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블라이의 샤머니즘적 세계관
Ⅰ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 1926~)는 시의 치유적 기능을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시인 중 한 사람이다. 샤머니즘적 특성이 강한 미국 인디언들과 에스키모인 들의 시에서 루미(Rumi), 까비르(Kabir), 미라바이(Mirabai) 등의 소위 ‘고급문화’(high culture) 시의 전형을 발견하고 이들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전체성’(whole)과 ‘치유적’(healing) 메시지를 발견하고 있는(News of the Universe 255) 블라이는 자신의 시에서도 강한 샤머니즘적 성향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조이스 퍼세로프(Joyce Peseroff)가 주장하듯이 “샤먼”(89) 시인으로서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표출하고 있다. 흔히 심층 이미지의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블라이는 ‘영’(spirit), ‘트랜스’(trance), ‘여정’(journey), ‘저승’(the other world)등과 같은 무속적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블라이의 시를 ‘주문’(incantation)과 같다고 말하는 하워드 넬슨(Howard Nelson)은 블라이가 시 낭송을 할 때 종종 세모꼴의 현(弦)이 달린 타악기의 일종인 덜시머(dulcimer)를 사용하였다고 한다(49-50). 이는 샤먼이 굿을 할 때 드럼이나 기타 악기를 사용하여 초혼(招魂)하는 것과 유사하다. 블라이 자신도 “나는 나의 신들림을 신뢰하는 것을 배웠다”(“In Search" 1)고 말하듯이 그는 ‘신들림’ 현상을 시로 승화하고 있다. 그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 전에 약 3년간 뉴욕에서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내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고독 속에서 나는 역암(conglomerate stones) 층을 지나고, 에로스를 지나고, 가족의 애정을 지나고,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지나 마치 한 지층에서 또 다른 지층으로 가라앉은”(Selected Poems 12, 이후 SP)듯한 경험을 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블라이가 말하는 내면세계로의 하강은 평범한 일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 내면의 층변(層變)을 일으켜 샤먼으로 재생하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통과제의적인 무병(巫病)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무속학자 엘리아데(Eliade)는 “무병이란 신에 의해 속(俗)에 속한 사람이 성스러운 샤먼으로 재탄생하는 징표”(33)라고 말한다.
블라이에게 이러한 무병적 경험은 그가 1950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3년간 뉴욕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그에게 광야, 밤 여행, 그리고 각성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영적 체험을 하게 하였으며 샤먼 시인으로 변모하게 하였다(Nelson 9). 블라이는 20대에 “홀로 있는 특별한 순간 꿈꾸는 사람처럼 마음의 심연을 지나고 나무 혹은 언덕 속을 통과하는” 영적 체험을 통해 “저 세상과 교통하는(communicate) 감미로운 감각”(SP 26)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블라이는 “모든 시는 여정이다. 시는 어딘가에서 또 다른 어디로 가는 것이다. 최고의 시란 긴 여정을 다룬다. 나는 인간의 영역 속에 머물면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여정을 다루는 시를 가장 좋아 한다”(SP 88)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그의 시가 변화된 의식, 즉 샤먼적 의식을 반영하는 ‘접신 여행’(ecstatic journey)과 유사하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이 여정의 목적은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상처의 치유를 통해 영적 건강을 회복하는 데 있다. 반전 시인이기도 한 블라이가 자신의 시를 “치유 과정”(Talking All Morning 233)이라고 언급한 것은 엘리아데가 샤먼의 여러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주술적 치유 기능”(215)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블라이의 시를 샤머니즘적 관점으로 읽음으로서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애매성을 보다 더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블라이의 시가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샤먼적 여정, 토템 상징들, 그리고 샤먼 의식의 획득과 치유 메시지 등을 다루게 될 것이다.
II
블라이는 고독한 시간이 일상적 자아가 죽고 샤먼적 자아가 살아나는 시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첫 시집『눈 내리는 들판에서의 정적』(Silence in the Snowy Fields)의 두 번째 시 「고독으로 돌아가기」(“Return to Solitude”)에서 고독이 자아의 내적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동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이 시의 제 1연에서 달빛이 비치는(moonlit) 고요한 밤이지만 바람이 불고(windy night) 풀이 뛰는(the grass leaping) 외적인 동적 이미지로서 시인 자신의 내적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는 이 때야 말로 되돌아가야할 시간(the hour of return)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되돌아간다는 것은 이성과 논리 중심의 일상 의식으로부터 감성과 초월적 논리의 소위 ‘어머니 의식’(mother consciousness)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블라이는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에서 ‘되돌아감’의 의미를 무아경(ecstatic)에 진입한다는 뜻으로 말할 때 각 개인은 한 때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현대 남성들은 남성의식 쪽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남성의 일은 되돌아가는 것”(Sleepers Joining Hands 29, 이후 SJH)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되돌아감의 의미를「고독으로 돌아가기」제 2연에서 블라이는 자아의 내적 변화를 초래하는 무의식으로의 여정 혹은 샤먼적 여정과 유사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돌아가기 원한다. 바다로 되돌아가기 원한다.
