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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부공제(賦貢制) 5
염철고 하(鹽鐵考下)
동(彤)이 표(表)를 올려서, “신이 들으니 한 효무제(漢孝武帝)가 정사를 하면서, 구마(廐馬)가 20만이고 후궁이 수만 명이었다 합니다. 밖으로 오랑캐를 정벌하고 안으로 궁실을 지어서 허비한 것이 실상 지금의 백배나 심했습니다. 그러나 옛적에는 허비가 많아도 재화에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용도도 적으면서 재물이 부족함은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옛적에는 재물을 산택(山澤)에서 취했는데, 지금은 가난한 백성에게만 취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산택에서 취하면 국가에 이(利)가 많으면서 사람들은 농사로 돌아오고, 가난한 백성에게서 취하면 국가의 이가 박하면서 사람들은 그 업(業)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선왕이 법을 만들어서 산해(山海)에 대한 벼슬이 있었고, 우(虞)ㆍ형(衡)이라는 직(職)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경하게 하고 중하게 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금(禁)하고 헤치는(發) 데에 시기가 있으니, 첫째로 농사에 전력하고, 둘째로 나라가 넉넉해지니, 사람을 구제하는 좋은 일입니다. 무릇 바닷물을 졸여서 소금을 만들고, 광물을 채굴해서 돈을 만들며,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짓는 자는 풍족한 무리이며, 추워도 입을 것이 없고 굶주려도 먹을 것이 없으며 품을 팔아 스스로 살아가는 자는 곤궁한 무리입니다.
능히 산해의 많은 이를 거두어 풍족한 자가 차지하던 것을 빼앗으며, 조렴(調斂)과 중요(重徭)를 감면해서 곤궁한 사람을 도와줄 것 같으면, 이른바 여유 있는 것을 줄여서 부족한 데에 보탠다는 것이니, 어찌 제왕의 도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폐하께서 염ㆍ철ㆍ목재 등을 관리하는 관원에게 조서하여, 각각 그 이를 거두어서 백성에게 돌린다면 두어 해가 못 되어 부고(府庫)가 여유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너그럽게 진대(賑貸)하는 영을 내려서 궁독(窮獨)한 사람의 요역을 감면하시면, 군생(群生)에게 혜택이 될 것이며 황복(荒服)도 편케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재신(宰臣)에게 그 가부를 논의하도록 했더니, 모두 “염ㆍ철의 이가 국가 재정에 매우 유익하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강사도에게 해내 염ㆍ철에 대한 과세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유동의 말은 소통(疏通)해서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금령을 제정하는 당초에는 “요역을 경하게 한다.” 하고, 이를 누리는 날에 식언하게 되면 취렴(聚斂)으로 끝날 뿐이니, 내가 염려하는 바는 바로 이 점이다.
생각건대, 목재도 큰 재물이니, 동철(銅鐵)과 더불어 여금(厲禁)을 같게 함이 마땅한데, 유동의 표(表)에 목재를 아울러 거론했음도 이치에 합당하다. 《통고(通考)》에, “당나라 때에 염지(鹽池)가 18, 염정(鹽井)이 640개였는데, 모두 탁지(度支)에 예속되었다. 포주(蒲州) 안읍(安邑) 해현(海縣)에 염지 5개가 있었는데 총괄해서 양지(兩池)라 하며, 해마나 소금 1만 곡을 생산해서 경사(京師)에 진공하였다. 염주(鹽州) 오원(五原)에도 오지(烏池)ㆍ백지(白池)와 와지(瓦池)ㆍ세항지(細項池)가 있었고, 영주(靈州)에는 온천지(溫泉池)ㆍ양정지(兩井池)ㆍ장미지(長尾池)ㆍ오천지(五泉池)ㆍ홍도지(紅桃池)ㆍ회락지(回樂池)ㆍ홍정지(弘靜池)가 있었으며, 회주(會州)에는 하지(河池)가 있었는데, 3주(州)는 모두 쌀을 바쳐서 소금에 대신하였다.
안비 도호부(安比都護府)에는 호락지(胡落池)가 있어 해마다 소금 1만 4천 곡을 생산해서 진무군(振武軍)과 천덕군(天德軍)에 공급하였다. 검주(黔州)에는 염정 41개가 있었고 성주(成州)와 수주(嶲州)에는 염정이 각각 하나였다. 과덕(果德)ㆍ낭주(閬州)ㆍ개봉(開封)ㆍ통주(通州)에는 염정이 120개인데 삼산 남서원(三山南西院)에서 관할하고, 공주(邛州)ㆍ미주(眉州)ㆍ가흥(嘉興)에는 염정이 13개 있는데 검남 서천원(劍南西川院)에서 관할했으며, 재주(梓州)ㆍ수령(遂寧)ㆍ면주(綿州)ㆍ합천(合川)ㆍ창릉(昌陵)ㆍ유주(渝州)ㆍ노주(瀘州)ㆍ자천(資川)ㆍ영창(榮昌)ㆍ능천(陵川)ㆍ간양(簡陽)에는 염정 460개가 있었는데 검남 동천원(東川院)에서 관할해서, 모두 달마다 할당량을 독려하였다.
유주(幽州) 대동(大同) 횡야군(橫野軍)에는 염둔(伍)이 있고 둔마다 역정(役丁)과 병정이 있어, 해마다 소금 2천 800곡을 생산했으며, 적을 때에도 1천 500곡이었다. 바닷가 고을에는 해마다 조(租)를 면제하고 그것으로 소금 2만 곡을 생산해서 사농(司農)에게 바쳤다. 청주(靑州)ㆍ초주(楚州)ㆍ창주(滄州)ㆍ해주(海州)ㆍ체주(棣州)ㆍ항주(杭州)ㆍ소주(蘇州) 등은 소금 값으로 가벼운 물건을 사서 또한 사농에게 바쳤다.” 하였다.
천보(天寶 : 당 현종의 연호, 742~755)ㆍ지덕(至德) 연간에는 소금 1두에 10전이었는데, 건원(乾元 : 당 숙종의 연호, 758~759) 초기에는 염철사(鹽鐵使) 제오기(第五琦)가 처음으로 염법(鹽法)을 변경하여 천하 소금을 다 독점하고, 1두에 시가로 100전(錢)을 보태서, 110전으로 하였다.
살피건대, 중국에는 염지와 염정이 이와 같이 많은데, 어찌해서 우리나라에만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에도 바다와 먼 곳은 혹 1천 리나 떨어진 곳[廢四郡]이 있고, 혹 400~500리 되는 곳도 있다. 생각건대 염천(鹽泉)이 있어도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능히 못을 파거나 우물을 뚫지 못하기 때문에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이다.
유안은 전적으로 소금을 독점하는 법을 써서 군국(軍國)의 재정에 충당시켰다. 당시에 허(許)ㆍ여(汝)ㆍ정(鄭)ㆍ등(鄧) 여러 주(州)의 서쪽 지방은 모두 하동(河東)에서 생산되는 지염(池鹽)을 먹었는데, 탁지(度支)에서 주관하였고, 변(汴)ㆍ위(渭)ㆍ당(唐)ㆍ채(蔡) 여러 주의 동쪽 지방은 모두 해염(海鹽)을 먹었는데, 안(晏)이 주관하였다. 유안은 관원이 많으면 백성을 시끄럽게 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소금이 나는 고장에만 염관을 두어 염호(鹽戶)가 만든 소금을 가져다 상인에게 팔아 그것이 가는 대로 두었고, 나머지 주(州)ㆍ현(縣)에는 관원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강주ㆍ영남 사이의 소금 생산지와 거리가 먼 곳은, 관염(官鹽)을 운반해서, 저곳에 저장했다가 혹 장사가 오지 않아서 소금이 귀해지면 값을 낮춰서 팔았는데, 이를 상평염(常平鹽)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관에 이익이 되면서 백성에게 소금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시초에는 강회(江淮) 소금의 이가 40만 꿰미에 불과했으나 대력(大曆 : 唐 代宗의 연호. 766~779) 말년에는 600만 꿰미나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의 재정이 풍족했고, 백성도 곤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동(河東)에는 소금의 이(利)가 80만 꿰미에 불과하면서 값은 해염보다 비쌌다.
구준은 “천지간에 생산되는 물건은 이 두어 가지뿐이다. 인력에는 한정이 있는데, 용도는 끝이 없으니 조호(竈戶 : 소금 달이는 집)를 벗겨내고 상인에게 손해보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소금의 이를 이와 같이 많이 얻었겠는가? 이러한 때에 백성에게 부과할 세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소금 한가지에만 의지해서 이와 같았던 것이다 유안이 비록 이재(理財)에 능했다 하나, 나라를 이롭게 함이 이익이 되는 줄만 알았고, 백성을 이롭게 함이 크게 이익이 되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관(官)에서 소금을 생산해서 관에서 판다면 상평(常平)이라 할 수 없다. 반드시 백성이 사사로 생산하고 팔도록 허가하는데, 소금이 흔하면 값을 보태서 사들이고, 소금이 귀하면 싼값으로 풀어야 비로소 상평이라 할 수 있으니, 염정(鹽政)은 상평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한(漢)ㆍ당(唐) 시대에 재정을 맡은 신하는 착한 자가 없었다. 오직 유안이 위로는 국가 재정을 돕고 아래로는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였으니 이재에 능한 자라 할 만하다.
천하의 물(物)은 진실로 이 수(數)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천지간에 정한 이치는, 임금은 마땅히 부(富)해야 하며, 백성은 마땅히 고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성왕이 법도를 세우면서 무릇 천하 부귀의 권한은 위에서 잡게 하고, 온 백성에게는 덕(德)을 내렸던 것이다. 홍범(洪範 : 《서경》의 편명)에, “임금이 그 극(極 : 표준)을 세우고, 5복(福)을 거두어서 널리 그 백성에게 준다.” 한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전지는 모두 왕의 전지이며 천하의 재물은 모두 왕의 재물이며, 천하의 산림ㆍ천택은 모두 왕의 산림ㆍ천택이었다.
무릇 그런 다음에 왕이 그 전지와 재물을 그 백성들에게 널리 나누어주며 왕이 그 산림ㆍ천택에서 나오는 것을 그 백성들에게 널리 나누어주었는데, 이것이 옛 선왕의 뜻이었다. 왕과 백성 사이를 막는 사람이 있어서, 그 징렴(徵斂)하는 권한을 훔치고 그 널리 나누어주는 은덕을 막는다면, 임금이 능히 극을 세우지 못하며 백성도 능히 고르게 받지 못한다. 탐관오리가 부당하게 거두고 호상(豪商)과 교활한 관리가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주례(周禮)》 9부(府)의 직과 관시(關市)ㆍ전사(廛肆)의 관원도 그 큰 뜻은 모두 거두고(斂) 주는(錫) 두 글자에 있었다. 위에서 그 부(富)를 가지고 아래에서 그것을 고르게 받는 것이 곧 왕자가 하늘을 본떠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이다. 후세에 재물을 다스리는 신하는 오직 복을 거둘 줄만 알고, 복을 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오직 상평염법이 능히 아래를 고르게 하고 위를 부하게 해서, 선왕의 뜻과 대략 합치했으므로 재물을 얻은 것은 비록 많았으나 백성이 원망하지 않았다. 구경산(丘瓊山 : 경산은 구준의 자)은 그 재물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고, 한결같이 백성에게서 뜯어 내는 것을 정사라고 몰아붙였으니 그 또한 잘못이다.
정원(貞元) 연간에, 양지(兩池)에 소금 1석을 남모르게 달인 자는 죽였다. 원화(元和) 연간에 와서는 사형을 감해서 천덕(天德 : 당대의 중국 서북 변방) 다섯 성에 귀양보냈는데, 박(鎛)이 당초와 같이 사형하기를 논주(論奏)했다. 두(斗) 이상은 등에다 곤장을 치는 동시에 수레와 나귀를 몰수하고, 1두 이상의 도둑 소금을 잡은 자에게는 1천 전을 상으로 주었다. 그리하여 주ㆍ현(州縣) 단보(團保)에서 서로 살핌이 정원시대에 비해 더욱 혹심해졌다.
생각건대, 백성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기를 그치지 않으면, 드디어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니, 소금을 독점함은 불가하다.
생각건대, 5계(季) 때에 소금에 부과하던 것은 예전과 같았다. 관에서 판매하는 것에 잠염(蠶鹽 : 고치를 적시는 데 쓰는 것)ㆍ잠염(蠶鹽 : 고치를 적시는 데 쓰는 것) 식염(食鹽) ㆍ대염(大鹽)ㆍ냉염(冷鹽)ㆍ난염(欒鹽)이 있었고, 또 청염(靑鹽)ㆍ백염(白鹽)ㆍ맥염(陌鹽) 따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또 과염(顆鹽)은 괴염(塊鹽)이고, 말염(末鹽)은 산염(散鹽)이다.
5대(代) 때에 염법이 너무 엄격하여 건륭(建隆 : 송 태조의 연호, 960~962) 초년에 너그럽게 하였다. 그러나 무역한 소금이 10근에 이르거나, 소금 버캐를 달인 것이 3근에 이른 자도 또한 사형을 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또 너그럽게 한 것이다.
살피건대, 《주례》에, 산택(山澤)에 여금(厲禁)이 있어, 나무를 훔친 자는 형벌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그 시기가 아닌 때에 함부로 채취한 자나 위에서 명령이 없었는데 마구 들어간 자에게 가벼운 벌이 있을 뿐이었다. 백성의 이익을 독점하고, 백성이 그 법을 어겼다 하여 죽이는 것은, 어진 사람의 정사가 아니니, 3대(代) 때에는 비록 걸(桀)ㆍ주(紂)라도 이런 법은 없었다.
생각건대, 전최라는 것은 당(唐)ㆍ우(虞) 때에 고적(考績)이라 일컫던 것으로 곧 왕자가 하늘을 본떠서, 사람을 다스리는 큰 권한이었다. 자목(字牧)하는 직은 고찰할 만한 것이 많은데, 소금과 누룩 과세의 많고 적음을 비교해서 잘하고 잘못한 것으로 구별했음은 제요(帝堯)의 전장과 다르니, 아아! 슬프다. 《통고(通考)》에, “소금 버캐를 달여서 소금을 만들기도 했다. 대저 소감 버캐가 있는 흙이 혹 두텁기도 혹은 엷기도 한데, 엷으면 이가 적어서 당호(鐺戶)가 파산해도 그 구실을 충당하지 못했다. 지화(至和 : 宋 仁宗의 연호, 1054~1055) 초기에 한기(韓琦)는, 당호를 개설한 지 만 3년이 되어서 지력이 다하면 다른 호(戶)를 지적해서 대체해주기를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기를 청했다.” 하였다.
또 “촉(蜀) 지방에는 우물 물을 조려서 소금을 만드는데, 우물 물의 근원이 혹 많아지기도 줄어들기도 하는데, 책과(責課)를 요구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였다.
또 “해주(海州)ㆍ양주(梁州) 동쪽에 큰 염지(鹽池)가 있어 100여 리나 뻗쳤고 해마다 억만 전을 얻었다. 원부(元符) 원년 장마에 못이 무너졌는데 이때에 와서 복구하기를 의논하였다. 4년 만에 완성해서, 무릇 2천 400여 휴(畦)를 개발하여, 백관이 모두 하례하였다.” 하였다.
혹자(或者)는 “해지(解池)에 한 자 깊이로 물을 대어서 뙤약볕에 쪼이고 남풍(南風)에 쏘이면 잠깐 동안에 소금이 되어서 그 이가 컸다. 액수를 늘리고자 해서 적당한 바람과 햇볕을 기다리지 않고 물을 많이 대었다가 물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은 맛이 써서 사람의 입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생각건대, 황해도 지방에 땅이 갑자기 꺼져서 길은 못이 된 곳이 있는데,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고 그 맛은 쓰고 매우 고약하다. 이것은 모두 염정(鹽井) 지역이건만 조사하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심괄(沈括)의 《필담(筆談)》에, “해주 염택(解州鹽澤)은 사방이 120리이다 오랜 장마에 사방 산의 물이 모두 못에 쏟아져들어와도 일찍이 넘치지 않았고, 큰 가뭄에도 일찍이 마르지 않았다. 간수(滷) 빛이 새빨갛고 판천(版泉)의 하류에 있는데 민간에서는 치우(蚩尤)의 피라 부른다. 오직 중간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감천(甘泉)이며, 이 물을 발견한 다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북쪽에 요소수(堯梢水)가 있는데, 무함하(巫咸河)라 이르기도 한다. 매우 짠 물이며, 감천을 섞지 않으면 소금이 되지 않고, 무함수를 넣으면 소금이 다시 엉기지 않는 까닭에 사람들이 무함하(無鹹河)라 부르면서 염택(鹽澤)에 해가 되므로 큰 둑을 쌓아 막아서 도둑을 방비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했다. 그 이치를 궁구하면 무함은 탁(濁)한 물인데 간수 속에 들어가면 해감이 간수 결에 가라앉아서 소금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소금은 여러 가지 품질이 있는데, 전사(前史)에 기재된 것으로 오랑캐 나라에도 10여 종이 있고, 중국에서 나는 것만도 수십 종은 된다. 지금 쓰는 것도 공사간을 통틀어서 네 가지이니, 말염ㆍ과염ㆍ정염(井鹽)ㆍ애염(厓鹽)이 이것이다. 오직 섬서로(陝西路)의 과염(顆鹽)에 일정한 과세가 있어 해마다 230만 꿰미를 징수하며, 그 나머지는 많아졌다가 적어졌다가 해서 일정하지 않으나, 1년 수입이 대략 2천여 만 꿰미이다.” 하였다.
또 “무릇 100리 길을 육로로 운반하면 1근에 4전이고 배로 운반하면 1근에 1전인데, 이로써 율(率)을 삼는다.” 하였다.
생각건대, 염지(鹽池)도 반드시 땅속으로 바닷물과 서로 통한 것이므로 장마가 져도 넘치지 않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것이다.
여조겸(呂祖謙)은 “소금의 종류가 매우 많다. 바다에서 나고 우물에서 나고 못에서도 나는데, 이 세 가지 외에도 나는 곳이 더 있다. 하북(河北)에는 노지(鹵地 : 소금이 나는 땅)가 있는데 이것은 땅에서 나는 것이고, 영강군(永康軍)에서는 소금이 벼랑에서 나는데 이것은 산에서 나는 것이며, 또 돌에서 나는 것, 나무에서 나는 것이 있어,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하였다.
