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시기 이고(李翱, 772-841)의 『복성서(復性書)』와 조동종 유엄선사(745-828)의 가르침
2022년 4월 13일
당나라 시기 이고(李翱, 772-841)는 젊었을 때는 한유(韓愈, 768-824)와 아주 가깝게 지내고 한유 집안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또 한유, 유종원(柳宗元, 773-819), 유우석(劉禹錫, 772-842) 몇몇이 모여 유학을 부흥시키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고는 유학에서 말하는 도(道)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48살(820)에 약산사(藥山寺)에서 조동종(曹洞宗) 개창자의 한 사람이었던 유엄선사(唯儼, 「藥山惟儼禪師塔銘并序」︰745-828)를 만나 본심(本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였고 나중에 다시 금장선사(金藏, 馬祖의 후손)을 만나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성서(復性書)』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고가 유엄선사를 찾아가 뵐 때 상황이 그럴듯하여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고가 유엄선사에게 고맙다고 지어 올린 시 2수가 그때 상황을 더욱 잘 나타냈습니다.
“유엄선사는 수련하여 오근(五根)이 청정하셔서 겉모습조차 학(鶴)처럼 맑고 깨끗하시고, 조용한 솔밭에 있는 약산사 절간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두 상자에 따라 참선 공부를 하셨습니다.제가 찾아와서 도(道)를 여쭈었는데 다른 가르침은 없으시고 ‘구름은 푸른 하늘에서 온갖 모습을 짓지만 맑고 깨끗한 물은 감로수 물병 안에 있습니다.’고 일러주셨습니다.”
“煉得身形似鶴形,千株松下兩函經。我來相問無餘說,雲在靑天水在瓶。”
“유엄선사는 조용한 약산사를 골라 머무시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좋아하십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도 저 같은 손님을 배웅하거나 또 맞이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옛날에는 약산(藥山)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셔서,
밝은 달빛이 구름 사이로 비추는 것을 보시고 깨달으셔서 크게 웃으셨다고 합니다.”
“選得幽居愜野情,終年無送亦無迎。有時直上孤峰頂,月下披雲笑一聲。”
특별히 “雲在靑天水在瓶” 구절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뜻은 간단하며 이해하기 쉽지만 깨닫기는 스님 또는 일반인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구름은 소위 말하는 식(識)이 세상(靑天)에서 윤회하는 것이고 물(水)은 부처의 불심(佛心, 本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마음에서 갖가지 그림을 그리고 행동을 지어서 윤회하더라도, 맑고 깨끗한 본심은 나 자신에게 있으며 몸의 오근(五根)이 감로수처럼 청정할 때가 되면 본심을 깨닫는다는 말뜻입니다.
유엄선사의 수양공부 수준에 관하여 이고가 학(鶴)처럼 맑고 깨끗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오근(五根) 또는 육근(六根)이 청정(淸淨)하다는 뜻으로 아주 높은 평가입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오근청정위(五根淸淨位) 또는 오품제자위(五品弟子位)에 올랐다고 평가받았던 스님은 정토종 개창자 혜원(慧遠, 334-416) 스님이나 천태종 종사 지자대사(智者大師, 智顗, 538-597) 모두 임종을 앞두고 52위 가운데 십주위(十住位)에도 들어가시지 못하였다고 자술하였습니다. 따라서 학처럼 오근(五根) 또는 육근(六根)이 청정하다고 높이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당나라 문인들의 희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고는 이런 불교 내용을 이해하고 『중용』 “天命之謂性”을 인용하여 천성(天性)을 회복하는 것이 유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나타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성을 회복하는 수양공부 방법이겠지요. 불교는 쉽게 말하여 전식성지(轉識成智)하여 지(智)가 진여(眞如)와 평등평등(平等平等)한 것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고가 복(復)을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데 좋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가에서도 불교처럼 오근청정위 또는 오품제자위에 해당하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공부하여야 할까요? 안연이 잘못을 알면 고치고 고친 뒤에는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어떨까요? 다른 평론가들도 말하듯이 이고는 불교 이야기를 직접 인용하지 않아 숨겼으나 내용은 불교입니다. 유엄선사가 육조선사의 후손으로서 조동종 개창자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간단히 말하면 이고가 선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뒤에 금나라 이순보(李純甫, 1177-1223)가 이고를 모방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에 근거하여 북송과 남송 시기 성리학을 비판하였답니다.