바다의 고독한 회랑으로,
거친 밤의 복도로,
슬픔의 폭발로,
죽음의 바다로 뛰어들기 원한다.
선회하는 곰 자리의 별들처럼.
We want to go back, to return to the sea,
The sea of solitary corridors,
And halls of wild nights,
Explosions of grief,
Diving into the sea of death,
Like the stars of the wheeling Bear. (Silence 12)
위의 시구에서 바다는 시적 화자가 영적으로 재생되는 장소를 상징한다. 시적 화자는 어둠으로의 하강, 즉 무의식으로의 여정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자로 재생될 것이다. 여기에서 바다 이미지는 넬슨이 주장하듯이 “태고 유형적 생명, 무형, 자궁, 심연, 무한” 등과 연계되며 시인이 바다를 특히 ‘죽음의 바다’ 라고 언급한 것은 죽음은 의식적 “자아가 그 일상적인 범주를 넘어서 나아갈 때 느끼게 되는 현상”(Nelson 10-11)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수호령(helping spirit)의 역할을 하는 달의 인도를 받아 하계인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시인의 샤먼적 여정을 노래하는 서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라이는 샤먼적 여정을 다루는 시를 통해 이원적 분리 의식이 극복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시에서 “가장 적절하고 특별한 리듬을 선택하여 독자들과 자기 자신을 무아경에 이르게 하고 저승(the other world) 혹은 동물들이 사는 세계로 안내한다(SP 88). 시의 기능을 ”인간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Talking 233)이라고 믿는 블라이는 우주의 모든 사물들은 인간 영혼의 일부를 함유하고 있다는 범신론적 입장을 취하고 자신의 시적 여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이든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조개껍질, 박쥐 날개, 솔방울, 이끼 조각--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의 조각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들은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얇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여정은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P 89)
블라이는 영혼이 빈약하게 된 현대인들을 자신의 시적 여정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영적으로 풍요하게 되기를 원한다. 블라이는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삶의 경이를 그려주고 있는『눈 내리는 들판에서의 정적』의 여러 시에서 어머니 의식을 반영하는 밤, 바다, 동물, 달, 곡식 단 등의 친숙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의식 중심의 현대적 사고의 틀을 탈피하고 무의식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여기에서는 샤먼적 여정 구조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라끼 빠흘러 강 쪽으로 차를 몰며」(“Driving Toward the Lac Qui Parle River”)의 분석을 통해 블라이의 샤먼적 의식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이 시는 정적이 배경으로 깔려있는 가운데 내면 의식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늦여름 미네소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황혼 무렵에 시작하는 자동차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무의식으로의 여정 혹은 다른 세계로의 여정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자동차 여행이 일종의 영적 여정으로 은유되는 이 시는 현상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통합적 인식이 바탕이 되고 있다. 제 1연은 시적 화자가 샤먼이 활동을 개시하는 황혼 시간에 자동차를 몰고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는 차를 몬다, 황혼 무렵 미네소타에서.
그루터기 들판이 태양의 마지막 성장을 붙잡고 있다.
콩들은 사방으로 입김을 내뿜고 있다.
작은 읍내에서는 늙은이들이 그들의 집 앞 차 시트위에
앉아있다. 나는 행복해.
달은 칠면조 우리 위로 떠오르고 있다.
I am driving; it is dusk; Minnesota.
The stubble field catches the last growth of sun.
The soybeans are breathing on all sides.
Old men are sitting before their houses on car seats
In small towns. I am happy,
The moon rising above the turkey sheds. (Silence 20)
위의 시에서 샤먼적 의식에 사로잡힌 시적 화자는 추수를 마치고 그루 터기만 남은 들판을 자동차로 달리고 있다. 그는 들판이 기울어져가는 저녁 햇살을 붙들려하고 “콩들”이 숨쉬는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이 자연 사물들과 일체가 되는 경험을 하며, 그들의 집 앞에 앉아 있는 노인들과도 일체감을 느낀다. 이러한 황홀한 순간 그는 “나는 행복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 시에서 달은 시적 화자를 영적 세계로 안내하는 영매와 같은 존재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화자와 함께한다.
