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少相依的慈竹
谢高低黄瓜香
2023-06-09 00:44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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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少相依的慈竹——
慈竹,亦称“子母竹”、“钓鱼慈”。禾本科。秆高5~10米,顶端细长下垂如钓丝状,上部节间长达60厘米,直径3~6厘米,中空甚大。
箨鞘革质,长约倍于箨叶。叶在最后小枝上有数枚至十枚以上。花枝常成束,不具叶,弯曲下垂;小穗常2~4枚生于一节,棕紫色,各含小花4~5朵。
生于平原或低丘,分布于中国西南各地,是四川竹类中分布最普遍的一种。秆材坚韧,用以劈篾编竹器,或作造纸原料。笋微苦,可食。因秆枝如母子相依,故名。
慈竹,也叫茨竹。川东还有一些地方叫它们笼竹,看上去确实像一笼一笼的。慈竹一般会长到十米左右的高度,越到顶端越是细长,然后变成了弧形,竹梢弯曲和下垂着。
因为都是丛生的,所以也有叫它们丛竹的。一丛竹子,总是细细密密地拥挤在一起,小的一丛有几十根,大的一丛可以有几百根。
笼竹、丛竹这样的名字比较好理解,都是从形态上讲的。但是为什么会叫慈竹呢?原来,人们认为,慈竹的新竹和旧竹紧密集结在一起,
高低相倚,就像老少相依,子孝母慈,不离不弃,所以称它们为慈竹。这个名字里,寄托着中国人传统的道德伦理。
被列为“初唐四杰〞之首的诗人王勃写过一篇《慈竹赋》,其中写道:“广汉山谷,有竹名慈。生必向内,示不离本。修茎巨叶,攒根沓柢。
丛之大者,或至百千株焉,而萦结逾乎咫步……若乃宗生族茂,天长地久。〞王勒二十岁时从长安启程入蜀,在四川各地游历,《慈竹赋》就是这时候写下的。
除了道德伦理和精神上的象征意味,慈竹也像别的竹子一样,为人类奉献了自己的一切。人们经常看见的竹器用品,大都是慈竹的功劳。
慈竹的篾片和篾条很柔软也很坚韧,像筲箕、簸箕、筛箩、箢蔸、背篓、菜篮,还有凉席、晒簟、摇篮什么的,慈竹的篾片都能担当。
慈竹因喜好肥沃、深厚、疏松、湿润的土壤,常常植于山麓坡角、溪壑池塘、房前屋后,是蜀地最常见的种植竹类。在川渝、云贵、湘鄂等地适宜生长。随着20世纪50年代我国“南竹北移”,慈竹逐渐北扩,近至淮河渭河流域。
竹学专家说,“非草非木”的竹子与水稻、玉米、小麦一样,同属于禾本科的植物,其全部囊括在竹亚科之中,全球已知竹子物种超过了1700个。
慈竹家族中,已经找到许多品种兄弟姐妹:金丝慈竹、黑笋慈竹、琴丝慈竹、蛇头慈竹、龙头慈竹、佛肚慈竹、牛腿慈竹.……
还有我国竹子第一个国审良种“四/116号”。随着竹业的不断发展、科学研究的日益深入,更多的个性变异可能被发现。
歇后语说得好“竹篮里装竹笋——母子情深”,从小就受教育。浩浩荡荡的慈竹“宗生族茂,天长地久,万柢争盘,干株竞纠”,世代母子相依,兄友相爱,懂得群丛恪守的谦卑,绝不孤秀一枝绿意。
莫非儒家文化核心的“仁以处人,有序和谐”,与彰显共生的慈竹不谋而合?!川渝贵一带,门联“慈竹和风”寓意生活美满;“慈竹临风空有影,晚萱经雨不留芳”,则是用来怀念母亲的对联。
唐明皇曾与诸王游赏后花园,看见一丛竹子翠绿茂密,笋子则被包在竹丛里,于是语重心长说:“父子、兄弟应当如同这丛竹一般相亲啊!”因而竹子亦有“义竹”“兄弟竹”和“慈竹”之称。
老少相倚的慈竹,家和万事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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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45권 /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누정】
풍월루(風月樓) 객사 북쪽에 있다. 유의손(柳義孫)의 기문이 있다.
봉서루(鳳栖樓) 객사 동쪽에 있다.
월송정(越松亭)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소나무가 만 그루이고, 흰 모래는 눈 같다. 소나무 사이에는 개미도 다니지 않으며, 새들도 집을 짓지 않는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신라 때 신선 술랑(述郞)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일은 지나가고 사람은 옛 사람 아닌데 물만 스스로 동쪽으로 흐르고 천 년 전 남긴 자취 정자 소나무에 있네. 겨우사리[女蘿] 다정한 듯 서로 엉켰으니 아교풀로 붙인 듯 풀기 어렵고, 형제죽(兄弟竹)이 마음으로 친하니 좁쌀 방아찧을 것이, 어느 선랑(仙郞)이 있어 함께 학을 구울까, 초부(樵夫)의 도끼로 용 잡는 것 배우게 하지 말라. 머리털 절반이나 희어, 예전 놀던 곳 찾으니, 푸르른 옛날 모습 불현듯 부럽구나.”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가을 바람에 옛 자취 찾아 말 머리 동쪽으로 돌리니, 울창한 정자 소나무 좋기도 하구나. 몇 해 동안이나 이 마음은 신선 지경 찾으려 했나, 천 리 먼 길에 길 떠나려 양식을 방아찧었네. 도끼의 액운이 없었으니 한위(漢魏)를 지났고, 재목은 큰 집[廓廟] 지을 수 있으니 기룡(蘷龍 기ㆍ용은 순 임금의 어진 신하)에도 비기겠네. 난간을 의지하여 침음(沈吟)하기 절로 오래인데, 졸렬한 붓으로 만분의 일도 형용하기 어렵다.” 하였다. 『신증』 예전에는 집이 없었는데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처음으로 지었다.
