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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8.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막1:7,8)
7 He announced to the people, “The man who will come after me is much greater than I am. I am not good enough even to bend down and untie his sandals. 8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우리는 이 사람을 부러워하고 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남들과 비교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두고 소설 한 권쯤 거뜬히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겉만 보고는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그들이 말하는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봅시다.
지금 우리 어르신들은 거창이라는 공간에 살고 계십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아니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일생을 보내셨는데 나의 현재 모습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마다 부모 아니겠습니까?
성도 부모의 성을 따릅니다.
모양도 성격도 부모를 닮기 마련입니다.
또 부모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나 부모가 있기에 이 땅에 숨 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당장 부모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가 없어서 치명적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일제와 전쟁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뉴스를 통해서 가끔 확인하는 일입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보내져서 미국 사람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 태반이 한국말을 아예 하지 못합니다.
부모란 누구에게나 결정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보다 사람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냐? 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 아니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 그들의 운명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의해 우리가 김씨 이씨 박씨 성이 갈리지만 또 고향이 정해집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어디에도 어머니의 산고를 거치지 않고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모두 하나님으로 인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듯이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고아가 되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르신들도 아마 텔레비전을 통해 북한의 사정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양입니다.
수년 전 그들이 먹을 식량이 없어서 몇백만 명이 죽어갔다고도 합니다.
그 때에 많은 북한의 주님들이 두만강의 국경을 넘어서 중국으로 갔습니다.
베트남 미안마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어떤 젊은 청년 한 사람의 이야기를 TV를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북한 공산당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중국으로 국경 넘을 때 국경에는 총을 든 북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국경을 넘는 자들에게 총질을 했습니다.
그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국경을 넘었다고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중국 경찰들이 탈북자들을 잡아서 다시 북한 감옥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또 중국 국민들은 탈북자를 신고하고 현상금을 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을 피해서 산을 넘어오는데 늙은 부모들은 걸음이 느렸습니다.
굶고, 상처도 당하고, 길은 험하고.......
그런 어느 날 그렇게 남을 향하던 그 앞에 부모님들이 사라지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모님들은 아들이 염려가 된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챙기다가 걸음이 지체될까 보아 아들 눈을 피해 숨어버린 것입니다.
아들은 별수 없이 홀로 한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목숨을 버린 셈입니다.
그 분들이 북한에 끌려가면 북한의 옥에서 돌아가셨을지 모를 일입니다.
부모는 아들을 위해 그 죽음의 길을 스스로 택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부모님 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다루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희생 덕으로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신앙 생활이란 주일마다 하나님을 찾아가서 공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찾아가서 공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에게 공을 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사람들을 죽을 처지에서 건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우리를 구원하시는 자를 뜻합니다.
그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언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적이 있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주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으니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하나님하고 부르면 주님은 이 자리에서 나다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제사 음식을 차리고 목이 터져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실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먼저 소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7.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7 He announced to the people, “The man who will come after me is much greater than I am. I am not good enough even to bend down and untie his sandals.
요한이 이 예수님을 소개 할 때에 첫 마디는 그 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 시절에 처음 교회에 갔습니다.
그 날이 성탄절 새벽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성가대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나가는 옆집 앞에서 교회 성가대원들이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그 찬양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렸던지 오는 주일 고등학교 때 내 짝을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가 다니던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공부를 다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니 제가 신앙에 대한 것을 잘 알 지 못 했습니다.
저는 작은 시골 교회들을 담임하게 되었는데 제주도의 봉성이라는 한라산 중산간의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인들의 숫자는 열 손가락을 꼽을 만큼 작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부부가 교회 출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주간을 꾸준히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예배를 참석하신 지 몇 주일이 지났습니다.
예배 후 교인들과 나누는 점심시간이었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오시더니 자신이 교회를 나오게 된 사연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납읍이라는 옆 마을에 사는 한 남자분과 재혼을 해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제주로 이사를 와서 경험한 일입니다.
잠을 자는데 꿈에 뱀이 나타나서 여인이 되어 자신을 목 졸랐다는 것입니다.
또 지네가 나타나서 그것도 여인이 되더니 자신을 칼로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심해서 정신과 병원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증상이 계속되니 교회를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몇 주일 교회를 나왔는데 그런 악몽이 그쳤다고 저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으로 놀란 사람은 목사인 저였습니다.
첫째로 저는 그런 이야기는 라디오 방송극의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영적 세상이 있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그 세상이 이와 같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둘째로 저는 말씀의 능력에 놀란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그 분의 사정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 사정을 알았다고 한들 대안을 못 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한 일은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을 내가 아는 대로 지금처럼 죽 이야기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말씀을 어르신들께 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말씀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어르신들보다 세상 경험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탁월한 지식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말씀을 듣는 도중에 그 부인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내 뒤에 능력 많으신 분이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이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여기서 설교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저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는 뒤에서 그 분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당시에 요한이라는 사람은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요한은 저 같이 초라한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주인의 신발을 벗겨주는 종보다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렇게 부족한 채로 예수님을 전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제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설교 뒤에 능력 많으신 그 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상대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기독교의 특별한 교리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탈북한 청년의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국경을 넘고 중국의 땅에서 사람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나이 드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들을 잠시 심부름을 시키고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 자식 눈을 피해 숨읍시다.
우리 자식만큼은 한국에 가도록 아들에게 몸을 숨기셨던 것입니다.
청년의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가 스스로 죽자고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 분들은 중국의 겨울산에서 얼어죽으셨는지 모르고 경찰에 잡혀가 북한으로 끌려가서 옥에서 돌아가신지 모를 일입니다.
그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8.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8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당시에 예수께서는 봉사들을 눈뜨게 하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수만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한 명의 도시락으로 수만을 먹이신다.
물 위도 걸으신다.
명령 하나에 죽은 자가 일어난다.” 나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분이 베푸시는 세례가 탁월하시다!”
의 능력 때문이라고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 요한에 비해 세례에서 뚜렷히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합니다.
얼굴을 씻는 것입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세탁을 합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신앙 생활을 한 지 한 1년이 지나면 세례를 줍니다.
洗(씻을 세)禮(예도 예)를 줍니다.
여기에서 씻는다는 것은 사람 마음 중에 죄를 씻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사람들은 손을 많이 씻었습니다.
물로 비누칠을 해서 손을 씻는 것입니다.
하지만 병균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사바늘을 비눗물로 씻어서 쓰는 병원을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우리들은 불주사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 주사 바늘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사용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바늘을 물로 씻은 것이 아닙니다.
불로 태울 경우 바늘이 완전히 소독할 될 것입니다.
주사바늘을 알코올램프 불에 태웠던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세례를 물로 씻는 것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죄를 씻으실 때에 불로 태워버리실 것입니다.
완전한 방법입니다.
완전하게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완전한 보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제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는 것입니다.
죄가 옷에 묻은 때처럼 눈에 보이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깊은 마음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는 일을 해야 하는데 저는 성경에 나온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는 순간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불로 태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죄를 불로 태워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을 전혀 다른 새 사람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하실 터인데 세례를 통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