이 시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로버트 레더(Robert Rehder) 같은 평자는 이 시는 일련의 서로 무관한 이미지들로 연결되어 있다고 혹평하고 있으나(280) 로렌스 크래머(Lawrence Kramer) 같은 이는 이 시의 모든 풍경들은 동일한 하나의 몸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평한다(216). 이 시를 샤머니즘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 린 보우먼(Lynne E. M. Bowman)은 이 시가 시작되는 황혼 시간은 영적 여정에 적합한 시간이며 원시성이 배어있는 인디언 지명인 미네소타 또한 영적 분위기를 돕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이시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는 d/k/n/m/t의 음은 샤먼의 영적 여정을 돕는 드럼 소리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d 의 음가는 하강 이미지를 제시하기에 알맞으며 미지의 영역으로의 여정을 암시하는데 적절하다고 주장하고 있다(232). 시적 화자는 소리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를 통해 자신과 주변 사물들이 일체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 1연이 샤먼적 여정의 출발이라면 제 2연은 그 도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에서의 여정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샤먼 시인 화자는 더욱 깊은 내면의 세계로 빠져든다.
차 속의 작은 세계가
깊은 밤의 들판으로 돌진한다
윌마에서 밀란까지 가는 도상에서.
철로 덮인 이 고독이
밤의 들판을 지나간다
귀뚜라미 소리가 꿰뚫고 들어오는 동안.
The small world of the car
Plunges through the deep fields of the night,
On the road from Wilmar to Milan.
The solitude covered with iron
Moves through the fields of night
Penetrated by the noise of crickets. (Silence 20)
위의 시의 영적 여행자인 시적 화자는 자신의 몸과 일체가 된 차를 타고 영적 영역 혹은 무의식의 영역을 상징하는 밤의 깊은 들판을 달리고 있다. 출발지인 윌마에서 기착지인 밀란으로 가는 도상에서 시적 화자는 수호 령과 같은 역할을 하는 달의 인도를 받고 있다. 그는 귀뚜라미 소리가 차 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소리를 감지하고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계를 상징하는 차 속의 세계와 귀뚜라미 우는 들판의 세계가 연계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마지막 제 3연에서 시적 화자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점을 암시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 마침내 목적지인 강에 도착하는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밀란에 가까웠을 때, 갑자기 작은 다리 하나,
그리고 달빛 아래 물이 무릎을 꿇고 있다.
작은 읍내에서는 집들이 바로 땅 위에 지어져 있다.
등불이 잔디 위에 네 발로 떨어진다.
내가 강에 도착할 때, 보름달이 그것을 덮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배 안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다.
Nearly to Milan, suddenly a small bridge,
And water kneeling in the moonlight.
In small towns the houses are built right on the ground;
The lamplight falls on all fours on the grass.
When I reach the river, the full moon covers it.
A few people are talking, low, in a boat. (Silence 20)
제 3연의 분위기는 이승 세계가 아니라 신비한 저승 세계의 한 장면 같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작은 다리는 샤먼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통로인 ‘세계나무’의 역할을 한다. 이 다리에 도착했을 때 시적 화자는 새로운 영적 비전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달빛 아래 물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나 “등불이 잔디 위에 네 발로 떨어지는” 광경을 영적인 눈으로 포착한다. 비록 윌리엄 데이비스(William Davis)같은 평자는 이를 두고 “자신들 보다 더 강한 힘에 대한 복종을 보여주는 것”(23)이라고 평하고 있으나 이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영적인 안목이 열린 상태에서 사물을 바라 볼 때 물은 자연 빛에 의해 오히려 생기를 얻게 되고, 인공적인 등불 또한 잔디에 떨어질 때 생기를 얻게 되는 상생적 관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폴 레이시(Paul Lacey)가 “이 시에서는 죽은 것 혹은 무생물들도 살아 숨을 쉰다.”(120)고 평한 말과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적 화자가 ‘무언가 말하고 있는 호수’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 지명의 라끼 빠흘러 강에 도착 했을 때 보트에 탄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이 장면에서도 독자들은 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강물이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상상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이 사람들은 독자들에게 이승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기보다 저승 세계에 속한 사람들처럼 비쳐진다.
III
블라이의 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토템 상징물들로 나무, 풀, 물개, 새, 거북, 그리고 불가사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블라이의 시적 화자들을 영적 세계로 안내하는 영매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는 나무, 물개, 거북이 등장하는 시들을 통해 블라이의 샤먼적 의식을 추적해 본다.
먼저 나무는 샤머니즘에서 엘리아데가 “땅과 천상계와 지하계를 연결하는 세계 중심을 상징하는 ‘우주나무’(492) 혹은 ‘세계 나무’로 인식된다고 말하듯이 지상의 세계를 하계와 천계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블라이는 그의 초기 작품 「옥수수 밭의 꿩 사냥」(“Hunting Pheasants in a Cornfield”)에서 버드나무를 세계나무 이미지와 연결짓고 있다. 그는 이 나무가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관문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이 들판에 홀로서 있는 버드나무를 보고 감정 이입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고적한 마음과 유사성을 발견하는데서 출발한다.
탁 트인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무엇이 그리 이상한가?
그것은 버드나무다. 나는 그 주변을 계속 돈다.
몸체는 이상하게 찢겨 지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마침내 나는 그 아래에 앉는다.
