달간의 전화 내용은 종기 때문에 나눈 대화였다. 그건 업무상 전화 시간과 달랐다.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던 게 친구를 자극한 것 같았다.
“뭣 때문에 P에게 이토록 자주 전화를 한 거야? 이런데도 발뺌을 할 수 있어?”
나의 변명은 구차했다. 친구에게 한 이야기에는 힘이 없었다. 친구는 빨간줄이 두 개나 그어진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날! 두 사람이 뭘 했어?”
두 달 가량 지난 일을 기억해 내는 건 쉽지가 않았다. 손가락을 짚어가며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보았다. 가방에서 업무 수첩을 꺼냈다. 그건 지난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통화기록의 날짜를 확인했다. 그날은 몸살이 났었다. P에게 주사를 놔줄 수 있느냐고 했던 날이었다.
“그래도 발뺌 할 거야?”
“그건 아니야!”
목구멍 근처까지 말이 올라왔다. 짧은 문장은 이윽고 꿀꺽 삼켜졌다. 그때 P가 나타났다. 친구는 P에게 통화기록이 적힌 종이를 냅다 던졌다. 종이가 뺨을 스쳐가면서 살을 베었다. 뺨에는 긴 핏자국이 생겼다. 그걸 그거 하면 어떻게 해요! 내가 뭘 그거 했다고 그거 하는 거예요! P는 악을 썼다.
친구는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줄을 확 잡아 당겼다. 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링거줄을 따라서도 투명한 액체가 병실 바닥에 떨어졌다. P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P는 자신의 힘으로 친구를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간호사를 불렀다. 친구는 뽑아든 링거줄로 P를 휘갈겼다. 그때 쳐다본 친구의 눈빛은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연극치고는 액션이 기가 막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P가 말했다. 가만히 그러지 말고 그걸 그거 해 봐요! 그때 P의 목소리는 앙칼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오히려 입을 닫았다. 그걸 지켜본 나는 차용증서를 다시 써 달란 말을 할 수 없었다.
P에게서 연락이 올까 하고 기다렸다. 그녀는 종내 소식이 없었다. 나는 친구의 병세가 더 나빠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늦은 퇴근길에 P의 병원으로 갔다. 차용증서 이야기를 P가 먼저 꺼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는 의자를 비워두고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옆자리의 직원에게 P가 간 곳을 물었다. 아마, 애 아빠에게 갔을 걸요. 그녀의 입김이 스쳐간 복도는 찬바람이 일었다. 나는 복도에 서서 P를 기다렸다. 복도에는 의사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건 클리닉 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의 종기를 수술했던 의사는 맨 아래에 있었다. 인턴이었던 그의 이름은 A였다. 그걸 본 순간 아무렇지도 않았던 목덜미가 뜨끔거렸다 나는 P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잘못했더라면 경추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P가 목 부분의 수술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 친구가 얘기했던 보너스가 생각이 났다. 그건 아마도 내 목숨을 두고 얘기한 것 같았다. 나았다고 생각한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삼십 분이 지났다. P가 나타났다. P의 하얗던 얼굴이 노랗게 변해있었다. 평소에는 그녀가 서두르는 걸 본적이 없었다. 잃어버린 서류를 찾는 것 같았다. 책상 서랍을 온통 다 열어젖혀 뒤적거리고 있었다. P의 눈에 나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직은 그걸 그거 하면 안돼. 아직은 그게 아니야. 좀 더 그거 하다가 그거 해야 해. P는 혼자서 한참 동안이나 중얼거렸다. 나는 친구의 병실로 갔다. 덩치가 컸던 친구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있었다. 그를 못 본 건 불과 일주일이었다. 팔 양쪽에 링거줄이 달려있었다. 감고 있는 눈 밑이 거무죽죽했다. 나는 친구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친구는 눈을 뜰 기미가 없었다.
