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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21장1~10절
제목 : 취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내려 주시고, 엘리야는 약속대로 바알 선지자를 시손 시내에서 다 죽임니다.
이 소식을 아합을 통하여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 형편을 보고 자기의 생명을 위해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로 도피하여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엘리야는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원하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떡과 물을 주십니다.
그 떡과 물을 마시며 40주 40야를 가서 하나님 호렙 산에 이릅니다.
그리고 굴에 들어가 머물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머물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불평합니다. 그들이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하라고 하십니다.
20장에서는 아합을 멸하겠다는 심판이 시작됩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을 포위하고 1차, 2차, 3차에 걸쳐 이스라엘을 협박합니다. 결국 협상이 결열되어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그때에 한 선지자가 나타나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32명의 왕이 연하여 싸우러온 아람 군을 이스라엘 아합 왕의 손에 넘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은 7,232명 밖에 안됩니다.
정오에 나가 싸운 결과 약속대로 아합이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숫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선지자가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다시 올 것이니 준비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준비하여야 합니다.
아람 왕도 전쟁의 패인을 분석하여 평지에서 싸우고, 왕 대신 실전에 능한 총독을 세우고, 잃은 병사와 병거를 보충하면 이길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군인은 이길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그런데 아합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람 왕과 협상하여 그를 살려 줍니다.
아합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교만하여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다시 아합왕에 부상군인으로 나타나 아합왕의 잘못을 깨닫게 합니다.
42절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런데 아합이 회개를 하지 않고 근심하고 답답해 하였다고 합니다.
43절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그 후에 이 일이 발생했습니다.
땅의 언약적인 의미를 무시한 채, 아합 왕은 자신이 원하는 나붓의 포도원을 취하려다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이 나서서 땅을 빼앗을 계략을 꾸밉니다.
1. 포도원 양도를 위한 아합의 제안(1~4절)
1)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포도원이 있어 왕궁에서 가까웠습니다(1절)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본절은 나봇 사건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아합(20장)은 당시 이스라엘에 별궁을 지어 두고 사치와 방탕 생활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로 그 즈음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유흥지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 잡혔던 것입니다.
이스르엘. -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린(Zerin)으로 추정되는 성읍입니다.
구약 시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아합은 특별히 이곳에 별궁을 건설, 종종 거처하였던 듯합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46 주석을 참조하라.
나붓. - '나봇'(나보트)은 아마도 '싹트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Ward).
나봇의 조상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포도 재배를 해왔을 터이니 그러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음직도 합니다.
포도원. - 팔레스틴의 가장 특징적 식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와 이를 재배하는 포도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의 원천이 되었습니다(Ross).
신20:6은 포도원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병역 의무를 면제하여 귀가 조치하게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 포도원이 갖는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신7:13 주석 참조.
2)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의 채소밭으로 삼으려고 제안하지만 이를 거절합니다(2절).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채소 밭. - 여기서 '채소'(야라크)이란 녹색의 풀 종류 일반을 말합니다.
그리고 '밭'(간)은 오히려 '뜰' 또는 '정원'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채소 밭'이란 '푸른 정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공동 번역).
보통 이러한 정원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장소로 고안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종종 우상 숭배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사1:29;65:3;66:17).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이에 해당하는 원문(토브 베에이네이크)은 문자적으로 '눈에 좋거든'이란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은 상대방의 의사를 한껏 존중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비록 왕이라도 남의 토지를 무작정 몰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데서 비록 초기의 이상(理想)은 많이 빛바랜 것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땅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 이므로 권력자라도 그 소유관계를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구속력을 보게 됩니다(레25:23).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제한일 뿐 왕정 시대가 개막된 이래 왕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 소유를 확장하려 들었습니다.
사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모두 대지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조차 이를 흉내 냈다는 현실적 사실은, 조건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던 삶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지금 아합이 시도하는 토지 소유의 확대는 일찍이 사무엘이 경고했던 바에 부합합니다(삼상8:12,14).
*삼상8:12,14 “[12]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4]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즉 백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왕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거기서 거둬 들인 농산물은 더 이상 생산자인 백성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왕은 자꾸 백성들의 포도원과 감람원을 빼앗아 자기 신복(臣僕)들의 손에 넘겨줍니다.
이러한 경고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여야 하나 실제로는 모든 백성이 도리어 왕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타락이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합이 나붓의 포도원을 소유하려는 표면적 구실은 무엇이든 그 실제적 동기는 왕권의 극대화를 위한 토지 소유의 확대 도모로 보아야 합니다.