그것은 수 에이커나 되는 마른 옥수수 밭에 홀로 서 있는 버드나무다.
그 잎사귀 들은 나무 밑 둥과 나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재 갈색으로 변했고 미묘한 검정색 반점이 있다.
이재 수숫대만이 소리를 낼 수 있다.
What is so strange about a tree alone in an open field?
It is a willow tree. I walk around and around it.
The body is strangely torn, and cannot leave it.
At last I sit down beneath it.
It is a willow tree alone in acres of dry corn.
Its leaves are scattered around its trunk, and around me,
Brown now, and speckled with delicate black.
Only the cornstalks now can make a noise. (Silence 14)
위의 시의 제 1연에서 시적 화자는 들판에 있는 나무에 이끌려 그 나무 밑둥에 앉아 명상에 빠져드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아직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들판에 홀로 있는 나무가 무엇이 이상한가?”하고 수사적인 질문을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나무 주변을 걷다가 그 찢겨진 몸체를 보고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블라이는 일련의 유성음과 반복어를 사용하여 자신과 독자들을 황홀경으로 이끌어 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유성음인 ‘o' 가 반복적으로 나타나 시인과 주변 사물들이 일체가 되는 최면적 효과를 발휘한다(Bowman 111). 제 2연에서 마른 옥수수, 갈색과 검정색을 띤 떨어진 잎사귀들, 옥수숫대 이미지들은 정적과 죽음의 세계를 상기 시킨다.
이어서 제 3연에서 시인은 겨울의 싸늘한 태양과 얼어 죽은 잡초들을 바라보는 분별하는 일상 의식의 세계가 가라앉게 되고 영적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제 4연에서 시인은 나무와 자신이 일체가 된 상태를 보여준다. 시적 화자는 “내 마음은 수년간 홀로 잎사귀들을 떨어뜨려 왔다”라고 자신을 나무와 완전히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나무는 시인의 마음이 되며 시인의 마음은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나무가 된 것이다. 이 순간 그는 “나는 이 옛 장소에서 행복하다”(Silence 14)고 외치게 된다. 이것은 합일적 의식이야말로 인간에게 치유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블라이는 샤먼적 여정을 통해 얻어지는 합일적 경험의 “어느 순간 특별히 홀로 있는 순간 우리는 마음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되고 그 순간 우리는 꿈꾸는 사람이 먼 곳으로 여행해서…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세계로부터 감미로운 우정의 감정을 가지고 깨어나는 것처럼 나무 혹은 언덕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SP, 26)고 말하고 있다.
「옥수수 밭의 꿩 사냥」의 화자는 버드나무라는 영적 매체에 의해 끌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여정을 떠났다가 “황혼 무렵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to turn home at dusk, Silence 14) 영적 순례를 그려주고 있다.
나무와 더불어 블라이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토템 상징물로 거북을 들 수 있다. 블라이는 「거북」(“The Turtle”)이라는 시에서 거북을 하계로부터 나온 동물이라는 점을 부각 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거북은 아무도 그 알들을 찾을 수 없는(No one fine the huge turtle eggs) 신비의 세계에 속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신비의 영역, 즉 “어두움 속에서 나온”(out of darkness) 거북을 영적인 빛을 발휘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거북이 얼마나 반짝이는가!”(How shiny the turtle is!, 5)라고 감탄한다.
이 거북은 「여인들과의 여행」(“A Journey with Women”)에서는 시인을 영적 세계로 안내하는 영매와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이 시의 제 1연에서 시적 화자는 거북과 함께 “비밀스런 통로”(the secret pass)를 지나 하계, 즉 “항아리 속에 죽어 잠들어 있는 자들”(the dead sleep in jars)의 세계로 들어간다.
거북 피 속에 떠서 뒤로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는 미친 섬게처럼 잠을 깬다.
비밀스런 통로 가까이 피 흐르는 들판 위에서―
거기에는 죽은 자들이 항아리 속에 잠들어 있다...
