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개노래(058)-물속에도 길이 있다
바람들은 사철 남쪽과 서쪽 봉우리들에서 동쪽 봉우리로 난 길을 지나 산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강개에서 연을 날리며 그 바람들이 지나가는 길들을 마음속에 그려놓았다.
바람이 시작되는 산봉우리들은 강개 쪽으로나 산 너머 마을 쪽으로 빗물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홍성 오서산과 덕산 가야산에 내린 비가 삽교천을 흐르다 강개에서 큰물이 되곤 하였다.
풍수쟁이들은 오서산엔 ‘만 대가 영화를 누릴 명당’(萬代榮華之地)이, 가야산엔 ‘두 대에 걸쳐 왕이 나올 명당’(二代天子之地)이 있다며 천기인 양 누설했다.
추사한테 글씨와 난 치는 걸 배우고 파락호 예인 흉내를 내며 때를 기다리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그래도 힘이 모자라자 풍수에 귀의한다.
풍수한량 이만구로부터 오서산과 가야산 명당 이야기를 듣고 흥선군은 가야산을 택한다.
그러구는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를 연천에서 덕산 가야사 밑 상가리 밭에 임시로 묻고는(1844) 때를 기다렸다.
흥선군은 한시가 급했지만 가야사가 수덕사보다 더 큰 절이라 단번에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쓸 수가 없었다.
흥선군은 대제학 김병학의 가보인 옥벼루 단계연(端溪硯)을 슬쩍 빌려다가 제 것인 양 영의정 김좌근에게 선물하고는 청탁을 하였다.
세도가 김좌근의 서찰을 받은 충청감사는 군사를 몰고 가서 가야사에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절터에선 탑이 선 자리가 명당이라 흥선군은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썼다(1845).
과연 1852년에 흥선군에게서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태어나고, 그가 12살(1863)이 되던 해에 조선 제26대 고종으로 즉위했다.
고종 15살에는 ‘병인박해’(1866)를, 17살에는 ‘무진박해’(1668)를 몰아쳐 조선천주교는 쑥대밭이 되었다.
덕산 가야사를 불 질러 없앤 것이나(1845) 동학 창시자 최제우를 처형한 것이나(1864) 내포천주교인들의 씨를 말리려 한 것이나(1866, 1868) 모두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종교박해들이다.
불교 전설에 죄를 지은 중이 죽어서 등에 큰 나무가 난 물고기로 환생했는데, 그 물고기가 참회하다 고승의 도움으로 해탈했단다.
그 같은 교훈을 목어(木魚)에 담아 사찰에 걸어놓고 울려서 알리고 있고, 그 목어를 간소화한 것이 목탁이란다.
가야사에서 걸려 있던 목어가 절이 불타던 날 울면서 가야산을 떠나 덕산천을 거쳐 삽교천으로, 그리고 아산만을 거쳐 서해로 흘러갔다.
목어가 울며 삽교천 강개를 지나 바다로 가는 물 속은 속세의 더러움과 맑음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서해는 오서산과 가야산에서 흘러오는 물을 마시고는 삽교천에 토해서 갯벌을 만들어 놓았다.
썩거나 더러운 것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하루에 두 번 씩 상류를 향해 그렇게 토악질을 해댔다.
삽교천은 바다에게 더러운 것을 먹이는, 그리고 더러운 것을 먹은 바다가 게워내는 물길이 되어야 했다.
가뭄과 조금으로 삽교천 물살이 고요해지면 물속에 난 길이 보였다.
맑은 물이 속닥이는 작은 수렁샘들이 구토하느라 상처 난 삽교천의 식도를 치유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더러운 물로, 부끄러운 물로 아픔을 겪은 삽교천 밥줄을 고치는 것은 물속의 작은 수렁샘들이었다.
그렇게 수렁샘들은 더러운 탁류(濁流)가 지나간 자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청류(淸流)가 흐르도록 하였다.
삶을 더럽고 아프게 하는 것들은 처음엔 내게 분노를 일으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슬프게 하다못해 외롭게 만든다.
바람들이 강개 하늘을 지나다 갈대들을 뒤척이게 할 때쯤이면 그 슬픔과 외로움이 누군가를 그립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본 적도 없고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다.
나의 영혼은 초기화 상태에 빠졌다.
내면이 영적으로 초기화되면 ‘고독’이라는 메시지가 반복해서 떴다.
그것을 해석하면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였다.
누군가가 지금 나를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정화’와‘조명’과 ‘일치’이라는 이정표가 꽂힌 길을 걸어야 했다.
그 길은 누군가와 함께 행복하게 걷는 정원길이 아니었다.
추수가 다 끝나고 삭풍이 몰아치는 들녘처럼 길 없는 길을 홀로 걸어야 했다.
그 길은 화살이 날아가듯이 직선으로 곧장 날아가지 못 했다.
골고타에 오르는 길처럼 걷다 넘어졌다 하며 진퇴를 반복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정화에서 조명과 일치의 길이 보이기도 하고, 조명에서 넘어져 정화의 길로 나동그라져 도루묵이 되기도 했다.
진보한 것 같지만 후퇴하고, 후퇴하는 것 같지만 진보하는 지루하고도 신비로운 길이었다.
그러기를 삼 세 번, 그러니까 죽을 때가지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강개를 지나 바다로 흘러간 목어의 전설처럼 등에 나무가 난 채로 강이나 바다에서 헤엄을 치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