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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서애, 왕극장 3명의 1512년 6월 사명산 설두사(四明山 雪竇寺) 유람
2021년 6월 7일
왕양명이 41살 여름 6월 하순에 사명산 설두사에 유람을 갔습니다. 목적은 사명산에서 묵으면서 정좌하고 강학할 수 있는 터를 물색하는 것이었고 용계(龍溪)에 잡았습니다.
왕양명이 평소에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41살 여름에 사명산에 올라갈 때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잘 올라갔습니다. 아마도 아팠던 병이 많이 낫고 건강을 회복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6명이 출발하였고 맨 나중에는 왕양명, 서애, 왕극장 3명만이 설두사에 올라가서 구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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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 출발 7명, 완주 3명
왕양명, 徐愛, 王琥(字世瑞), 許璋(字半圭), 蔡宗兗(字希顏), 朱節(字守中), 汪克章(字叔憲)
서애(徐愛), 「설두산 유람 및 용계 여행기(遊雪竇因得龍溪諸山記)」,『橫山遺集』,卷下︰
왕양명 선생은 오래전부터 설두산(雪竇山, 해발 800m)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정덕 계유년(1512) 2월에 나(徐愛)는 왕양명 선생을 따라 북경에서 절강성 소흥부에 돌아왔고 여름 6월에 여요현에 있는 용천산(龍泉山, 靈緒山 또는 嶼山이라고 부르며 해발 200m)에 올라가서 청풍정(淸風亭)에서 피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로 왕호(王琥), 허장(許璋), 채종연(蔡宗兗), 주절(朱節) 4명이 찾아왔고 설두산 유람을 실행하자고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첫날 : 왕양명, 徐愛, 王琥(字世瑞), 許璋(字半圭), 蔡宗兗(字希顏), 朱節(字守中) 6명
약속대로 여요현에 있는 도교의 각박관(恪薄觀)에 모여서 성촉계(星燭溪) 골짜기로 들어가서 영낙사(永樂寺, 餘姚縣 丈亭鎮)에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골짜기 물이 맑고 절벽이 높으며 커다란 소나무들이 있어서 공기도 시원하였습니다. 가는 동안에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설두산에 가는 길을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은 배를 타고 가기를 바라고【영락사에서 배를 타고 여요강(餘姚江)을 거슬러 상우현(上虞縣)에 내리고 걸어서 사명산으로 가서 다시 설두산에 올라가기를 바랐습니다.】 채종연마저 탈이 나서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달밤에 밀물을 타고 빠르게 여요현 통명 갑문(通明壩)에 왔습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 : 왕양명, 徐愛, 王琥(字世瑞), 朱節(字守中) 4명
밤에 배에서 자고 일어나니 이튿날(둘째 날) 배가 여요강(餘姚江)을 지나 조아강(曹娥江)을 거슬러 상우현(上虞縣)에 왔고 허장(許璋)과 채종연(蔡宗兗) 2명은 유람을 그만두고 집으로 갔습니다. 상우현에서 설두산 가는 길을 물으니 상우현에서 산(山)을 담당하는 관원(虞人)이 양액령(羊厄嶺, 다른 이름 羊額嶺)으로 가라고 일러주었으나 실제로는 가지 말라고 막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밤새 배를 타고 상우현에서 여요강을 따라 내려와서 금사 갑문(金沙壩)과 황죽 갑문(黃竹壩)을 지나 새벽(셋째 날)에 사명산(四明山)으로 가는 사명향(四明鄕)에 도착하였습니다.(錢明 선생은 金沙와 黃竹이 고갯길(嶺)이라고 보고 사명향까지 걸어왔다고 말합니다. 通明이 갑문이고 배를 타고 온 것을 보면 아마도 갑문인 것 같습니다. 더 찾아봐야지요.)