Floating in turtle blood, going backward and forward,
We wake up like a mad sea-urchin
On the bloody fields near the secret pass―
There the dead sleep in jars... (Light Around the Body 56, 이하 LAB)
위의 시에서 시적 화자가 들어가는 세계는 “비밀스런 통로”와 “항아리”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듯이 여성 의식의 세계이다. 제 2연에서 시적 화자는 달을 수호령으로 하여 하계 여행을 계속한다. 그는 “밤에 천천히 거북의 집게발의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달덩이를 가지고/ 터널을 비추기 위해”라고 말한다. 리처드 슥이 지적하듯이 이 시의 제목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신화에서 남성들을 잠의 터널에서 꿈과 무의식의 삶으로 안내하는 달, 즉 ‘하얀 여신’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65). 달리 표현하면 남성 화자인 샤먼 전수자는 여성 수호령인 달의 안내를 받으며 거북과 함께 신비의 영역인 하계로 향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제 3연에서는 깊은 잠으로 비유되는 ‘황홀경’(trance) 상태에서 거북을 타고 천계로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아프리카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거북”을 타고 날아올라 “부성적 자의식의 현대 산업 사회의 상징인 뉴저지 주를 지나”(Sugg 65) “별들 사이의 어둠 속으로”(LAB 56) 날아올라 샤먼적 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시적 화자는 영매인 거북과 더불어 의식의 세계로부터 가장 먼 곳, 즉 무의식의 세계에 진입함으로써 샤먼적 존재로 변모한다. 제 4연에서 시적 화자는 접신 상태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샤먼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새벽에 우리는 여전히 투명하다./ 별빛을 끌어들여”라고 말하며 스스로 “달빛 가득한 방”(a room full of moonlight)과 같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는 시적 화자 자신이 이제 자신의 수호령인 달과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리처드 슥(Sugg)은 달로 표현된 이 꿈 꾸는 사람은 진화의 높은 단계에 나타난다고 하는 “몸 둘레의 빛”을 가진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블라이가 말하는 이 사람의 정체성은 샤먼과 가장 유사하다고 본다.
블라이의 시에서 거북과 같은 동물 영매 역할을 하는 짐승으로 물개를 들 수 있다. 블라이는 그의 산문 시집 『나팔꽃』(The Morning Glory)에 수록되어 있는「죽은 물개」(“The Dead Seal”)에서 물개에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는 영매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죽은 물개」의 시적 화자는 어느 날 해변을 걷다가 누군가에 의해 치명상을 당하고 죽어가는 물개 한 마리를 발견하고 물개의 죽어가는 과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는 죽어가는 물개의 혼을 달랜다는 의미에서 보면 진혼가와 같고 죽은 물개를 자연에 맡기는 과정으로 보면 장례식과도 유사하다. 시적 화자가 해변에서 물개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가자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린다. 이 순간 시적 화자는 삶과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파악하는 예지를 갖게된다. 곧 이 경험은 자신의 “방의 벽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SP 96) 충격적인 것으로 그의 일상적인 의식의 구조를 흔들어 놓게 된다.
나는 서서 그를 바라본다. 그 죽은 몸뚱이에서 떨림이 있다. 저런, 아직 살아 있구먼. 그리고 그 충격이 나의 방의 벽이 무너져 내린 듯 내 속에 퍼진다. 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고, 작은 눈들이 감겨진다. 수염은 이따금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기름이다. 여기 등 위에는 우리의 집들을 그렇게 효율적으로 데워주는 기름이 묻어있다.
I stand and look at him. There's a quiver in the dead flesh: My God, he's still alive. And a shock goes through me, as if a wall of my room had fallen away. His head is arched back, the small eyes closed; the whiskers sometimes rise and fall. He's dying. There is the oil. Here on its back is the oil that heats our houses so efficiently. (SP 96)
시적 화자는 계속해서 죽어가는 물개의 외관을 상세하게 묘사 해 주고 있는데 물개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수염만 움직이고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물개 등에 어려 있는 기름을 주시한다. 그리고 이 기름은 곧 “인간의 집을 효율적으로 데워주는 열”이 되는 것이라고 짐짓 인간이 동물에게 가한 행위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는 블라이가 현대 환경 생태학적 의식을 고취하는 장면이기도하다. 곧 인간을 이롭게 하는 기름이 물개에게는 치명적인 것임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어서 시적 화자는 다소 냉소적인 유머를 사용하여 분위기를 환기 시킨다. 즉, 그는 죽어가는 물개가 연거푸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마치 크리스마스장난감이 내는 소리 같다”고 말한다. 물개는 바다로 돌아가려고 애써 보지만 기력을 잃고 모래 바닥에 턱을 묻고 만다. 제 2연에서는 시적 화자가 이 죽어가는 물개를 통하여 죽음의 실상을 더욱 분명하게 자각하는 과정을 그려주고 진혼굿의 성격을 내 비친다.
잘 가 형제여, 너는 파도 소리 속에서 죽어가는구나. 사람들이 너를 죽였다면 우리를 용서해 다오. 너의 종족 만세, 너희 튜브의 종족이여, 땅에서는 그렇게 불편하고 바다에서는 그렇게 편안한 종족이여, 그러면 죽음 속에서 편안하라, 모래가 너의 콧구멍 속에서 사라지면 순수한 죽음을 통해 긴 바다 속에서 헤엄쳐 갈 수 있으리라.
