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산에 처음 갔던 것은 지난 80년, 무전여행처럼 제주에 가던 길이었다.
동행하겠다던 친구는 이유를 만들어 포기했고 혼자였다.
대전에서 0시50분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하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제주로 가는 배는 도라지호, 오후 7시에 출발예정이었고 12시간이 지나야 성산포항에 도착한다고 했다.
처음 닿은 부산의 풍경은 참 부산스럽다는, 산비탈까지 빼곡히 들어선 집들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바다를 가로지른 긴 다리며 동백섬주위로 솟아오른 초고층아파트로 부산이라는 동네는 더 부산스러워졌다.
지난 주중에 부산에 도착하여 오전에 일을 마치고 대학에 근무하는 친구와 점심약속을 했다.
대학 캠퍼스는 낯설게도 작은 동산 하나 없는 평지였다. 바다를 매립한 곳이라 그렇다고 했다.
그가 회의중이라 비가 내리는 캠퍼스를 거닐었다.
돌집으로 '워커하우스;라는 아담한 건물이 있다.
"더이상 후퇴는 없다. 모든 부대는 반격을 가해 적을 혼란에 빠뜨려야 한다."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방문해 이같이 독려했다.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고자 미 8군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철수 개시일인 8월 1일을 사흘 앞두고 일선 부대를 찾아 낙동강이 최후의 방어선임을 강조하며 전의를 불사른 것이다.
현재 캠퍼스안에 워커하우스는 여분이 없는 통신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대구에서 이곳으로 미8군의 지휘부를 옮겼던 곳이다.
그는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그러나 중대장으로 참전한 아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전방으로 이동하던 중 의정부 축석령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처음에는 미군들의 휴양지였다가 현재의 워커힐호텔이다.
전쟁초기 미국 조야의 한반도 포기의 기류에서도 장군만이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였고 그는 승리의 발판을 구축했다.
신학기를 맞아 바쁜 시간, 같은 학과의 교수들과 회의를 마치고 점심약속이 있었는데 나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그는 나에게 특별한 역사의 현장으로 나를 안내한다고 했다.
역사의 현장?
그가 안내한 식당은 학교 뒷편, '초원복집'이었다.
너무나 깊이 나의 뇌리에 각인된 현장이었다.
지난 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부산지역의 기관장들이 이 식당에 모였는데,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가관이었다.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 다리에 빠져 죽자” , 지역감정을 유발해야 한다는,
당시 한국 사회 지배층의 국가관·윤리관·정치의식 등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부여 주었던 현장이었다.
또한 불법 선거 운동을 모의한 중대 범죄보다 도청이라는 수단의 도덕성을 부각시켜 본질을 흐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어 여론을 조작한 한국 주류 언론의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행태를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세월은 숱하게 흘렀지만 총선을 앞둔 오늘의 정국은 얼마나 진화하였는가?
우연하게도 부산스런 부산에서 굴절된 근대사의 양면성이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국가를 국민을 떠벌리는 자들, 그리고 나,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도대체 한 것이 무엇인지?
인공지능대 바둑천재의 대국, 우울한 신세계의 도래를 예감도 해야 하는 날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자신이 창조한 괴물처럼 생겨먹은 인간때문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비극을 겪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든 원리를 묻는 친구에게 그는 말한다.
'미쳤습니까, 친구! 내 불행에서 배우고 당신의 불행을 자초하지 마십시요.'
이역만리 낯선 땅, 풍전등화의 위기를 구하고 순직한 장군과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던 복집에 모였던 권력자들과 여전히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늘 날 너와 나, 우리들의 씁쓸한 민낯을 보며
부산스런 부산에서 잠시 우울한 마음으로 봄으로 부치는 세번째 엽서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