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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_산행친구들, 밀양 사명대사유적, 김종직 예림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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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생가, 유적지, 무안 표충사
밀양 영남루 무봉대에 있는 사명대사상
* 생몰연대 ;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 풍천 임씨. 수성의 2남
* 속명 응규,
* 법명 ; 유정(惟政)
* 호 ;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鍾峰)
* 13세에 김천 직지사 출가, 김천 직지자 주지, 봉은사 주지 사양.
* 휴정(서산대사, 묘향산 보현사) 제자, 재상 노수신에게 사사 받음
* 박순, 임제, 허균 지인
* 1589년 정여립의 난에 연루 모함, 강릉 유생 항소로 석방
* 금강산 유점사 수도중 임진왜란 당해 승의병 2천명 대장, 휴정과 합류
* 1593년 평양성 퇄환 전초전인 평양성과 중화 사이 길 차단
* 명군과 합세하여 평양성 탈환전 참전
* 1593.3. 서울 삼각산 노원평 우관동 전투 전공
* 전공 포장; 선조가 선교양종판사제수
*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제수
* 가등청정과 4회 강화회담(1593년 4월, 7월, 12월, 1597년 3월)
* 1604년 서산대사 부음 받고 가던 중, 선조의 명을 받고 일본에 강화사신으로 파견됨. (1604년 8월~1605년 5월)
* 해인사 요양, 1610년 8월 26일 설법중 결가부좌한 채 입적.
해인사 홍제암 옆에 부도와 비가 있다.
사명대사(송운대사)
밀양 사명대사 생가옆에 사당 비석
이 비석은 현대적 사명대사 유허비(遺墟碑)이다.
비문 원문
惟師之敎廣濟無邊
卷而懷之甁鉢蕭然
出而用之國威克宣
刻此貞珉昭示萬年
이 비문의 내용은 여기에 풀이해 놓은 대로 이렇다.
우리 대사의 가르침은 온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지만
자기 몸으로 돌아와서는 물병과 밥그릇 한벌 뿐이오
세상에 나아가 사용하면 국위를 크게 선양하게된다.
이제 이 돌에 새기노니 거룩한 공덕 천년만년 밝게 나타나리라.
* 유허비(遺墟碑) ; 선현들의 자취가 있는 곳에 추모하여 세운 비.
유허, 유지란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머물렀거나, 순절하였거나, 적거(귀양)하였던 곳이다.
밀양 사명대사 생가옆에 사당/ 사당 대문인 분충서난문
분충서난문 ; 충성스런 마음을 한껏 품고 국난을 극복하였다는 의미를 가진 문. <분충서난록>이라는 사명당의 저서명에서 가져온 용어.
"철검 포환 속에서도 태연자약"
"공명과 영리 때문에 그 계율을 바꾸지 않았다."
"상소문 두 차례 병폐 진단과 기의(機宣 ; 시기나 형편에 잘 맞음)에 맞았다."
ㅡ김재로 분충서난록 서문중에서 사명 칭송 요지.
밀양 사명대사 생가옆에 사당
* 숙청사(肅淸祠) ;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 맑고 고상한 유상(遺像;고인의 초상화)에 대해 엄숙하게 경의를 표한다.
밀양 사명대사 생가
사명대사 생가.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사명대사생가로 642)
밀양 사명대사 생가
송운대사구택. 사명대사 구택으로 하지 않은 것은 ?
사랑채가 사명당이라 혼돈 피한것.
사명대사는 1544~1610.
* 풍천임씨 수성과 모 달성서씨와 사이 2남 출생
* 속명 ; 임응규/ * 법명 ; 유정 / * 법호 ; 사명당, 송운, 종봉
* 허균의 사시 ; 자통홍재존자
* 자통홍제존자 ; 허균이 입적한 사명대사에게 내린 사시(私諡)
* 시호는 공적이 큰 분이 돌아가신 후에 국가에서 내려주는 호칭이다.
사시란 국가가 아닌 개인이 내린 시호라는 의미다.
밀양 사명대사 생가
밀양 사명대사 생가
밀양 사명대사 생가
* 육영당 ; 育英堂 , 毓은 育과 같은 육 자
*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자란곳이란 의미.
밀양 사명대사 생가 마을 유적지 공원
1999~2006년 역사교육장으로 조성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의병장
[ 좌측 벽화 전체 ]
*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승려의병을 일으켜 평양성탈환전에서 왜적과 싸우는 장면을 중심으로 벽화를 꾸몄다.
* 우측상단에는 대사의 공적과 능력을 인정한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이 끝난 1604년에,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는 장면이다.
대사를 일본외교사절 사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 많은 조정의 대신 관료들을 다 두고 승려인 사명대사를 보낸 것이다.
* 사명대사가 왜군 적장 가등청정과 만나서 4차례나 담판을 짓고있다.