또 “남방의 소금은 전적으로 바다에서 생산되고 북방은 전적으로 해지(解池)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남방 소금을 관리하는 데에 올바른 사람만 얻으면 그 해가 적지만, 오직 북방 해지 소금은 글안(契丹)과 서하(西夏) 소금이 서로 끼여들어서 해지 소금의 이(利)를 빼앗는다. 대체로 해지 소금 맛이 서하 소금 맛보다 못하므로 연변(沿邊)에는 은밀히 두 나라 소금을 파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휘종(徽宗) 초기에 빗물이 예사가 아니었는데 주위의 해자가 깊지 않았고 지키는 자가 잘 감시하지 않아서 외수(外水)가 섞여들었다. 빗물이 예사가 아니고 외수가 넘쳐서 해지(解池)에 흘러드니, 다시는 소금이 되지 않았다. 그 후에 요역(徭役)을 크게 일으켜서 외수를 퍼낸 다음부터 차차 복구되었다.” 하였다.
생각건대, 외수라는 것은 이른바 무함수(巫咸水)였다.
여조겸은 “하북 소금은 독점할 수 없다. 정염(井鹽)ㆍ지염(池鹽)은 독점할 수 있고, 바다 소금도 달여야 하는데, 가마를 만드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니 또한 독점할 수가 있다. 오직 하북 소금만은 노지(鹵地)에서 나는 것이어서 그 지역이 매우 넓으므로, 염정(鹽井)이나 염지(鹽池)와 같이 담장 또는 해자로 막아서 지킬 수가 없다. 또 잠깐 달이면 문득 소금이 되어서, 바다 소금처럼 달이기를 기다려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금령을 범하기가 가장 쉬웠으므로 장돈 때부터 하북 소금도 금단해서 독점했던 것이나 정강(靖康) 말년에 와서는 도적이 더욱 많아졌다.” 하였다.
생각건대, 한차례 전진했다가 한차례 후퇴하고, 한차례 독점했다가 한차례 복구했는데, 붕당 때문에 미치는 화가 이와 같았다. 송나라 법은 또 상인에게 변새(邊塞)에 곡식을 바치고, 강회(江淮)에서 소금을 받아 산매(散賣)하도록 허가하고, 수십 고을에 운반하는 비용을 감해주면서 그 명목을 중염(中鹽)이라 했는데, 선유(先儒)는 이것을 좋은 법이라 일렀다. 또 이른바 초염(鈔鹽)이라는 법이 있었는데 상인에게 경사(京師)에서 초전(鈔錢 : 지폐 또는 어음)을 받고 소금을 관창(官倉)에 납부하는 것이었다. 채경(蔡京)이 백성을 속여서 염법을 여러번 변경하니 초전이 쓸데없게 되어서 상인이 손해를 보고 도둑이 날로 일어났다. 다 쇠란한 때의 법이어서 이제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임금으로서 소금 달이기를 처음 시작한 자는 오왕(吳王) 비(濞)였고 잇달아 좇은 자는 상홍양(桑弘羊)이었으며, 관중(管仲)은 원통한 자였다(뜻은 앞에 말했다). 염법이 생긴 이래로 오직 유안의 상평염법이 가장 좋았고, 나머지는 시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광야고(卝冶考)
매색(梅賾)은 “3품은 금ㆍ은ㆍ동(銅)이다.” 하였다.
채침(蔡沈)은 “철은 유철(柔鐵)이고 누는 강철인데 조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금ㆍ은은 모두 귀중한 물품이니, 백성에게 부과해서 징수할 수 없고 반드시 그 지역 제후에게 원래부터 관채(官採)가 있어서 그 공(貢)에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현은, “횡이라는 말은 광(礦)을 가리키는데, 금ㆍ옥이 기물(器物)이 되지 않은 것을 광이라 한다.” 하였다.
주석(錫)은 백철(鈏)이다.
나는, “가끔 채취한다.”는 것은 관에서 채굴하는 것이니, 평시에는 여금해서 지키다가 관에서 채굴할 때를 당하면 그 있고 없는 지역을 분변하여(그곳을 물색한다) 도(圖)를 그려서 일 맡은 자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정현의 주에는 그곳을 물색한다는 것은 그 땅이 소금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 했으나, 무슨 이치인지 모르겠다).
생각건대, 금ㆍ은ㆍ동ㆍ철은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는 것이니 옛적 성왕이 백성에게 사사로 채굴하는 것을 허가할 리가 없다. 이제 이 경서(經書)를 상고하니 관에서 지키면 관에서 채굴했던 것이 분명하다.
정현은, “청(靑)은 공청(空靑)이다.” 하였다. 또 “갈(楬)은 표지(表識)하는 것이고, 새(璽)는 인(印)을 찍는 것이며, 수장하는 부는 옥부(玉府)와 내부(內府)이다.” 하였다. 정중(鄭衆)은, “들어오는 정(征)을 받는다는 것은 조세를 받는 것이다.” 하였다. 정현은, “요(要)란 범수(凡數 : 槪數)인데 태부(太府)에 들이는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산택(山澤)에 우씨(虞氏)와 형씨(衡氏)를 두는 법은, 생산된 보물을 옥부(玉府)에 들이고, 그 나머지를 만민에게 갈라주면서, 이에 세금이 있었는데, 직금(職金)은 그 들여오는 것을 받는 것이었다.
생각건대, 《관자(管子)》ㆍ《한서(漢書)》에서 《당사》ㆍ《송사》에 이르기까지 그 철야에 대한 말이 모두 염세(鹽稅)와 서로 섞여 있는데, 그에 대한 의논을 위에 적었다.
소식(蘇軾)의 구지필기(仇池筆記)에, “왕망(王莽) 때 성 안에 황금이 60만 근이었고, 진평(陳平)은 4만 근으로써 초(楚)를 이간시켰다. 동탁(董卓)의 미오(郿塢)에도 금이 많았으며, 그 나머지 30~50만 근이라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근세에는 금을 근(斤)으로 계산하지 못하며, 비록 임금이라도 남에게 백금(百金)을 주지 못하였으니 어찌해서 예전에 많던 것이 지금은 적어졌는가? 산을 파고 모래를 헤쳐서 그냥 넘기는 날이 없이 캐건만, 금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보화가 변해짐이 자못 의심스러운데, 알 수는 없지만 산택으로 다시 돌아간 것인가?” 하였다.
살피건대, 당(唐)ㆍ송(宋) 이래로 번국(蕃國)의 배가 중국을 왕래하자 황금이 모두 서남 해국(海國)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3대(代) 이후로 채광하는 일이 드디어 없어졌으니, 황금의 없어짐을 괴이쩍게 여길 것도 없다. 고염무(顧炎武)는, “황금은 불전(佛殿)과 불상에 많이 들어갔다.” 했는데 이것도 또한 그럴듯하다(宋 太宗이 秘閣 校理 杜鎬에게, “西漢 시대에는 賜與하는 데에 모두 황금을 썼는데, 근세에는 황금이 구하기 어려운 재물이 된 것은 왜인가?” 하니, 호가 대답하기를, “그 때에는 佛事가 성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금 값이 매우 헐했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한 무제(漢武帝)가 황금을 녹여서 인지 요제(麟趾褭蹏)의 형상을 만들었으나, 채광한 것은 아니었다. 섭몽득(葉夢得)은, “한나라 때에 신하에게 사여하는 황금은 매양 100근, 200근이었고, 적어도 30근이었다.” 하였으며, “연왕(燕王) 유택(劉澤)은 비록 제후였으나 전생(田生)에게 하사한 금이 또한 200근이었다.” 하였고, “초(楚)의 양효왕(梁孝王)이 죽은 후에 금 40여 만 근이 있었다.” 하였으니 대개 화폐는 가볍고 쌀은 흔하며, 금은 많았던 것이었다.
마단림은, “두 사람의 말에 따르면 금은 한(漢)나라 때보다 많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채취하는 것과 관부(官府)에서 징렴(徵斂)하는 것을 사서(史書)에 일찍이 말하지 않았으나, 생각건대 반드시 후세와 같이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은 천지간에 숨겨진 보물로서, 홀로 독점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한나라 법에 백성으로서 사사로 돈을 만든 자는 왼쪽 발을 베었고, 박사(博士)가 군국(郡國)에 교조(矯詔)를 내려 백성으로서 농기구를 만든 자는 죄가 사형에 이르도록 하였다. 철관(鐵官)이 무릇 40고을이었는데, 철이 나지 않는 곳에는 또 소철관(小鐵官)을 두어서 천하에 깔렸으나 홀로 금에 대한 금령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철은 지극히 흔한 것인데도 이를 독점해서 세밀하게 분석하고, 금은 지극히 귀한 것인데도 진흙같이 써버렸다. 그런즉 나라에서 이(利)를 추구할 때에는 금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화식전(貨殖傳)에 촉의 탁씨, 산동의 정(程)씨와 정(鄭)씨, 완(宛)의 공씨, 조의 병(邴)씨를 기재하고, 두드러진 부자라 일컬었으나 모두 철야를 독점한 이(利)를 말했을 뿐이고, 금을 갈무리했다는 일은 듣지 못했다. 그런즉 호강(豪强)한 집이 부자가 되는 것은 금을 연유하지 않아서, 상하 간에 숭상하던 것이 이와 같았다. 대개 옛 사람이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던 유풍(遺風)이었다.” 하겠다.
생각건대, 옛적에는 주(珠)ㆍ옥(玉)이 상폐(上幣)이고 황금이 중폐였으니 금이 흔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공(禹貢)에 3품의 공물이 있고, 《주례(周禮)》에는 횡인(卝人)의 여금(厲禁)이 있었다. 선왕 적에는 실지에 힘써서 재물이 생산되도록 했는데, 패자(覇者)가 섞여나온 이래로 재물을 생산할 줄은 모르고 오직 박민(剝民)만을 힘썼다. 그런데 마단림은 도리어 한나라 습속을 고풍(古風)이라 했으니 잘못도 심하다.
한중(漢中)에 옛적에는 금호(金戶) 1천여 호가 있어, 항상 한수(漢水)에서 사금(沙金)을 채취하여 연말에 바쳤는데, 그 후 임회(臨淮) 왕욱(王彧)이 양주 자사(梁州刺史)로 있을 때, 상주하여 폐지시켰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위 명제 때에 곤명국(昆明國)에서 피한조(辟寒鳥)를 바쳤다. 이 새는 항상 금가루를 토하는데 좁쌀 같았다.” 하였다.
촉도부(蜀都賦)에는, “금 모래, 은 자갈이 영창(永昌)으로 쏟아져드는데, 물에서 나는 금이 마치 겨(糠)가 모래 속에 있는 것 같다.” 하였다.
《남사(南史)》 이맥전(夷貊傳)에, “임읍국(林邑國)에 금산(金山)에 있는데 돌이 모두 붉은색이고, 그 속에서 금이 난다. 금은 밤에 나며 날아오르는 모양이 반딧불 같았다.” 하였다.
마단림은, “이것은 모두 사금(沙金)으로 역사에 전한 것이다. 옛적에는 먼 지방 오랑캐 나라에서 산출되었으나 지금은 동남 지방에도 곳곳에서 난다.” 하였다.
생각건대, 형주ㆍ양주가 어찌 먼 지방 오랑캐인가? 마단림의 말은 생각지 않고 한 잘못된 말이다.
정관(貞觀) 초에 시어사(侍御史) 권만기(權萬紀)가 상언하기를, “선주ㆍ요주 2주의 은을 대대적으로 채굴한다면 해마다 수백만 꿰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짐에게 부족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다만 백성을 이롭게 할 만한 아름다운 말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경은 일찍이 한 현인도 천거하지 않았고 한 불초(不肖)한 사람도 물리치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오로지 은세(銀稅)에 대한 이만 말하니, 나를 환(桓)ㆍ영(靈) 같은 임금이 되도록 기대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고, 이에 만기를 물리쳐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생각건대, 임금이 그 신하를 물리치거나 승진시키는 데에는 그 사람의 공죄(功罪)를 살펴봄이 마땅하다. 만기의 말이 무슨 죄를 범했길래 이와 같이 물리친단 말인가? 요순(堯舜)이 형주ㆍ양주의 공(貢)을 받았고, 우탕(禹湯)도 역산(歷山)ㆍ장산(莊山)의 금을 채굴했는데 어찌 반드시 환ㆍ영과 같겠는가? 죄 없는 신하를 갑자기 물리쳐서 재물을 멀리했다는 명성을 낚았으니, 이것은 한때 덤벙거리며 농락하던 권도였는데, 후세의 용렬한 임금이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그가 한 일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 술책에 빠지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丘瓊山은 태종의 이 말을 백세 제왕의 스승으로 삼고, 후세 임금이 이를 말한 신하에게 상준 것을 태종이 죄인으로 삼았으나, 그의 시비한 것이 반드시 이치에 맞는 말은 아니다).
생각건대, 왕기와 본명이라는 것은 이치에 합당한 말이 아니다. 후세에 간사한 말이 백성을 의혹에 빠뜨려서, 비록 1천 리를 내리뻗은 산맥이라도 감히 범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산택의 이(利)가 개발되지 못한 것이다.
살피건대, 문종(文宗) 때에 다시 산택의 이를 주ㆍ현에 돌렸는데, 주ㆍ현에서 많이 차지하고 세납(歲納)을 매우 적게 하므로 그 후에 다시 복구했다.
금광 5처(處 : 商州ㆍ歙州 등), 은광 3감(監 : 桂陽ㆍ鳳州 등)이 있었고, 또 51장(場 : 賢豐ㆍ馬茨 등)ㆍ3무(務 : 雍州ㆍ隴州 등)가 있었고, 동광이 35장[饒州ㆍ英州 등]ㆍ1무[梓州]가 있었고, 철광이 4감[大通ㆍ萊撫 등]이 있었으며, 또 12야(冶 : 凌雲ㆍ赤谷 등)ㆍ20무[晉磁ㆍ鳳灃 등]ㆍ25장[丁溪ㆍ聖水 등]이 있었다. 연광(鉛鑛)이 36장[韶州ㆍ衢州등]이 있었고, 주석광(朱錫鑛)이 9장(虔州ㆍ南康 등), 수은광(水銀鑛) 4장[秦州ㆍ鳳州등], 주사광(朱砂鑛) 3장[商州ㆍ宜州 등]이 있었다.
생각건대, 소금을 독점하는 것은 백성의 이를 빼앗고 백성의 먹을 것을 방해하는 것이니 독점해서는 안 된다. 오직 금ㆍ은ㆍ동철은 반드시 관에서 채굴함이 마땅하며, 백성에게 허가함은 불가하다.
지도(至道 : 송 태종의 연호, 995~977) 말년에 천하에 해마나 부과하던 은이 14만 5천여냥, 동이 412만 2천여 근, 철이 574만 8천여 근, 납이 79만 3천여 근, 주석이 26만 9천여 근이었는데, 천희(天禧 : 宋 眞宗의 연호, 1017~1021) 말년에는 금이 1만 4천여 냥, 은이 88만 3천여 냥, 동이 267만 5천여 근, 철이 629만 3천여 근, 납이 44만 7천여 근, 주석이 29만 1천여 근, 수은이 2천여 근, 주사(朱砂)가 5천여 근이었다. 그런데 금ㆍ은 갱(坑)과 풀무에는 정세(丁稅)를 면제하고 무역하는 외에는 세전(稅錢)을 부과했다. 값을 잘라서 바치고 서로 무역하도록 하니 모두 소득이 있었다.
금ㆍ은ㆍ동철ㆍ납ㆍ주석을 제련하는 풀무를 설치한 곳이 총 271곳이었다. 금 풀무가 11곳, 은 풀무 84, 동 풀무 46, 철 풀무 77, 납 풀무 30, 주석 풀무 16, 단사(丹砂) 풀무 2, 수은 풀무 5곳이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서 주관하도록 했다.
생각건대, 채광하는 지역에는 본디 간사한 도둑이 많으니, 서로 보호하는 법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로는 여러 도[路]의 광갱(鑛坑)과 제련하는 풀무를 혹 신설하기도 혹 폐지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생각건대, 금ㆍ은ㆍ동철은 반드시 관에서 채굴함이 마땅하며,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폐쇄하는 편이 낫다. 백성에게 사사로 채굴하도록 허가하면 간사한 도둑이 서로 모여서 도둑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반드시 허가해서는 안된다.
구준은, “송나라 때에 갱야(坑冶)가 매우 많았고, 원(元)나라 때 광갱도 오늘날에 비해 열두 배나 많았는데 왜 그럴까? 대개 천지간에 생산되는 물(物)로서 끝없이 생산되는 것은 곡식과 상ㆍ마(桑麻) 따위이고, 그 땅과 함께 생긴 것은 금ㆍ은ㆍ동철 등이다. 옛적 성왕이 백성에게 받는 부(賦)로서 미속지정(米粟之征)과 포루지정(布縷之征)은 있었지만, 이른바 금은동철지정(金銀銅鐵之征)이라는 것은 없었다. 산택에서 생산되는 것은 땅과 함께 생긴 것이므로 취하면 다함이 있어서 잇달아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산림에는 초목이 있고 토석(土石)이 있는데 그 가운데 초목은 다 채취해도 잇달아서 자라나므로 비록 날마다 취하고 해마다 취해도 다함이 없지만, 무릇 산간의 토석은 파버리면 깊숙하게 웅덩이가 되고 가져다버리면 비어서 흔적이 남는 것은 왜일까? 그 형상이 일정한 까닭이다. 이러므로 갱야에서 나오는 이가 전대에는 많았으나 후대에 와서 줄어들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적어짐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다.
생각건대, 3대의 법은 금ㆍ은ㆍ동철을 관에서 채굴해서 관에서 제련했고 백성이 사사로 하지는 못했으므로 부세(賦稅)를 징수하지 않았다. 백성이 만약 사사로 채굴했다면 반드시 세가 있었을 것이다. 또 5금(金)과 8석(石)은 모두 흙의 정기가 일ㆍ월ㆍ성신의 기운을 받아서 응결된 것이며, 또한 잇달아 생성(生成)해서 다함이 없는 것이다. 경산(瓊山)은 송나라 사람이 수백년 동안 채굴해서 그 자원이 드디어 고갈되었다고 하였으나, 천지가 물(物)을 생성하는 이치는 호호광대(浩浩廣大)한 것인데 그의 지식은 어찌 그리 천소(淺小)한가? 그러나 초목이 해마다 무성해지는 것과는 진실로 같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날로 금ㆍ은을 채굴해서 중국 비단과 바꾸는 것은 크게 불가하다.
