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 柳氏의 시조 : 柳車達》
한국(韓國) 성씨의 역사는 우리 가문(家門)의 역사이자 한국인(韓國人)의 역사다. 조상들의 거쳐온 모습과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을 자손에 전 함이다.
<류씨의본관>은 문화(文化)·진주(晉州)·전주(全州)·서산(瑞山)·풍산(豊山)·선산(善山)·고흥(高興) 등이 7본이다. 류씨는 문화류씨를 대종(大宗)으로 하는 동원분파(同源分派)로 알려져 있다.
<류씨시조>고려 초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 류차달(柳車達) 을 시조로 한다. 고려 창업 당시 왕건(王建)을 도와 벼슬이 대승(大丞)에 올랐다.
1990년 경제기획 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50만 9077명, 12만 887가구로 총 274개 성가운데 제19위였다.
문화(文化) 류씨는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을 시조로 한다. 본관은 류차달의 8대손으로 고려 고종 때 문신인 류경柳璥이 별장 김준과 함께 최씨무단 정권을 무너뜨린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이 되고,
그 공으로 그의 고향인 유주(儒州)를 문화현으로 승격 후손들이 문화를 관향으로 삼았다.
문화 류씨의 분파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활약한 인물로
류차달 11세·13세·14세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14개파로 나 누어진다.
7세조 류공권(柳公權)에게는 언침(彦沈)· 택(澤) 두 아들이 있었다,
<류씨 파조 14개파 이름>
3산2주→豊山(풍산)柳 : 派祖 諱 節 (대승공 14세) 戶長
瑞山(서산)柳 : “ ” 成澗 ( ” 10 “) 瑞寧府院君
善山(선산)柳 : “ ” 元庇 ( “ ” ) 善山 “
全州(전주)柳 : “ ” 濕 ( “ 13 ”) 掌令. 完山伯
晋州(진주)柳 : “ ” 仁庇 ( “ 10 ”) 密直使. 晋山君
甲 派 7 →侍郞公(시랑공)派 : 派祖 諱 溏 ( 대승공11 ”)
文肅公(문숙공)派 : “ ” 思訥 ( “ 14 ”)
夏亭公(하정공)派 : “ ” 寬 ( “ 13 ”) 文簡公. 右議政
掌令公(장령공)派 : “ ” 羲 ( “ 13 ”) 司憲府掌令
崑山君(곤산군)派 : “ ” 益貞 ( “ 13 ”) 崑山府院君. 領議政
文僖公(문희공)派 : “ ” 淑 ( “ 16 ”)
文平君(문평군)派 : “ ” 沼 ( “ 13 ”) 典書
乙 派 8 → 祗侯公(지후공)派 : “ ” 仁修 ( “ 11 ”)
左相公(좌상공)派 : “ ” 曼殊 ( “ 13 ”) 朝鮮開國功臣
檢漢城公(검한성공)派 : “ ” 元顯 ( “ 13 ”)
貞肅公(정숙공)派 : “ ” 廷顯 ( “ 13 ”) 領議政
判事公(판사공)派 : “ ” 廷懋 ( “ 13 ”)
水使公(수사공)派 : “ ” 滋 ( “ 13 ”)
府尹公(부윤공)派 : “ ” 信 ( “ 13 ”)
忠景公(충경공)派 : “ ” 亮 ( “ 14 ”) 朝鮮開國功臣. 領議
※甲.乙派 고려조 문간공 公權(공권) 7세조의 장자彦沈(언침) 갑파. 차자澤(택) 을파
<歷史的 人物>문화류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최씨·김씨·이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이다.
문화유씨는 고려, 조선조에 걸쳐 상신(相臣) 9명, 대제학 4명, 문과 급제자 134명, 무과급제자 279명, 생원·진사합격자 542명, 음사(蔭仕) 728명이 였다.
유명인물로 조선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예문관대제학·우의정을 지낸 류량(柳亮), 대마도 정벌의 총책임관 영의정 류정현(柳廷顯), 청백리 류관(柳寬),
사육신의 한사람인 류성원(柳誠源),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鼻祖)인 류형원(柳馨遠),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실학의 선구자인 류수원(柳壽垣),
북학파의 학자로 발해사 연구에 업적을 남긴 류득공(柳得恭), 독립운동가인 류동열(柳東說)로 역사적 인물이 있다.
한민족 성씨의 역사(韓民族 姓氏의 歷史)"중에서
우리나라 류씨(柳氏)의 유래에 대해 문헌에 따르면, 류씨(柳氏)는 황제 헌원씨(軒轅氏: 3황 오제의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선조라 함)의 후예로 전한한다.