3) 나봇이 아합에게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하나님이 금하실 것이라고 말 합니다(3절)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나봇(Naboth)의 이 같은 대답은 그가 여호와 신앙가이며 율법에 충실하려는 인물임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물론 아합이 후한 보상을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 포도원이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전해야 할 분깃인 선조의 유업을 매각하는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1)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무를 것, (궁핍하여 무를 날짜를
연기할 때는 연기된 기한을 계속하여 무를 것,
(2)무를 힘이 없을 때 그 토지를 산 자가 희년(禧年)에 돌려 줄 것 등을 율법으로 명시하셨습니다(레25:23-28).
그러나 나봇처럼 전통의 신앙과 이상에 충실하려는 인물이 아합 시대와 같은 변질된 시대에 얼마나 더 있었는지는 자못 의문스럽습니다.
4) 나봇이 아합 왕에게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식사를 않했습니다(4절).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근심하고 답답하여. – 이에 앞장에서도 언급된 구절로서 내적 격동으로 인해 속이 타거나 기분이 언짢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20:43주석참조. 그런데 아합의 심리 상태에 대해 거듭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 우리는 그의 완악함과 패역(悖逆)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침상(寢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 본절에서 아합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나타납니다.
즉 그는 갖고 싶은 것을 못 갖게 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성인다운 면모롤 보이지 않는 아합에게서 독자(讀者)들은 그가 왕으로서 너무 졸렬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에 외국의 우상 숭배가 도입되고 번창되게 된 원인(16:29-33)에는 아합의 이처럼 줏대 없고 성숙치 못한 사람됨이 한몫을 차지하였습니다.
한편 아합의 소유욕이 빚어낸 이 우스갯거리는 결국 나봇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발전하고 말았습니다(5-16절).
여기서도 우리는 죄가 죄를 유발한다는 죄의 속성(약1:15)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2. 포도원 강탈을 위한 이세벨의 음모(5~10절)
1) 이세벨이 아합 왕에게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합니까 라고 묻습니다(5절).
“[5]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 아합의 무기력하고 유치한 면은 도리어 이세벨의 강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을 부각시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본절에서도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마치 후견인 같은 자세로 등장합니다.
즉 그저 드러누워 끙끙 앓는 아합에 비해, 질문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려는 이세벨은 훨씬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벨의 관계에 있어 늘상 끌려 다니는 쪽은 아합이었던 것입니다. 19:1 주석 참조.
2) 이세벨은 왕으로부터 식사를 아니하는 이유를 듣습니다(6절).
“[6]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아합이 일의 자초지종(自招至終)을 이세벨에게 고하고 있는 본장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1)대체로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전제 군주적(專制君主的)성격이 강한 두로 출신의 이세벨(더구나 이 여자는 잔혹한 폭군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을 기억해야 한다)에게 아합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 하는 문화적 차이점입니다(16:31).
(2)아합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시콜콜히 이르는 어린 아이처럼 처신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일찍이 자신이 신봉하던 우상 종교 도입을 요청하는 이세벨에게 아합이 여호와 신앙의 바람막이가 되기에는 분명히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16:31-33).
아합이 펼친 종교 정책에는 언제나 이세벨의 입김이 작용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3)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겠다고 하며 식사를 권합니다(7절)
“[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 본절은 의문문이 아닙니다.
히브리 원문상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왜 그 모양입니까'라는 힐난조의 말입니다.
Modern Language Bible은 이를 '당신은 이스라엘에 대해 왕권을 행사하지 않을 겁니까? '(Do not exercise the kingship over Israel?)로 좀더 풀어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세벨이 가긴 왕권 개념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적 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이세벨은 고대 근동의 전제군주가 일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염두에 두면서 본절과 같은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왕권은 보다 제한적입니다.
즉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른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신17:14-20).
이점은 고대 근동의 거의 무제한적 왕권에 비해 훨씬 행동의 제약을 받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부모의 유업 외에 타인의 유업을 함부로 탈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눈에는 그 같은 아합의 행동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왕답지 못한 처사로 비쳤을 것입니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 나봇의 말 중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3절)을 '내가' 주겠다고 말하는 이세벨의 언동에서, 그녀가 정녕 이스라엘을 해치는 대적임이 극명(克明)하게 드러납니다.
이처럼 이세벨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왜곡하도록 부추긴 암적(癌的) 존재였습니다.
4) 이세벨이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써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냅니다(8절).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印)을 치고 봉하여.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인장(印章)의 용도 역시 다양했습니다.
즉 인장(印章)은 의식서 날인, 재산 증서의 신빙성 보장, 공문서의 권위보증 등 여러 효능을 띠었습니다.
본절에서 이세벨이 거짓 편지를 쓴 후 아합의 도장으로 인친 것도 그 내용이 의심할 바 없는 것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세벨은 백성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기 위해 왕의 인장을 도용(盜用)하는 짓도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한편 당시의 도장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 외에도 굴려서 인을 찍는 원통형 인장, 그리고 인장 반지도 있었습니다. 창41:42 주석 참조.