이고가 유엄선사께 올린 시를 마음속에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고의 시에서 말하였듯이 “식(識)이 허공에서 각가지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경지가 있겠지요.(靑天莫起浮雲)” 그렇다고 이백(李白, 701-762)처럼 “하늘에 올라가서 손을 휘저어 구름을 없애려고 들어도 좋을까요?(直上青天揮浮雲)” 그냥 무지하고 용감한 꿈이겠지요. 또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를 걱정하고 풀어보려고 애썼던 사람이 이고입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에 한국 중앙정치와 지방정치에서 일어나는 뉴스를 보고 요즘에는 더욱 그런데요. 공자가 갈 곳이 없어 거백옥(蘧伯玉)의 집에서 몇 년 동안 얹혀살았고 나중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난 날을 회상하며 “차라리 덜 벌어서 아껴 쓰더라도 옳지 않은 돈과 권력을 바라지 않는다.(『論語、述而』︰飯疏食飲水,曲肱而枕之,樂亦在其中矣。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정치 혐오 때문에 조선 중기에 조광조 선생이 사화에 휘말린 이후에는 많은 지식인이 낙향하고 중앙정치에 무관심하였답니다. 이런 정치에 대한 혐오와 좌절 현상은 한국사회 발전에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선 정치를 거울삼아 혐오하고 절망하지 이전에 개혁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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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宋高僧傳』,卷十七,唐、「朗州、藥山、唯儼傳」
당나라 원화 연간(당 憲宗, 806-820)에 이고(李翺, 772-841)는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이 되어 이경검(李景儉(字寬中, 號致用)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경검이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이고를 추천하였고 이경검이 술에 취하여 공경대신을 욕하였기에 지방 자사(刺史)로 좌천되자 이고도 연좌되어 원화 15년(820)에 낭주자사로 좌천되었습니다. 이고는 약산사(藥山寺, 현재 湖南省 津市市 藥山鎭 棠華鄉 藥山村)에 거주하는 유엄선사(惟儼禪師, 「藥山惟儼禪師塔銘并序」︰745-828)가 불법에 조예가 깊다는 소문을 듣고 한가할 때 찾아뵙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처음에 찾아갔을 때 유엄선사는 불경을 손에 쥐고 이고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곁에서 시자가 “태수께서 여기에 오셨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고는 그릇이 작고 성격이 급하여 크게 소리 내서 “얼굴을 직접 보니까 듣던 소문보다 못하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유엄선사가 “고(翺)야!”라고 부르니까 이고가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유엄선사가 “태수는 어찌 남들이 떠드는 소문을 믿고 자신의 눈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타이르자 이고가 두 손을 모아 인사드렸습니다.
이고가 “도(道)가 무엇입니까?”라고 여쭙자, 유엄선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시 깨끗한 물을 담은 감로수 물병을 가리키며 “구름이 푸른 하늘에서 온갖 모습을 짓지만 맑은 물은 이 병 안에 있습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이고는 이때 깜깜하게 어두웠던 방안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고 굳게 얼은 얼음이 별안간 녹는 것 처럼 도(道)에 관한 의문이 풀렸습니다. 잠시 뒤에 이고는 시 2수를 지어 자신을 깨우쳐주신 유엄선사께 고마움을 나타냈습니다.
“유엄선사는 수련하여 오근(五根)이 청정하셔서 겉모습조차 학(鶴)처럼 맑고 깨끗하시고, 조용한 솔밭에 있는 약산사 절간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두 상자에 따라 참선 공부를 하셨습니다.제가 찾아와서 도(道)를 여쭈었는데 다른 가르침은 없으시고 ‘구름은 푸른 하늘에서 온갖 모습을 짓지만 맑고 깨끗한 물은 감로수 물병 안에 있습니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유엄선사는 조용한 약산사를 골라 머무시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좋아하십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도 저 같은 손님을 배웅하거나 또 맞이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옛날에는 약산(藥山)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셔서,
밝은 달빛이 구름 사이로 비추는 것을 보시고 깨달으셔서 크게 웃으셨다고 합니다.”
이고가 젊었을 때 한유(韓愈, 768-824), 유종원(柳宗元, 773-819), 유우석(劉禹錫, 772-842) 몇몇과 글 짓는 모임을 조직하고 서로 맹서하였습니다. “측천무후와 안사 난리를 겪은 끝에 우리는 황제가 요순임금이 되도록 하는 학술(道)를 회복하기 위하여 함부로 도가(道家)에 따라 유학을 해석하지도 않고 유가를 버리고 불교에 빠져서 중국(夏) 문화의 정체성을 어지럽히지 않겠습니다. 만약에 삐뚤어진 마음에서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나와서 이 맹서를 어기면 세상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수명도 다 누리지 못하고 유학의 성인들 신명께서 바로잡고 죽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고가 유엄선사를 만나고 본심(本心)을 깨우쳤습니다. 나중에는 호부상서와 양주자사를 지내다가 산남동도 절도사가 되어 당주(唐州, 현재 河南省泌陽)에 있는 자옥산(紫玉山)에서 불법을 전수하던 금장(金藏, 馬祖의 후손)선사를 만나 여쭙고 도(道)에 관한 개념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복성서(復性書)』 상하 2편을 지었습니다. ……한유와 유종원이 『복성서』를 보더니 한탄하며 “우리 유학은 시들었구나! 이고조차 불교로 도망갔다네!”라고 말하였답니다.
