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더위, 늦 더위
손 원
엊그제가 추분이었다. 가을이 왔음이 실감 난다. 추분 하루 전날까지 폭염으로 외출조차 꺼렸지만, 추분 일이 되니 갑자기 시원해 져 아침저녁 외출 시는 긴 소매 차림을 할 정도다. 무한한 공간의 기온이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도 이상하다. 넉 달간 폭염, 하루만에 서늘해진 기온, 모두가 정상이 아닌 듯 하다.
올해 더위는 일찍 시작해서 늦게 끝났기에 유별하다. 7, 8월 한여름 더위야 오십보백보라지만, 6월 더위와 9월 더위가 유별나 역대급 긴 여름을 기록했다. 9월 중순인 추석에 폭염경보가 내려지기도 했다. 계절이나 기온은 순기가 있어 9월만 되면 언제 더웠냐고 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7, 8월 폭염이 6, 7, 8, 9월까지 늘어나 자연의 역습을 받고 있다. 에어컨이 첫 번째 생활필수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7, 8월 더위를 이겨내면 된다는 기대감이 무너진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가 무색하게 혹서가 두 달이나 늘어남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기후에 민감한 농작물의 피해가 늘어났고, 이러다간 앞으로 농업에 대한 대혼란과 함께 먹거리 걱정까지 하게 된다.
여름 입맛을 돋우는 상치가 이른 더위로 작황이 나빠 초여름에 서민 식단서 뜸해졌다. 추석 차례상에 오를 시금치도 더위 탓에 제상에 오르지 못했다. 무더위 영양 보충으로 삼겹살을 먹자니 그 흔한 상치마저 더위에 녹아내려 삼겹살 궁합도 깨어졌다. 한여름 상치는 서민 밥상을 풍성하게 한다. 강된장에 상치와 풋고추는 까끌한 여름 입맛을 돋우지만, 올해는 달랐다. 폭염으로 풋고추, 오이마저 시들어 밥상에서 멀어져 더위 먹은 심신을 더욱 힘들게 했다.
막바지 더위에 두 가지 일을 해야 했다. 벌초와 김장 채소 모종이다. 벌초는 더위가 한풀 꺾이면 해왔다. 해마다 벌초를 8월 하순이면 했는데, 올해는 여전히 더위가 맹위를 떨쳐 8월을 넘겨 추석이 임박해서야 했다. 시원해 지기를 기다렸지만, 더위가 가시지 않아 무더위와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한나절 폭염에 몸을 사려가며 제초기를 돌렸다. 30분쯤 고군분투하면 지쳐 그늘에서 도랑물을 껴언져가며 가까스로 벌초를 마쳤다. 비 오듯 땀을 흘렸고 체력을 소진했기에 탈진하여 한 이틀 몸을 추스려야 했다. 그다음 주에는 배추 모종을 했다. 몇 주간 5일 장에서 모종을 구입하려 했으나 폭염으로 모종이 귀했다. 모종 시기가 늦어져 배추재배를 포기하려 했다. 혹시나 해서 장터를 두리번거렸는데 난전에 배추 모종이 눈에 띄였다. 연약한 모종 한 판을 사서 밭으로 갔다. 오후에 메마른 땅에 골을 지어 모종을 넣었다. 물을 듬뿍 주기는 했지만, 땡볕에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인근 산소를 벌초한 마른 잔디가 버려져 있기에 서너 아름 모종을 덮어 주었다.
이틀이 지난 추석 전날, 배추밭을 가 보았다. 마른풀을 걷자 고꾸라진 모종이 드러났다. 이틀 새 절반이 말라 죽고 나머지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으로 물을 주었다. 지금 물을 주지 않았다면 한 포기도 살아 남지 못할 것 같았다. 고사 직전의 모종이 우선은 생기를 갖기를 간절히 바래는 마음이다. 당분간 비 소식이 없고 무더위도 지속된다기에 걱정이다. 물을 몇 번 더 주면 되겠지만, 백 리 길을 오가기가 쉽지 않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배추 농사가 잘되면 자가소비를 충당할 수 있지만 쉽지 않다. 30포기 정도 배추 수확에 들인 비용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시장에서 사다가 김장하는 것이 낫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따지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을 거라고 한다. 비용과 노력을 떠나서 여건이 되면 해 보는 것이 농사라고 했다. 투자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농사일은 즐겁고 보람 있기 때문이다. 최선의 노력을 하되 성공과 실패는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 적절한 일조량과 기온, 강우를 내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만한 일에 하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에 겸손해야겠다. 이른 더위, 늦더위까지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극복해 가면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른다.
※ 2024.10. 2. 영남경제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