셋째 날 : 왕양명, 徐愛, 王琥(字世瑞), 朱節(字守中), 汪克章(字叔憲) 5명
사명향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넓고 기름진 평야가 있는데 올빼미과에 속하는 독이 있다는 짐새들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후한시기에 상우령(上虞令)을 사직하고 수련하여 부부 모두 신선이 되었다는 유강(劉綱, 字伯鸞)과 부인 번씨(樊氏)가 수양 공부하던 잔원동(潺湲洞) 옛터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 4명은 왕양명 선생 집안과 오랫동안 가깝고 나(徐愛)와 진사 동년 왕극장(王克章, 餘姚縣 四明鄉 梁弄鎭)을 찾아갔습니다. 왕극장이 안내하여 잔원동(潺湲洞)에 있는 도교 사원 백수궁(白水宮)에 가서 폭포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구경하였습니다. 백수궁과 폭포는 삼태산(三台山 : 屏風, 石屋, 雲根)으로 둘러싸였고 골짜기가 깊어 아주 조용하며 정말로 유강(劉綱) 같은 사람이 은거하며 수양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다시 양액령(羊厄嶺)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달계(妲溪) 골짜기로 곧바로 갔습니다. 왕양명 선생은 “달계에는 우리의 먼 집안이 살고 있으니 가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왕호(王琥)는 되돌아가고 싶었으나 갈 수 없었고 왕극장이 유람에 동행하였습니다. 큰 고개를 넘고 하관(下館)을 거쳐 달계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달계 입구의 서쪽 골짜기에는 뾰족한 산봉우리 셋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가운데 산봉우리 아래에 돌탑처럼 보이는 것을 자세히 보니 돌기둥(石筍)이었습니다. 남쪽에는 선교동(仙橋洞)이 있기에 오랫동안 서서 구경하였습니다. 점심밥은 왕양명 선생의 집안이 새로 지은 집에서 먹었습니다. 왕양명 선생의 집안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녁에는 달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서 왕양명 선생의 먼 조상이 사셨던 옛집까지 갔습니다.(다시 내려와서 새로 지은 집에 묵었습니다.)
넷째 날 : 왕양명, 徐愛, 王琥(字世瑞), 朱節(字守中), 汪克章(字叔憲) 5명
달계 골짜기에는 바위와 시냇물이 부딪히며 달려오듯이 급하게 흐르고 산들이 빙 둘러싸고 돌아나가는데 마치 봉황과 용이 똬리를 틀고 맞서 있는 모습이 다정한 짝처럼 보였습니다. 먼 조상이 사셨던 옛집 앞에는 골짜기 둘이 모여서 동북쪽으로 꺾여서 상위(湘渭)로 흘러나갔습니다. 삼태산 가운데 석옥산(石屋山)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골짜기 밖에 멀리 있는 산봉우리에 붉은빛(芒角赤色)이 떠돌기에 물어보았더니 삼룡담(三龍潭)이라고 하며 서쪽 골짜기(西溪)의 물골(源)이라고 합니다. 동쪽 골짜기(東溪)의 물골은 아주 멀어서 먼저 설두산(雪竇山)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가보자고 말하였습니다. 석옥산에서 내려오면서 달계 골짜기에서 시냇물에 발을 씻고 바위에 누워 쉬면서 각자 시를 짓고 마음껏 즐겼습니다.(識樂) 왕극장이 감탄하여 말하길 “이렇게 깊은 골짜기가 있다니 신기합니다! 달계는 세상에서도 시냇물이 맑고 조용한 곳입니다.” 왕양명 선생도 달계는 사람의 누린내와 냄새(腥味濕氣)가 나지 않는 골짜기이기에 경치가 좋다고 여겼습니다. 왕호(王琥)는 달계(妲溪 : 妲은 은나라 나쁜 임금 紂의 왕비 이름) 이름이 비루하니까 문계(文溪)라고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왕양명 선생은 말하길 “그렇습니다. 차라리 용계(龍溪)라고 이름을 짓지요.” 여러 사람이 모두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삼룡담(三龍潭)에서 물이 흘러오니까 용계라고 이름 지은 것이며 이때부터 용계라고 불렀습니다.
