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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의 영웅적 덕행 2 [소(蘇)주교 심포지엄 2차 자료]
이영제 신부(가톨릭대학교)
들어가는 말
세상을 떠난 누군가, 특히 역사적 간극으로 온전한 이해가 어려운 누군가의 인품을 확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나아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가 살았던 특정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그의 활동과 업적, 삶을 지탱하던 내적 동기와 신념, 그리고 영적 원천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전제로 하는 신중한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 간은 죽음을 넘어서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는 누군가를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기억하고 기 념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톨릭교회의 경우, 신자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고 떠나간 이들을 복자(福者)나 성인(聖人)으로 공경하며 공적인 전례를 통해 기억하고 기념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보여준 종교적 차원의 영웅적 삶을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들의 삶은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이자 영적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시암(Siam, 오늘날 태국) 대목구에서 파견되어 선교 활동하던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élémy Bruguière, 1792-1835년) 주교1)는 박해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여러 차례 성직자를 요청하며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조선 교우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당시 조선 선교와 관련한 교회 내외적인 차원의 수많은 어려움이 존재했음에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피력하면서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된다. 이후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1765-1846년) 교황은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 설정과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고,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곧바로 조선 입국을 위한 길고 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3년의 여정 중에 수많은 고통과 난관을 이겨냈지만, 그는 누적된 과로와 병으로 조선 땅을 밟지 못한 채 1835년 10월 20일 저녁 8시 15분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서 선종한다.
서울대교구는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한 프랑스 선교사 브뤼기에르 주교를 기억하고 기념한다. 그런데 그가 교회 내에서 복자나 성인으로 공적인 공경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활동, 업적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평판에 이르기까지 “윤리적이며 신학적인 요소, 특히 영성 신학적 요소를 바탕으로 교의적 점검과 교회법적 절차를 거쳐, 마지막으로 교회의 성인 공경이라는 공적 전례를 통해”2) 복자와 성인으로 선포돼야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적인 공경을 위한 시복을 추진하던 서울대교구는 2023년 10월 12일 교황청 시성부로부터 시복을 위한 외부 검증 절차의 결과로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승인받았다.
이제 브뤼기에르 주교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시복 대상자로 공경을 받게 되었고, 서울대교구는 교구의 시복 재판을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영웅적 덕행과 성덕의 명성을 증거하는 자료 수집과 지역 교회의 현양 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본고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을 위한 절차에 따라 복자로서 공적인 공경을 받기 위해 필요한 덕행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로와 병으로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회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순교자’가 아니다.3)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같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를 증거하고 이를 뿌리내리기 위해 온 삶을 바치고 죽음을 맞이한 ‘증거자’이다. 증거자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있음을 증거한 사 람”4)을 뜻한다.
순교자의 경우, 시복에 조건으로 ‘신앙을 위한 죽음’ 그 자체가 영웅적이기 때 문에 순교자의 영웅성을 밝힐 필요는 없지만, 증거자의 경우, 온 삶을 통해 드러난 ‘영웅적인 덕행’을 밝혀야 한다. 여기서 시복과 시성을 위해 요구되는 ‘영웅적인 덕행’이란 그리스도교적 덕목들, 곧 믿음, 희망, 사랑의 대신덕(對神德)과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의 사추덕(四樞德), 그리고 청빈, 정결, 순명, 겸손 등의 덕목들을 “인간적 계산 없이 자발적이고(expedite), 단호하며(prompte), 기꺼운 마음으로(delectabiliter), 보통의 인간적 차원을 넘어(supra humanum modum)”5) “삶의 방식과 삶의 조건에 따라”6) 지속적으로 실천한 덕행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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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뤼기에르를 부르는 호칭과 관련하여, 삶의 역사적 시점을 고려하여 교회법적 신분에 따라 호칭을 달리 사용해야 함에도 본고는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주교’라고 표기하겠다.
2) 최인각,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서울대교구 시복시성 자료집 1 – 시복을 위한 핵심주제: 반역, 병사, 살인, 행방 불명』,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80쪽.