이보다 앞서 유창(劉鋹)이 해문진(海門鎭)에서 군사를 모집하면서 능히 구슬을 찾아내는 자 2천 명을 미천도(媚川都)라 불렀다. 무릇 구슬을 캐는 자는 반드시 몸에다 새끼로 돌을 매어서 자맥질을 하는데, 자맥질을 깊이 하는 자는 그 깊이가 500척(尺)이나 되었고 빠져 죽는 자도 매우 많았다. 그후 영남도를 평정하자 미천도를 폐지했고, 이어서 백성이 채취하는 것도 금지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관에서 다시 채취했다. 용주(容州) 바닷가에도 구슬이 산출되었는데, 관에서 관리를 두어서 관장했다.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부터 구슬 100근을 공(貢) 받았고, 7년에는 50근을 공 받았는데 직경이 1촌 되는 것이 셋이나 있었다. 8년에는 1천 610근을 공 받았는데, 모두 주장(珠場)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살피건대, 우공(禹貢)에 회이(淮夷)는 빈주(蠙珠)를 조공하고, 형주(荊州)에서는 기조(璣組)를 조공해서, 여러 나라에 세과(歲課)가 있었다. 그러므로 천자는 일정한 공물을 징수해서 면류(冕旒)를 장식하고 반함(飯含)에 제공했으니 또한 선왕이 취하던 바였다. 그러나 이것은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니 법으로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진부량(陳傅良)이 이르기를,“송 태조가 반석 달이는 것을 금지한 것은 글안[契丹]ㆍ 북한(北漢) 때문에 실시한 법이었고, 그후 소금과 술을 독점한 것도 모두 본의가 아니었다.” 하였다.
생각건대, 반석을 독점한 것은 법 중에 가장 나쁜 것이었다. 진실로 반석을 독점할 참이면 무릇 웅황(雄黃)ㆍ유황(硫黃)ㆍ석고(石膏)ㆍ적석(赤石)ㆍ활석(滑石) 등도 모두 독점할 것이지 하필 반석만을 한단 말인가? 그 종류를 늘려나가려면 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살피건대, 지금 중국에는 풀무간과 온돌[煖炕]에 전적으로 석탄을 사용한다. 반드시 세액(稅額)이 있을 터이나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삼각산(三角山) 서쪽 기슭에 석탄이 많으니, 중국 석탄 두어 조각을 수입해서 빛깔과 광맥(鑛脈)을 분변한 다음, 관에서 채굴한다면 국가재정에 보탬이 있을 것이다.
재목고(材木考)
살피건대, 목재에 부(賦)를 매긴 것은 위인(委人) 조에 보이는데(地官의 관속임) 위인이란 우인(虞人 : 單襄公은, “우인이 재목을 들인다.”라 하였다)이다. 태재(太宰)가 9직(職)으로 백성에게 맡겼다 우ㆍ형(虞衡)에게는 산택의 재목을 만들어서 그 산물(山物)과 택물(澤物)을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이 직공(職貢 : 實物을 부과했다)이었다. 그리고 산림에 있는 백성이 재목을 재물로 해서 판매했으면 반드시 부세가 있어서, 관시지세(關市之稅)에 들어갔고 다시 산택지부(山澤之賦)라 하지 않았다(금ㆍ은이 본디 산에서 산출된 것이나, 이미 저자에 들어왔으면 저자 재물이 되는데, 재목도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한나라 이후의 재목에 대한 세는 전혀 상고할 수 없다.
화식전에, “물에는 천석어피(千石魚陂)가 있고, 산에는 천장(千章)의 재목이 있다.” 했는데, 이것은 재물 중에 큰 것이니 반드시 세렴이 있었을 터인데 사관이 누락시킨 것이다. 직방씨(職方氏) 조에, “양주(揚州)에는 그 이(利)가 죽전(竹箭)이고 기주(冀州)는 그 이가 송백(松栢)이다.” 하였다.
이미 이것을 한 고을 재리(財利)의 근원으로 했은즉, 부렴에 반드시 일정한 액수가 있었을 터이나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속명도잡지(續明道雜志)》에는, “황주(黃州)에 패세(牌稅)가 가장 중요하다.” 하였다. 이른바 패(牌)라는 것은 모두 큰 나무 판자이고 네 조각이 한 벌이 되는데, 대개 관(棺) 하나의 소용이다.
생각건대, 재목에 대한 세는 공부(工部) 관할인 까닭으로 주ㆍ현의 세를 면제하도록 했던 것이다. 사서에 갖추어 실려 있지는 않으나 세법은 알 수 있다.
서울에 있는 것은 군위(軍衛)에게 각자 장(場)을 설치하고 분(分)을 거두어서 시탄을 저장했다가, 달마다 금군(禁軍)과 고(孤)ㆍ노(老) 들의 소목(燒木)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대나무와 목재 등 물건으로서 외방 장ㆍ국(外方場局)에 있는 것은, 그곳에 소용되는 것을 각각 지급하도록 했다.
태평부(太平府)의 무호(蕪湖)와 형주(荊州)의 사시(沙市)와 절강(浙江)의 항주(杭州)에는 공부(工部)의 속관을 미리 보내서 그 지역을 직접 감시했다. 추분한 물품을 다시 발매(發賣)하고 그 값대로 은을 받아 서울로 보내서 공부의 수선(修繕)ㆍ건조(建造)하는 비용에 제공하며, 백성에게 부과 징수하던 것을 면제했다.
구준은, “이것이 진실로 좋은 방책이었다. 그러나 상판(商販)은 일정하지 않아서 액수를 정하기가 어렵다. 다음에 온 자가 추분한 액수를 전임자보다 많게 하기를 힘써서, 능하다는 이름을 바라면 해마다 그 액수가 증가되니 결국에는 다함이 없을 것이다. 요량해서 제도를 맞게 하고 지역에 따라 액수를 정하도록 청한다. 많이 추분한 것을 훌륭하다 하지 않고, 액수에 미치지 못한 것을 나쁘다 하지 않아야 이 제도가 영구토록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각다고(榷茶考)
당시에 군부(軍府) 수용(需用)이 많아서 경상세(經常稅)로는 부족했으므로 이런 조서가 있었다. 그러다가 봉천(奉天)에 나간 다음, 깊이 후회하고 조서를 내려서 바삐 혁파했다.
염철사(鹽鐵使) 장방(張滂)이, 다(茶)가 산출되는 주ㆍ현 및 다가 나는 산에 외상(外商)이 왕래하는 길목마다 10분의 1세를 받아서 방면(放免)한 두 가지 세에 대충(代充)하고, 명년 이후에는 수재나 한재 때문에 부세를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 이 세로써 대충하기를 주청하자 조서를 내려 윤허하고, 이어서 장방에게 위임해서 처리하는 조목을 갖추었다. 이리하여 해마다 돈 40만 관(貫)을 얻었는데, 다(茶)에 세가 부과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수재나 한재를 만난 곳에 일찍이 다세로 구제한 적은 없었다.
호인(胡寅)은, “무릇 이(利)를 말하는 자는 아름다운 명목을 가탁해서 임금의 사사 욕심을 받들지 않은 자가 일찍이 없었다. 방(滂)이 다세로써 수재나 한재를 당한 전지의 조세에 대충한다던 것도 이런 따위였다. 이미 세액을 정한 다음에는 견감(蠲減)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였다.
무종(武宗) 때에 염철사 최공(崔珙)이 또 강회 지방 다세를 증액했다. 이때에 다상(茶商)이 지나가는 주ㆍ현에 중한 세가 있었고, 혹은 배와 수레째 약탈하여 비(雨) 속에 노적(露積)하기도 했다. 여러 도(道)에 저사(邸舍)를 설치해서 세를 거두면서 탑지전(塌地錢)이라 일렀던 까닭으로 간사한 범죄가 더욱 일어났다.
대중(大中) 초기에 염철사 배휴(裴休)가 조약을 만들어서, “사매(私賣) 3범(犯)으로서 사매한 것이 모두 300근이 되면 사형으로 논죄하고, 장행군려(長行軍旅 : 멀리 출동하는 군대)는 가진 다가 비록 적더라도 또한 사형한다. 고재(顧載) 3범으로서 500근에 이르거나, 점사(店舍)에 있으면서 거간해서 4범한 것이 1천 근에 이르면 모두 사형한다. 사매 100근 이상은 장척(杖脊)하고 3범은 중한 요역(徭役)을 가한다. 다원(茶園)을 침탈해서 업(業)을 잃게 한 자는 자사나 현령이 사염(私鹽)한 죄로써 논한다.” 하였다.
호인은, “다른 독점한 이래로 상려(商旅)가 무역하지 못하고 반드시 관(官)과 더불어 매매하였다. 그러나 사매(私賣)하는 것을 능히 끝내 금단하지 못해서, 추매(椎埋) 하는 악소(惡少)들이 몰래 판매하는 해가 일어났다. 사매하다가 우연히 잡히기라도 하면, 간사한 사람과 교활한 아전이 서로 더불어 제 낭탁(囊槖)에로 돌리고, 옥사는 끝까지 바루어지지 않는다. 그 연유한 바를 다스리다보면 그루가 연하고 가지가 뻗어나서, 양민(良民)으로서 파산하는 자가 촌리(村里)에 잇달았고 심하면 도적이 되어 나오기도 한다. 관청에서는 저장하는 일에 조신하지 않아서, 제 때 아니게 발매하여 부패하기에 이르고, 새로 징렴하는 것과 서로 걸리기도 한다. 혹 몰래 팔던 것을 몰수했으나 판매할 데가 없으면 이에 모두 불태우거나 혹은 물에 넣기도 하니,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해롭게 하면서 다 걱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마단림은, “《육우전(陸羽傳)》을 상고하니 우(羽)가 다를 즐겨했고 《다경(茶經)》 3편을 지어서 다의 유래와 다 달이는 법과 다에 딸린 도구를 설명하면서 더욱 형식을 갖추었다. 이리하여 천하에서 더욱 많은 사람이 다 마실 줄을 알게 되었다. 그때에 다를 파는 자는 육우의 얼굴을 그려서 온돌 사이에 두고 다신(茶神)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상백웅(常伯熊)이라는 자가 있어, 우의 논설을 바탕으로 다의 공효를 다시 넓혀서 논했는데, 그 후에 다를 숭상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고, 회흘(回紇) 사람이 입조(入朝)할 때 비로소 말을 몰아 다를 매매하였다. 우가 정원(貞元) 말기에 죽었으니 다를 즐기고 다를 독점하던 것을 모두 정원 연대에 비롯되었다.” 하였다.
생각건대, 다라는 물(物)이 그 시초에는 대개 약초 가운데도 하찮은 것이었다. 그것이 오래되자 초거(軺車)를 연했고 주박(舟舶)을 아울렀은즉, 현관(縣官)이 부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거나 이것도 판매하는 물건의 한 가지이니 알맞게 요량해서 세를 징수하면 이것으로써 족하다. 어찌 관에서 스스로 장사하면서 백성의 사사 매매를 금단하여, 베어 죽여도 그만 두지 않기에 이르는 것인가?
순화(淳化 : 송 태종의 연호, 990~994) 3년, 조서하여 관다를 훔쳐 판 것이 10관 이상이면 얼굴에 자자(刺字)하며, 그 고을 뇌성(牢城)으로 귀양을 보냈다.
송나라 제도는 다를 독점해서 여섯 무(務)가 있고[江陵ㆍ蘄州] 열 세장이 있었으며[蘄州ㆍ黃州 등], 또 다를 수매하는 곳으로서 강남(江南)ㆍ강남(江南)호남(湖南)ㆍ복건(福建) 등 모두 수십 고을이 있었다. 산장(山場)의 제도는 원호(園戶)를 통솔해서 그 조(租)를 받고 나머지는 죄다 관에서 수매하였다. 또 별도로 민호에 세액을 절충해서 부과하던 것도 있었다.
무릇 다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편다(片茶)와 산다(散茶)가 그것이다.
편다는 쪄서 제조하는 것으로, 단단히 말아서 복판이 꼬치처럼 되어 있다. 오직 건주(建州)와 검주(劍州)에는, 찐 다음에 갈고 대를 엮어 시렁을 만들어서 건조실(乾燥室) 안에 두는 것이었는데, 가장 정결하여 다른 곳에서는 능히 제조하지 못했다. 그 명칭으로는 용봉(龍鳳)ㆍ석유(石乳)ㆍ적유(的乳)ㆍ백유(白乳)ㆍ두금(頭金)ㆍ납면(蠟面)ㆍ두골(頭骨)ㆍ차골(次骨)ㆍ말골(末骨)ㆍ추골(麤骨)ㆍ산정(山挻) 따위 12등급이 있어 세공(歲貢)과 방국(邦國)의 쓰임 및 본도(本道) 내의 차를 먹는 나머지 주에 충당했다.
편다에 진보(進寶)ㆍ쌍승(雙勝)ㆍ보산(寶山)ㆍ양부(兩府)는 흥국군(興國軍)에서(江南에 있다), 선지(仙芝)ㆍ눈예(嫩蘂)ㆍ복합(福合)ㆍ녹합(祿合)ㆍ운합(運合)ㆍ경합(慶合)ㆍ지합(指合)은 요지주(饒池州)에서(강남에 있다), 이편(泥片)은 건주(虔州)에서, 녹영(綠英)ㆍ금편(金片)은 원주(袁州)에서, 옥진(玉津)은 임강군(臨江軍)ㆍ영천(靈川)ㆍ복주(福州)에서, 선춘(先春)ㆍ조춘(早春)ㆍ화영(華英)ㆍ내천(來泉)ㆍ승금(勝金)은 흡주(歙州)에서, 독행(獨行)ㆍ영초(靈草)ㆍ녹아(綠芽)ㆍ편금(片金)ㆍ금명(金茗)은 담주(潭州)에서, 대척침(大拓枕)은 강릉(江陵) 대ㆍ소파릉(大小巴陵)에서, 개승(開勝)ㆍ개권(開捲)ㆍ소권(小捲)ㆍ생황(生黃)ㆍ영모(翎毛)는 악주(岳州)에서, 쌍상(雙上)ㆍ녹아(綠芽)ㆍ대소방(大小方)은 악진(岳辰)ㆍ풍주(澧州)에서, 동수(東首)ㆍ천산(淺山)ㆍ박측(薄側)은 광주(光州)에서 각각 나오는데 총 스물 여섯 가지 명칭이 있다. 그리고 양절(兩浙) 및 선강(宣江)ㆍ정주(鼎州)에는 상ㆍ중ㆍ하로써, 혹은 제1에서 제5까지를 명호(名號)로 하는 것도 있었다.
산다(散茶)로는 태호(太湖)ㆍ용계(龍溪)ㆍ차호(次戶)ㆍ말호(末戶)는 회남(淮南)에서, 악록(岳麓)ㆍ초자(草子)ㆍ양수(楊樹)ㆍ우전(雨前)ㆍ우후(雨後)는 형주(荊州)ㆍ호주(湖州)에서, 청구(淸口)는 귀주(歸州)에서, 명자(茗子)는 강남에서 각각 나오는데 총 열한 가지 명칭이 있다.
지도(至道) 말년에 다를 판매한 돈이 285만 2천 900여 관이었는데, 천희(天禧) 말년에는 45만여 관이 증가되었다. 천하의 다를 사사로 매매하는 것은 모두 금했으나, 오직 사천(四川)ㆍ협서(峽西)ㆍ광주(廣州)에는 백성이 직접 매매하는 것을 허가하고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했다.
단공(端拱) 3년에 세과(歲課)가 50만 8천여 관으로 증가되었다.
진부량(陳傅良)이 이르기를, “가우(嘉祐) 4년에 인종이 조서를 내려서 다금(茶禁)을 늦추었다. 이로부터 다(茶)가 백성에게 폐해를 주지 않은 지 60~70년이 되었다. 이것은 한기(韓琦)가 정승으로 있을 때의 사업이었는데, 그 후 채경(蔡京)이 독점하는 법을 복구하기 시작하여 다리(茶利)는 일철(一鐵) 이상부터 모두 경사(京師)로 돌아갔다.” 하였다.
원풍 연간에 수마(水磨 : 관직 명)를 창설하여 서울에 있는 모든 다호(茶戶)로서 말다(末茶)를 함부로 갈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있었고, 쌀ㆍ팥 따위 잡물(雜物)을 섞은 자에게도 벌이 있었다.
시어사(侍御使) 유지(劉摯)가 상언하기를, “촉(蜀) 지방에 다를 독점하는 폐해 때문에 원호(園戶)가 도망쳐서 면하는 자가 있고, 물에 빠져 죽어서 면하는 자도 있는데 그 폐해는 이웃 오(伍)에까지 미칩니다. 나무를 베어버리자니 금령이 있고 더 심자니 세(稅)가 증가되기 때문에 그 지방말에, ‘땅이 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화를 낳는다.’고 합니다. 사자(使者)를 선택하여 다법의 폐단을 고찰하시고 촉민(蜀民) 소생시킴을 기약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후세에 다로써 오랑캐 말과 교역한 것이 비로소 여기에 보이는데, 대개 당나라 때부터 회흘(回紇)이 입공하면서 벌써 말로써 다와 교역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오랑캐들은 유락(乳酪)을 즐겨 마시는데, 유락은 가슴에 체하는 성질이 있는 반면, 다는 그 성질이 잘 내리므로 체한 것을 능히 말끔히 씻어주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송나라 때에 비로소 다마사를 마련하였다.”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다의 명칭이 왕포(王褒)의 동약(僮約)에 처음 보이다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크게 나타났고, 당ㆍ송 이래로 드디어 인가(人家)의 일용품(日用品)이 되어서 하루라도 없으면 안되는 물건이 되었다. 그런데 당ㆍ송 시절에 쓰던 다는 모두 세말(細末)하여 떡 조각처럼 만들었다가 쓸 때가 되면 다시 갈았는데, 당나라 노동(盧仝)의 시(詩)에, ‘손으로 월단(차 이름)을 만진다(手閱月團).’ 하였고,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시에는, ‘다 맷돌을 돌리다 먼지가 난다(輾畔塵飛)’라는 것이 이것이었다. 원지(元志)에도 말다(末茶)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에는 오직 위광(闈廣) 지방에서만 말다를 쓸 뿐이고 온 중국이 엽다를 사용하였는데, 외방 오랑캐도 또한 그러하여 말다가 있는 줄을 다시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또 가끔 관문(關門)과 나루터, 요긴한 목에는 비험소(批驗所)를 설치하고 해마다행인(行人)을 보내어, 다를 교역하는 지방에 방(榜)을 걸어서 백성에게 금령을 알렸다.