사명대사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자 직지사에 가서 출가하였다.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왜란으로 나라가 풍비박산이 되고 , 절과 승려들이 왜적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분연히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 사명대사와 선조 임금,
* 사명대사가 왜란중에 적장 가등청정과 휴전회담을 하는 장면.
이 장면에 대하여 학정 이재익 시인은 <금강산1>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아래)
금강산 1.
-마의태자, 사명대사, 이승만
이재익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북으로 더 가야겠소'
노산 선생*이 철조망 앞에 주저앉아
파도와 함께 울부짖던 '그리운 금강산'.
백두대간 준령峻嶺의 영묘靈妙한 숲을 헤치니
화랑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눈물이 어려있다.
-조선에는 보물이 있소?
가등청정의 위세에
-있고말고요, 당신의 목이지요!
승의군僧義軍 사명대사의 배포 또한 서렸다.
-지금도 한국에는 호랑이가 있소?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가고 없소!
400년 후 한일정상*들이 연장전을 또 치렀으니
이승만 대통령의 호기도 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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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산 ; 노산 이은상(1903~1982) 선생 ; 시인. 문학박사
* 한일 정상 ;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지금도 한국에 호랑이가
있느냐" 고 비웃자 이승만 대통령은 "없소,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갔소."
라고 했다. (1953년 1월, 도쿄의 미군사령부에서 회담시)
이재익 시집, <<함께 가는 길>>에서
2000년대 초 금강산 방문길이 잠시 열렸을 때, 금강산의 방문 그 감격 속에서도 금강산과 관련이 있는 역사의 세 분 위인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마의태자는 신라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금강산으로 숨어 들어 비극적인 운명을 마쳤다.
임진왜란 시에는 금강산에서 사명대사가 승의병을 일으켰으며 가등청정과 휴전회담 담판을 지으면서도 당당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 평생 항일독립운동에 몸바치시고, 대한민국건국의 아버지가 되셨다. 일본 수상을 만나서도 가등청정을 빗대어 비난함으로써 일본 수상의 기를 죽였다.
금강산 하면 화랑도 수련, 마의태자의 눈물, 사명대사의 승의병 생각나고, 사명대사가 무지막지한 왜장과 네차례 담판시에 그 호기가 생각나고, 그 호기는 이승만의 호기로 이어져생각난다.
사명대사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중차대한 임무를 가지고 적국 일본의 본법사 절에서 제야를 보내며 잠들 수 없는 수심을 읊었다. 이때가 1605년 구정전날 밤이다.
<본법사에서 섣달 그믐날 밤>
사해에 떠도는 송운 늙은이
행장이 뜻과는 서로 어긋나네
한 해가 오늘 또 오늘밤으로 다하거늘
만리길 어느때에 돌아가리
옷은 오랑캐땅 비에 젖고
시름은 옛절 사립문에 막혔구나.
향사르고 앉아 잠들지 앉으니
새벽눈이 또 부슬부슬 내리네.
<대마도 해안포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짓다>
혀를 차며 하늘에 글을 쓰고 말없이 앉았으니
어두운 바람 비를 몰아 외로운 배에 뿌려주네.
십년동안 죽고 삶은 관산의 달이요
만리길 위태로움은 도깨비나라 가을이네.
더운 바다 성난 파도는 쉴 날이 없으니
병든 몸 부평초는 어느 때에 편안하리.
돌이켜 생각하니 백옥같은 일천 봉우리 속에
원숭이와 학이 무리지어 자유로이 살리라.
<불도를 가르쳐 준 시>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토쿠가와막부 신정권을 세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장자가 불도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며 지성스럽게 가르쳐 주기를 여러 번 간청하기에 써주었다.
큰 우주의 공간은 다함이 없고
적지(寂知)는 냄새와 소리도 없는 것
이제 설법듣고 무엇을 번거로워 물으리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네.
밀양 사명대사 생가 마을 유적지공원 저수지에서 사명대사의 설화를 생각한다.
* [사명설화1 ]
일본이 시험하고자 쇠방에 가두고 불을 지폈으나. 雪,霜자를 써 붙여두니 눈서리가 가득했다는 신통술.
* [사명설화2 ]
왜왕이 문명국임을 과시하려고 병풍을 나열했고, 사명대사가 말을 타고 병풍 앞을 지나갔지만 그 내용을 모두 외면서 이것은 모작이라고 하여 기를 죽였다는 이야기.
밀양 사명대사 생가 마을 유적지 공원
밀양 사명대사 생가 마을 유적
밀양 무안면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밀양 무안면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밀양 무안면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향나무
밀양 무안면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향나무
밀양 무안면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밀양 무안면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마을 뚝너머 산책길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밀양 사명대사 생가마을
사명대사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사명대사 표충비각, 땀흘리는 비석
밀양 김종직 선생 생가 및 예림서원
점필재 김종직 선생 흉상
🟦 점필재 김종직 선생
* 金宗直 1431(세종 13)~1492
호 점필재. 본관 선산. 부친 강호 김숙자와 모 밀양 박씨 사이 3남2녀중 막내아들
* 세조 5년 문과 장원 급제
* 30여년 외직(영남병마평사, 함양군수, 선산도호부사, 경기도, 전라도, 황해도 관찰사, 한성부좌윤 등)
* 내직 도승지, 이조, 공조, 병조참판, 형조판서
* 백성 다스림에 간략함을 따르고, 정靜을 주로 따르고 동動을 제재.