Goodbye, brother; die in the sound of waves. Forgive us if we have killed you. Long live your race, your inner-tube race, so uncomfortable on land, so comfortable in the ocean. Be comfortable in death then, when the sand will be out of your nostrils, and you can swim in long loops through the pure death. (SP 97)
모든 죽음을 은유하는 물개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처럼 매우 고독한 가운데 느릿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개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는 시적 화자는 물개와 교감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형제여’ 라고 부르게 된다. 이는 인간의 운명과 물개의 운명이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역시 샤먼적 여정을 다루는 휘트먼의 시「라일락이 뜰에 피어 있을 때」(“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d”)와 「끊임없이 출렁이는 요람에서 나와」(“Out of the Cradle Endlessly Rocking”)에서 시적 화자가 영매 역할을 하는 새에게 ‘형제여’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 시킨다. 시적 화자는 물개에게 용서를 구하고 명복을 빌어주며 ‘순수한 죽음’을 지나 재생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양서 동물로서 물개는 시인에게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삶과 죽음의 세계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Davis 110)을 하며 더 나아가 시인을 영적 세계로 안내하는 영매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블라이는 “좋은 산문시는 긴박하고 기민한 리듬으로 우리들을 경계 지역을 지나게 하고 하계 혹은 동물들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게 한다”(SP 88)고 말한 바 있다. 그는「죽은 물개」를 통해 이와 같은 그의 시론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결말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물개에게 “너는 내가 만지는 것을 원치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분리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과 자연은 서로 독자적인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언급이다. 블라이는 “신낭만주의를 지향 한다”고 진단하는 마이클 델빌(Michel Delville)은 이를 두고서 “사물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decolonizing the object, 156) 태도라고 적절하게 해석하고 있다. 물개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하는 시적 화자는 그 동물을 그대로 두고 절벽을 기어올라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 시에서 물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시인에게 죽음과 삶은 연계되어 있다는 새로운 지식을 전수해 주는 영매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V
블라이의 시적 화자는 종종 샤먼적 접신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수호신을 모시고 사는 샤먼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잠자는 사람들 손잡다』(Sleepers Joining Hands)의 첫시 「여섯 개의 겨울 사생활 시」(“Six Winter Privacy Poems”)의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가 “나는 홀로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다”(I am alone, yet someone else is with me, SJH 4)라고 하는 말이라든지 「머리 속으로 끌어 올려진 물」(“Water Drawn Up Into the Head”)라는 시에서 “내 속에 또 다른 존재가 살고 있다”(SJH 65)라는 언급은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언술이라 생각된다. 이들 시적 화자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영적 존재들은 시적 화자에게 영적 세계에 대한 비전을 말해주게 된다. 『잠자는 사람들 손잡다: 장시』(“Sleepers Joining Hands: A Long Poem”)는 시적 화자의 내면에 자리 잡은 영적 존재의 입을 통해 블라이의 샤먼적 비전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나는 어두움 속에 사는 어두운 영(dark spirit)이다”(SJH 58)라고 말하는「나를 경고하는 사람과의 만남」(“Meeting the Man Who Warns Me”)의 시적 화자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말해준다. 그는 “죽음이 정다운 것이라고 판결 한다”(SJH 62) 라고 하계에서 발견한 지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준다. 이는「냄비 속에서의 밤 여행」(“The Night Journey in the Cooking Pot”)의 시적 화자가 영적 여정인 “밤바다 여행 중에 태어났다”(I was born during the night sea-journey, SJH 59)고 말하듯이 블라이의 화자는 샤먼적 여정을 통해 샤먼과 같은 시인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블라이의 샤먼적 화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에게 삼킨바 되어(swallowed by the invisible) 자기 주변의 나무들이 벌거숭이로 기뻐하는(naked and joyful)것을 보게 되고 춤꾼들을 사랑하며(I love the dancers) 스스로 노래하게(I start to sing, SJH 61)된다. 그는「머리 속으로 끌어 올려진 물」에서는 자신의 영적 상속을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온”(SJH 64) 샤먼적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오랜 기다림과 고독을 통하여 샤먼적 감각을 획득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나는 여기 홀로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나는 여기 홀로 2년 동안 앉아 있었다!
내 속에 또 다른 존재가 살고 있다.
그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나는 그를 듣는다
벌거숭이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속에서
I have sat here alone for tow hours...
I have sat here alone for two years!
There is another being living inside me.
He is looking out of my eyes
I hear him
in the winds through the bare trees. (SJH 65)
위의 시구에 등장하는 타자(other being)는 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내면적인 존재이기도 하고 시인의 외부에 존재하는 외적 존재이기도하다. 이는 이 타자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언급과 시인 자신이 그의 소리를 바람 부는 벌거숭이 나무에서 듣는다고 하는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외적인 영적 존재는 시인에게 인간계와 자연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샤먼적 비전을 제시한다. 시인은 일상적이며 이성적인 자아의 국면이 허물어지고 이 같은 변화된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을 삼단계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몸을 풀고 진흙탕을 돌진하는 악어다.
나는 아기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소리치는 개코 원숭이다
나는 한 밤에 아마(亞麻) 꽃을 피우게 하는 빛이다!