다섯째 날 : 용계 가는 길에는 왕양명, 徐愛, 王琥(字世瑞), 朱節(字守中), 汪克章(字叔憲) 5명이고 용담 가는 길에는 왕양명, 徐愛 2명
새로 지은 집에서 자고 이튿날에는 왕극장과 왕호 2명이 돌에 부딪혀서 뼈 근육이 뭉쳤는데〔석당(石撞)은 산골짜기에서 나는 민물조개이며 石榜 또는 石獷이라고 부르는데 혹시 민물조개를 잘못 먹고 배탈이 났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호는 억지로 일행과 함께 용담(龍潭)에 구경 갔습니다. 짚신을 신고 10리를 걸어가니까 많이 지쳐서 짜증을 내더니 점심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기침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초가집에 가서 쉬고 용담(龍潭)까지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나(徐愛) 혼자 “반드시 끝까지 가겠다.”고 고집하고 지팡이를 짚고 왕양명 선생을 따라갔습니다. 길은 갈수록 위험하여 겁을 내면서 용담 셋 가운데 아래에 있는 하담(下潭)에 도착하였습니다. 담(潭)은 둥글고 넓은데 마치 시루(甑)를 걸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동쪽 절벽에 있는 돌계단으로 내려가서 샘물을 손으로 떠서 마셔보니 이빨이 빠질 만큼 차가웠고 서쪽 절벽에는 폭포 물이 떨어지고 덜 녹은 눈도 있는데 추운 기운이 몸까지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담(潭)에 잠깐 있다가 얼른 올라왔습니다. 위쪽에 있는 2개 담(潭)은 깎아지른 골짜기에 있기에 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담(潭) 셋을 합하여 삼담(三潭)이라고 부릅니다. 가운데 있는 중담(中潭)이 가장 멋있습니다. 중담에는 옆으로 긴 돌이 걸려 있고 폭포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바위에 파인 동굴이 비어서 폭포 소리를 증폭하듯이 메아리쳤습니다. 폭포는 마치 도교에서 말하는 경궁(瓊宮)에 내린 주렴 같았으며 폭포 밖에서 듣기에도 큰 음악 소리처럼 들렸고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다시 바위 틈새를 따라 넝쿨을 붙잡고 올라가 나무다리를 건너 2리쯤 가니까 돌계단이 망가졌고 발 닿던 돌계단 절반도 이끼에 덮여 더 갈 수 없었습니다. 절벽 쪽에 가까이 가보니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삼담(上潭)은 얼마나 깊은지를 모를 만큼 아주 깊었습니다. 나는 다리가 떨려서 올라가지 못하는데 왕양명 선생은 편안히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셨습니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여 “3년만 수양 공부하면 정신이 튼튼하여 더 높은 곳에도 날아가듯이 갈 수 있을 텐데.”라고 시를 짓고 자신을 탓하였습니다. 나는 바위 그늘에서 한참 쉬었더니 선생님은 맨 위쪽 상담에서 날 듯이 내려오셨습니다. 위험하면서도 부러웠습니다. 이때부터 용계(龍溪) 골짜기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날 : 왕양명, 徐愛, 汪克章(字叔憲) 3명
이튿날(새로 지은 집에서 잤음)에는 왕양명 선생의 조상 옛집을 지나니 서북쪽에 있는 면계(面溪) 골짜기가 나왔는데 땅이 조금 평평하였습니다. 내려와서 왕양명 선생의 먼 집안사람들과 상의하여 왕양명 선생이 앞으로 공부하고 강학할 장소를 여기에 결정하였습니다. 이때 왕양명 선생은 더위에 지쳤고 주절(朱節)이 발목을 다쳤기에 사람들이 다시 떠들며 설두산(雪竇山, 四明山의 최고봉 해발 800m) 유람을 막았으나 왕양명 선생 혼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주절이 화를 내며 말하길 “뜨거운 날씨를 무릅쓰고 험난한 곳을 가는 것은 즐겁지 않고, 유람 가는 것만 고집하는 것도 공부가 아닙니다.” 왕양명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길 “즐거움도 알고 공부하는 것도 잘 안다면 어느 것인들 즐거움이 아니고 공부가 아니겠느냐?”