치다. - 이에 해당하는 '하탐'은 그 자체로 '인을 찍다','봉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하탐'하는 것은 남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끔 비밀에 붙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아합의 친서는 비밀리에 이스르엘의 장로와 귀인(貴人)들에게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족. - 이에 해당하는 '호르'는 성경에 '귀족'으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전10:17;렘27:20).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카일(Keil)은 이들을 행정관들로 보고 있습니다.
5) 편지의 내용입니다(9,10절)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10]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1) 금식을 선포하게 합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공적인 금식 선포는 공동체 내의 악행 및 죄에 대해 집단적 참회를 촉구하는 것입니다(삼상7:6;14:24).
*삼상7:6,14:24 “[7:6]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14:24]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즉 한 개인의 죄는 그 사람만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관계 개선이 요구된다는 사고방식이 담긴 행위입니다. 에스더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본절의 금식 선포는 도리어 악행을 짓고자 하는 음모에서 발단된 그릇된 성격의 것입니다.
즉 이세벨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성읍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려고 이스라엘 성읍에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이란 물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날조된 죄를 의미합니다(10,13절).
(2)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안칩니다.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 즉 나봇을 피고인(被告人)의 신분으로 재판정에 앉히운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도 모르는 체 이처럼 재판정에 끌려나온 나봇은 필시 어리둥절하였을 것입니다. 13절 주석 참조.
(3) 불량자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 하였다고 하게 합니다.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증거하기를
불량자. - 이에 해당하는 '베네벧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무가치함의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잘못 없는 존재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삿19:22주석과 삼상10:27 주석을 참조하라.
*삿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삼상10: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두 사람을. – 사람을 사형에 처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이 요구된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입니다(신 17:6).
*신17: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 규정을 최소한도로 만족시키기 위해 이세벨은 두 명의 불량배를 포섭해 두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하고. -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저주함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조차 저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20:7;22:28).
*출20:7,22:28 “[20:7]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22:8]도둑이 잡히지 아니하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자기가 그 이웃의 물품에 손 댄 여부의 조사를 받을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어긴 탓에 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사형에 처해진 사례를 레24:10-16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였습니다(레 24:15).
*레24: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그런데 이세벨은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4) 나봇을 돌로 처 죽이게 합니다.
돌로 처축이라. - 율법상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① 우상 숭배자(신13:10),
②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27),
③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자(레24:14),
④ 간음한 여인(신22:21)등에게 가해졌습니다.
이러한 형 집행 절차는, 먼저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묶어서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대 위에 올려 두면, 한 증인이 그를 밀어뜨리고 이어 두 번째 중인이 큰 돌로 먼저 쳤습니다.
그 후 둘러 선 무리가 함께 돌을 들어 쳤는데 이때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적, 공동적 돌 처형법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과 연대(連帶) 의식을 심어 주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신13:10,11).
*신13:10,11 “[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11]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헤렘(소유)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20:34) 아합은 이제 남의 소유마저 임의대로 취하려 합니다(1,2절).
왕이라 할지라도 땅을 사고 팔 수 없었는데,
그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금하셨는데도, 탐욕에 눈이 멀어 무시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솔선수범하여 법과 원칙을 지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작은 제안일지라도 상대방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신중해야 합니다.
2)아합에게 한낱 거래 대상에 불과한 포도원이 나봇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조상의 유업’이었습니다(3절).
나봇은 최고 권력자의 압제와 위협 앞에서도 땅의 유업을 임으로 팔아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레25:23~28)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불의한 시대에 거절이 불러올 위험을 알면서도 타협하고 굴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정의를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면,
어려움에 처하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세속적인 가치나 셈법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을 따라 결정하십시오.
3) 아합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상심하여 식음을 전폐합니다(4~6절).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갖지 못한 그 ‘하나’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이방 왕의 제안은 단번에 수용하면서(20:32~34),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자기 백성의 요청(3절)은 보류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나봇의 말을 왜곡하며 그를 무례한 백성으로 매도합니다.
아합의 치졸한 말 바꾸기는 이세벨의 악한 마음을 격동하여 결국 나봇을 죽이는 참극을 낳습니다.
4) 교활한 이세벨은 권력을 이용하여 약자인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왕에게 주겠다고 장담합니다(7~10절).
이를 위해 미리 위증을 지시해 둔 두 증인을 세워 나봇을 신성모독과 반역 죄인으로 몰아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취할 수 없으면 착취하고, 응하지 않으면 응징하는 야비한 권력의 자화상입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면, 결국 아합과 이세벨처럼 자기 머리에 심판을 쌓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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