구준은 말하기를, “다가 생산되는 지방은 강남(江南)에 가장 많은데, 오늘날은 독점하는 법이 없고 오직 사천과 섬서에 금법이 자못 엄중한 것은 대개 말과 교역하기 때문이었다. 무릇 중국에서 쓸데없는 다로써 쓸모있는 오랑캐의 말과 바꾸는데, 비록 다를 백성에게서 취한다 하나, 이로 인해 말을 얻어서 백성을 보위할 수 있으니 산동과 하남에 말을 기르는 일과 비교한다면 이미 가벼운 것이다.” 하였다.
사염에 대한 법은 위에서 말하였다. 내가 전고(前古)의 재부(財賦)하던 제도를 일일이 보니, 손익과 득실이 세대마다 같지 않았다. 그러나 대개 도가 있는 세대에는 그 부렴은 반드시 박하면서 그 재용은 반드시 넉넉했고, 도가 없는 세대에는 그 부렴은 반드시 중하면서 그 재용은 반드시 모자랐다. 이것은 벌써 그러했던 자취로 보아 뚜렷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재용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지만, 그 큰 이로움은 부렴을 박하게 함보다 나은 것이 없고 재용이 모자라게 되는 이유도 한 가지가 아니지만, 그 큰 해로움은 부렴을 중하게 함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아아! 천하의 재물은 한이 있어도 용도는 한이 없으니 한이 있는 재물로써 한이 없는 용도에 응하면 그 무엇으로써 감당해내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이 법을 마련하기를, “수입을 요량해서 지출한다.” 하였으니 수입한다는 것은 재물이고 지출한다는 것은 용도이다. 한이 있는 것을 요량해서 한이 없는 것을 절제함은 성인의 지혜이며 융성하는 방도이고, 한이 없는 것을 함부로 해서 한이 있는 것을 다하게 함은 우부(愚夫)의 미망(迷妄)이며 패망하는 방법이다. 무릇 부세를 마련하는 데는 나라 용도를 먼저 계산하지 말고 백성의 힘을 요량하고 하늘의 이치를 헤아릴 것이며, 무릇 백성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과 하늘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곧 털끝만큼도 감히 더 할 수 없다.
이러므로 1년 수입을 통계하여 세 몫으로 갈라서 두 몫으로 1년 용도에 지출하고 한 몫은 남겨서 다음해를 위해 저축한다. 이것이 이른바 3년 농사해서 1년 먹을 만큼을 남긴다는 것이다. 만일 부족함이 있으면 위로 제사와 빈객 접대에서 아래로 승여(乘輿)와 복식(服飾)에 이르기까지 소용되는 온갖 물품을 모두 줄여서 검소하게 하여 서로 알맞도록 기약한 다음에 그만두는 것이니 이것이 옛적의 도였으며 다른 방법은 없다.
[주D-001]황복(荒服) : 왕기(王畿)에서 멀리 떨어진 2천 리에서 2천 500리 사이의 지역.
[주D-002]5계(季) : 당(唐)나라가 망하자, 그 후 50년 동안에 차례로 일어났던 양(梁)ㆍ당(唐)ㆍ진(晉)ㆍ한(漢) 다섯 나라. 5대(代).
[주D-003]환(桓)ㆍ영(靈) : 후한(後漢)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모두 부덕한 군주였음.
[주D-004]왕기(王氣) : 왕자(王者)를 태어나게 하는 지기(地氣).
[주D-005]반함(飯含) : 죽은 사람을 염습할 때에 입에다 구슬과 쌀을 물리는 일.
[주D-006]북한(北漢) : 진(晉)나라 때에 흉노(匈奴) 유연(劉淵)이 제(帝)라 일컬으면서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했는데 사가(史家)가 북한이라 했다.
[주D-007]천석어피(千石魚陂) : 피(陂)는 못둑. 양어(養魚)해서 해마다 1천 석(石)에 해당하는 이익이 있는 못이라는 뜻(《漢書》 貨殖傳 師古注).
[주D-008]천장(千章)의 재목 : 장(章)은 큰 재목. 천장의 제목은 많고 큰 재목이라는 뜻.
[주D-009]방목(枋木) : 박달나무.
[주D-010]《상부편칙(祥符編勅)》 : 상부는 송 진종(宋眞宗)의 연호. 상부 연간의 조칙(詔勅)을 편집한 책.
[주D-011]객상(客商) : 물품을 수레나 배에 싣고, 생산지에서 상업지로 왕래하면서 판매하는 상인.
[주D-012]추분(抽分) : 상품에 대한 일종의 세. 상품을 뽑아내어서 상납하도록 하는 것.
[주D-013]고재(顧載) : 고(顧)는 고(故)와 같고 재(載)는 재(哉)와 같다. 고재는 고의(故意)라는 뜻.
[주D-014]장척(杖脊) : 송대 형제(刑制)의 하나로서 척추에 곤장을 치는 것.
[주D-015]추매(椎埋) : 사람을 쇠뭉치로 때려 죽여서 묻어버리는 것. 아주 난폭한 행동을 일컫는 말.
[주D-016]뇌성(牢城) : 절도범을 지정된 지역에 보내서 사역(使役)시키던 형의 일종. 송대 형제(刑制).
[주D-017]원호(園戶) : 다(茶) 재배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백성.
[주D-018]다마사(茶馬司) : 송대 관청의 하나로서 다(茶)와 서역 말을 교역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주D-019]동약(僮約) : 한나라 때 왕포(王褒)가 지은 글로서 종을 사들이는 문권이 기록되어 있다.
[주D-020]첩사법(貼射法) : 송대에 시행하던 다의 전매법(專賣法). 상인이 직접 다원(茶園)에 가서 다를 매입한 다음, 일정한 세전(稅錢)을 관에 납부하던 법.
[주D-021]교인법(交引法) : 송대에 대전(代錢)을 서울에 납부한 상인에게 교부해서 국경에 나간 다음에 현품을 인도하도록 허가하던 감찰(鑑札).
[주D-022]비험소(批驗所) : 정부에서 각 매매 물품을 직접 검사하던 기관.
[주D-023]행인(行人) : 외국에 가는 사신과 빈객(賓客)을 접대하던 사무를 맡은 벼슬.
제11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부공제(賦貢制) 6
이하는 잡세(雜稅)이다.
각주고(榷酒考)
주석하기를, “술을 기찰한다는 것은 술 매매가 지나치게 많은 것과 시기가 아닌 것을 기찰하는 것이고, 조심시킨다는 것은 백성에게 씀씀이를 절약해서 항시 마시지 못하게 함이다.” 하였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술 매매에 금령이 있었는데, 그 율은 세 사람 이상이 까닭 없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 벌금이 4냥이었고, 나라에 경하할 일이 있어 백성에게 음식을 크게 내리는 때에는 모여서 술을 마셔도 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는 음식 내리는 법이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는 술을 독점하였다.
안사고(顔師古)는, “점(占)은 스스로 그 실제를 가만히 헤아려서, 그 말을 정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반(劉攽)은, “조는 술을 판 데에 대한 세이다. 술값이 1승에 4전이라는 것은 백성에게 후한 이를 얻지 못하도록 제한한 것이다.” 하였다.
희화(羲和)어광(魚匡)이, “옛것을 법받아 관에서 술을 만드는데, 2천 500석으로 1균(均)을 만들어 죄다 하나의 지정된 판매처[盧]에서 팔기를 요청했다.” 하였다.
살피건대, 이후에는 술을 금단한 일은 있어도 술을 독점하는 영은 없었다.
후주(後周) 말기에, 관에서 주방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거두어들였는데 문제가 혁파하였다.
호인(胡寅)이 이르기를, “술과 다를 독점하고 배와 수레를 계산하며 산과 못을 주관하는 것은 옛적 성왕(聖王)이 하지 않던 것인데 후세에는 큰 이익의 근원으로 삼는다. 관청을 설치하고 법을 세워 엄하게 방지하고 모조리 빼앗는 것이 상부(常賦)보다 심했는데, 한 번이라도 느슨해지면 바로 모자라게 되니 삼대(三代)적 천하가 또한 후세의 천하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때에도 관리에게 늠록(廩祿)을 주었고, 군려(軍旅)에도 사용했으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진구했고, 사이(四夷)를 교제(交際)하였다. 억제한 것은 유독 공ㆍ조(貢助)로서 10분의 1만 해도 족했으니, 이것은 무슨 방도였던가? 그 까닭은 취하는 데에 제도가 있었고 쓰는 데에 한절이 있으며, 수입을 요량해서 지출하고 사치하거나 망령된 허비가 없으면 10분의 1인 공ㆍ조만으로도 족할 뿐이 아닌데, 지출이 끝 없고 요구가 법 없으면 독점하고 산하여도 재물은 고갈되고 백성은 배반해서 나라마저 잃게 된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소금ㆍ술ㆍ차 세 가지는 백성이 먹는 것인데, 백성이 먹는 것을 독점하는 것은 포학한 정사이다. 그러나 주ㆍ거(舟車)를 산(算)하고 산택(山澤)을 주관함은 법에 득실은 있을지라도 옛적에도 시행했음이 문헌에 나와 있으니 함께 논의할 수는 없다.
생각건대, 이후부터 오계(五季)에 이르도록 모두 술을 독점하고 누룩을 독점한 것이 때에 따라 증감(增減)은 있었으나 족히 기술할 것이 없었다.
태종(太宗)이 조서하기를, “전에 백성을 모집해서 차와 소금을 관장시키고 술 판매를 독점하도록 했었는데, 백성들이 상수(常數)보다 많이 증가되어 장(掌) 되기를 구하여 이익을 엿보려 하니 앞으로는 다시 (인원을) 증가하지 못한다.” 하였다.
희령 10년 이전에는 천하 여러 주(州)에서 술에 부과하는 세액으로서 40만 관(貫) 이상인 데가 두 곳[東京ㆍ成都], 30만 관 이상이 세 곳[開封ㆍ杭州 등], 20만 관 이상이 다섯 곳[京兆ㆍ鳳翔 등], 10만 관 이상이 서른 두 곳[西京ㆍ北京 등], 5만 관 이상이 일흔 세 곳[南京ㆍ淄州ㆍ靑州 등], 5만 관 이하가 쉰 곳[沂州ㆍ濰州ㆍ岢嵐 등], 3만 관 이하가 쉰 다섯 곳[遼東ㆍ漈州 등], 1만 관 이하가 열 아홉 곳[登州ㆍ瀘州 등], 5천 관 이하가 열 여섯 곳[桂陽 등]이었다.
생각건대, 송대(宋代)가 끝나도록 술과 누룩을 독점했으며, 말기에 와서는 방(坊)ㆍ장(場)을 박매(樸賣)해서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지금은 자세하게 기술하지 않는다.
생각건대 초를 파는 것은 천하에 지극히 천한 짓이었다. 일찍이 만승(萬乘) 임금으로서 초를 파는 자가 있었는가? 우리나라가 비록 동쪽 변방에 있으나, 삼한(三韓) 적부터 나라의 임금으로서, 술과 초를 팔아서 이익을 취한 사람은 없었다.
저들이 오히려 중국이라는 것으로써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이 또한 부끄럽지 않은가?
구준(丘濬)은 말하기를, “하루에 25석이면 서른 곳을 총계할 때에 하루 소비가 750석이고 한 달 소비는 2만 2천 500석이며 1년 소비는 27만 석이나, 오늘날 경사(京師)에서 1년 동안 소비하는 것은 이것뿐이 아닌 듯하다. 또한 술을 빚는 쌀은 모두 강남에서 나오는데, 배에 싣고 수레에 실어서 수천만 리를 지난 다음에야 여기에 이르니, 슬프다, 대저 백성의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을 금단해도 오히려 방종해질까 두려운데, 이에 누점(樓店)을 설치하고 불러들여서 그 하고 싶은 것을 방종하도록 함이 옳겠는가?”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누룩에 대한 금령으로서 민가(民家)에서 제조하는 것이 1두를 넘지 않는 것은 백성이 스스로 하도록 청허(聽許)하고, 다만 교역(交易)해서 재물과 바꾸는 것은 허가하지 말기를 청(請)한다. 지금 천하에 누룩 만드는 곳은 오직 회안(淮安) 일부이나 소맥(小麥)을 허비[糜]하는 것이 많다 그 1년 동안 허비하는 것은 석으로 계산하면 무려 100만이나 되니 엄하게 금약함이 마땅하다. 무릇 민간에서 누룩을 제조하는 기구는 죄다 부수고, 범금(犯禁)하는 자가 있으면 사염(私鹽)이나 위전(僞錢)과 죄과를 같이 하면, 1년 동안에만도 소맥 100여 만 석이 남아서 백성의 먹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외쇄고(猥瑣考)
광종(光宗) 때에 조여우(趙汝愚)가 말하기를, “여러 현(縣)에 조치한 월용전(月椿錢)은 그 사이의 명색(名色)에 위법한 것이 많아서 세민(細民)에게 제일 해가 된다. 시험삼아 그 중 큰 것만 들어보면 국인전(麴引錢)ㆍ백납초전(白納醋錢)ㆍ매지전(賣紙錢)ㆍ호장갑첩전(戶長甲帖錢)ㆍ보정패한전(保正牌限錢)ㆍ절납우피근각전(折納牛皮筋角錢)과 양쪽이 송사(訟事)해서 이기지 못하면 벌전(罰錢)이 있고, 이미 이겼으면 환희전(歡喜錢)을 바치도록 하는 것이며, 다른 명칭과 괴이한 조목이 곳마다 같지 않다.”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송나라가 강남(江南)으로 건너온 후에 이른바 총제전(總制錢)ㆍ월용전 따위가 있었는데 모두 상부(常賦) 이외의 것이며 일정한 제도의 가외로 다른 계책을 교묘하게 꾸민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당시 형편에 부득이해서 한 일이었고, 지금은 세대가 달라져서 죄다 혁파되었다.”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원사》 식화지(食貸志)를 상고하니, 이른바 세과(歲課)라는 것이 있었다. 산림과 천택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금(金)ㆍ은(銀)ㆍ주(珠)ㆍ옥(玉)ㆍ동(銅)ㆍ철(鐵)ㆍ수은(水銀)ㆍ주사(朱砂)ㆍ벽전자(碧甸子)ㆍ납(鉛)ㆍ주석(錫)ㆍ반(礬)ㆍ겸(鹻 : 소금 버캐)ㆍ대나무 따위는 그 이(利)가 매우 많은 것이고, 염법(鹽法)ㆍ다법(茶法)ㆍ상세(商稅)ㆍ시박(市舶) 이 네 가지는 여기에서 제외된다. 또 이른바 액외과(額外課)라는 것이 서른 두 가지나 있는데, 액외라고 이르는 것은, 세과는 모두 일정한 액수가 있는데 이 과(課)는 그 액수 안에 들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역일(曆日)이란 흠천감(欽天監)에서 역서(曆書)를 많이 인출(印出)해서 그 이익을 수입한 것이고, 계본(契本)이란 소위 아계(牙契)ㆍ인계(印契)로서 백성 중에 매매하는 것이 있으면 관에서 홍계(紅契)를 발급하던 것이었다. 하박(河泊)이란 선세(船稅)이고, 산장(山場)이란 재목에 대한 세이며, 요야(窯冶)란 염철(鹽鐵)에 대한 세이고, 방지조(房地租)란 저점(邸店)에 대한 세이며, 문탄(門攤)이란 관세(關稅)이고, 지당(池塘)이란 관개(灌漑)에 대한 세였다. 나머지는 혹 미상하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역역지정(力役之征)
정현은 말하기를, “정(政)은 정(征)으로 읽는다.” 하였다.
지정은 전지(田地)의 소출이며 고른다는 것은 그 9등급의 율을 고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현은 말하기를, “지수란 형씨(衡氏)ㆍ우인(虞人) 등속이고 지직이란 농자(農者)ㆍ포자(圃者) 등속이었다(가공언은 “太宰가 九職을 맡기고 그것으로 인해서 세를 내도록 했다.”고 하였다). 역정이란, 인민은 성곽과 골목 길ㆍ도랑을 정리하는 것이고 우마와 거련은 화물 따위를 전운(轉運)하는 것이다.” 하였다.
순(旬)이란 편(徧)인데, 공순이란 그해 공사(公事)의 해마다 한 차례의 돌림이라고 생각한다.
가공언은 말하기를, “흉은 그해 곡식이 익지 않은 것이고, 찰은 천하에 역병(疫病)이 유행하는 것이다.” 하였다.
정현은 말하기를, “재부는 9부(九賦)이다.” 하였다.
지수를 거두지 않으면 산택에 세가 없고, 지직을 거두지 않으면 9공(九功)에 공(貢)이 없으며, 지정을 고르지 않으면 조속(耡粟)에 율이 없고 오직 곡식이 익은 해에만 거두어들인다고 생각한다.
3년마다 대비(大比)한다는 것은 모든 조속 및 9부ㆍ9공을 혹 보태기도 혹 줄이기도 해서 그 율을 크게 고르는 것이었다.
정현은 말하기를, “공(公)은 사(事)이고, 순(旬)은 균(均)이다 순순(㽦㽦)한 원습(原隰)이라는 순(㽦)과, 곤(坤)이 변해서 균(均)이 된 것처럼 읽는데 지금 글에도 순(旬)으로 씌어진 것이 있다.” 하였다.
살피건대 순(旬)과 순(巡)은 모두 편(徧)이었다. 《시경(詩經)》에, “내순 내선(來旬來宣)이라는 말이 있는데 순을 편”이라 하였다(毛詩傳). 《한서(漢書)》 책방진전(翟方進傳)에, “순세(旬歲)가 되어 한가하게 양사 도례(兩司徒隷)를 면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순(旬)은 만(滿)인데 순세는 만세(滿歲)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공순이란 공역(公役)하는 해의 한 편(徧)이라는 것인데 왕제(王制)에, “백성의 힘을 쓰는 것이 1년에 3일을 넘지 않는다.” 했고 또한 세 편이라는 것인데, 정현의 뜻은 그른 듯하다.
생각건대, 흉찰이란 대흉 대살(大殺)된 해로서 상ㆍ중ㆍ하 3등의 해 외에 더 심한 것이었다. 늠인(廩人)이 4부(四鬴)ㆍ3부ㆍ2부 3등의 해로 구별했는데, 능히 2부도 못 되는 것은 또 그 밖이었다.
진호(陳澔)는 말하기를, “사려(師旅)에 대한 일은 이 규례에 구애되지 않는다.” 하였다.
생각건대, 공순(公旬)에 다른 뜻이 있었다. 혹은 공순으로 3일을 부린다는 것을 1년에 30일을 부리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주 제도가 이와 같았고, 수 양제(隋煬帝)도 낙읍(洛邑)을 건설하면서 달마다 정장(丁壯) 200만 명을 사역시켰는데 모두 경문(經文)을 잘못 해석한 까닭이었다. 나라에 백성 10만 명이 있는데 모두 3일씩을 부린다면 30만 병이 되는데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는가? 해마다 30일을 사역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다만 사려(師旅)에 대한 일은 이 제한에 들지 않았다.