(왕양명은 설두산에 가겠다는 뜻) 그런데 나도 몹시 지치고 기운이 떨어져서 주절(朱節)과 왕호(王琥) 두 사람이 돌아가는 것을 억지로 말릴 수 없었기에 돌아가도록 놔두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왕극장 2명이 왕양명 선생을 모시고 설두산 유람을 갔습니다. 서쪽 골짜기(西溪)로 올라가서 석림(石林)과 태평(太平) 등 유적지를 살펴보지 않고 동쪽 골짜기(東溪)를 건너 고개로 올라가서 10리를 가니 고갯마루에 이르렀고 고갯마루를 지나니 다시 평평한 경작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농사짓느라고 가득하였습니다. 내려와서 왕양명 선생 집안사람의 새집에서 묵었습니다. 집 앞의 골짜기는 돌아서 북쪽 절벽 쪽으로 흘러나갔고 폭포 아래에는 위백양(魏伯陽)이 『주역 참동계(周易參同契)』을 지었다는 선고동(仙姑洞)이 있습니다.
일곱째 날 : 왕양명, 徐愛, 汪克章(字叔憲) 3명
이튿날에는 주마강(走馬岡) 언덕으로 갔습니다. 점심은 공석(孔石)에 있는 심씨(沈氏) 집에서 먹었습니다. 공석에서 15리를 가니 서쪽에 있는 사명동(四明洞)에 이르렀습니다.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하늘이 조금 보인다는 석창(石窓, 四窓)이라는 곳이며 월(越) 지역의 무(鄮)씨 집안이 여기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바위에는 큰 글씨로 ‘사명산심(四明山心 : 사명산의 중심, 鄞州區 章水鎮 字岩下村에 있으며 杖錫寺 남쪽 1리에 있음)’이라고 옛날(漢나라 시기에 새겼다고 전해오지만 고증에 따르면 송나라 시기에 새김.)에 새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길을 잃었으나 끝까지 가보니 한채암(韓蔡巖)에 이르렀습니다. 한채암 서쪽의 뾰족한 바위는 조어대(釣魚臺 : 桐廬縣 富春山 기슭에 있음)라고 하며 동한 초기에 여기에 은거하였다는 엄광(嚴光) 또는 당나라 한유(韓愈) 조카의 아들 한상자(韓湘子) 두 사람의 전설이 전해온다는데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샘물이 흘러나오는 돌계단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가니 개비자나무(石榧, 三尖杉)가 덮여있습니다. 앉아서 발을 씻었는데 떠나기 싫었습니다. 일어나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니 골짜기 바위 색깔이 모두 붉어서 협곡 절벽이 모두 붉은색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주 즐겁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나무꾼이 우리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는데 “너희는 집오리들처럼 떼를 지어 바쁘게 걸어가는데 내가 외톨이로 혼자 다니는 것만 못하네요. 너희는 쇠도 녹일 뜨거운 불 속을 걸어가는데 나는 안개 끼고 하늘 가까이에 있네요.” 우리가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났습니다. 저녁에 골짜기를 건너가니 큰 나무가 많고 고개도 아주 높았습니다. 비 내린 뒤에 샘물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교룡(蛟龍)이 소리 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가파른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무너진 큰 기와집(展)이 보였고 곁에는 장석사(杖錫寺)라고 글자가 쓰여있습니다. 봉우리에서 내려온 골짜기가 장석사를 둥글게 감고 내려가는데 마치 성(城)을 둘러싼 해자(垓子)와 같았고 사방을 내려다보니 아주 위험한 절벽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올라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도적들이 쳐들어와서 죽이기에 스님들이 모두 도망갔고 최근에 여요현 출신 문강(文江) 스님이 와서 주지를 맡고 있었습니다. 문강 스님이 우리를 절에 묵도록 하였습니다. 밤에 바람이 불고 이슬이 맺힐 만큼 추워서 깊이 잠들지 못하였습니다.