나는 우랄 산 너머 세 부분 속으로 진입하는 천사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I am the crocodile unrolling and slashing through the mudded water,
I am the baboon crying out as her baby falls from the tree,
I am the light that makes the flax blossom at midnight!
I am an angel breaking into three parts over the Ural Mountain!
I am no one at all. (SJH 67)
동일한 구문의 반복으로 주술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위의 시구는 소위 블라이가 말하는 세 종류의 두뇌, 즉 파충류, 포유류, 그리고 신 두뇌의 개념을 환기 시키고 있다. 블라이는 그의 에세이 「세 종류의 두뇌」에서 인간의 두뇌는 욕구 충족 및 생존과 관계되는 파충류 두뇌에서 사랑과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포유류 두뇌를 거쳐 고도의 영적인 단계인 신 두뇌로 발전되어 왔다고 주장 한 바 있다(Leaping Poetry 59-67). 위의 시구에서 진흙에 돌진하는 악어는 파충류를 대표하며, 개코 원숭이는 포유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천사와 동일시되는 빛은 신 두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블라이는 파충류 두뇌에서 신 두뇌로 오르내리는 현상을 ‘도약적’(leap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승에서 저승으로 오르내렸던 오르페우스를 “초기의 샤먼적 인물”(Leaping Poetry 73)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리처드 슥(Sugg)은 블라이가 언급하는 신 두뇌의 수준을 신과 근접해 있는 단계라고 주장한다(101). 필자는 이 단계는 샤먼적 의식과 가장 유사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샤먼은 현재의 분리되고 파편화된 인간 조건을 파기하고 한 동안이나마 태초의 상태, 즉 모든 것을 상호 관계적으로 인식하는 낙원적 상황을 지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Eliade 99).
위의 시의 시적 화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우주의 다양한 생명체들 뿐 아니라 추상적인 자질들과도 자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분별 의식이 사라진 샤먼적 엑스터시의 상태에 돌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어두운 하늘에 있는 불멸의 가시다,
나는 결코 내가 만나보지 못한 자다,
나는 거친 물결을 가로 지르는 재빠른 물고기다,
나는 폐허된 집에서 소리치는 마지막 상속자다
나는 사원의 연못에 숨은 연어다
나는 애인의 유품이다
나는 광기의 곡선을 껴안고 있는 검은 에나멜 질 무릎을 가진 곤충이다
나는 바다 한 가운데서 떠오르는 저녁 빛이다
나는 긴 갈대 속에서 싸우는 영원한 행복이다.
I am a thorn enduring in the dark sky,
I am the one whom I have never met,
I am a swift fish shooting through the troubled waters,
I am the last inheritor crying out in deserted houses
I am the salmon hidden in the pool on the temple floor
I am what remains of the beloved
I am an insect with black enamel knees hugging the curve of insanity
I am the evening light rising from the ocean plains
I am an eternal happiness fighting in the long reeds. (SJH 67)
자아 확산의 양상을 표현하는 휘트먼의 카타로그 처럼 마침표 없이 열거되는 위의 시구를 통해 블라이는 자아의 범주가 우주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가시,’ ‘물고기,’ ‘상속자,’ ‘연어,’ ‘유품,’ ‘곤충’ 등과 같은 속(俗)에 속한 것들 뿐 아니라 ‘저녁 빛,’ ‘영원한 행복’과 같은 성(聖)에 속한 자질들과도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샤먼처럼 결코 속의 세계에 속한 세계를 결코 초월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든 종족이 하나가되는 세상을 꿈꾼다. 자신을 “황혼 무렵 들판에서 뚜벅 뚜벅 걸어가고 있는 털 복숭이 몸”(the hairy body padding in the fields at dusk, SJH 66)이라고 말하는 시적 화자는 이 시의 종결부에서는 자신을 팬더 곰과 동일시하고 있다.
팬더는 모여드는 어둠 속에서 기뻐한다.
수마일 공간을 통해 서로에게 급히 손을 내민다.
세상의 잠자는 모든 사람들은 손을 잡는다.
The panther rejoices in the gathering dark.
Hands rush toward each other through miles of space.