생각건대 1년 동안에 백성을 50일이나 부리게 되면 백성이 견디어내지 못한다. 경서의 뜻을 한 번 그르치자 그에 따른 해독이 이와 같았다.
살피건대, 차역하는 법은 이미 당대에 생겼으며, 송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옛 제도에 역사를 부과하는 일은 모두 호민(戶民)에게 나왔고, 군국(軍國)에서 관물(官物)을 운반하는 것은 죄다 교거(僑居)하는 사람으로 충수했는데, 이 때에 와서 개정하였다.
국초(國初)에 옛 제도를 따라서, 아전이 관물을 주관하고 이정(里正)ㆍ호장(戶長)ㆍ향서수(鄕書手 : 書吏)가 부세를 감독했고, 기장(耆長)ㆍ궁수(弓手)ㆍ장정(壯丁)이 도적을 체포했으며, 승부(承符)ㆍ인력(人力)ㆍ수력(手力)ㆍ산종관(散從官)이 구사(驅使)에 분주하였다. 현(縣)에서는 조사(曹司)부터 압록(押錄)까지, 주(州)에서는 조사에서 공목관(孔目官) 이하 잡직(雜職)으로써 우후(虞候)ㆍ간도(揀搯) 등에 이르기까지 각각 향호(鄕戶)의 등급 차례로써 차임을 보충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이것은 송나라 초기 이래로 차역하던 법이다.” 하였다.
구준이 이르기를, “상고하건대 이것은 송나라 희령(熙寧) 때의 면역법이었다. 그 논의를 한강(韓絳)이 시작했고 왕안석(王安石)이 이룩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민고전(民庫錢)과 서로 비슷하였다.
소백온(邵伯溫)이 이르기를, “오ㆍ촉(吳蜀) 지방 백성은 고역(雇役)을 편리하게 여기고, 진ㆍ진(秦晉)지역 백성은 차역(差役)을 편리하게 여긴다.” 하였다.
여중(呂中)은 말하기를, “사마광은 차역을 주장하고, 왕안석은 고역을 주장했는데, 두 가지 역의 경중이 서로 같고 이해도 서로 반반이다. 차역하는 법은 비록 백성에게 역역(力役)하는 수고로움은 있으나, 전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고 조가 있으면 역(役)이 있어서, 모두 나의 직분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유감될 바가 없다. 그 중에 혁파할 만한 것은 아전(衙前)의 중한 역이다. 고역하는 법은 백성이 비록 역역에 대한 값은 내어도, 온 가족이 편하게 앉아서 삶을 영위하는 계획을 할 수 있으니 또한 원망이 없다. 그 중에 없앨 만한 것은 관잉전(寬剩錢)을 지나치게 배정하는 것이므로 그 편리함에 따라서 해가 되는 것을 없애면 두 가지 역을 모두 시행할 만한 것이다.” 하였다.
구준은 말하기를,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사역하는 법은 반드시 이 두 가지를 겸한 다음이라야 시행하기에 치우치지 않으며, 특히 이해가 서로 반씩일 뿐만도 아니다.” 하였다.
생각건대, 송나라의 차역하던 법은 대개 천하의 학정이었다. 심지어는 과부가 개가하고 친족끼리 갈라살며 혹 전지를 남에게 주어서 상등되는 것을 면하고 혹 비명의 죽음을 구해서 단정(單丁)이 되기도 하였다(이상은 韓琦의 疏章에 있다). 집에는 감히 소를 먹이지 못했고, 마을에는 감히 뽕나무를 심지 못했으며(司馬光의 상주에 있다), 술잔과 공이를 남기지 않았고, 숟가락과 젓가락도 모두 계산하였다(吳充의 말이다).
그런데 왕안석이 면역법을 창설해서 그 폐해를 죄다 없애므로 백성이 편하게 여겼었는데 애석하게도 붕당(朋黨)의 화가 백성에게 미쳐서 비록 사마광의 어짊으로도 또한 당론(黨論) 때문에 백성의 이(利)를 막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대저 백성의 힘을 쓴다는 것은 성을 쌓거나 축대를 쌓는 일과 냇바닥을 파고 도랑을 정리하는 따위이니, 그 징발하는 것에 시기가 있고 그 시작과 마침에 기한이 있어서 농한기에 조용하게 사역시킨다면 그 해가 진실로 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수레로 운반하고 채찍으로 몰아가며 도둑을 쫓고 빈객(賓客 : 외국 사신 따위)을 맞이하여 겨울도 여름도 없고 낮도 밤도 없으며 구렁에 자빠지고 구덩이에 떨어져 땀을 흘리며 무서워서 벌벌 떨며 숨죽여 쉬며 개나 닭보다 못함과 같겠는가?
차역과 면역은 그 이롭고 해로움과 편리하고 편리하지 못한 것의 차이가 흑백처럼 분명하건만, 당시에 정사를 의논하던 신하가 밑으로는 백성의 실정을 숨기고 위로는 임금의 결단을 변동시켜서 반드시 그 법을 혁파한 다음에 그만두었으니 어찌 심하지 않은가? 후세에 논의하는 자는 오히려 양쪽이 다 옳다, 혹은 다 그르다 하여 감히 굽고 곧음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논쟁에도 또한 다 알 수 없음이 있는 것을 알았다.
희령 4년에 풍경(馮京)이 차역을 정리해서 보갑(保甲)으로 만듦으로써 인민이 극도고 노고하게 되는 폐단을 말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웃 백성에게 물어보라.” 하였는데 모두 면역법으로 함을 기쁘게 여겼다. 대개 비록 돈을 내어서 그 신역(身役)이 면제되었더라도 추후(追後)해서 형책(刑責)을 당할 걱정이 없으므로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바였다. 문언박(文彦博)은 말하기를, “조종(祖宗)께서 마련한 법제가 갖추어 있는데 반드시 경장(更張)해서 인심을 잃을 필요가 없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법제를 경장하면 사대부는 기뻐하지 않을 자가 진실로 많겠으나 백성에게야 무엇이 불편하겠는가?”라고 하자 언박은 말하기를,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백성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마단림은 말하기를, “노공(潞公 : 문언박을 가리키는 말)의 이 말은 잘못이었다. 대개 개보(介甫 : 왕안석의 字)가 새 법을 시행하면서, 그의 뜻은 용감하게도 모든 원망을 자신이 책임지며, 헐뜯음과 칭예함에 동요되지 않았다. 역법(役法)을 시행하여 방곽 품관(坊郭品官)의 집도(즉 都城에 있는 朝官) 모두 돈을 바치도록 하고, 방장 주세(坊場酒稅)의 수입을 다 조역(助役)으로 돌렸기 때문에 사부(士夫)와 호족(豪族)들은 원망이 없지 않았으나 실상 농민에게는 이로웠다. 이것이 신종(神宗)의 ‘백성에게 무슨 불편함이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게 된 까닭인데, 노공의 이 말과 동파(東坡 : 蘇軾의 호)가 이른바 ‘피폐함이 너무 심해서 주전(廚傳)도 쓸쓸하다.’라는 것이 모두 개보가 ‘습속에 따라서 칭찬만 요구하는 자는 족히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지적한 것이니 이래서야 어찌 족히 그 치우침을 바로잡아서 폐단을 구제하겠는가?” 하였다.
생각건대, 차역하는 폐단은 당나라 말기에 일어났고, 송 태조ㆍ태종이 조보(趙普)ㆍ왕부(王溥)와 더불어 의정(議定)한 금석 같은 법이 아닌데 어째서 조종의 법제라고 이르는 것인가? 삼대 때 우ㆍ탕ㆍ문ㆍ무(禹湯文武)가 나라를 세우고 중정(中正)의 도를 세우면서, 예법을 마련하고 음악을 지어서 금석 같은 법을 드리우니, 어진 신하와 착한 보필이 사군(嗣君)에게 고하기를, “어기지 말며 잊지 말고, 죄다 옛법대로 하십시오.” 하였다.
그런데 후세에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타서 우뚝 일어난 자는 천명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고 인심도 복종되지 못하여 호족들의 원망을 받게 될까 염려해서 드디어 쇠란한 세대의 나쁜 제도가 겹겹이 쌓여서, 벌써 곪아터질 종창과 같은 것을 그대로 따라하였다. 혹 한 가지라도 좋은 소견이 있어서 경장하는 방법을 시험하고자 하면 원로 대신과 침중(沈重)하여 덕이 있는 듯한 자가 반드시 한마디 말로써 천천히 억압하면서, “조종께서 마련한 법제를 반드시 경장할 것이 아니다.” 하면 호족과 권세를 믿는 자로서 사(私)만 알고 공(公)은 모르는 자가 반드시 따라서, “노야(老爺)의 태산 교악(泰山喬岳) 같은 덕망이 국가를 진정할 만하다.” 한다. 그러나 실상 향원(鄕愿) 거짓 덕이고, 선을 좋아하는 마음은 한 점도 없는 자이다.
문언박(文彦博)이 촉금(蜀錦)으로써 궁중에 통하여 정승 자리를 도모했으니 그 이(利)를 즐기고 염치 없는 비루한 사람임이 벌써 분명했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참 정성은 없고, 호족을 돌보는 더러운 뜻이 있었으니, 어찌 면역전이 백성에게 편리하다고 이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가 곧 말하기를, “임금이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니, 사대부의 소원에 따름이 마땅하다.” 했으니 이 한마디에서 그 심술의 은밀함을 추측할 수가 있다.
아아! 시비는 성패에 확정되고 선악은 강약으로 결단되었으니 “같은 데에 찬동하는 자로 하여금 그를 바로잡게 하니, 이미 같은 데에 찬동했는데 어찌 능히 바로잡겠는가?” 하는 말이 진실로 천고의 명언이었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차역은 나라에 능히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전(驛田)ㆍ참전(站田)ㆍ원전(院田)ㆍ도전(渡田)이 있어 급주(急走)하는 자를 공궤(供饋)하고, 체전(遞傳)하는 사람을 돕는 데에 백성의 재물을 거두지 않고 이에 공전(公田)을 주었으니, 그 송나라 법과 비교하면 매우 인후했다. 또 모든 진상(進上)하는 물품을 수운(輸運)하는 태가(駄價)와 짊어지고 가는 다리 품을 모두 대동미(大同米) 안에서 수량을 대조하여 회감(會減)해서 백성의 힘을 너그럽게 하는 것도 극진하였다. 그런데 군현(郡縣)에서 사사로 명목을 세워서 그 백성을 부리며 그 재물을 징수함으로써 이에 민고(民庫)라는 것이 생기게 되어 모질게 거둠이 대중이 없고, 훔쳐 먹는 것도 끝이 없으니, 전야가 날로 황폐해지고 여리(閭里)가 날로 공허해진다. 나라에서는 모르는 바이나 백성은 다 죽을 참이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송나라에서 시행하던 차역법과 면역법이 비록 좋은 점과 나쁜 점은 있었으나 반드시 조정 대신에게 의논하여 제도를 정하고 조서를 내려서 식례를 반포한 다음이라야 관에서 징수할 수 있고 백성이 응할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에 민고의 법은 군ㆍ현의 작은 아전들이 서사(胥史)와 더불어 법제를 사사로 세우고 수령은 몽매하여 문서 끝에 조심스럽게 서명(署名)할 뿐인데, 거리낌없이 시행하여도 능히 막지 못하니 이것은 자그마한 아전이 임금의 권한을 훔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말한다면 비록 법 없는 나라라고 이르더라도 변명할 수가 없다.
구준은 말하기를, “요역을 고르게 하는 법을 강남에는 시행할 수 있어도 강북에는 시행할 수 없으며, 큰 현에는 시행할 수 있어도 작은 현에는 시행할 수 없으며, 큰 호에는 시행할 수 있어도 작은 호에는 시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강북의 주ㆍ현에는 백성은 적은데 요역이 많기 때문이다. 큰 현에는 백성이 많으니 10년을 기다려서 한 번 요역해도 가하나 작은 현에는 백성이 적어서 요역한 지 3~4년 만에 벌써 한 차례가 돌아온 자가 있다. 큰 호에는 살림이 많고 정구(丁口)도 많은데, 살림이 많으면 재물 내기가 쉽고 정구가 많으면 힘 내기가 쉽다 무릇 가난한 호는 10년 동안의 요역을 일시에 아울러 쓰게 되니 어찌 능히 감당해내겠는가?” 하였다.
이사지례(弛舍之例)
종정한다는 것은 사대부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어(論語)》에, “지금 종정하는 자는 위태하다.” 했고, 또 “유(由)는 종정토록 할 만하다. 구(求)는 종정토록 할 만하다.” 하였다 《춘추전(春秋傳)》에는 “진(晉)나라에 종정하는 자가 새로 나왔다.” 했고(宣公 12년조), 또 “자산(子産)이 종정하니 여인(輿人)도 칭송했다.” 하여(襄公 30년조) 그 글이 뚜렷하다. 다만 정현의 주(注)와 잡기(雜記)와 왕제에 모두 종정을 역역하는 정(征)이라 했는데, 그들의 뜻도 또한 근본한 데가 있었다. 종정(從政)이란 종정(從征)이니 부모가 아주 늙었으면 그 자식이 집을 떠나서 멀리 갈 수 없으므로 모든 사려(師旅)와 성지(城池)의 역사(役事)는 반드시 면제해서 왕제에 이른 바와 같은 것이 있었지만, 그 부역을 견감하는 일 같은 것은 경서(經書)에 명문이 없다.
50세가 되면 역정하는 데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향대부(鄕大夫) 조에, “나라 안은 60세 된 자와 야외에는 65세 된 자도 모두 부세(征)한다.” 했으니(문장은 위에 있다), 역정이 부역이 아님도 여기에서 분명하다.
이것은, 나이 80이 된 자는 그 집 사람 2명에게 구산(口算)을 면제하는 것인데, 옛적에는 명문(明文)이 없었다.
생각건대, 이것은 《주례》에, 비록 명문은 없으나 또한 아름다운 법이었다. 그러나 80세가 된 사람은 많아서 허위가 있을까 염려되니, 90세에 1명을 면역시키고 100세에는 온 집을 면역시킴도 또한 마땅할 것이다.
이상은 우로지사(優老之舍)임.
이것은 사대부의 예이다. 정현의 주에는, “요역을 면제한다.” 했으나 그 뜻은 잘못된 것이다(徐乾學은 “이것은 모두 사대부가 벼슬을 바친 것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고 서민을 이른 것은 아니다.” 하였다).
생각건대, 유향의 《설원》에는 역역하는 구실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나, 호조(戶調)하는 부(賦 : 구실)는 경서(經書)에 그런 글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 법에는 번(番)이 면제되는 대신 베(布)를 상납하고, 상(喪)으로서 면제되는 법은 없다. 사사로 모집하는 군관(軍官)의 돈(錢)은 상을 당하면 면제하는데(喪頉이라고 이른다), 오직 3년상이라야 이런 혜택이 있게 되는데 아전이 이 법을 인해서 간사한 짓을 하며, 상고(喪故) 없는 자를 남몰래 공문(公文)을 내어서 또한 상고로 만들어 이를 면제하도록 하니 법이 본디 주밀하지 못한 때문이다.
생각건대, 요사도 또한 역역하는 구실이었다.
이상은 애상지사(哀喪之舍)임.
생각건대, 이때에는 전(廛)을 준 다음에 전지를 주었고 전지를 준 다음이라야 백성이 되어서 이에 정역이 있었기 때문에 이 법이 있었으나 후세에는 관에서 전을 주지 않았으며, 옮겨가고 옮겨옴에 일정함이 없어서 요역을 도피하는 백성이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있기도 하니 이 법은 쓸 수가 없다.
주하기를, “대부 채지(采地)의 백성으로 제후의 나라로 옮겨와서 백성이 되면 새로 옮겨왔다는 이유로 반드시 요역을 면제함이 마땅하나, 다만 제후의 나라는 땅은 넓고 요역이 적기 때문에 3개월만 종정하지 않으며, 제후의 나라에서 대부의 채읍으로 옮겨오면 대부의 채읍에는 요역은 많으면서 땅은 비좁기 때문에 1년이 되도록 종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종정이란 역역하는 정이므로 이 나라에서 옮기려는 자는 3개월을 종정하지 않고, 저 나라에서 새로 온 자는 1년을 종정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생각건대, 위ㆍ진(魏晉) 이래로 백성을 호적하는 법을 반드시 주호(主戶)와 객호(客戶)로 분간한 것은 새로 옮겨온 자에게 가벼운 쪽으로 따르게 하려던 것이었다. 부동(浮動)하는 백성과 요역을 도피하려는 자가 이 때문에 이리저리 전전했는데, 육지(陸贄)도 또한 그 불편함을 말하였다. 왕자가 법을 세우는 데에는 반드시 5가(家)를 비(比)로, 5비를 여(閭)로 하여 5와 5가 서로 보증하도록 해서 부동하는 자가 그 사이에 끼여들지 말게 하며, 혹 우접(寓接)한 자도 요역과 부세를 용서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전지를 사고 전택(廛宅)을 두어서 영구히 살 계책을 정하는 자는 3년 동안 부를 면제함이 또한 알맞을 것이다.
이상은 신사지사(新徙之舍)임.
선사에게는 향 중에서 요역을 면제하고 준사에게는 국(國) 중에서 요역을 면제하는데 이것이 그 차(差)이다. 향대부(鄕大夫) 조에, “어진 자와 유능한 자는 모두 사(舍)한다.” 하였다.
주나라 제도에 선사와 2는 육향(六鄕) 밖에 나가지 않았고 육향은 왕성(王城) 안에 있었다. 주나라 법에 또 국택(國宅)에는 부세(征)가 없었는데, 향대부에 이른바 어진 자와 유능한 자에게 이사(弛舍)한다는 것은 부가지정(夫家之征) 및 구직지공(九職之貢)과 역역지정(力役之征)뿐이었다. 그런데 후세에는 태학 진사(太學進士)가 반드시 왕성 안에만 있지 않았으니, 그 택전(宅廛)에 대한 세가 면제될 수 없다 한ㆍ위(漢魏)의 제도는 다만 그 신역(身役)을 면제했으니 태학생으로서 면제되어야 할 바는 정전(丁錢)뿐이다.
이상은 현능지사(賢能之舍)임.