침대 난간에 그의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금식이란 붉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병원에서는 별다른 처치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침대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쯧쯧 하며 혀를 찼다.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왔다. 친구의 링거줄에다 주사기를 찔렀다. 투명한 호스를 따라 링거액이 흘러들어갔다. 링거액의 속도는 무척 느렸다. 수액은 좁쌀만 한 공기방울을 만들었다. 팔뚝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기포는 터지지 않았다. 공기방울이 몸속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그거 하면 그거 하잖아요! 간호사가 내 말을 듣고 힐끗 돌아보았다. 내 입에서 은연중에 나온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마치 그들의 각본을 훔쳐본 것 같았다. P가 나타났다. 적절한 시점이었다. 그걸 그거 하면 혈관이 막히잖아.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나는 모처럼 P가 명사를 쓰는 걸 들었다. 그 말은 무의식중에 나온 것 같았다. 나는 P가 각본에 있는 말을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실에 와서도 P는 허둥지둥했다. 침대의 높낮이 조절용 핸들을 좌로 우로 돌렸다. 옷장을 열어 옷을 들춰보기도 했다. 나는 P가 각본의 대사를 기억해내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P는 나이트 담당 간호사를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간호사가 다가왔다. 그녀는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있었다. 어서 그거 해봐. 지금 많이 그거 하니까 조심해서 그거 하고. 간호사는 손목시계를 보며 맥박을 쟀다. 친구 팔목에 고무 띠를 감았다. 찍찍이로 고정시켰다. 펌프질을 했다. 수은주가 은색으로 차올랐다. 수은주는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펌프의 밸브를 열자 수은주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중간쯤에서 멈칫하던 수은주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P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부장님, 우리 애 아빠가 그거 하거든요. 빨리 그거 좀 해주세요. 혈압이 그거 하고요. 맥박도 그거 해요. P의 목소리는 울먹이는 듯했다. 그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각본의 대사를 잊어버리지 않는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침대 옆 보조 서랍을 P가 열었다. 그 속에 사진 석 장이 눈에 들어왔다. 맨 위에 사진은 검은 바탕에 현란한 조명이 배경이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선명하지 않은 두 사람이 사진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눈을 사진에 더 가까이 갖다 댔다. 그 모습은 P와 내가 모텔로 들어가는 사진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걸 본 내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사진이 들었던 것이라 여겨지는 봉투가 사진 옆에 있었다. 봉투를 보니 내가 아는 친구 회사의 것이었다. 나는 그때 P의 저의를 알 것 같았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모텔로 따라 들어온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P는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그녀가 이런 상황에도 차용증서를 써 주기 싫어 그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왜 편지만 꺼냈는지 의아했다. 내 생각대로라면 각본이 순서가 바뀐 게 아닐까 했다. 각본에는 내가 차용증서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게 관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보여준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송금한 돈은 지출이 다 되었을 것이다. P에게 보낸 돈은 임시변통한 것이었다. 그걸로 한 달 안에 돌아올 어음을 막아야 했다. 차용증서를 받지 못하면 내가 구속을 당할 것 같았다. 눈앞이 노래졌다.
건장한 남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사복 위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간호사 두 사람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P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부장님 어서 그거 하세요. 차트를 그거 하시면 그거 하잖아요. 남자는 은색 차트를 빠르게 넘겼다. 차트는 은색이라 차갑게 보였다. 그가 친구의 눈꺼풀을 까뒤집었다. 눈을 바짝 갖다 댔다. 하얀 손을 귀 아래에다 갖다 댔다. 그는 깜짝 놀랐다.
“간호사! 심장 전기 충격기 준비해!”
P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걸 그거 해야만 해요? 두 사람의 간호사는 병실을 부지런히 들락거렸다. 그들은 무언가를 수레에 실어왔다. 간호사 한 사람이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그녀의 머리에 얹힌 캡에는 까만 줄 한 개가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P가 이러는 게 연극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차용증서를 적어주지 않으려고 부리는 수작이라 생각했다. 나는 복도로 나갔다. 커피 자판기에 삼백 원을 넣었다. 블랙커피가 종이컵에 떨어졌다. 나는 커피가 수혈용 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잔의 피를 친구의 몸에 넣어주고 싶었다. 그게 있으면 친구가 어렵게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사내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P의 목소리는 앙칼졌다. 대명사의 대사는 또박또박 했다. 통곡이 복도에 울렸다. 하얀 벽이 쩌렁 쩌렁 했다. 사내가 병실에서 나왔다. 통곡소리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에이. 가까운 사람의 마지막을 이렇게 봐야 해!”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느린 걸음으로 그는 멀어져 갔다. 내과전문의라고 가운에 적힌 그의 뒷모습이 씁쓸해 보였다. 나는 힘없이 병실로 들어섰다.
P는 흰 천으로 덮인 침대를 부여잡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거 하겠지만 어쩌겠어요. 산 사람이라도 그거 해야 하니 잘 그거 하세요. 그 말을 하고 보니 내가 다시 각본을 훔쳐본 것 같았다. P는 그 말을 듣기나 했는지 훌쩍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병실로 들어섰다. 무거운 침대를 이리저리 돌렸다. 침대는 힘들게 문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앞뒤에서 침대를 밀고 끌었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거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건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친구가 죽었다는 걸 확인하지도 못했다.
언제 그거 하셨어요? 그거나 그거 좀 하지 왜 그거 했어요? 아무튼 와주셔서 그거 해요. 친구들이 장례식장으로 밀어닥쳤다. 나는 P의 옆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찾아온 친구들은 나를 벌레 보듯 했다. 마누라를 앞세워 왔다가 나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여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사를 했다. 그녀는 우리와 꽤 친한 사이였다. 요즘 그건 안 했어요? 나도 일이 그거 해서 그걸 한 번도 못했네. 미안해요, 하도 그거 해서. P는 친구 아내에게도 대명사의 인사로 예의를 갖췄다. 그 옆에 서 있었던 나는 목례로 인사를 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나와 P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각본에 맞게 캐스팅된 배우였다. 그런데도 나는 각본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배우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나와 P를 눈여겨보는 사람들 모두가 각본을 왼다고 고생께나 한 사람들인 것 같았다. P는 주연 배우였다.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문상객을 맞이했다. 친구의 입관 때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곡을 하는 것 같았다. 상식을 올릴 때도 서럽게 우는 역할을 태연하게 했다. 그런 그녀의 연기는 눈물겨웠다.