3) 윤민구 신부에 따르면, 순교의 사실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순교자 측과 박해자 측의 질료적이고 형상적인 순교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이를 순교자 측에서 본다면, 질료적 순교란 실제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고 형상적 순교는 그 죽음이 “신앙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순교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박해자 측에서 본다면, 질료적 순교란 “죽인 행위 또는 죽음의 직접 동기가 된 가해 행위”이고, 형상적 순교란 “신앙에 대한 증오(in odium fidei) 또는 이러한 증오가 주된 동기가 되어” 죽음에 이른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요약하면, 순교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 육체적 생명이 희생되어 ‘참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둘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진리에 대한 ‘명백한’ 증오로 인한 죽음이어야 하며, 셋째,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경우, 중국과 조선에서의 박해를 이미 인지한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박해나 순교의 상황에서의 죽음에 대한 수락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순교’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질병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를 위해 선택한 생활의 방법에서 나오는 예정된 위험의 결과로 인한 죽음은 순교에 해당하지 않는다. 참조: 윤민구, “시복 시성”, 『한국가톨릭대사전 8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5327쪽; 이동호, “순교”, 『한국가톨릭대사전 8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5156-5157쪽; 최인각,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113-122, 124-126쪽.
4) 류한영, “증거자”,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940쪽
5) 최인각,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고찰」, 『사목연구』 18, 2007, 342쪽. Cf. Benedicti Papae XIV, De Servorum Dei Beatificatione et Beatorum Canonizatione, III, 22, 1.2. Bruxellis: Typis Societatis Belgicae, 1840, p.142. “Virtus christiana, ut sit heroica, debet ex supradictis efficere, ut qui ea præditus est, expedite, prompte ac delectabiliter supra communem modum ex fide supernaturali operetur”(영웅적이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덕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에 의해 행해져야 하는데, 그 덕으로 인해 갖추어지는 이는 초자연적 신앙에서 비롯되어 자발적이고, 단호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공통된 방식 위에서 전념할지어다.)
6)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시복 시성 절차 해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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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을 위해 ‘증거자에게 요구되는 성덕’을 밝히기 위해서는 앞서 제시된 덕행의 목록을 준거로, 그의 덕행이 영웅적인지를 밝히는 신학적 작업이 필요하다.
이에 본고는 시복 절차에 따라 ‘증거자에게 요구되는 성덕들’ 가운데 전통적으로 ‘복음적 덕행’으로 제시되는 ‘가난’, ‘순명’, ‘정결’, 그리고 ‘겸손’과 직접적인 덕행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지만, 주교로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보여준 사목적 활동의 영웅적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활동, 죽음을 고찰할 것이다. 여기서 그의 삶과 관련된 교회사적, 교회법적, 윤리 신학적 차원에서 필요한 보다 깊은 연구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맡기면서, 본고는 교회의 가르침을 토대로, 특히 영성 신학적 관점과 사목적 관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음적 덕행들과 사목적 덕행을 성찰하겠다.
이를 위해 먼저 영성 신학적 측면에서 각 덕행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남긴 서한과 여행기,7) 그리고 그에 대한 증언들과 연구들을 근거로 앞서 제시한 덕행의 특징에 따라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덕행의 영웅적인 모습을 제시하겠다. 마지막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복음적 덕행’을 통해, 시복을 위한 준비 자료로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증거한 덕행들이 한국 천주교회에 어떤 영적인 빛을 새롭게 비추어 주는지를 살펴보겠다.
1. 증거자에게 요구되는 복음적 덕행에 대한 신학적 고찰
‘증거자들에게 요구되는 성덕들’ 가운데 ‘복음적 권고’에 근거한 덕행들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교에서 제시하는 ‘성덕’(聖德)에 대한 신학적 정의와 의미를 살펴보고 ‘복음적 권고’ 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1) 성덕의 보편적 소명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교회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참조: 1베드 1,16)는 말 씀에 따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성덕으로 부르고 계심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가르친다. 성덕의 소명에 대한 교회의 강조는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이라는 표제 아래 작성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이하 『교회헌장』) 5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교회헌장』은 교회의 거룩함을 제시하면서 그 신학적 근거로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8)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 안에 모든 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거룩함은 결코 자기 공적이나 업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인간적 완성의 단계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얻을 수 있다.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으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였기에” 거룩할 수 있다.9) 또한 성덕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선물이지만, 아직 완성의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니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거룩한 생활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느님과 이웃 사 랑의 모범과 성령의 내적인 도우심, 곧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살며 이미 받은 성덕을 보 존하고 완성해 나가야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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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본고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남긴 사료들을 인용할 때, 자세한 출처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정양 모 역, 가톨릭출판사, 2007)는 『여행기』 로,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정양모·윤종국 역, 가톨릭출판사, 2007)은 『서한집』으로 표기하겠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196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3, 39항.