살피건대, 절행(節行)을 복호(復戶)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 한나라의 기신(紀信), 당나라의 장순(張巡)ㆍ허원(許遠)ㆍ안고경(顔杲卿),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ㆍ육수부(陸秀夫),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ㆍ경청(景淸) 등을 봉사(奉祀)하는 집은 비록 10대(代)라도 복호함이 마땅하며 그 나머지 충신ㆍ효자ㆍ열녀는 혹 그 자식만 면제하고 혹은 그 손자대까지 미치게 할 것이니, 마땅히 면제를 조서하는 당초에 대수를 분명하게 나타낼 것이며, 과람하게 할 수는 없다.
이상은 절행지사(節行之舍)임.
생각건대, 속적은 우리나라의 《선원보략(璿源譜略)》이 이런 유였다.
생각건대, 주나라가 친척을 높였기 때문에 노나라와 정(鄭)나라의 법에 공족(公族)은 모두 세경(世卿)과 세록(世祿)이었다. 그런데 당 이래 공족을 억압해서 서성 천족(庶姓賤族)보다 못하게 했음은 천리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법은, 공족은 비록 10대라도 군역을 매기지 않았기 때문에 서성 천족이 거짓 족보를 만들어서 함부로 선파(璿派)에 의탁한다. 내가 전일 서도(潟) 고을에 있을 때에 스스로 선파라고 칭탁하는 자를 보면 반드시 마음을 다해서 조사했는데, 위모(僞冒)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선원보략》에 4대만 기록함은 너무 간략한 듯하니, 그 제한을 넓혀서 4대 이상의 자녀는 다 기록하기를 지금 법과 같이 하고, 4대 이하부터 10대까지는 성 손(姓孫)만 기록하도록 하여 무릇 이름이 그 《보략》에 있는 자는 호세(戶稅)만 있고 그 정전(丁錢)을 면제하면, 친척을 친하게 하는 뜻에 거의 맞을 것이다.
이상은 의친지사(議親之舍)임.
생각건대, 공신에도 원훈(元勳)과 차훈(次勳)이 있으니 제복(除復)하는 데에 원근(遠近)의 차가 있음이 마땅하며, 개괄(槪括)해서 소하(蕭何)ㆍ곽광(霍光)을 예로 함은 불가하다.
이상은 의공지사(議功之舍)임.
생각건대, 왕자는 사정이 없는 것인데 풍ㆍ패라 하여 사정을 쓸 수 있는가? 요역을 면제함이 돈이나 비단을 많이 줌만 같지 못하다.
이상은 제향지사(帝鄕之舍)임.
살피건대, 채옹(蔡邕)이 지은 《독단(獨斷)》에 이르기를, “천자의 거가(車駕)가 이르는 곳을 행(幸)이라 한다. 그것은 천자가 이르는 곳에 음식과 포백(布帛)을 하사하고 백성에게 벼슬도 등급이 있게 하며 혹 전조도 면제하는 영을 내리기 때문에 행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한나라의 법이었고 옛 경서에는 근거한 데가 없다.
이상은 행행지사(行幸之舍)임.
생각건대 이와 같은 유는 혹 전지를 준 자이니, 그 요역을 반드시 면제할 것이 아니었다.
이상은 사묘지사(祠廟之舍)임.
살피건대, 옛적에는 천하 전지가 모두 군전(軍田)이었는데, 왕이 이미 전지를 주었으므로 백성들에게 군졸ㆍ수레ㆍ말ㆍ소를 부과(賦課)해도 백성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후세에는 천자가 송곳 하나 세울 만한 전지도 백성에게 준 것이 없으면서 백성을 빌려 군사로 삼으니, 백성이 순종하지 않자 이에 그 잡요(雜徭)를 면제해서 그 수고했음을 갚았는데 모두 구차스러운 정사였다.
이상은 군졸지사(軍卒之舍)임.
생각건대, 서인으로써 관직에 있는 자는 서울과 외방을 논할 것 없이 반드시 그 요역을 면제했는데, 촌리(村里)의 보정(保正) 따위는 반드시 논의할 것이 아니었다. 또 조관(朝官) 집으로서, 그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그 자손을 복호하는 것은 옛 경서에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
이상은 직역지사(職役之舍)임.
살피건대 월어(越語)에 “구천(句踐)이 영(令)하기를, ‘장차 면(免 : 젖먹이를 말한다) 하려는 자를 보고하면 의원으로 하여금 보호하도록 하되 세 사람을 낳으면 나라에서 유모를 정해주고, 두 사람을 낳으면 나라에서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하였는데, 고조의 영도 또한 이 뜻이었으나 다 선왕의 법이 아니니 족히 기록할 것이 없다.
이상은 신산지사(新産之舍)임.
마단림은, “주나라에서 복제하던 법은 그 정역을 면제할 뿐이었는데, 한나라에 와서는 부세마저 아울러 면제했으니 한나라 법이 어찌 주나라 법보다 나은 것이겠는가? 아니다. 대개 부세는 전지에서 나오는데, 주나라사람은 전지를 모두 관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그 정역만 면제하였으나, 한나라에 와서는 전지가 민유(民有)이어서 관에서 주고 받는 권한을 잡지 못한 까닭으로 복제해야 할 예에 있는 자는 그 부역을 아울러 면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에는 벼슬한 집으로서 음덕(蔭德)이 있거나 한 정(丁)뿐이거나 혹 늙고 병든 자에게 그 부역을 면제했던 적은 있었으나 조세를 면제한 일이 있다는 말은 두 번 듣지 못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사(弛舍)하는 은택은 가볍게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요행으로 면제된 자는 비록 즐거워하겠으나 치우치게 고초(苦楚)받는 자는 괴롭지 않겠는가? 법이 이 때문에 어지러워지고 간사함이 이 때문에 생기며, 용도가 이 때문에 축이 나고, 은택의 고마움이 이 때문에 줄어드니 한 임금이 세운 법으로서 마땅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는 원래 부세가 없었다가 중엽 이후로 군보(軍保)에게 베(布)를 거두는 법이 있었으나, 나라 안 귀족은 다 이사(弛舍)하는 예에 들었다.
이 법이 오래되자 시골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백성도 모두 귀족이라 칭탁해서 모두 이사하는 중에 들게 되었다. 오직 남의 집에 고용하는 하천(下賤)과 떠돌이ㆍ비렁뱅이, 늙고 병들어서 호소할 데 없는 백성이 이에 군부(軍賦)에 응하고 또 군ㆍ현의 소리(小吏)는 사사로 민호(民戶)를 뽑아서 계방(契房)을 만들었다. 무릇 계방 마을로 된 곳은 곧 털끝도 들어갈 틈이 없어 부역의 치우침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다. 무릇 부렴(賦斂)을 마련하는 자는 이사하는 예에 처음부터 삼감이 마땅하며, 그 길을 가볍게 열어놓음은 불가하다.
[주D-001]희화(羲和) : 당우(唐虞) 때에 희(羲)씨와 화(和)씨가 역상(曆象)에 대한 일을 맡았는데, 그후 역상을 관장하는 관원을 희화라 일컫게 되었다.
[주D-002]연액전(年額錢) : 1년 동안 거둔 세전(稅錢)의 총액.
[주D-003]월용전(月椿錢) : 송대에 군비(軍費)조로 징수하던 세전. 지금의 방위세와 같다.
[주D-004]국인전(麴引錢) : 인(引)은 면허증과 같은 것. 누룩 제조에 발급하던 면허장에 대한 세전.
[주D-005]백납초전(白納醋錢) : 백납(白納)은 토사(土司 : 지방 관서)의 하나. 지방 관서에서 초(醋)에 대해서 징수하던 세전.
[주D-006]호장갑첩전(戶長甲帖錢) : 호장(戶長)은 이정(里正)과 같은 것. 호장에게 보갑첩지(保甲貼紙)를 발급하고 징수하던 돈.
[주D-007]보정패한전(保正牌限錢) : 송대에 창설했던 자치 제도. 500집을 도보(都保)로 하고 도보에 보정(保正)이 있어 통할했음. 패(牌)는 10집을 1조(組)로 하고 패를 만들어서 호주와 성명을 기록하는 것인데,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보정이 갱신되면서 보민(保民)에게 수수료를 영수했고 그 돈에 대해서 세를 징수하던 돈.
[주D-008]절납우피근각전(折納牛皮筋角錢) : 절(折)은 그 값을 정한다는 뜻. 값을 정해서 그 값에 대한 세전을 바치는 것.
[주D-009]총제전(總制錢) : 송대 부세(賦稅)의 명칭. 송 선화(宋宣和) 연간에 진형백(陳亨伯)이 경제사(經制使)로 있으면서 이 세를 창설했고, 그후 옹언국(翁彦國)이 총제사(總制使)가 되어 세액을 증가해서 총제전이라 일컫게 되었다.
[주D-010]4부(四鬴) : 1부(鬴)는 6두 4승. 한 사람이 한 달 먹는 쌀이 4부라는 뜻이다.
[주D-011]차역(差役) : 중국 송나라 때의 과역법(課役法). 백성의 빈부의 차를 9등급으로 나누어 4등 이상에서만 공용의 인부를 징발하고 5등 이하는 면제하였다.
[주D-012]체부(遞夫) : 각 역(驛) 사이에 공문서 따위를 전달하던 역졸(役卒).
[주D-013]고치(雇直) : 인부를 부리고 지급하는 삯.
[주D-014]아전(衙前) : 송대 부역의 명칭. 이정(里正)과 향호(鄕戶)를 아전으로 삼아서 부고(府庫)를 관리하고 관물(官物) 운반을 책임지웠다.
[주D-015]향원(鄕愿) : 그 지방 인심에 영합하면서 가장 점잖은 체하는 사람. 《논어(論語)》 양화(陽貨) 편에, “鄕愿德之賊”이라고 보인다.
[주D-016]구산(口算) : 인구에 부과하는 세. 즉 인두세(人頭稅).
[주D-017]실을 당한(當室)자 :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가사를 담당한 사람을 말함.
[주D-018]12년에 조서하여, …… 안정시킨 자 :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는 “2천 석의 관리로 장안에 이사한 자와 촉한(蜀漢)에 들어갔다가 삼진을 …… (吏二千石 入徒長安者 入蜀漢定三秦者 …… )”이라고 되어 있다.
[주D-019]향삼로(鄕三老) : 관직의 이름. 한나라 제도에 향마다 삼로(三老) 한 사람을 두어 교화를 관장하게 하였음. 《한서》 고제기에, “擧民年五十以上 有修行能帥衆爲善 置以爲三老 鄕一人 擇鄕三老 一人爲縣三老”라고 보인다.
제11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부공제(賦貢制) 7
방부고(邦賦考)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무릇 세공(稅貢)하는 물건을 징수한 것은 다음해 6월을 기한으로 해서 상납한다.” 하였다.
“전세(田稅) 외에 공물은 2월을 기한으로 한다.” 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세말(歲末)마다 여러 관청에 상납된 공물의 수량을 고찰하는데, 여섯 관청 이상에 납부하지 못한 수령은 계문(啓聞)해서 파출(罷黜)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토공하는 법은 지금에 밝힐 수가 없다. 그러나 오례(五禮)에 소용되는 것 외에도 외잡(猥雜)한 여러 가지 물품은 연산군(燕山君)이 황음(荒淫)하던 그때에 생긴 것이 많고, 모두가 조종(祖宗)들이 옛적에 정한 것은 아니었다. 무릇 상납하는 물품은 비록 쌀ㆍ팥ㆍ비단ㆍ베 따위라도 오히려 퇴짜를 놓고 뇌물을 요구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생선ㆍ생복(生鰒)ㆍ갓끈ㆍ관(冠)끈ㆍ모피(毛皮)ㆍ가죽ㆍ약초(藥草) 등속이겠는가? ‘크다’, ‘작다’, ‘신선하다’, ‘묵었다’라고 해서 서리들이 마음대로 조종하고 간사한 짓을 행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속담에, “공물은 꼬지에 꿰어 바치고 뇌물은 짐바리에 실어서 몰고 간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토공을 상납할 때에 여인(輿人)들이 원망하는 말이니 그 폐단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그 상소는 대략, “이른바 공안을 고친다는 것은, 여러 고을에 토지의 대소와 인민의 많고 적음이 같지 않고 혹 동떨어지게 다르건만 공안에 정해진 것에는 심한 차등이 없으니 괴로움과 편리함이 고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토산품 아닌 것이 많고 온갖 물품을 모두 마련해서 각 관청에 갈라바치는데, 수량이 점점 많아지는 폐단은 해가 백성에게 돌아가도 이(利)는 서리가 취할 뿐이고 나라 용도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또 근래에는 세가 가벼워져서 맥(貊)의 도(道)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1년 수입으로써 지출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매양 옛날에 저축했던 것을 보태어 씁니다. 그리하여 200년 동안이나 축적해오던 나라에 지금은 2년 동안 먹을 것도 없습니다.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니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지금에 부세를 더하고자 하면 백성의 힘이 벌써 다했고, 전일의 규정만 지키면 오래지 않아서 나라 재물은 반드시 다 없어질 터이니 이것은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약 공안을 개정하자면 능숙한 솜씨를 지닌 자에게 맡겨서 잘 규획하도록 하고 다만 그 땅에 생산되는 것으로 균평하게 배정한 다음, 한 고을에서 상납하는 것이 두세 관청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수입하는 원래 수량은 별로 줄어들지 않으면서도 백성의 허비는 열에 아홉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백성의 힘을 너그럽게 펴주고, 백성의 심정을 위로해서 즐겁게 한 다음, 알맞게 요량해서 세를 증가한다면 나라 용도는 점점 넉넉해질 것입니다.
공안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사실 백성만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경비를 위한 것입니다.” 하였다.
살피건대, 당시의 법에 무릇 생선을 바치는 이는 봉상시(奉常寺)ㆍ사옹원(司饔院)ㆍ예빈시(禮賓寺)ㆍ양현고(養賢庫)ㆍ사재감(司宰監)에 바치는데, 백성이 이것 때문에 폐해를 받는다. 만약 아울러 봉상시에 바치고 그곳에서 여러 관청에 분배하도록 한다면 그 폐해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약재(藥材)는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의정부(議政府)ㆍ종친부(宗親府)ㆍ충훈부(忠勳府)ㆍ의빈부(儀賓府)ㆍ중추부(中樞府)ㆍ기로소(耆老所)에 바치는데 백성이 또한 폐해를 받는다. 만약 아울러 내의원에 바치고 그곳에서 여러 관청에 분배하도록 한다면 그 폐해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또 군ㆍ현의 크고 작음으로써 공액(貢額 : 공물의 수량)을 가감하면 백성의 바치는 것이 약간은 고르게 될 터이니 이 때문에 공안을 고치자고 하는 것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윗사람에게 손(損)이 되면 아랫사람에게 익(益)이 되고, 아랫사람에게 손이 되면 윗사람에게 익이 됨은 천하의 정리이다. 그러나 전부의 폐단은 유익함이 위로 나라(公)에 있지 않고 아래로 백성에게도 있지 않다. 한 물건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좀벌레가 되어서, 위로 영양(榮養)이 깎이고 아래로 고혈(膏血)이 착취된다. 예부터 충성스런 뜻을 가진 사람이 그 입이 쓰고 마음이 괴롭도록 반드시 없애고자 한 것은 무릇 이것뿐이었다. 노(魯)나라의 삼가(三家)와 한(漢)나라의 척리(戚里)와 우리나라의 서리(胥吏)는 그 귀천은 비록 다르나 그 중간에서 가로막은 것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유자(有子)가 철법(徹法)을 쓰도록 청하면서, “임금이 백성과 함께 족(足)해진다.” 했고, 문성공(文成公 : 이이의 시호)이 공안을 개정하길 청하면서, “임금이 백성과 함께 족해진다.”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그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다(또 상고하건대, 율곡이 《東湖問答》을 지은 것도 또한 이 뜻이었으니 참고함이 마땅하다).
그 다음해 봄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이가 또 계하기를, “군적(軍籍)을 개정하는 것은 비록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비록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방책이 반드시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이(利)가 십(什)이 못 되면 옛 것을 고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경장(更張)한다는 빈 명칭만 있고, 변통한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예전대로 할 뿐입니다. 아아! 공안을 개정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 없고 나라 용도도 마침내 넉넉할 수가 없습니다. 논의하는 자는 혹 소요(騷擾)스러움을 걱정하나 공안을 개정하는 등의 일은 조정에서 상의(相議)해서 결정할 뿐입니다.
백성은 한 되의 쌀, 한 자의 베도 허비함이 없는데, 무엇이 백성에게 관계되기에 소요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만약 양전(量田)을 한다면 백성을 조금 소요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이에 거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개정하는 것을 반드시 양전보다 뒤에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진실로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고르게 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전한 다음이라고 해서 전결의 증감에 어찌 큰 차이가 생기겠습니까? 먼저 공안을 개정하고 뒤따라서 양전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전결에 비록 남고 모자라는 작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찌 지금 공안이 전결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겠습니까?” 하였다.
살피건대, 당시 공법도 반드시 전결로써 근본을 삼았기 때문에 상소한 바가 이와 같았고, 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전결로써 쌀을 거두었다.
《보감(寶鑑)》에 이르기를, “왜란 후에 공법이 더욱 무너졌는데 옛 공안을 줄이고, 한결같이 토산(土産)에 따르도록 명했다. 증가나 감손을 다 개정하지 못하고 중지했으나, 공물을 쌀로 변경한다는 논의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살피건대, 갑오년은 만력(萬曆) 임진 계사의 다음해(1594)였다. 이때는 왜구가 물러가지 않았으니, 법을 제정할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명(成命)이 비록 내렸으나 개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상소하여 공안을 상정하기를 청했는데 그의 논의에, “각 도의 민결(民結)에 쌀과 콩을 고르게 부과해서 모두 경창(京倉)으로 실어오도록 하고, 각사(各司)의 공물 및 방물 진상도 물품을 계산해서 값을 정합니다. 제용감에 진헌(進獻)하는 모시와 베의 값을 무명[木]으로 하는 예와 같이 하고, 유사(有司)를 시켜 무역해서 쓰도록 합니다.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 특별히 조달할 일이 생기면, 공물과 방물 진상의 액수를 요량해서 적당히 감합니다. 그렇게 하면 곳간에 갈무리한 쌀과 콩으로 번거롭게 바꿔서 만들지 않더라도 취해 쓰는 데에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중국에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고,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 : 벌금으로 받은 은)을 광록시(光祿寺)에 교부(交付)하여 모든 진공(進供)하는 물품을 사서 쓴다 합니다. 만약 특별히 소용되는 일이 있으면 특명으로 선수(膳羞)를 줄여서 그 값을 인용(引用)하기 때문에 먼 지방 백성이 실어나르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공장에서 만든 온갖 물건이 경도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은 그 법 세운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였다.
