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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33-02)
예루살렘 함락과 남은 백성을 심판
에스겔 33장 21-33절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중에서 배신자인 염석진이 있습니다. 염석진은 독립웅동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배신자입니다. 쁘락지로서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으며, 동지들을 팔아먹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은 나중에 들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동지가 총을 겨누고 묻습니다. ‘너는 왜 매국노 짓을 했느냐?’ 염석진은 ‘나라가 독립될 줄 알았나?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깐, 내가 그랬지!’라고 대답하고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고 현실에 급급하며 살아가면, 나중에 심판을 받을 때, 이런 말로 변명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는 줄 알았나?’
격렬했던 심판 예언자의 활동을 마감하고 에스겔이 파수꾼 예언자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물러나 있었던 에스겔이 성의 멸망 소식을 듣고 무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맡겨집니다.
다시 입을 열리는 에스겔(21-22)
찰스 스펄천 목사님은 ‘믿음에서 떠나간 사람은 먼지 낀 성경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린 첫 번째 신호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생명을 줍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21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22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21-22)
아내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관한 표적행위(24:13-24)를 행한 후 에스겔은 표적행위의 예언의 성취되기까지 한동안 벙어리로 지냅니다(24:25-27). 에스겔이 침묵을 끝내고 다시 등장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에스겔이 선포했던 예루살렘 멸망이 역사적 현실로 드러납니다.
(1) 성의 함락 소식을 듣는 에스겔(21)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주전 585년 1월 19일)에 예루살렘에서 도망쳐온 자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그 전날에는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참조, 사무엘상 9:15-17).
(2) 에스겔의 입을 열어주시는 여호와(22)
에스겔서의 연대기(24:1)에 따르면 에스겔은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주전 588년 1월 15일), 곧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성의 멸망을 선포하고 벙어리가 되기에 침묵 기간은 대략 삼 년이 됩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선포했던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 멸망에 관한 소식을 들을 때까지 삼 년을 벙어리로 지냅니다(24:26-27). 주전 593년 그발 강가에서 심판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2:10)을 선포했던 에스겔이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잿더미로 파괴된 지(주전 587년 8월 28일) 대략 17개월이 지나 파수꾼 예언자로 다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에스겔의 연대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회복과 관련한 마지막 예언이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40:1)에 선포되기에, 에스겔은 십이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파수꾼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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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 남은 자(23-33)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채우는 수단과 도구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그런 사람들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23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4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25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26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27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 28내가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29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31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33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23-33)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요 거주지가 세 지역으로 분화됩니다. 다수는 가나안에 남았고, 예루살렘의 주류에 속했던 자들은 주전 597년의 첫 번째 유배와 주전 587년의 두 번째 유배 때 대부분 사로잡혀 끌려갔습니다. 또 멸망 전후에 적지 않은 사람이 피난처를 찾아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면, 누가 하나님 백성의 정통성을 계승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상속받게 되겠습니까? 본문은 여기에 대한 에스겔의 답변입니다. 첫째 단락(24-29)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가나안에 남은 자들의 파렴치를 고발하며 이들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둘째 단락(30-33)은 에스겔의 선포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유배민의 위선적 경건을 고발합니다. 폐허가 된 가나안에 사는 자들이 ‘하나님 백성’에서 탈락했다고 자동으로 그 영예가 바벨론 유배민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유배민도 가나안에 남은 자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자격이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 수 있습니다.
(1) 가나안에 남은 자들(23-29)
주전 59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신하들과 많은 예루살렘 주민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후,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첫 번째 유배민에게서 하나님 백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했던 것처럼(11:15), 주전 587년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도 가나안에 남은 자들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내세우며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약속(참조, 창세기 12:7; 13:15; 15:18-21; 17:8)을 자신들이 계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나안에 남은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웃의 재앙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데 악용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정통성과 가나안 땅을 독점하려는 이들의 주장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돌아갈 날만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유배민에게는 소망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에스겔은 가나안에 남은 자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주장에 맞서 이들의 윤리적, 제의적 파렴치를 고발하고 심판을 선포합니다. 유배당하지 않고 가나안에 남았다는 사실이 이들의 자격과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이들이 의로워서 유배를 모면하고 고향에 남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들이며 가나안은 이들의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이교적 제의에 빠져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멸망의 심판뿐입니다. 이들은 칼과 들짐승과 전염병에 넘겨져 죽게 되고, 이스라엘 땅은 아무도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약속을 주신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가 상속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며 제의적,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곧 파수꾼 예언자 에스겔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가 되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2) 에스겔의 말을 듣기만 하는 유배민(30-33)
역설적으로 유다의 멸망이 심판 예언을 선포한 에스겔을 유배민 가운데 유명인사로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조롱당했던(12:21-28) 에스겔이 참 예언자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에스겔을 대화의 주제로 삼아 떠듭니다.
이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30) 하며 에스겔을 찾아와 그 앞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가시와 찔레와 전갈’과 같았던(2:6) 사람들이 ‘여호와의 백성’이 된 양 말씀을 듣기 위해 에스겔을 찾습니다(31).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었습니다.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에스겔의 집을 찾지만 이들은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에스겔 앞에 앉아 열심히 듣지만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사랑이 있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속으로는 제 잇속을 차리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귀로는 말씀을 듣고 몸으로는 제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말씀을 듣기에만 열심인 자들에게 에스겔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32)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에게 에스겔의 설교는 소리꾼들이 장터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부르는 ‘사랑의 노래’와 같았습니다. 귀에 거슬리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외치지 않고 귀에 좋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였기에 잘 받아들인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들을 때는 감동하고 좋아하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 ‘생명의 율례’를 지키려는(15) 구체적인 결단이 없었습니다. 경건한 자세로 말씀을 열심히 듣는 것으로 정의와 공의의 실천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삶의 자세는 안 바뀐 채 말씀만 들으면 하나님의 징벌을 초래할 뿐입니다. 사랑의 노래로 들었던 예언자의 선포가 저들의 위선적 경건을 폭로하고 심판할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단락 마지막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대신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가 나옵니다. 거의 독점적으로 여호와와 관련해 사용하던 인지 양식이 예언자 에스겔에게 적용됩니다. 말씀을 주시는 여호와와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에스겔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이 변형된 인지 양식은 에스겔이 심판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2:5)에서 한번 더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의 심판뿐만 아니라 회복에도 함께하십니다.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에 마음을 두는지가 중요합니다. 남은 자들은 땅에만 관심을 두고 유배민들은 열매 없는 경건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실현된 예언 앞에서 요청되는 건 시대 통찰, 자기 성찰, 공감과 통감의 언어이지 가증한 말이나 미끈한 말이 아닙니다. 말씀의 실현 앞에서 말씀의 실천으로 응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