9) 참조: 『교회헌장』 40항.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 업적 때문에 하느님께 불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에 따라 부름 받고, 주 예수님 안에서 의화되고, 믿음의 세례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였기에 참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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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덕에 도달해야 하는 공통의 의무 를 지녔다는 것이 같은 조건 아래, 같은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공의회 교부들 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성덕의 의무는 하나이지만 “각기 고유한 은혜와 임무에 따라”11) 다르게 부여되었기에, 성덕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고 강조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성덕이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케 하시려고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무상의 선물로서, 세례를 통하여 거룩한 교회에 결합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각기 고유한 방식과 직무에 따라 이미 받은 성덕을 보존하고 완성해 나가야 한다.
2) 성덕과 복음적 권고의 관계
성덕의 보편적 소명에 대해 가르치는 『교회헌장』 5장은 마지막으로 애덕에 초점을 맞추어 성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데, 사랑에 대한 최상의 증거인 ‘순교’와 전통적으로 정결과 순명, 그리고 청빈으로 표현되는 ‘복음적 권고’를 언급한다. 여기서 공의회 교부들은 복음적 권고의 덕행들을 실천함으로써 어떻게 성덕의 완성에 이를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 중요성 또한 강조한다.
그런데, 시복 시성 절차와 관련하여, 베네딕토 14세 교황(1704-1758)12)은 「하느님의 종의 시복과 복자의 시성」(De Servorum Dei Beatificatione et Beatorum Canonizatione)에서 시복과 시성의 후보자, 증거자에게 요구되는 ‘시성할 만한 덕’의 준거로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S. Thomas de Aquino)의 향주삼덕과 윤리적이며 탁월한 덕, 곧 사추덕에 대한 고전적 분류를 받아 들여 이를 기초로 제시하는데, 여기서 증거자가 성성(聖性)을 얻으려면 복음적 권고의 실천은 필요하지 않고 계명의 영웅적 준수면 충분하다고 설명한다.13) 그렇다면 시복의 준비로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덕을 살펴보기 위한 복음적 권고에 대한 검증은 부차적인 요소일까?
교회 역사 안에서 ‘권고’라는 말은 ‘계명’이라는 말과 구별되어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더욱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덕행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14) 그래서 계명은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면, 권고는 선택과 거부가 자유로운 자발적으로 실천 행위로 이해되었고, 복음적 권고는 교회 내 특정 부류의 사람, 특히 수도자들에게만 요청되는 이차적인 계명처럼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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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같은 곳. 여기서 ‘완덕’, ‘성덕’,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실제도 교회 내에서 성덕과 완덕이란 용어는 유사한 개념으로 간주하여 구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성덕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선물이며,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천상적인 존재로 들어 높이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은총의 신비”라고 한다면, 완덕은 “은총과 인간의 협조적인 행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덕의 발전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 생활의 어떤 충만성”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교회헌장』은 그리스도인의 완성이 성덕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 아래 성덕과 완덕,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충만성 등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박재만, “성덕”, 『한국가톨릭대사전 7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4554-4555쪽.
11) 『교회헌장』 41항.
12) 우르바노 8세 교황(1623-1644)가 마련한 시복 시성 절차법에는 ‘삶의 성성(聖性)’인 ‘영웅적인 덕’의 확인을 요구하면서, 영웅성의 명확한 기준과 구체적인 덕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후 시성 절차 전문가이자 훗날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된 프로스페로 람베리니(Prospro Laberini)는 우르바노 8세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세분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과 영웅적 성덕의 개념을 준용한 점을 간파하고 시성의 안건을 다루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참조: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시복 시성 절차 해설』, 73쪽.