여덟째 날 : 왕양명, 徐愛, 汪克章(字叔憲) 3명
새벽에 일어나서 남쪽으로 내려가려는데 길이 없어서 무작정 무성한 풀을 헤치고 가는데 이슬도 많고 뱀에 물릴 위험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문강 스님이 지주령(蜘蛛嶺)을 지나 서부암(徐鳧巖, 해발 476m)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점심때 돌다리(石橋)에 도착하였는데 동쪽에는 대선유(大仙岰 : 산줄기가 둥글게 굽어서 감싼 곳)에 누각과 흰 눈에 덮인 소나무들이 보이는데 설두사(雪竇寺)라고 합니다. 목동이 우리를 안내하여 돌다리를 건너 돌계단 수백 개를 내려가서 은담(隱潭)을 구경하였습니다. 은담에 있는 용이 아주 신령스러워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이 곧 나타난다고 합니다. 은담 위에는 산봉우리 셋이 나란히 있는데 일찍이 강남지역 문장가들이 와서 보았으나 산봉우리 셋의 높고 기묘함을 노래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운데 있는 중봉(中峯)의 북쪽에는 폭포가 있고 남쪽에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6-7리를 가는 동안에 산은 크고 두툼한 것이 넓은 평지와 같았습니다. 산세는 남쪽으로 기울었고 오직 북쪽에만 높은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쳐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서 다리 위에 있는 정자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말하길 절간이 보이지 않았으면 황량한 들판이나 다름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설두사(雪竇寺) 절이 있습니다. 수많은 산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에 많이 구경하여 지쳤고 소문만큼 마음에 들지 않아 덤덤한 기분으로 절에 들어가서 잠깐 쉬면서 차 몇 잔을 마신 뒤에 나와서 두루 구경하였습니다.
동쪽 골짜기(東溪)에서 발원한 시냇물은 장석사(杖錫寺)부터 100여 리를 남쪽으로 흘러와서 설두산(雪竇山)에 왔고 다시 꺾어서 서쪽 골짜기(西溪)에 모였습니다. 서쪽 골짜기의 물은 설두산에서 내려와서 다리를 거쳐 동쪽 협곡으로 흘러가며 콸콸(㶁㶁) 소리를 내며 큰 바위 아래로 흘러갑니다. 큰 바위가 천장암(千丈巖)입니다. 천장암의 폭포(높이 현재 186m)는 물보라가 햇볕을 받아 무지개를 피는데 비설정(飛雪亭)에서 보면 가장 아름답습니다. 다리 안쪽에 있는 금경지(金鏡池) 연못은 이미 폐쇄되었습니다. 설두사 절간 뒤쪽에 있는 서쪽 산봉우리들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묘고봉(妙高峰)이며 산세가 동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 유봉(乳峯)입니다. 설두사 앞에는 작은 언덕이 둥글게 있는데 주림(珠林)이라고 합니다. 동북쪽 숲속에 작은 집 몇 칸이 있는데 옥천암(玉泉庵)이라고 합니다. 암자 밖에 있는 작은 연못은 물빛이 푸를 만큼 맑고 연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래서 나(徐愛)는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는 처음 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옥천암 경치는 멀리까지 넓고 평평하며, 깨끗하여 편안하고 고요하다(沖和肅穆)고 느꼈습니다.