생각건대, 유문충(柳文忠 : 유성룡의 시호)이 말한 바가 곧 대동법(大同法)이었으니, 대동에 대한 논의는 문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가?
그 법에, “매년 봄 가을에 민전(民田) 한 결(結)마다 쌀 8두를 거두었다가 시기에 따로 각사(各司) 사주인(私主人)에게 갈라주고 상공(上貢)할 물품을 스스로 무역해서 바치도록 하고, 그 수량을 넉넉히 남도록 해서 주인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하고 이외에는 한 되의 쌀도 민호에 더 징수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광해가 기내(畿內)에 먼저 시험하도록 했는데 거실과 호민(豪民)이 방납(防納)하는 큰 이(利)가 없어지자, 온갖 방법으로 훼방놓았다. 그리하여 광해가 여러번 파하고자 했으나 경기 백성이 편리하다고 함으로써 시행되었다(李植의 《澤堂集》).
생각건대, 지금 토공(土貢)은 모두 혁파되었고 오직 인삼공(人蔘貢)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방납하는 법이 있다. 그 법은, 무릇 나삼(羅蔘)을 공(貢)하는 자는 나삼 한 냥마다 돈 400냥으로 값을 정해서 내의(內醫)의 집에 바치는 것이다. 내의는 그 10분의 1로써 삼을 무역해서, 제가 바치고 제가 받으면서 남은 10분의 9를 먹는데 이것이 소위 방납이다. 그때에는 온갖 물품의 공(貢)이 모두 이와 같았으니 백성이 어찌 견뎌냈겠는가?
이보다 먼저 광해 때에 이원익이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청했으나 기내에 시행되었을 뿐이고 끝내 여러 도에 파급하여 시행하지는 못했다. 이때에 와서 이 법을 8도에 두루 시행하기를 청했으나, 도하(都下)의 터무니 없는 논의 때문에 관동(關東)에만 시행하였다(《寶鑑》 및 《택당집》).
생각건대, 토공이 변해서 대동이 된 것은 천하에 옳게 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행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그 이해를 미리 요량하기 어려운 것에 있어서랴?
그후 3년이 지난 병인년(1626)에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서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자 이에 원익이 말한 법에 따라 온 도의 전역(田役)을 평균하고 고르게 분배하여 혈법(絜法 : 명백한 법)으로 한 다음, 문적에 기록해서 갈무리하였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무인년(1638) 가을에, 관찰사 김육(金堉)이 그 문적을 보고 감탄하여,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하고 이에 그 법을 부연하여 더욱 상세하게 한 다음 치계(馳啓)하기를, “대동하는 법이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긴절합니다. 신이 도내 전결을 총계하여 결마다 면포(綿布) 한 필, 쌀 1두를 내게 했더니, 진상하는 공물 값과 본도에 쓰는 온갖 요역(徭役)도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어 다시 재촉하여 징수하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묘당(廟堂)에서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위에서 시행하도록 특명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생각건대, 나쁜 법을 변경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우니 후세 사왕(嗣王)은 이런 점에 감계(監戒)해야 할 것이다. 《보감》에 이르기를, “인조 17년 기묘년(1639) 겨울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청하므로 허가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 글은 비록 이와 같았으나 그때 실상은 시행되지 않았고, 숙종(肅宗) 초년에 와서야 영남에 시행되었다.
효종이 즉위하던 해 11월에 우의정 김육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왕정(王政)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백성이 편한 다음이라야 나라가 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동하는 법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으니, 또 양호(兩湖 : 호서와 호남)에 시행할 것 같으면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유익하게 함이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대저 1년 동안에 실시(應行)하는 요역은 한 결마다 면포 10여 필을 소비하게 되며, 적더라도 7, 8필 이하는 아닙니다. 그리고 뜻밖에 횡출(橫出)하는 역(役)은 또 이 한정에 들지 않았으니 백성이 어찌 고달파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한 결마다 봄에 면포 한 필과 쌀 2두를 내고 가을에 쌀 3두를 내도록 하면 총 10두가 되는데, 전세 외에 진공하는 공물 값과 본 고을에 바치는 것이 모두 그 중에 들었습니다.
한번 바친 다음에는 그 해가 다 가도록 편히 쉬게 되니, 경기에서 선혜청에 1년 동안 바치는 16두와 비교해도 훨씬 수월합니다. 양호의 전결이 모두 27만 결이니 면포가 5천 400동(同)이고 쌀이 8만 5천 석이 됩니다. 능숙한 솜씨를 지닌 자에게 맡겨 규획(規劃)해서 조치한다면 쌀과 면포에 가외 수량도 반드시 많아서 공장(公藏)과 사축(私蓄)의 위아래가 아울러 풍족할 것이니 뜻밖의 요역에도 또한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먼저 호서에 시험한 다음, 8도에 고르게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효종 원년 경인(1650) 봄에 이조판서 김집(金集)이 상소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당초 우의정 김육이 호서 지방에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했을 때 경재(卿宰)와 대각(臺閣)으로서 명류(名流)라 일컫는 자는 모두 불편하다고 말했다. 안방준(安邦俊)은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라고 배척하기까지 하므로 상(上 : 임금)이 집(集)에게 하문하자 집도 불가하다고 말했다. 그후에 집이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순방(詢訪)하여 불차탁용(不次擢用)하기를 청했는데 육(堉)이 또 불가하다 하여, 이로 인해 두 사람의 논의가 화합하지 못했다.
육은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면서 “신의 고조(高祖) 식(湜)이 기묘년의 화(禍)에 걸려든 이후로, 화살에 상처 입은 새는 굽은 나무만 보아도 놀라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지금에 또 시인(時人)들의 꺼려함을 당했으니 목숨을 구하기에도 부족한데, 어찌 감히 어진 사람이 진출하는 길을 오래도록 방해하겠습니까?” 하였다. 집도 이로 인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소장을 올리고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집의(執義) 송시열(宋時烈)이 계하기를, “김집은 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옛적에 범중엄(范仲淹)이 내침을 당하자 윤(尹)ㆍ채(蔡) 여러 사람은, ‘사우(師友)가 진퇴(進退)하는 마당에 의리상 혼자만 다르게 처신할 수 없다.’ 하여 함께 폄출(貶黜)되기를 청했습니다. 지금 집이 이미 갔는데 신의 도리상 홀로 머물러 있기는 어려우니 체직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임금은 세 사람을 타일러서 양쪽으로 화해시키고 다시 승지(承旨) 윤강(尹絳)을 보내어 집에게 머물러 있기를 권유했으나 집은 곧 시골로 돌아갔고, 육도 또한 여러번 사직해서 정승을 사면하므로 호서에 시행하려던 대동법이 드디어 중지되고 시행되지 못하였다(《보감》).
2년 8월에 김육이 다시 상언하므로 임금이 김육을 불러서 종일토록 대동법의 이해를 서로 말하고 육에게 먼저 절목(節目)을 꾸미도록 명하니 육이 물러가서 절목 한 통을 바쳤다. 상은 이에 이시방(李時昉)과 허적(許積)에게 그 일을 맡아서 급히 호서 일고(一路)에 시행하도록 명했는데, 야읍(野邑)에는 결마다 쌀을 내어서 배에 실어 상강(上江)으로 조운(漕運)하고 산읍(山邑)에는 쌀 대신 면포[柨]를 서울에 바쳤다. 어공(御供)ㆍ향사(享祀)ㆍ접빈(接賓)하는 수용(需用)으로부터 추간(芻稈 : 꼴과 곡식 줄기)ㆍ신증(薪蒸)까지 이것으로써 마련하니, 관에서는 넓히지도 좁히지도 못하고 아전도 감히 늘리지도 줄이지도 못했다. 모든 공안(貢案)에 여러해 묵은 교활한 폐단이 일조에 혁파되자 호서의 백성은 수화(水火)에서 벗어난 듯 고무(鼓舞)하지 않는 자가 없고, 전일에 불편하다고 말하던 자도 이에 도리어 입을 모아서 아름다움을 일컬었다.
수납하는 쌀의 원수(元數)는 해마다 그때 기간(起墾)된 전결 숫자에 따른다. 한전(旱田)ㆍ수전(水田)을 통해 1결마다 봄ㆍ가을에 5두씩을 거두어서 서울과 외방의 1년 용도(用度)로 하고, 본도의 1년 동안 지출[應下]할 수량을 계산해서 제감한다. 그리고 그 고을의 대ㆍ중ㆍ소ㆍ잔(殘)을 분간해서 알맞게 요량하고, 여유의 쌀은 남겨두어 각 항의 쇄마(刷馬)와 과외의 요역에 응한다. 여유 쌀이 부족한 고을에는 여유 있는 이웃 고을의 쌀을 옮겨다가 충당해주며, 경청(京廳)에서 만약 불시에 특별히 복정(卜定)하는 일이 있으면 임시로 조달하는 비용으로 한다.
1. 본도에 실지 전결이 12만 4천 746결 영(零)이니 한 결마다 쌀 10두를 거두면 8만 3천 164석이 된다. 이 안에서 서울에 상납하는 쌀이 4만 8천 280석이고, 선마(船馬) 값이 3천 962석이며, 본도에 남겨두는 쌀 3만 932석 영이다.
1. 28개의 관청에, 원 공물 및 전세조(田稅條) 공물, 호조 작지역가(戶曹作紙役價), 기인 세폐 상차목(其人歲幣上次木), 각 관청의 경주인(京主人)ㆍ방자(房子)의 품삯, 예조(禮曹)와 관상감(觀象監)의 각양 지지(各樣紙地), 공조(工曹)의 칠전(漆田)과 전칠(全漆), 조지서(造紙署) 닥밭(楮田)의 소출(所出), 장원서(掌苑署) 과원(果園)의 결실(結實), 전생서(典牲署)의 황우(黃牛), 비변사(備邊司)의 유지의(襦紙衣),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는 대ㆍ소맥(大小麥)과 생면(生麵), 각 전(殿)의 삭선(朔膳)과 월령(月令)ㆍ탄일(誕日)ㆍ동지(冬至)ㆍ정조(正朝)의 납육 진상(臘肉進上), 내의원(內醫院)이 우황(牛黃)과 약재(藥材), 삼명일(三名日)의 진상마(進上馬), 공조의 붓대, 내궁방(內弓房)의 어교(魚膠)ㆍ정근(正筋), 영접도감(迎接都監)의 경비(京婢)와 방자가(房子價)를 모두 쌀로 마련하는데, 본청(本廳)에서 1년 동안 꼭 상하(上下)할 액수를 통계한 것이 4만 6천 266석 영이다.
1. 전방병선(戰防兵船)을 신조(新造)하거나 개삭(改槊)하는 것과, 진상하는 방물로서 백면지(白綿紙)ㆍ유둔(油芚)ㆍ소호지(小好紙)ㆍ갑주(甲冑)ㆍ약환(藥丸)과 감영(監營)ㆍ병영(兵營)ㆍ수영(水營)의 영수(營需)와 각 고을 관수(官需)로서 기름ㆍ꿀ㆍ지지(紙地)와 사신(使臣) 및 감사에 대한 지공(支供)과 석전(釋奠)에 올리는 폐백(幣帛)ㆍ우포(牛脯)와 사직(社稷)ㆍ사액서원의 폐백 등 각 항 상하(上下)를 아울러 쌀로 계산하면 2만 2천 918석인데, 모두 본도에 유치한 쌀에서 제감해도 오히려 8천여 석의 쌀이 남아 있게 되니 이것으로써 과외의 별역(別役)에 조달하는 밑천으로 한다.
1. 해변과 강변 고을은 쌀을 상납하고 산중 고을은 면포를 상납해서 수운(輸運)하는 폐단을 없앤다. 쌀이면 먹을 만한 쌀을, 면포는 닷새(五升)에 35척으로 하는데, 풍흉(豊凶)을 막론하고 쌀 5두를 면포 한 필로 계산하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정한다.
1. 두ㆍ곡ㆍ승ㆍ척은 한결같이 호조에서 사용하는 규식대로 본청에서 만들며, 낙인(烙印)하여 본도에 내려보낸다. 본도에서는 또한 견양(見樣)을 만들어서 각 고을에 갈라보내고 이것을 행용(行用)하도록 한다. 호수(戶首) 등이 사사로 낙인 없는 두ㆍ곡ㆍ승ㆍ척을 사용하는 자는 적발해서 중하게 다스린다.
1. 서울에 상납하는 쌀ㆍ면포를 수운하는 뱃삯과 말삯은 수납한 쌀의 원수 안에서 계감(計減)하는데 면포는 정월 안에, 쌀은 4월 안에 상납하며, 기한 내에 미납한 수령은 해유(解由)에 모두 방애(妨礙)를 받는다.
1. 각 관청 공물로서 제향ㆍ어공과 잔폐(殘弊)해서 형편없는 관청은 당년 안에 상하(上下 : 회계함)하고, 그 밖의 각 관청은 모두 다음해 봄에 상하하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한다.
1. 각 고을에 모두 은결(隱結)이 있는데, 그 은결은 아울러 신결(新結)에 넣는다. 그리고 조만간에 발견되면 아울러 율에 의해서 중하게 따진다.
생각건대, 여기에, “봄ㆍ가을에 각각 5두를 거둔다.”는 것은 초창기의 법이었다.
가을 9월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육이 유소(遺疏)를 올려 호남의 일을 말하면서,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천거해서 그 일을 부탁했으나, 신이 만약 죽고 나면 하루 아침에 도움이 끊겨서 중도에 폐지될까 염려됩니다.”고 했는데, 그 뜻은 대개 호남에 다시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상은 비답(批答)하기를 “호남 일은 알맞은 사람을 구해서 맡겼는데 무엇을 걱정하며 무엇을 염려하는가?”고 하였다. 그후 상이 육을 생각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해서 흔들리지 않기를 김육같이 할 사람을 구하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먼저 효종이 일찍이 양호(兩湖)에 대동법을 세워서 백성의 곤란함이 펴지도록 명하여 먼저 호서에 시행되었으나, 호남에는 미처 시행되지 못했다. 상이 즉위하던 처음부터 선왕의 뜻을 반드시 이루고자 하였으나, 조정 신하는 그 불편함을 서로 말했다. 그리하여 경자년에 먼저 호남 산중 고을에 시험하여 시행하기도 하고 철폐하기도 했는데, 이때에 와서 소민(小民)은 모두 편리하게 여기고 오직 호민(豪民)에게만 불편하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고, 드디어 온 도에 두루 시행하도록 명하여 전지 1결마다 가을에 쌀 7두를 거두고 봄에 6두를 거두었다. 본도 전결(田結)이 총계 19만 855결인데 복호(復戶)한 2만 1천 84결을 제외하면 실결(實結)이 16만 9천 771결이고, 결마다 13두를 거두어서 14만 7천 134석이나 되었다. 이 중에서 경창(京倉)으로 조운(漕運)하는 것이 6만 1천 280석이고 본도에 쌓아두는 것이 8만 5천 916석인데, 이것으로써 중외의 수용에 대응하는 것이었다(《보감》).
생각건대, 여기에, “가을에 쌀 7두를 거두고 봄에 또 6두를 거둔다.”는 것은 초창기의 법이었다.
살피건대, 《비국요람(備局要覽)》에, “효종 무술년(1658)에 전라도 해변고을에 시행했고, 현종 임인년(1662)에는 김좌명(金佐明)의 상언(上言)에 의해서 전라도 산중 고을에 시행했다.” 하였는데, 《보감》에 기재된 것과 같지 않으므로 지금은 《보감》에 따른다.
현종 7년(1666) 겨울 10월에 전라도 대동미(大同米)를 봄ㆍ가을에 거두던 것을 합쳐서 봄에 거두도록 명했는데, 관찰사 홍처후(洪處厚)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보감》).
숙종 7년(1681) 6월에, 선혜청에서는 양남(兩南)에서 진공하는 사전(四殿) 삭선(朔膳)의 각종 물품값 및 감영ㆍ병영ㆍ수영과 각 고을 관수(官需)와 사객지공(使客支供)ㆍ전선(戰船)ㆍ병선 값 등의 쌀 수량을 재감하고 구별(區別)하여 녹계(錄啓 : 기록하여 啓聞함)해서 정식으로 하였는데 이는 나라 용도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호남 대동미의 원수(元數)가 총 6만 200여 석이었는데 감해진 것이 1만 5천 600여 석이고, 영남의 원수가 총 4만 석 중에 감해진 것이 9천 580여 석이었다.
숙종 9년 가을, 7월에 영돈령 민유중(閔維重)이 말하기를, “양호 대동미는 모두 12두로 정해져 있는데 유독 영남만은 13두로 정해져 있습니다. 나라를 경영하는 데에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불과한데, 지금에 비록 1두를 줄이도록 허락하더라도 경용(經用)을 지탱할 수는 있습니다.”고 하자,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살피건대, 숙종 3년에 재상(災傷)으로 견감하여 경기와 양호에 거두는 대동미에 차등이 있었고, 영남에도 재를 당한 고을에서 진상하는 호표(虎豹)의 가죽과 군기(軍器)ㆍ월과미(月課米)ㆍ기인가포(其人價布)ㆍ제용감정포(濟用監正布)는 아울러 전부 감면하도록 명했는데, 대개 이때 영남에는 대동법을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건의는 이해에 있었으나 시행된 것은 숙종 4년이었다.
살피건대, 선왕의 제도에는 두 가지의 공(貢)이 있었는데, 첫째는 민공(民貢)이고, 둘째는 후공(侯貢)이었다. 민공이란 《주례(周禮)》에 이른바 구공(九貢)으로서 농자(農者)는 구곡(九穀)을, 포자(圃者)는 초목(草木)을, 목자(牧者)는 조수(鳥獸)를, 형자(衡者)는 산물(山物)을, 우자(虞者)는 택물(澤物)을, 빈자(嬪者)는 포백(布帛)을, 공자(工者)는 그 기물(器物)을, 상고(商賈)는 그 물화(物貨)를 각각 공(貢)했는데 이것이 한 공(貢)이었다.
후공이란 우공편(禹貢篇)에 이른바 구공으로서 연주(兗州)에서는 칠(漆)과 실(絲)을, 청수(靑州)에서는 소금과 갈포[絺]를, 서주(徐州)에서는 하적(夏翟 : 오색 깃을 갖춘 꿩)을, 양주(楊州)에서는 구곤(璆琨 : 아름다운 옥)을, 형주(荊州)에서는 우모(羽毛 : 새의 깃과 짐승의 털)를, 예주(豫州)에서는 칠과 모시[枲]를, 양주(梁州)에서는 구(璆)와 철(鐵)을, 옹주(雍주州)에서는 구림(球琳 : 아름다운 옥)을 각각 공했는데 이것도 한 공이었다.