13) Cf. Benedicti Papae XIV, Doctrina de Servorum Dei Beatificatione et Beatorum Canonizatione, III, 22, 8, pp.142-143;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시복 시성 절차 해설』,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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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토마스 성인은 복음적 권고가 그리스도교 성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설명하면서도, 사랑의 계명처럼 애덕을 지향하고 있고, 또 애덕을 실천하는 데 있어 방해되는 장애들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권고 역시 성덕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도구가 된다고 가르친다.16) 그렇다면 복음적 권고는 단지 교회 내 특정한 부름을 받은 이들만이 실천하는 덕행이 아니라, 성덕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중요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교회헌장』도 복음적 권고가 교회의 일부 신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라 강조한다. 그래서 복음적 권고는 교회 안에서 수도자를 평신도와 구별하는 표지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에로 인도하는 모든 수단에 영감을 주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17)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복음적 권고는 공적으로 수도 서원을 하고 축성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 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무로 부과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덕의 보편적 소명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권고의 정신에 따라 사랑의 계명을 성실히 지킴으로써 효과적으로 자신을 성화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18)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앞서 살펴본 토마스 성인의 복음적 권고에 대한 확장된 이해와 『교회헌장』에서 설명하는 성덕과 복음적 권고 사이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하느님의 종의 구체적덕행을 검증하기 위해 묻는 ‘질문의 서식’에서 복음적 권고와 겸손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19) 복음적 권고에 따른 브뤼기에르 주교의 덕행의 검증은 그의 영웅적인 성덕을 밝히는 데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제 브뤼기에르 주교는 복음적 권고에 따라 어떤 영웅적 덕행을 실천했는지, 가난, 순명, 정결, 겸손 그리고 주교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드러난 사목적 덕행의 영웅적인 면모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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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f. A.-I. Mennessier, “Conseils évangéliques”,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 t.2, Paris: Beaushesne, 1953, pp.1595-1596.
15) 참조: 백남일, 축성생활신학회 편, “복음 권고”, 『축성생활 용어집』, 프란치스코출판사, 2015, 45쪽.
16) Cf. Thomas de Aquino, Reginald, td., Summa Theologiae, II-II. q.184, a.3, Paris: Cerf, 1984, pp.2260-2262; W. 패렐, 윤주현·주규홍 역,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해설서 III』,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1, 718-720쪽.
17) H. V. 스트라렌, 현석호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총서 3』, 성바오로, 1991, 360쪽.
18) 참조: J. 오먼, 이홍근 역, 『영성신학』, 분도출판사, 1987, 130쪽; 임병헌, 「수도자의 정체성에 관한 소고」, 『신학과 사상』, 12, 1994, 23쪽; 김흥주, 「그리스도교 성덕에 관한 신학적 고찰」, 『누리와 말씀』, 26, 2009, 168-169쪽.
19) 참조: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시복 시성 절차 해설』, 316-317쪽.
20) 참조: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 - 복음적 가난」, 『신학전망』, 81, 1988, 139-142쪽;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I) - 복음적 가난」, 『신학전망』, 82, 1988, 136-141쪽.
21)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시복 시성 절차 해설』, 316쪽.
22) “사람들은 내가 너무나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행기』, 102쪽) “어느 중국인 회장이 내 옷이 지나치게 소박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도 샴에 있을 때보다는 낫게 입은 편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여행기』,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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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음적 가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유하시면서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2코린 8,9 참조)를 본받아 자발적으로 가난의 복음적 덕행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이나 허전함, 그리고 부족함을 물건이나 명예 또는 권력, 또는 다른 인간에게 서 찾아 그것을 채우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복음적 가난은 물질적 차원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오로지 하느님과 이웃만을 사랑하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뜻한다.
복음적 가난의 본질은 크게 외적인 차원과 내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20) 전자는 재물이나 명예, 권력 등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며, 후자는 모든 집착과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그분의 섭리에만 의지하는 영적인 태도를 뜻한다. 이 같은 가난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시복 절차에 있어 증인에게 요청되는 ‘질문의 서식’에서도 발견된다. “하느님의 종이 그 자신의 생활 방식과 삶의 조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명예와 세속적인 재산과 지상의 부에 대한 사도적 영성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물질적 부의 사용에서 그의 습관적인 태도는 어떠하였는지 확인한다.”21)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가난의 복음적 덕행을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겠다.