왕양명 선생께서 옥천암에서 왕극장 곁에 앉으셔서 말씀하시길 “유람은 오늘 마치는데 내가 평소에 생각하였던 대로 마음에 드는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좋은 풍경이 많았으나 옛날 사람들이 노래하지 않았는데 지금 너희들과 잘 구경하였다. 영락사(永樂寺)가 있는 여러 산은 유람하기 좋은 곳이고, 사명동은 사람이 살아갈 만하고, 용계는 세상을 피하기 좋으나 좁고, 장석사 있는 곳은 숨어 살면서 수양하기 괜찮으나 세상과 너무 떨어져 있다. 넓은 곳과 그윽한 곳이 펼쳐져 있고 고개를 들어 올려보아도 내려보아도 좋고 가까운 곳도 가볍지 않고 먼 곳도 이상하지 않아 멀리 갈 수 있고 좋은 풍경이 있는 곳은 오직 설두산이로다! 너희도 눈으로 경치를 보고 귀로 물소리를 들어서 마음이 즐거웠는데(識樂) 산수풍경뿐이었느냐?” 왕극장이 “네! 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영파부 봉화현 대부촌(寧波府 奉化縣 大埠村)에서 배를 타고 여요현으로 돌아오니 7월 2일입니다.
徐愛,「遊雪竇因得龍溪諸山記」,『橫山遺集』,卷下︰
陽明先生久懷雪竇之游。正德癸酉(1512)夏,予從陽明北歸,過龍泉,避暑於清風亭。王世瑞(王琥)、許半圭(許璋)、蔡希顏(蔡宗兗)、朱守中(朱節)偕越來,矢遂厥游。
秉約有恪薄觀,客星燭溪,沿永樂寺,澄江峻(巍)壁,松高氣爽。諏雪竇所由路,人莫能識。眾欲泛江,而希顏(蔡宗兗)疾,乃返棹。月夜,乘潮上通明。
明日,達上虞,半圭(許璋)、希顏(蔡宗兗)辭去。詢道,虞人指羊厄嶺(上虞縣,羊額嶺),實陰沮之也。予輩乃夜踰金沙、黃竹,曉入四明山。
環區沃曠,中據數鴆族,意匪劉、樊故地。晉訪汪叔憲(汪克章,餘姚縣,四明鄉,梁弄鎭),出游白水宮,觀巖瀑,潔涼瀉下,仍有三台屏風環之,幽好深靜,眞仙隱也。再詢羊厄,人皆迂之,乃徑妲溪。先生曰︰“吾遠族居也,往焉。”世瑞欲返不得,而叔憲偕行。踰大嶺,經下館,抵溪口。西峽峭峰三,遙詫中峰下爲浮屠,就眡乃石筍。南控仙橋洞,佇賞久之。午餔於族之新居,宗人咸來會。晚循溪上,止於祖居。
泉石衝激,溪山環折,如鳳翔龍盤,勢睽而情麗。祖居前,兩溪流匯,折東北,出湘渭。登石屋,望峽外峰,芒赤浮動,詢乃三龍潭,爲溪西源。東源靡窮,期返雪竇探之。既相與濯溪枕石,各賦詩識樂。叔憲歎曰︰“奇乎幽哉!此溪乃于世泯泯。”先生亦以謝腥濕氣於隘爲勝。世瑞鄙妲溪之名,宜更名曰文溪。先生曰︰“然。不如名龍溪。”眾僉曰︰“善。”龍潭,厥源也,稱龍溪,自此始矣。