한 나라 이후의 공법은 전하는 것이 없다. 지금은 오직 당ㆍ송ㆍ원ㆍ명 때 여러 주(州)의 공안서 사책에 기재되어 있어, 무릇 천지간에 진기한 물건은 공을 바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부세에 대한 폐단은 세대마다 논의된 바가 있으나, 토공(土貢)에 대한 폐단은 사신(史臣)의 논의한 바가 별로 없고 간신(諫臣)도 의논한 바가 없다. 대개 공하는 여러 가지 물건의 대소ㆍ경중ㆍ장단ㆍ후박은 아울러 법령(法令)이 있었다. 현령은 민호에 거두고 감사는 군ㆍ현에 거두며, 서울 관청에서는 여러 도에서 거두는데, 그 헌납하고 영수하는 즈음에 법을 상고해서 그 방식에 맞게 하면 서리와 하례가 감히 그 사이에서 농간하지 못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기강이 한결 같아서 습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편하게 여겨서, 토공하는 일로써 별다른 민막(民瘼)은 생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일을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연경(燕京)에 세폐(歲幣)를 바쳐온 지가 400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예부(禮部)의 서리가 폐물(幣物)이 나쁘다는 이유로 탈을 잡아 물리쳤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무리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목동(牧童)이 차기에도 부끄러워할 작은 칼과 구걸하는 손으로 가지기 부끄러워할 나쁜 부채 따위 두어 가지뿐이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물건과 기이한 보화를 저들인들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니건만 법식이 한결같이 구비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감히 요구하지 못한 것인데, 이것이 토공에 폐단이 사라지게 된 까닭이다. 외국에 바치는 것에 이미 이와 같이 폐단이 없어졌으니 군ㆍ현에서 공하는 것은 더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토공하는 법도 반드시 포학한 정사는 아니었으나 특히 법령이 엄하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아서 서리가 퇴짜를 놓는 권한을 잡고, 호족이 방납하는 이(利)를 함부로 하여 아름다운 물건도 물리침을 당하니, 방납하는 값은 드디어 점점 많아지기에 이르렀고 안팎이 화응(和應)하여 억울함을 펼 수 없었다. 어진 신하와 현철한 정승은 옆에 있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습속이 이미 고질로 굳어져서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니, 이런 때를 당해서 그 법을 보존하면서 그 폐단만 없애는 것은 비록 성인이라도 능히 하지 못할 바가 있다. 그런데 그 형세를 따라서 그 뿌리를 뽑는 데에는 오직 슬기 있는 자가 먼저 그 기틀을 살필 것이니 이것이 토공을 없애고 대동을 설시한 것이다.
대동이란 방납하는 형세로 인해 방납하는 뿌리를 뽑아서 방민(坊民)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 법은 비록 잘 변했으나 기강을 진작시키고 호귀를 억제하는 것이니 능히 못할 바가 있었다. 또 토공하는 법은 군ㆍ현에서는 민호에 수납하고 감사는 여러 군ㆍ현의 공을 받아 도합해서 호조 바치면 호조에서는 받아서 여러 관청에 갈라주는 것이니, 그 폐단이 이에 이르지는 않는다.
오직 감사가 그 하솔(下率)들을 금단해서 제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하도록 하면 토공하는 법을 비록 남겨두더라도 가하다. 또 나라를 잘 경영하는 자는 반드시 명목을 바르게 해야 하는데, 실상은 비록 같더라도 그 명목은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세(田稅)는 10분의 1로 하는 것을 극한으로 하는데, 10분의 1보다 많으면 명목이 못 되지만 10분의 1에 미치지 못하면 그 명목은 정당하다. 우리나라 전세는 100분의 1도 되지 않으며, 비록 대동을 보태더라도 40분의 1세에 불과하니(남방에는 30분의 1세이다) 무엇이 덕(德)에 부끄러워서 감히 명목하지 못하겠는가? 바로 전세를 증가해서 결마다 20두로 하면 명목이 이에 정해질 것이다. 전묘(田畝)를 헤아려서 부세하는 것을 성인이 나무랐으니 어찌 반드시 그대로 따르겠는가?
지금 《대전(大典)》을 상고하니, “전지 1결마다 전세가 4두이고 대동이 12두이다.”고 하였다. 세는 가볍고 부는 무거워서 군자(君子)가 병통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법을 고치던 당초에 다 잘하지 못함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대동법을 시행하던 당초에 나라에서 백성에게 약속하기를, “여러 관청에서 요구하던 것은 한결같이 정지한다. 이 쌀만 한 번 바치면 그 해가 다 가도록 편하게 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여러 관청에서 요구하는 것이 날로 더하고 달로 많아졌으며, 그 중에는 저류미(儲留米)가 있다. 저류미에는 회감(會減)하는 것이 있고 바로 구걸(求乞)하는 것이 있는데 군ㆍ현에서도 이것을 빙자해서 민고(民庫)를 설치하고 전세와 대동미 외에 또 전결로써 돈과 곡식을 불법으로 거두는데 그 수량이 댓갑절이나 된다. 그리하여 회감한다는 것은 관청 낭탁(囊槖)으로 돌리고, 회감하지 않는 것은 아전이 제 굴혈(窟穴)로 차지한다. 조정에서는 눈여겨보면서도 구원하지 못하고 수령은 제 마음대로 양을 늘려 내므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서 견디어내지 못한다.
만약 선조ㆍ인조 적의 어진 신하와 어진 정승이 직접 이런 일을 보게 된다면 그 입술이 타고 발을 구르며 상한 듯 앓는 듯 걱정함이 당시보다 반드시 열 갑절이나 더 했을 것이다. 아아! 토공에 대한 폐단은 서울 관청에서 생겼기 때문에 수령이 원망하므로 묘당에서 듣고 이에 개혁하는 날이 있으련만, 민고(民庫)의 폐단은 하읍(下邑)에서 생겼으므로 수령은 이롭게 여기고 묘당에서는 무심하게 여겨서 장차 벗어날 기한이 없으니 이 점은 또 생민이 깊이 슬퍼하는 바이다.
《속대전(續大典)》에, “상정법은 대동의 규례를 모방해서 매결에 쌀 15두를 거두어(원래부터 거두는 쌀이 12두이고, 별도로 거두는 쌀이 3두인데 합해서 15두임. 旱田에는 小米 즉, 좁쌀을 거둔다) 그 영(營)과 고을의 1년 수용으로 하는데, 진상가미(進上價米 : 500석)는 선혜청에 바치고 공물가미(貢物價米 : 즉 별도로 거두는 쌀로서 해마다 本曹에서 작정한 수량대로 상납하는데, 결수가 많으면 남는 쌀을 남겨서 저축하고 결수가 축이 나면 남는 쌀로써 그 부족한 액수에 충당하는 것이다)는 본조에 바치며 그 남은 쌀은 또 저치(儲置)한다.”고 하였다.
《보감》에는, “해서 어사(海西御史)가 본도에 별도로 거두는 쌀을 제감하는 일로서 계문하자(해서에는 당초에 毛文龍 장군을 수응하기 위해서 1결마다 특별히 5두를 거두어서 들여보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하고 있다) 묘당에서 계하기를, ‘이것은 공물 값이고, 원래부터 과외의 거둠이 아니었으니 본도에 물어서 처리하기를 청합니다.’ 했으나 상이 특명으로 파하였다.”고 하였다(숙종 9년조).
《비국요람》에는, “광해(光海) 때에 모문룡이 가도(椵島)에 진수(鎭戍)한 후 삼남(三南)에서 군량을 수운하는데 전지 1결마다 쌀 1두 5승을 거두면서 모량(毛糧)이라 일렀다. 길이 멀다는 이유로 양서(兩西 : 관서와 해서)의 공가미(貢價米)와 서로 바꿨는데 이것이 별수미(別收米)의 시초였다. 선혜청에서 호조에 잘라보내어[劃送] 원 공물 값을 지출하는 액수로 했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별수미라는 것은 서도 백성의 억울한 것이었다 처음에 모량이라고 하고 삼남 쌀과 바꿔서 바치던 것이었으니, 이는 배〔船〕는 옮겨갔으나 자취는 남아 있고[船移刻存] 새〔鳥〕는 지나갔으나 소리만은 남아 있는 격이다. 지금 삼남 대동미는 모두 12두를 넘지 않는데 유독 황해 한도만이 아직도 모량 3두를 더 바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만약 정조(井耡)하는 법이 마침내 시행되는 날이 있으면 이런 병통은 말끔히 없어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바삐 정파(停罷)해서 삼남과 같은 예로 함이 마땅하다. 그렇게도 못한다면, ‘칙수미(勅需米) 3두라’ 함이 오히려 가하다. 하물며 숙종이 이미 정파하도록 명하여 사책에 기록되었는데, 아직도 그 쌀을 징수함이 가하겠는가?
《속대전》에, “수전ㆍ한전을 통틀어 1결마다 쌀 12두를 거두는데(강원도 영동에는 쌀 2두를 더했고, 量田하지 않은 10고을에는 4두를 더했다) 산중 고을은 포(柨 : 즉 면포)로 만든다. 쌀은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쌀이고, 포는 정 닷새로서 길이는 35척, 너비는 7촌을 표준으로 한다.”고 하였다(麻布도 같다).
《비국요람》에는, “호서에는 산 밑 13개 고을은 면포를 바치고(靑山ㆍ永春 등) 야지(野地) 6개 고을은 쌀과 면포를 절반씩 바친다(淸州ㆍ木川 등). 호남에는 산 밑 21개 고을은 돈과 면포를 절반씩 바치고(南原ㆍ光州 등) 2개 고을은 돈과 마포를 절반씩 바친다(雲峯과 長水). 영남에는 산 밑 45개 고을은 돈과 면포를 절반씩 바치고(안동ㆍ상주 등) 4개 고을은 돈과 마포를 절반씩 바친다(한양ㆍ산청 등). 관동의 산 밑 7개 고을(淮陽ㆍ金城 등)과 영동의 9개 고을(양양ㆍ삼척 등)은 아울러 마포를 상납한다. 해서에는 진상가미는 선혜청에 바치고, 공물가미는 호조에 바치는데(별도로 거두는 쌀), 산 밑 4개 고을(谷山ㆍ遂安 등)과 장산(長山) 이북의 16개 고을(黃州ㆍ安岳 등)은 돈으로써 상납한다.” 하였다.
또 “쌀로 면포를 마련하는 법은 호서에는 쌀 6두이고(한 필로 마련하는 것이다) 호남에 쌀 8두이며, 영남에는 쌀 7두이고 관동에는 쌀 5두로 한다(마포 한 필로 하는 것이다). 무릇 상정하는 예는 쌀 1석 값이 돈 420이고 면포 한 필 값은 돈 200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조운하는 법은 매우 엉성하다. 배(船) 틈을 회(灰)로 때우지 않아서 스며드는 물이 샘물처럼 나오고, 나무 못이 힘이 없어 썩으면 부러지기 쉬우며, 거적 돛이 둔해서 급한 경우에도 수습하기 어렵고, 바다에 숨은 암초와 가로막은 돌을 깎아 없애지 않아서 한 번이라도 역풍을 만나면 실은 것이 반드시 물에 젖는다.
게다가 법령이 엄하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아서 사공과 선리가 훔치는 쌀이 반을 넘기 때문에 그 배를 파선시키는데, 세입(歲入) 10여만 석에서 수만석은 항상 물에 빠뜨림을 당한다. 물에서 건진 쌀을 강제로 배정하고 다른 쌀을 대신 징수하는데 백성이 그 해독을 당하며, 서울에는 용도가 모자라서 나라가 그 해를 받는다. 결국 정조하는 법을 시행하는 날이 오면 오직 경기ㆍ황해ㆍ양호의 쌀만 경사에 실어오고 영남 쌀은 머물러서 조운하지 말며, 공물 주인에게 외수(外受)하도록 해도(지금 西關에서 좁쌀을 본도에 유치했다가 공물 주인에게 除給하는 것을 외수라고 이른다) 또한 마땅할 것이다. 배 척수가 이미 줄어서 물에 젖어 썩는 수량도 또한 줄어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라 용도에 도움이 있을 것이며, 선가(船價)도 아울러 주므로(給) 요판(料販)하는 이가 또한 많을 것이니 공물 주인에게도 이익이 있게 된다.
《속대전》에, “선혜청에서 서울 각 관청에 공물 값으로 지출(應下)할 액수를 계산하여 각 도에 통지해서 본청에서 수납하도록 한 다음, 등급을 나누어 공물 주인에게 내준다.”고 하였다(돈ㆍ쌀ㆍ면포 중에 귀한 쪽을 좇아서 계산(上下)하는 것이다).
또 “봄ㆍ가을 두 동으로 나눠서 쌀을 거두는데, 삼남과 강원도는 다음해 봄에 죄다 모아서 상납하고, 선가와 말삯은 원수 안에서 계산 제감하며, 경기에서는 봄ㆍ가을에 상납하고 선가와 말삯을 보태서 징수한다.” 하였다.
또 “전세와 대동미를 혹 면포로 만들어서 상납할 때에 수령이 돈을 징수했다가 면포와 바꿔서 바친 자는 탐오율(貪汚律)로써 논죄하며 종신토록 금고(禁錮)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경기에는 세율이 본디 가벼웠으므로 선가와 말삯을 별도로 징수했고, 전세는 원수가 본디 적기 때문에 선가와 말삯을 별도로 징수하였다. 그러나 이런 법제는 모두 얼룩져서 고르지 못했다. 만약 정조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저절로 통일되어서 억지로 미봉하는 자취가 없을 것이다.
《속대전》에, “각 영ㆍ읍에 1년 동안 지출할 액수를 계산하여 많고 적음에 따라서 획급(劃給 : 잘라서 줌)한다(강원도에는 매필에 6두씩을 본 고을에 남겨서 공비로 하고, 그밖에 또영의 수용을 제한 다음 나머지를 아울러 상납하도록 했다). 그 나머지 쌀은 각 고을에 쌓아두었다가 갑작스러운 공용에 대비한다.” 하였다(경기에는 칙사가 왕래할 때에 소용되는 인부와 말에 대한 비용을 民結에 따라 돌려가며 내는데, 관에서 그 값을 쌀로 준다).
또 “대동 저치미(大同儲置米)와 전병선치미(戰兵船置米)는 절대로 조적(糶糴)하지 못한다. 범한 자는 8년을 도형(徒刑)하고, 또 7년을 금고한다.” 하였다.
생각건대, 소위 저치미란 모두 아전들이 포흠(逋欠)한 것이었다. 어찌한 되 한 약(龠)인들 저치된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는데 이것이 사실상의 형편이었다.
《속대전》에, “산릉(山陵)의 역사(役事) 및 조사(詔使)가 왕래하는 외에는 일체 요역으로써 다시는 백성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생각건대,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먹는 것을 버리고 군사를 버리더라도 신(信)은 끝내 버리지 않고자 한 것은, 신이 없으면 백성에게 영(令)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른바 민고(民庫)라는 것은 모두 대동법을 시행한 이후에 생긴 것이니, 8도 여러 고을에 그 민고에 대한 절목(節目)을 모두 올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삼공과 육경이 정부에 모여서 삭제해야 할 것은 삭제하고(그 고을에서 시작된 것), 금지해야 할 것은 금지한다(서울 관청에서 시작된 것). 그리고 생각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저치미(儲置米) 중에서 회감하도록 허가하고 이에 정부가 회합 변통하여 재작(裁酌)한 다음, 여러 도에 시행할 절목을 만들어서 여러 도에 반포한다. 그리고 이 영이 내리기 전에 있었던 것은 다 석방해서 죄를 다스리지 않고, 이 영을 내린 후에 저지른 자는 특히 중한 율을 적용하면 백성이 거의 신용할 것이다.
《속대전》에, “양서의 공물 값 쌀은 본조에서 주관해서 내주고, 북도의 공물 값으로 거두는 마포는 그 관청에서 각각 내준다.” 하였다.
살피건대, 패서(浿西 : 평안도) 한 도가, 모든 전부(田賦)에 내는 것은 죄다 조사(詔使)를 수응(酬應)하는 데에 들어간다. 그러나 전세가 몇 말, 대동이 몇 말이라는 상정을 두어 여러 도와 같은 예로 함이 마땅하다. 그런 다음에 몇 섬을 칙사수용(勅使需用)으로 하고 몇 섬은 공적 수용으로 한다는 것을 법 조문으로 갖춤이 당연하다. 지금 서울 관청에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전장(典章)에 나타난 법례마저 모두 없으니 어찌 한 시대의 왕이 다스림을 마련하는 방법이겠는가? 정조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매우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현재 시행하고 있는 조목이라도 법전에 나타냄이 마땅하다.
또 “정전에 쌀ㆍ콩 따위 여러 가지 물건을 부과해서 그 영문(營門)과 고을의 공적 수용으로 하는데, 안변부(安邊府)에는 정전ㆍ속전을 통해서 부역을 고르게 낸다.” 하였다.
《비국요람》에는, “현종 계묘년(1663)에, 북관에도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했는데, 관찰사 민정중(閔鼎重)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하였다.
생각건대, 북관에 시행했다는 상정법도 《법전》에는 조금도 나타난 것이 없으니 보충해서 넣지 않을 수 없다.
[주D-001]오례(五禮) : 제사(祭祀 : 길)ㆍ상장(喪葬 : 흉)ㆍ빈객(賓客 : 빈)ㆍㆍ관례(冠禮 : 가)에 대한 다섯 가지 예.
[주D-002]공안(貢案) :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문서.
[주D-003]삼가(三家) : 춘추(春秋) 시대 노(魯)의 대부(大夫)로서 중손(仲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을 일컫는 말. 이들이 노나라의 정사를 제 마음대로 했다.
[주D-004]척리(戚里) : 원래 중국 장안에 있던 마을인데, 한대에 후비(后妃)의 친정이 그 마을에 많이 있었으므로 임금의 외척을 척리라 일컫게 되었다.
[주D-005]불차탁용(不次擢用) :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뽑아올려서 관직에 임용함.
[주D-006]해유(解由) : 수령이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었을 때 관리하던 관물(官物)을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호조(戶曹)에 보고해서 책임을 벗던 일.
[주D-007]배〔船〕는 옮겨 …… 남아 있고[船移刻存] : 배를 타고 가던 사람이 칼을 물에 빠뜨리고 곧 빠뜨린 쪽 뱃전에다 표를 새겨두었는데, 배는 이미 옮겨갔으므로 칼 빠뜨린 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고사. 즉 사물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 모르는 것을 이른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