樓亭
風月樓。在客館北。有柳義孫記。
鳳棲樓。在客館東。
越松亭。在郡東七里。蒼松萬株,白沙如雪。松間螻蟻不行,禽鳥不棲。諺傳新羅仙人述郞等遊憩于此。○安軸詩:“事去人非水自東,千年遺踵在亭松。女蘿情合膠難解,弟竹心親粟可舂。有底仙郞同煮鶴?莫令樵斧學屠龍。二毛重到曾遊地,却羨蒼蒼昔日容。” ○李穀詩:“訪古秋風馬首東,喜看鬱鬱蔭亭松。幾年心爲尋眞切?千里糧因問道舂。厄絶斧斤經漢、魏,材堪廊廟擬夔、龍。倚欄不覺沈吟久,拙筆難形萬一容。” 〔新增〕 古無宇觀,察使朴元宗始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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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재집 제1권 / 시(詩) / 월송정 시에 차운하다〔次越松亭詩韻〕
일 지나고 사람 아닌데 물만 동으로 흐르고 / 事去人非水自東
귀한 씨앗 남겨 두어 정자의 소나무 되었네 / 千金遺種在亭松
겨우살이 정겹게 엉겨 아교처럼 떼어 내기 어렵고 / 女蘿情合膠難解
제죽은 마음으로 친애하여 좁쌀 방아 찧는구나 / 弟竹心親粟可舂
어떤 선랑이 함께 학을 구워 먹었던고 / 有底仙郞同煮鶴
나무꾼이 용 잡는 기술 배우지 못하게 하라 / 莫令樵父學屠龍
희끗한 머리로 예전에 놀던 곳 다시 찾으니 / 二毛重到曾遊地
도리어 씩씩하던 옛 모습이 부럽구나 / 却羨蒼蒼昔日容
[주-D001] 월송정(越松亭) : 평해군(平海郡)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이 지역은 푸른 소나무가 만 그루이고 흰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며, 소나무 사이에는 개미도 다니지 않고 새들도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신라 때 국선 술랑(述郞)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5 江原道 平海郡》[주-D002] 귀한 : 원문은 ‘千金’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평해군(平海郡)에는 ‘千年’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千年’이 타당한 듯하나, 대본대로 번역하였다.[주-D003] 씨앗 : 원문은 ‘種’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평해군에는 ‘踵’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대본대로 번역하였다.[주-D004] 제죽(弟竹) : 대나무를 가리키는 듯하나,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주-D005] 좁쌀 방아 찧는구나 : 원문의 속가용(粟可舂)은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변용으로, 우애가 좋지 못한 형제를 비난할 때 사용한다.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동생 회남왕 장(長)이 모반하려다 실패하였다. 이에 문제가 조서를 내려 폐위시켜 촉군(蜀郡)으로 내보냈는데, 장이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이때 민간에서 〈척포두속〉이라는 노래를 불러 문제를 기롱하기를 “한 자의 베도 꿰매어 옷을 만들어 함께 입을 수 있고, 한 말의 곡식도 찧어서 밥을 지어 함께 먹을 수 있는데,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구나.〔一尺布尙可縫 一斗粟尙可舂 兄弟二人不能相容〕” 하였다. 《史記 卷118 淮南列傳》 그러나 여기서는 ‘한 말의 곡식도 찧어서 밥을 지어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의미만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우애가 깊다는 말로 사용된 듯하다. 곧 월송정의 소나무와 제죽(弟竹)이 잘 어울려 좋은 풍경을 이루었다는 말이다.[주-D006] 어떤 …… 먹었던고 : 원문의 자학(煮鶴)은 소금자학(燒琴煮鶴)의 준말로, 아름다운 풍경을 해친다는 말이다. 만당(晩唐)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의산잡찬(義山雜纂)》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훼손하는 행위로 맑은 샘에 발 씻기〔淸泉濯足〕, 꽃 위에 잠방이 말리기〔花上曬褌〕, 산을 등져서 누각 짓기〔背山起樓〕, 거문고 불 때고 학 삶아 먹기〔燒琴煮鶴〕, 꽃 마주하여 차 마시기〔對花啜茶〕, 소나무 아래에서 갈도하기〔松下喝道〕를 든 바 있다.[주-D007] 나무꾼이 …… 하라 : 나무꾼들이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월송정 주변의 소나무를 베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 원문의 ‘樵父’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평해군(平海郡)에 ‘樵斧’로 되어 있다. 나무꾼과 나무꾼의 도끼는 의미상 큰 차이가 없으므로 대본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용 잡는 기술〔屠龍〕’은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주평만은 지리익에게서 용 잡는 법을 배웠다. 천금의 가산을 탕진하여 3년 만에 기술을 이루었으나, 그 교묘한 기술을 쓸 데가 없었다.〔朱泙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技成 而無所用其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서정화 안득용 안세현 (공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