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建芳(1861-1939),「居然亭記」 번역
2023년 8월 24일
아래 원문은 보성군 거연정기 사진을 보고 타자 치고 번역하였습니다. 중간에 모르는 행서체 글자는 하곡학연구원 전임 회장 하정숙 선생의 도움을 받고 또 이동균 목사님이 보내주신 해서체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여전히 모르는 글자는 □ 표시로 남겼습니다. 또 열흘 전에 수원에 사시는 조영희 선생께서 거연정기 번역문을 찾으시기에 타자와 번역에 착수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건방,「거연정기(居然亭記)」︰
옛날에 우리 집안 형님 영재 선생(李建昌,1852-1898)이 상소문 언론에 연루되어 호남지역 보성군에 유배 갔습니다.(1892년) 보성군 지식인들 다수가 선생을 찾아와서 배웠습니다. 이듬해(1893년) 영재 선생이 특혜를 입어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길 이병일(李秉馹,1876-1928) 집안은 대대로 학문으로 지방에서 유명하였고 이병일이 나이는 어지리만 자질이 뛰어나고 열심히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기에 앞으로 도달할 수준을 예측하기 쉽지 않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내가 많이 들어 귀에 익숙하나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이 답답하였습니다. 얼마 뒤에(1893년) 선생은 관직 (1893년 按覈使) 에 나갔으나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저도 병이 나서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마음속에서는 가끔 이병일의 공부가 끝내 어떤 모습인지를 멀리서 생각해보았으며 그를 오래도록 잊지 않았습니다.
과연(果然, 내가 그를 그리워하였던 대로) 어느 날 최복(衰服)을 입고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만나려는 사람이 바로 이병일의 아들 이정래(李晶來,1899-1989)입니다. 그래서 이병일이 벌써 세상을 떠나(1928년) 초상을 마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 안지 수십 년이 되었으나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어찌 말하겠습니까? 여기에 더하여 아들 이정래가 엎드려 부탁하여 말하길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는 세상에 나갈 생각을 버리시고 오경과 역사 서적(史書)을 읽으시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셨습니다. 서적 수천 권을 쌓아놓고 낮에는 책을 읊으시고 저녁에는 동네 들녘을 산보하셨습니다. 동네에 석벽(石壁)이 있는데 아래 큰 개천이 흐르는 것을 내려다보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속이 시원하셨답니다. 석벽 위에 정자를 짓고 ‘거연(居然)’이라고 편액을 달았습니다. 아마도 주희의 시(詩) ‘초가집을 짓고 공부하였더니 문득(居然 : 문득, 어느덧 저절로 편안하게) 내가 자연(泉石)과 하나가 되었네.’라는 ‘거연’으로 정자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정자를 다 지었는데 아버지께서 병환이 나셨고 아프신 가운데 정자 기록을 반드시 이건방(蘭谷 李建芳, 1861-1939) 선생께 부탁하라고 이르셨기에 편액 널판지를 갖고 와서 선생님께서 써주시길 번거롭게 부탁합니다.”
내가 그(이병일)의 말을 듣고 감격하고 또 효자(이정래)를 위로하려는 생각에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이병일이 자주 갔던 언덕은 그의 재산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이 언덕에 올라가 가깝고 먼 사방을 둘러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래서 정자를 짓고 즐겼던 것이 저녁때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그가 그렇게 하였던 까닭을 압니다. 이병일이 열심히 공부하던 젊은 날에 마음속 품은 뜻은 세상을 경영하는 것인데 어찌 작은 언덕에 앉아서 농부와 어부들에게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것에 마음 편안하게 여겼겠습니까? 세월과 세상이 바뀌면서 세상을 경영하겠다는 의기는 지치고 세상 걱정하는 것도 한가해졌으나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생각(擬議揣摩)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는데 언덕을 편안한 곳이라고 여겼겠습니까? 그래서 바위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마음을 달랬으니 바위와 물의 냄새가 몸에 배었을 테니 비로소 이 언덕이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희가 나보다 먼저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에 더욱 공감하였을 것입니다. 정자의 이름을 생각해보면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병일을 잘 알았기에 이병일도 반드시 나에게 글을 지으라고 일렀으니 다른 누가 글을 짓겠습니까?
