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성당 죽어서도 형제같이 나란히 묻혀
대구시 동구 신천 3동 850-3 (053)745-3850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카), 이양등(베드로) 3위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각각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집과 전답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천주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들의 애환은 오늘날 후손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하물며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임을 기억한다면 순례자들은 하염없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울산 장대벌에서 한날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에 의해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구덩이 속에 묻혀 있다가 1907년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됐다. 그 후 1932년 5월 말 월배동 감천리의 천주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10월 19일 비로소 대구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김해에서 태어난 허 야고보는 본래 중류 계급으로 생활이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846년 입교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866년 병인박해 초기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재물에 어두운 그들에게 돈을 주고 간신히 풀려났다. 식솔을 데리고 길을 떠난 그는 언양(彦陽) 산골에 잠시 머물다 울산에 있는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으로 피난해 여기에서 이 베드로, 김 루카를 만나 순교의 길을 예비했다.
충청도 공주 태생인 김 루카는 어려서 입교해 신앙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다. 박해로 충청도 일대가 소란해지자 길을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의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금 울산의 죽령 교우촌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 죽령 대재 마을의 회장이었던 이 베드로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박해를 피해 멀리 경상도로 내려와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울산 대재 공소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꿀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며 전교에 힘쓰던 그는 다른 두 사람을 만난 후 또다시 박해를 피해 먼 길을 떠났다. 여러 날 끝에 경주 산내면 단석산에 있는 한 석굴(범굴)을 발견하고 이를 천혜의 피난처로 삼아 세 가족은 모두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나라로부터 더욱 혹독한 체포령이 내려져 마침내 1868년 이들은 포졸들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이들은 즉시 영장(營將)의 심문을 받았다. 이들 3인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경주 진영에서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의 80리 길은 죽음의 행진이었다. 큰 칼을 목에 차고 돌과 자갈, 가시밭길을 걸어 이틀 만에 도착한 울산 장대에서 그들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목을 떨구었다. 신앙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고향을 떠나 어린 자식과 힘없는 부녀자들을 이끌고 수십 수백 리 길을 쫓겨 다닌 이들은 오히려 순교함으로써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 터덜거리던 현세의 고달픈 삶은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써 얻은 영원한 생명으로 보답을 받게 되었다.
<중략> 성당 내부 제대와 감실에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