明日,叔憲、世瑞以誤食石撞骨病結,世瑞猶強與闞往龍潭,芒鞋行十里,足焦,午壑(餐)面頳發喘,趨憩茆舍,亦勿竟。予獨矢曰︰“必竟!”拂杖從先生,路益險,悸悸達下潭。潭圓廣,類立甑。東壁梯石下,掬泉驚齒,西壁飛瀑濺雪,寒氣逼人,須臾而出。兩潭尚隔絕巇,人稱三潭。中獨勝,以顛嵌橫石,飛瀑瀉下,石空應響,如瓊宮珠箔,外聆鈞韵,不可即矣。復遵磵緣藤,度棧上二里許,阻廢磴,半武苔沒,逼峭壁,深淵莫測。予股慄止,先生坦然而去,予自恨弗及,有詩曰︰“息養期三年,神完復高飛。”志咎也。憩陰崖久之,仰見先生自上飛下,且危且羨,由是益愛龍溪。
次日,過祖居,西北有面溪,地稍平完,謀諸族人,乃定卜棲計。時,先生困暑,守中(朱節)傷足,眾復鬨然欲沮雪竇之游,先生獨不撓。守中艴然曰︰“犯烈履險非樂,溺志老遊非學。”先生莞爾而笑曰︰“知樂知學,孰非樂非學也?”然予既疲苶,不可強留,任守中(朱節)、世瑞(王琥)歸,獨二人成游。乃弗西往考石林、太平諸跡,遂東渡溪登嶺,十里躋巔,巔復平疇,稼穡彌望,因族居止宿焉。居前溪折出北崖,瀑下仙姑洞。
明發,望走馬岡,午食于孔石沈氏。孔石十五里,西達四明,世傳石窗(四窓)所在者,鄮越之稱本此,故古以‘四明山心’銘諸巖。恨路迷,竟趨韓採巖。巖西石嶠,名釣魚臺,俗歸嚴子陵、韓湘子,未有考也。泉出石磴,入溪,覆石榧,坐濯不忍去。既行,下溪,溪色盡赤,夾之丹壁。予輩方樂甚,忽有樵子望而歌曰︰“群鶩之飛飛,不如我棲棲。女行爍火中,我在霞天湄。”招欲與語,不顧竟去。暮渡溪,林深嶺絕,雨過泉鳴,聲類蛟吼。陡頂,見荒殿,榜曰杖錫寺。峰溪環抱如城池,俯眂四垂極險,絕人跡。僧困誅侵盡逋,新得吾邑僧文江來主,留余輩宿。夜忽風露作,寒寢不成寐。
晨,南下無路,冥行深茆間,露沾蝮螫,賴江僧引達蜘蛛嶺,落徐鳧巖。午,抵石橋,東望大仙岰,樓臺與雲松參差者,云雪竇寺也。牧童引渡橋,梯石下數百步,觀隱潭。潭龍最靈,祀禱輒應。潭上三峰離立,嘗於江南豪家見之,巍怪弗及矣。中峰北闕爲瀑,南闕爲道。然自此六七里,山皆龐厚若大陸,勢欲南伏,獨北有巨峰列障。西下峻阪,入橋亭,咸謂弗睹梵宇,何殊曠野,不意即雪竇也。蓋自萬峰南下,飫目倦思之餘,未愜所聞,悵然入寺少息,啜茗數碗,乃出周覽。
始自東溪之源,發杖錫百餘里,隨山南奔,底雪竇,折而匯西溪。由西溪上雪竇,出橋峽東,㶁㶁有聲下巖,是爲千丈巖。巖瀑輝映天日,蓋飛雪亭之勝也。橋內金鏡池已廢。寺後西峰之特高者,曰妙高峰,東衍而忽平起者,曰乳峰。寺前環小阜,曰珠林。東北林中,隱屋數椽,曰玉泉庵。庵外塘水澄碧,荷花爛漫,乃歎曰︰“未始不奇觀也!”蓋邈然其夷曠,淡然其沖穆矣。
先生乃坐叔憲而論曰︰“今日畢,素懷己中。所歷佳勝比比,獨不彰於古昔,乃今得與二三子觀焉。夫永樂諸山,可備游觀者也;四明,可居者也。龍溪,可以避地者也,然而近隘矣。杖錫者,可以隱德也,然而幾絕矣。乃若隱顯無恒,俯仰不拘,近而弗褻,遠而弗乖,可以致遠,可以發奇者,其惟雪竇乎!諸君耳目之所接、心志之所樂,其於山水已乎?”叔憲曰︰“唯唯。”
乃下山,至大埠,買舟泛江而歸,七月二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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