다른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죽은 친구와 가장 친했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게 몸살이 나도록 하질 않았다. 친구에게 통화 기록을 떼보라고 시켰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단 말에 많은 의미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아니었더라면 필요 이상의 상상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사진을 찍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왜 이제야 그거 했어요? 맨 먼저 그거 할 줄 알았거든요. 내 옆엔 아무도 그거 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잘 그거 하잖아요. 그거 한다고 꼭 그거 하는 건 아니란 걸 그거 하시면서. P의 말을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P의 말을 전부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했다.
조문객들과 섞여 있다 보니 자꾸 눈치가 보였다. 나는 바깥 공기를 쐴 겸 주차장으로 나왔다. 저만치 내 차가 있었다. 거기에 장례를 치르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연극을 하는 배우가 저러고 있으면 어쩌나 하며 걱정이 되었다. 바삐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황급히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연극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간섭을 내가 할지도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당좌 예금 통장에 돈을 넣어야 할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금이 저려오는 내 눈에 자꾸 헛것이 보였다. 그럴 때 죽은 친구는 자주 내 주위에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일은 자주 되풀이 되었다. 나는 P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사람은 그거 했잖아요! 헛것이 그거 하면 주사기로 그거 해야 할 지도 몰라요. 틀림없이 그 말을 할 것 같았다.
P에게 차용증서 얘기를 꺼내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그녀에겐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끄나풀을 놓아버린 미망인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구속할 수가 없었다. 그걸 빌미로 나에게 매달릴 수도 있었다. 은행에 돈을 입금해야 할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각본을 미리 봤더라면 절대로 돈을 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사기도박단에 걸려든 것 같았다. 우두머리는 P였다. 나의 동태를 살피려고 그랬을 것이다. 죽은 친구는 또 내 앞에 나타나 얼굴을 비쳤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때 돈 때문에 혼이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친구가 멋진 연기를 한 공로로 보너스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P는 차용증서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은 것 같았다. 틀림없이 그거 할게요. 나를 그거 하세요. 라고 얘기한 것조차 남의 얘기인 양 시치미를 뗐다. 매스컴에서 베네치아 연극제 광고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가면을 써야 할 때,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다.” 그걸 보고 난 후 쳐다본 P의 얼굴은 혈색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손으로 만져본다면 뻔히 드러날 P의 정체가 한 겹 가면을 통해 가려져 있었다.
∥당선소감
뼈 몇 개가 닳아 없어질지라도 소설과 함께하기
엘리베이터 불빛이 깜빡거립니다. 몇 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기다리던 순간을 맞았다는 설렘으로 멀미를 하고 있습니다. 저를 태운 기계가 고장이 나서 멈추거나 수직 낙하를 한다면 그 또한 저의 게으름 때문일 거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럴 때 『시에』의 길을 닦고 계시는 선배님들께서 손을 내밀어 주시리라 염치없는 생각을 합니다.
거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처음이 아닌 처음을 보듬어주신 건 더욱 정진하라는 가르침으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신공나라 회원분들, 오랫동안 가족의 정을 쌓아왔던 이끌림문학회, 축정문학회, 학교 동문님들과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 모두를 들먹여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특히 글쓰기의 기본을 가르치신 김종남 교수님, 보이지 않는 채찍질을 오래 해주신 최해군 선생님께 머리를 숙입니다. 모든 분들께 보답하기 위해서 저의 뼈 몇 개가 닳아 없어질지라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작정입니다. 주저앉으려 구부릴 때마다 혹독한 질책 바랍니다.
∥심사평
소설을 쓴 다는 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탐구
소설을 쓴다는 일은 자기 전체를 바쳐 삶과 세계에 대해 탐구하는 일이다. 소설 형식에 대한 자의식과 함께 이야기의 진정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투고된 소설들은 고만고만했다. 자기가 체험했던 것이나 잘 아는 것을 써야 하는데, 많은 투고자들이 피상적인 것에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각본」(김득진)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소시민들의 부박한 인간관계와 소통불능을 평이한 문장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평이한 문장 속에서 하찮은 삶의 실상은 모호함을 벗고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평이한 문장은 삶과 현실을 객관화하는데 좋은 무기이기도 하다. 명사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그거’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작중인물의 모습은 인위적으로 과장되게 묘사했다는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한 방식으로 이해했다. 전체적으로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균형 잡혀있는 것도 칭찬할 만하다. 예민한 통찰력과 자기만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가진 작가로 도약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장석주(문학평론가)
이성천(문학평론가)
오윤호(문학평론가)
─계간 『시에』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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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작가로 거듭나길 소망합니다.
좋은 작가보다는
노력하는 작가가 되려합니다.
졸작을 뽑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좋은 작품 기대합니다.
구수한 입담이 압권이신 최선생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