『宋高僧傳』,卷十七,唐、「朗州、藥山、唯儼傳」︰
釋唯儼(「藥山惟儼禪師塔銘并序」︰745-828),俗姓寒,絳縣人也。童□慷愷敏俊逸群,年十七從南康事湖陽西山慧照禪師。大歷八年納戒於衡岳寺希澡律師所,乃曰:“大丈夫當離法自淨,焉能屑屑事細行於布巾邪?”遂謁石頭禪師密證心法。住藥山焉,一夜明月陟彼崔嵬,大笑一聲,聲應灃陽東九十許里。其夜灃陽人皆聞其聲,盡云是東家。明辰展轉尋問,迭互推尋,直至藥山。徒眾云︰“昨夜和尙山頂大笑是歟?”自茲振譽遐邇喧然。
元和中(15年,820),李翺(772-841)爲考功員外郎,與李景儉(字寬中,號致用,貞元十五年,進士)相善。儉除諫議薦翺自代,及儉獲譴,翺乃坐此出爲朗州刺史。翺閒來謁儼,遂成警悟。又初見儼執經卷不顧,侍者白曰︰“太守在此。”翺性褊急,乃倡言曰︰“見面不似聞名。”儼乃呼翺,應唯,曰︰“太守何貴耳賤目?”翺拱手謝之,問曰︰“何謂道邪?”儼指天,指淨瓶,曰︰“雲在靑天水在瓶。”翺於時暗室已明,凝冰頓泮。尋有偈云︰
“煉得身形似鶴形,千株松下兩函經。我來相問無餘說,雲在靑天水在瓶。”
又偈︰
“選得幽居愜野情,終年無送亦無迎。有時直上孤峰頂,月下披雲笑一聲。”
初,翺與韓愈(768-824)、柳宗元(773-819)、劉禹錫(772-842)爲文會之交,自相與述古,言法六藉,爲文黜浮華,尙理致,言爲文者韓柳劉焉。吏部常論仲尼既沒,諸子異端,故荀孟復之,楊墨之流,洗然遺落。殆周隋之世,王道弗興,故『文中子』有作,應在乎諸子左右。唐興房,魏既亡,失道尙華,至有武后之弊、安史之殘,吾約二三子同致君復堯舜之道,不可放淸言,而廢儒縱梵書而猾夏。敢有邪心歸釋氏者,有渝此盟,無享人爵,無永天年,先聖明神,是糾是殛。無何翺邂逅於儼,頓了本心。末由戶部尙書、襄州刺史,充山南東道節度使,復遇紫玉禪翁(『宋高僧傳』,卷十,當爲道通的弟子金藏),且增明道趣,著『復性書』上下二篇。大抵謂本性明白,爲六情玷污。迷而不返,今牽復之。猶地雷之復,見天地心矣。即內教之返本還源也。其書露而且隱,蓋而又彰。其文則象系『中庸』,隱而不援釋教,其理則從眞舍妄,彰而乃顯自心,弗事言陳,唯萌意許也。韓柳覽之,嘆曰︰“吾道萎遲,翺且逃矣。”儼陶煉難化,護法功多。回是子之心,拔山扛鼎,猶或云易。又相國崔群(772-832,字敦詩,號養浩,貝州武城人)、常侍溫造(766-835)相繼問道,儼能開發道意。以大和二年(828)將欲終告眾,曰︰“法堂即頹矣。”皆不喻旨,率人以長木而枝柱之。儼撫掌大笑云,都未曉吾意,合掌而寂,春秋七十云。
系曰︰嘗覽李文公『復性』二篇,明佛理不引佛書,援證而徵取『易』、『禮』而止,可謂外柔順而內剛逆也。故曰︰得象而忘言矣。經云︰“治世語言,皆成正法者,李公有焉。”儼公一笑聲徹遐鄉,雖未勞目連遠尋而易例有諸,隆墀永嘆遠壑必盈,道感如然不知其然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