<姒辛甲>황제후손 사신갑(姒辛甲)이 기자조선 때 요수(遼水)를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평양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서 은거하면서,
<王祖明 일토一土>를 따서 왕씨(王氏)로 변성하였으며,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고치고, 단군왕조에서 치민장(治民長)이 되어 문장과 도덕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그의 25세손 수긍(受兢)은 기자조선 말엽에 사사(士師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재판관)로
예악(禮樂)과 문물의 의관법도(儀官法道)를 제정하여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긍兢 삼갈긍 ; 삼가다, 두려워하다, 굳다, 굳세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 평양을 버리고 남하하여 마한(馬韓)에 은둔하였는데,
당시<일토초가자왕(一土草家者王)>이라는 동요가 떠돌자, 이를 두려워한 기준이 일토산 아래에 살던 왕씨(王氏)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몽王蒙>이때 수긍의 34세손 왕몽(王蒙)이 아들 8형제중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피신하여 살았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성(姓)을 세번 바꿔야 후손들이 번성한다고 계시하자, 왕(王)자 의 변형인 성을 전(田), 신(申)으로 고쳤다가,
다시 차(車)로 바꾸고 왕몽은 자신의 이름은 무일(無一)로 아들 왕림(王琳)은 신을(神乙)로 고쳤다.
<車無一>무일의 33세손 승색(承穡)이 신라 애장왕 때 좌상(左相)이 되었다.
서기 809년(헌강왕1) 병부령(兵部令 병부으뜸)으로 있던 왕의 숙부 언승(彦昇)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헌강왕이 되자, 애장왕의 원수를 갚기위해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헌강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아래 묵방동에 은신하였다.
차승색(承穡)은 조모의 성씨인 양씨(楊氏)를 모방하여 류(柳)로 고치고, 이름을 색(穡) 으로 아들은 숙(叔)으로 개명했다.
<柳車達>류색(柳穡)의 6세손 류해(柳海)가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사재를 털어 수레 1천량을 제작, 군량과 함께 보급하여 고려개국에 공을 세우고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올랐으며, 태조 왕건은 이차위달(以車爲達:차로써 목적을 달성함)의 뜻으로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차달(車達)의 아들 효금(孝金)에게 류씨를 계승하고, 본관을 유주(儒州)로 하였으나 지명의 변천으로, 유주가 문화(文化)로 개칭됨에 따라 문화(文化)로 하게 되었다.
북에서 성역화된 류릉의 전경
《文化柳 掌令公派 宗派門中族譜》
掌 令 公 派 장령공파 :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초계면
◇ 派祖 : 羲(희:장령공13世)→孟智(맹지:법성공회덕현감)→枝茂(지무)
羲 숨 희;내쉬는 숨, 복희(伏羲), 왕희지(王羲之)의 약칭
→依(의)→光漢(광한:참봉공17世)→允壽(윤수18)→榮春(영춘19)
→鐵柱(철주:병사공 17世)
→世溫(세온:임호공 연일현감 20 ) →慶門(경문 21)
→晦根(회근: 백강공 22世)
→ 敷(부) : 松岳公派 (송악공파 23世)
→ 徹(철) : 小栢公派 (소백공파 23世)
→ 微(미) : 嘉山公派 (가산공파 23世)
→ 敞(창) : 雲村公派 (운촌공파 23世)
派祖 -羲(희) 字. 欽甫 號. 南亭 관직. 司憲府 掌令 종4품→현 감사원 과장급
포은 정몽주 선생에 수학하고 조선 태조 5년 병자년 초계군 성산 남하.
栢山書院을 개설 후학 양성 문장 덕행 추중(推重) 사헌부 장령 제수.
추중 : 높이 받들어 중요하게 여기다
◇ 大 丞 公 (柳 車 達) - 1 世
2 世 長子 孝 全 → 延安 車氏
次子 孝 金 → 文化 柳氏 - 高麗 太祖 王建王 柳씨 賜姓
凡柳 → 文化. 三山 ( 豊山 瑞山 善山). 二州 (全州 晋州). 高興. 靈光 (8本貫)
◇ 백산서원 栢山書院
1692년(숙종 1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백강공(柳晦根) 송학공(柳敷)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위패를 모셨다.
대원군 서원철패로 패봉하였다. 현재는 종중에서 복원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송운각을 별체로 건립하여 10월 묘사를 대하고 있다.
卜 居 詩 복 거 시 ※卜 居 - 살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嶠 南 風 俗 最 尨 淳 (교남풍속최방순) 순박한 우리풍속 영남에서 제일이네
得 處 吾 身 自 保 珍 (득처오신자보진) 내 스스로 잡은 터전 귀하게 보전하리
雨 露 乾 坤 閑 對 案 (우로건곤한대안) 나라은총 온누리에 조용히 내리셔서
江 山 面 面 總 和 春 (강산면면총화춘) 우리 강산 곳곳마다 봄바람 가득 하리리
◈ 항렬도(行列圖)
본 항렬도는 고종 원년(1864)에 간행된 갑자보 당시에 전 종중의 결의로 제정된 항렬로 그후 간행된 병인보(1926년 간)에도 역시 그대로 준수하였다.
오행상생으로 배열하여 통운을 마춘것이 타성씨와 다른 특징이다. 항렬은 종중의 규약인만큼 후손된자 마땅히 선세의 유훈을 쫒아 대대로 준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 문화류의 기록자료을 모아 편성했습니다. 함께 선조에 대한 공부로 생각 하고
올립니다. 백산 류태욱 31세손 쌍책 010-3885-4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