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 도보 대행군 기행록(4)
4. 백의종군길에서 새긴 역사의 앙금(송산교 – 평택역 32km)
8월 10일(월), 오전에 흐리다가 오후에 비 내리다. 아침 7시에 숙소 부근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으로 조반을 들고 7시 반에 식당 건너편에 있는 병점역에서 당일참가자들과 합류, 출발지점인 송산교로 향하였다. 당일참가자는 6명, 총 19명이 3일째 멤버다. 행로는 송산교에서 한신대학 거쳐 오산 시내를 관통하여 평택시 진위면 지나 평택역에 이르는 삼남로 30여km의 평탄한 코스다.
걷기 중 신호 대기에 자주 걸린다. 오산 시내 걷기의 한 장면
중부지방에 머물고 있던 장마전선은 태풍 장미의 영향으로 소강상태, 비가 내리지 않아 걷기에 좋으나 습도가 높은 탓인지 몹시 무덥다. 오산의 물향기 수목원 입구를 지나며 코로나‧장마‧부동산 등으로 침체된 우리네 삶에 향기가 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시내 중심부를 지나노라니 3.1운동만세시위지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고 한 블록 더 가니 ‘밀머리’라는 표지가 새겨진 돌비가 우뚝한데 밀머리가 무슨 뜻인지 아는 이가 없다. 지역마다 나름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
오전 11시 반, 오산 시계를 벗어나 평택시 진위면에 접어든다. 한 시간여 걸어 진위면소재지, 면사무소 옆 3년 전에도 들렀던 식당이 점심장소다. 메뉴는 김치찌개, 더위에 지쳐 찬물을 여러 컵 마시고 나서야 밥에 손이 간다. 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 주차장 끝 정자에 설치된 백의종군 스탬프를 찾아 날인 후 잠시 정담, 첫날부터 참가자 일행과는 별도로 같은 코스를 따라 걷는 김명중 씨가 자기소개를 한다. 천안이 집이라서 숙박과 조석의 식사는 자택, 점심은 일행과 함께 하는 방식으로 가능한 지역까지 동행하겠다고 말하니 모두들 흔쾌히 동의하며 박수로 환영한다. 열외자도 껴안는 온정이 흐뭇하네.
진위면사무소 한쪽에 위치한 스탬프 설치장소에서 환담하는 모습
13시 30분에 오후 걷기, 면소재지를 벗어나 삼남로에 접어드니 평택지역을 가로지르는 진위천에 이른다. 평택까지는 13km라는 이정표의 안내, 차량들이 질주하는 도로를 따라 평택방향의 삼남로에 들어서려는 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긴 언덕길을 두 개나 지나서 칠원소공원에서 아이스크림 휴게, 인조가 지나다가 옥관자를 붙였다는 고사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멘트를 수백 포 지원하여 공원으로 가꾸었다는 역사가 서린 옛 정부숙사 자리에서 잠시 환담을 나누기도. 태풍 장미의 영향인 듯, 비는 오후 내내 가늘게 내리다가 막바지에 세차게 몰아친다. 피할 겨를도 없이 흠뻑 젖는 수밖에. 빗속을 뚫고 목적지인 평택역에 이르니 오후 5시 반, 32km를 부지런히 걸었다. 숙소는 역에서 5분 거리, 여장을 풀고 6시 반부터 저녁식사 등 하루 일정이 빠듯하다. 참가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평안히 쉬십시오.
* 오산에서 평택으로 걷는 도중의 길목에 원균의 묘를 안내하는 표지가 있다. 3년 전 백의종군 길 걸을 때 이를 목도하며 호기심이 발동, 묘한 갈등과 반목으로 서로를 불신한 충무공과 원균은 수백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서로를 탓할까. 충무공의 흔적은 곳곳이 성역화 되었는데 원균의 묘소는 어떤 모습일까. 점심시간에 원균 묘소를 답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집행부에 개진하였다. 선상규 회장과 최고령인 김웅종 대원이 동행하기로 합의, 오후 3시 경 지원차량을 이용하여 걷는 길목에서 1km쯤 들어가 있는 묘소로 향하였다. 원주 원 씨 문중묘역 인근의 묘소는 외관상 충무공 묘소 못지않게 반듯한 편, 가까이서 살피니 관리주체가 문중이 아니라 평택시라서 의외였다. 묘역의 기록 요약.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원균 장군
원균은 흔히 이순신을 모함하여 귀양을 보낸 간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균은 임진왜란 당시 누구 못지않은 용맹을 자랑한 장군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구축해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에서 연전연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1597년 육군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로 싸움에 내몰린 끝에 칠천량에서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에 녹훈되고 원릉군에 봉해졌습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원균에 대해서, 이제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원균 장군 묘
조선 중기의 무신 원균(元均, 1540~1597)의 묘이다. 현재의 묘는 시신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어 유품을 묻어 조성한 묘이다.’
묘역 옆에는 원균기념관 건물도 있는데 월요일인 탓인지 문이 잠겨 있다.
주변 경관이 수려한 원균 묘
이와 관련 아들과 주고받은 내용, ‘원균 표지판은 원 씨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것 같은데, 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과오들이 여러 자료로 밝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도 원균 묘를 원 씨 후손들이 관리하는 것으로 짐작하였는데 현장에 와서 확인하니 평택시에서 관리하는 중! 평택이 원 씨 집성촌이어서 시와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판단은 각자의 몫.
나의 견해, 원균의 공과는 별개로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충무공은 원균과 앙숙관계를 지속하고 있을까. 그때는 서로가 원만하지 못했지만 이제 구원(舊怨)에 얽매이지 않는 승자의 아량을 베푸시지 않을까. 곳곳에 얽혀 있는 역사의 앙금도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첫댓글 비도 내리는데 고생들이 많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밀머리마을 유래는 이렇습니다.
*밀머리(마을) :
아주 오래 전에는 오산천에 제방이 존재하지 않아 장마가 지면 오산천의 물이 범람하기 일쑤였다. 장마로 불어난 오산천의 물은 원2~3동 쪽으로 밀려들어갔는데, 이때 물과 함께 밀려와 생긴 마을이 바로 ‘밀머리 마을’이다.
물이 밀려 들어오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밀머리 마을’은 현재 한주아파트, 오산한국병원, 메가박스 극장, 이마트 등이 있는 번화가로 변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