* 조선초 영남사림파 종장宗匠으로서 성리학 정착과 조선중기 사림정치 수립 기초를 놓은 경술과 문리를 겸비한 성리학자겸 문장가.
* 청렴 정직하고 효제충신 중시. 중론조화, 풍속교화
* 문하에 정여창(일두, 함양 남계서원). 김굉필 (도동서원) 등 도학거유 배출.
조위, 김일손(함양 청계서원), 유호인, 표연말, 남효온(생육신) 등 문장 명사 배출.
* 무오사화 시에 연산군의 폭정으로 부관참시 당함.
김종직 글 <조의제문> 을 제자 사관 김일손이 사초(뒷날 정식 편찬될 왕조실록 기초자료) 에 실어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에게 공격당함.
* 시호 문충, 영의정 추증,
* 저서; 점필재집, 당후일기, 청구풍아, 동문수, 여지승람 등
* 弔義帝文 ; 신하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 의제를 슬퍼한 글. 초나라 역사에 빗대서 신하 수양대군(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슬퍼하는 글임을 알 수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 흉상
🟦 무오사화에 대하여
1) 배경 ; 두 세력의 대립 ;
* 훈구파는 기성세력, 사장詞章 중심 학파, 벌열세력.
* 성종이 김종직 중용하니,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영남 신진사류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기성 훈구파와 갈등이 초래됨.
* 길재 학통 영남 사림들은 신진기예, 性理學 중심, 대간 홍문관 사관 등 언로에 주로 종사.
2) 성종실록 편찬과정의 대립
* 실록 편찬 당상관이 된 이극돈이 유자광을 부추겨, 유자광.노수신이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를 헐뜯은 대역무도' 하다고 상소하다고 공격하였다.
* 유자광 이극돈 등이 김종직 김일손 등 사림출신들을 공격하여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유?
*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 ;
함양 학사루에 걸렸던 유자광 시를 김종직 함양군수가 떼어버린 것.
* 이극돈 개인의 원한 ; 김일손이 史草에 이극돈의 비리를 기록한 것.
즉 이극돈이 전라감사시 세조비 정희왕후 국상때 근신 않고 장흥기생과 놀았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 결과로 무오사화 발생. 이극돈 자신도 파직됨.
3) 무오사화 결과
*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능지처참 사형(간악한 파당, 세조 무록誣錄) ;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
* 곤장 변경 관노 ; 강겸
* 불고지죄로 장류(곤장 때리고 귀양) ;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 김종직 문도라는 이유로 장류 ;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강혼, 이계맹 등.
* 파직 (수사관修史官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이극돈도 파직됨.
* 좌천 ;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 유자광만 위세당당.
* 이극돈, 유자광 등의 고자질과 연산군의 광기가 첫번째 사화 무오사화 [戊午士禍(史禍) ; 1498.연산군 4년,7월]를 일으켜 사림학자 관료가 많이 희생됐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가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가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가
추원재. 추원(追遠 )은 '조상의 덕을 추모한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가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가 마을 / 추원재 마을 점필재 김종직 선생 기념비각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 서원의 위치 변동에 대하여
* 처음 세움 ; 1567. 명종 22년, 지방 유림이 중동면 자씨산 아래 세움. 덕성서원
* 상남면 예림림로 이건
* 현종때 1670년 예림서원으로 사액서원
* 현재 위치 ; 1680년 부북면 후사포리.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 모란이나 그려야겠네
점필재 선생이 16세 때 과거에 낙방한 후에, 한강 제천정에서 그 심경을 읊은 시다. 16대 후손 조수가 새겨 걸었다.
雪裏寒梅雨後山 (설리한매우후산)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은
看時容易畫時難 (간시용이화시난)
바라보기는 쉬우나 그림으로 그리기는 어렵네
早知不入時人眼 (조지불입시인안)
일찍이 시인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알았으니
寧把臙脂寫牧丹 (영파연지사목단)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이나 그려야겠네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강당 명칭은 구영당(학문의 진리를 가득 담겠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 구영당의 좌측방은 시민재, 우측방은 일신재.
구영당의 일신재
🟦 극준조약 무생과실 ;
克遵條約 無生過矢
'법규와 약속을 잘 지키면 잘못이 생길 수 없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육덕사. 사당
김종직 선생 위패를 중심으로 모시고, 박한주, 신계성 두 분을 배향(함께 모심. 서원 설립에 기여한 선비일것).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점필재 김종직 선생 제향하는 예림서원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가마을
점필재 김종직 선생 생가마을
예림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