All the sleepers in the world join hands. (SJH 67)
위의 시구는 휘트먼의 「잠자는 사람들」(“The Sleepers”)의 시구, 즉 “옷을 벗고 누워 잠자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그들은 온 땅의 사람들과 손에 손을 잡고 함께 흐른다”(Leaves of Grass 432)라는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위의 시에 언급되고 있는 팬더는 릴케의 시 「팬더 곰」(“The Panther”)에 연유한다. 블라이는 릴케의 이 시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시의 말미에서 그〔릴케〕는 팬더의 몸속에 있다”(News of the Universe 211)고 언급한 다. 다시 말해서 블라이는 관찰하는 주체인 시인과 객체인 팬더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위의 시구에서 남성 의식의 상징인 팬더가 여성 의식의 상징인 어둠 속에서 기쁨을 찾는 개인적 경험은 세상의 모든 잠자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의 세계에서 손잡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된다. 단수인 ‘나’(I)로 표현된 시인의 개인적 경험은 굿판과도 같은 시를 통해 독자들 혹은 관중들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의 얼굴들은 어둠으로 빛난다.”(Our faces shine with the darkness, SJH 67)라는 복수 개념의 모순 형용적 표현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V
무의식의 세계에 깊이 천착했던 블라이는 샤머니즘적 사유가 인류의 보편적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한 양식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과 중남미 뿐 아니라 인도 및 아시아의 문학적 전통을 이어 받고 있는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샤먼적 감수성으로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시를 일종의 ‘여정’이라고 간주하였던 그가 말하는 ‘여정’은 일반 의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 샤먼적 이니시에이션을 거쳐 샤먼 시인으로 변모되어가는 통과 제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블라이의 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자연 상징물들은 단순한 시적 이미지 제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샤먼적 영적 여정을 도와주는 영매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블라이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나무, 새, 거북, 물개, 불가사리 등은 인간의 내면 상태를 은유하는 심층 이미지 역할을 하기도하고 인간과 자연, 의식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 삶과 죽음 등의 상호 관계를 인식시켜주는 매체로 작용하기도 한다.
블라이는 자신의 시적 화자의 입을 통해 영적으로 재생한 샤먼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의식으로의 하강은 의식의 층변을 일으켜 변화되기 위해 필수적인 영적 시련이다. 이 과정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어머니 의식’의 획득과 관계된다.
블라이는 또한 인간과 자연, 남과 여, 그리고 삶과 죽음 등의 이원적 세계의 합일을 지향하는 샤먼적 의식을 소위 그의 ‘신 두뇌’ 작용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인류가 생존과 관계되는 파충류 단계와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포유류 단계를 지나 영적으로 성숙한 신 두뇌 단계에 도달해야 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신 두뇌는 만물의 상호 관계를 인정하는 샤먼적 의식을 드러낸다.
블라이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개인과 사회의 정신적 건강을 회복시켜줄 샤먼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그의 영적 메시지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적 세계관을 뛰어넘어 통합적 비전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블라이는 샤머니즘에서 시적 효용성을 찾고 이를 통해 현대의 파편화된 정신세계를 치유코자 하고 있다. 폭력과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반전 시인인 블라이가 부르짖는 소리에 한 번쯤 귀 기울여 볼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주제어: 샤머니즘, 토템, 어머니 의식, 도약 시, 무의식, 수호령
인 용 문 헌
Bly, Robert. Silence in the Snowy Fields. Middletown: Wesleyan UP, 1962.
_____. The Light Around the Body. New York: Harper, 1967.
_____. Leaping Poetry: An Idea with Poems and Translations. A Seventies Press Book. Boston: Beacon P, 1975.
_____. Talking All Morning. Ann Arbor: U of Michigan P, 1980.
_____. Selected Poems. New York: Harper & Row, 1986.
_____. News of the Universe: Poems of the Twofold Consciousness. San Francisco: Sierra Club Books, 1980.
_____. Sleepers Joining Hands. New York: Harper & Row, 1973.
_____. “In Search of an American Muse.” New York Times Book Review 22, 1. 1984.
Bowman Lynne E. M. “Poet Robert Bly: Shaman of the Dark Side." Ph. D. Diss., The U of North Carolina, 1989.
Davis, William V. Understanding Robert Bly. Columbia: U of South Carolina P, 1988.
Delville, Michel. The American Prose Poem: Poetic Form and the
Boundaries of Genre. Gainsville: UP of Florida, 1989.
Eliade, Mircea. Shamanism: Archaic Techniques of Ecstasy. Trans. William R. Trans. New York: Bollingen Foundation, 1984.
Kramer, Lawrence. “A Sensible Emptiness: Robert Bly and the Poetics of Immanence.” Critical Essays on Robert Bly. Ed. William V. Davis. New York: G. K. Hall & Co., 1992. 212-23.
Lacey. Paul A. “The Live World.” Critical Essays on Robert Bly. Ed. William V. Davis. New York: G. K. Hall & Co., 1992. 114-34.
Nelson, Howard Robert Bly: An Introduction to the Poetry. New York: Columbia UP, 1984.
Peseroff, Joyce. “Minnesota Transcendentalist.” Critical Essays on
Robert Bly. Ed. William V. Davis. New York: G. K. Hall & Co., 1992. 89-91.
Rehder, Robert. “Which Way to the Future?” Critical Essays on Robert Bly. Ed. William V. Davis. New York: G. K. Hall & Co., 1992. 267-82.
Sugg, Richard. Robert Bly. Boston: Twayne Publishers. 1986.
출처: 현대영미어문학회
가우리블로그정보센터(G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