아들 이정래가 들려준 말의 순서를 정리하여 정자의 기(記)를 써주며 정자 위에 걸어놓으면 뒤에 정자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나와 이병일이 서로 잘 알았다는 것은 만났는지 못 만났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사년(1929) 사월 초파일 난곡거사 이건방 지음
李建芳(1861-1939),「居然亭記」︰
曩余宗兄寧齋先生(李建昌,1852-1898)坐言事,謫湖南之寶城郡,士之賢者,多從先生遊。其明年,先生宥還,爲余言李君長汝(李秉馹,1876-1928),世以文學著於鄉,而長汝年少質美,且劬學不懈,其所詣未易量也。余耳之熟,而願以未即見爲悵。未幾,先生卽世,而世且日亂,余亦病,廢敎門息交,而獨往往心中遙念長汝進修竟何狀,久而未能忘也。
日有果然以衰服來者叩門求見,即君之子晶來(李晶來,1899-1989)君也。於是知君之已沒而且過期矣。相知累十年而不獲一相見,其爲悵可勝道?即既而晶來君跪而請曰︰“先父自世亂絕意進取,惟以經史自娛,庋書累千卷,日諷詠其中,晚而逍遙郊埛,間有石壁,俯臨大川,登而四顧,意甚樂之,乃於其上搆一亭,扁之曰居然。蓋以晦菴先生(朱熹,1130-1200)詩︰‘一日菲棟成,居然我泉石(「武夷精舍雜詠」︰一日茅棟成,居然我泉石)’之語以名之也。亭纔成,而吾父病,病猶言亭之記,必屬諸李蘭谷某,是以□以煩執事。”余於是感其言而且有以慰孝子之思,則其何忍辭!且夫長汝之於斯邱,在家中物耳,計其自少至老,登矚□遠之日不止一再,而其爲亭而樂之者,乃在晚莫何也。吾有以知其然也,蓋當長汝讀書攻苦之日,其胸中之志,必在於四方,則宜區區懷安於一邱之間,與田父漁翁問其趨哉?及夫時移事變,氣倦意閑,其平日擬議揣摩之念,無少□見,則其亦將安所之哉?於是焉,惟取夫一石一泉之佳,而寄其娛樂,宜其煙穿,則始覺斯邱之爲吾有也。然則晦庵之先得我心尤有感。考之亭之名無以易也。然則余之所以知長汝,長汝之所以必求余文,又誰得以議之哉?
次其說,以遺晶來君,俾揭諸亭上,使後之登斯亭者,知余與長汝相知之際,固不在於見不見也。
己巳浴佛前日,蘭谷居士李建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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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李建昌(1852-1898)
李建芳(1861-1939)
李秉馹(1876-1928)
李晶來(1899-1989)
朱熹(1130-1200),「武夷精舍雜詠」︰
琴書四十年,幾作山中客。
一日茅棟成,居然我泉石。
서적을 연구하고 또 때로는 악기를 타면서 40년을 보냈더니,
이제는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사는 사람이 되었네.
어느 날 초가집을 짓고나니,
문득 내 자신이 샘물과 바위처럼 자연과 하나가 되었구나.
첫댓글 이경룡 원장님.. 거연정기 번역하시느라고 너무도 수고하셨습니다.
과연 전문가의 번역은 다릅니다.
원문보다 번역본이 더 훌륭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덕을 봅니다.
감사드립니다.
하곡학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모든 분들의 건강하심을 기원합니다.
이동균 목사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주 연락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거연정기를 일찍 번역하지 못하여 더욱 죄송합니다.
마침 수원에 사시는 조영희 선생께서 번역을 재촉하시기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글을 참고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이병일 선생과 그 아드님 이정래 선생 두 분께서는 훌륭하신 학자이며 정치가였습니다.
보성군 학자들의 높은 학술이 이건창 선생에게도 전수되고 서로 교류하였습니다.
모든 분들은 조선 말기에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셨던 애국자이며 경세가이십니다.
보성군 군민들께서 거연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도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이경룡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