1) 외적인 차원에서의 복음적 가난
– 재화의 관리, 명예, 권력에로부터의 이탈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복음적 가난의 모습은 전 생애에 펼쳐져 있기에 이를 정리하는 것
은 쉽지 않지만, 몇 가지 주요한 특징들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물질적 재화 관리에 대한 절제 있고 명확한 태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언제나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는 화려한 옷차림보다 늘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으며,22) 언제나 자신의 소유로 있던 물건들을 팔아 선교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하기를 원했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그가 보여준 복음적 가난의 덕행은 무엇보다 선교사이자 주교로서 세속적 재산을 관리한 그 의 절제 있고 명확한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29년 5월 19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동료 회원들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포교성성이 제안한 조선 선교에 대해 회원들이 선교비용 충당의 어려움을 제시하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내일을 걱정하여 섭리를 모욕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새로운 마련해주실 것”23)이라며 강조하며,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의탁을 요청한다. 이는 어떠한 인간적인 계획과 노력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맡기면 된 다는 식의 무모하고 맹목적인 의탁이 아니었다. 같은 서한에서 그는 프랑스 리옹의 전교후원회 의 도움과 포교성성의 원조를 통해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만약 프랑스 교회 내에 선교에 대한 열의가 식게 된다면, 재원을 지혜롭게 절약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할 수 있다는 현 실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그에게 선교란 세속적인 재화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멈추어야 할 인간 적인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섭리하심에 의탁하여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일이었다.
이러한 세속적 재화를 다루는 그의 태도는 1832년 11월 1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낸 서한 에서도 발견된다. 당시 전교회가 재차 조선 교구를 맡을 의향이 없음을 밝히자,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개진하면서 선교를 위한 재정적인 문제는 포교성성이 모든 비용을 책임지기로 약속했기에 해결할 수 있고, 자신 역시 공동체의 금전적 부담을 공동체에 지우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다.
이를 보증하기 위해, 그는 주교 서품식 때 시암 교우에게 받은 것 모두를 깨끗하게 정리하라 지시했으며,24) 파리에서 신자들과 공동체로부터 받은 것 역시 그 값을 계산하여 환불할 것이고, 또 본부에서 보내준 주교 예식서와 전례서, 그리고 주교관(主敎冠)마저 그냥 받을 수 없기에 이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페낭(Penang)에서 마카오(Macao)까지의 여행 경비를 극동지역 파리 방전교회경리부장이었던르그레즈와(Pierre Louis Legrégeois, 1801-1866년) 신부를 통해 갚도록 조처했다고 밝히고, 나아가 본부에서 빌린 돈은 지금 당장 갚을 수 없 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을 처분하면 갚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25)
조선 입국을 위한 긴 여정에 있어 브뤼기에르 주교는 분명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음을 알고 있었고 이에 많은 이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과도한 기부 금을 요구한 적이 없다. 오히려 도움을 주려는 이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기부받았고, 자신이 받은 금액은 세심할 정도로 정확하게 따져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으며, 또한 받은 금액을 아껴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어, 1832년 10월 마닐라에서 마카오로 떠나는 여정을 위해 당시 마닐라 세기(José Seguí Molas, 1773-1845년) 대주교가 뱃삯을 치를 수 있는 여비를 제공했는데,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를 그냥 받지 않고 빌린다는 조건으로 받은 후, 마카오에 돌아와 빌린 돈을 바로 되갚았다.26) 1833년 베이징에 파견했던 이들이 되돌아와 남경(南京) 주교님께 부탁한 약간의 돈을 가져왔을 때도, 그 돈을 빚을 갚는 데 사용하고 남은 금액을 여행 경비에 사용하였다.27) 1834년 산시 지역을 출발하여 만리장성을 향하는고된 여정을 시작할 때, 그곳 주교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돕기 위해 주변에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리려 하자, 산시 주교의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그의 관대한 선심을 사양한다.28)
이후 산시 주교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전교 회장을 통해 돈을 보내주었을 때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돈을 그냥 받지 않고 다 갚았다고 증언한다.29) 세속적 재화를 관리하는 그의 투명한 태도는 1934년 교황청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장 움피에레스(Raffaele Umpierres, 1823-1837 재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이 지원받은 금액을 상세히 보고하면서 자신은 결코 돈을 무모하게 낭비하지 않았고, 남은 돈은 공평하고 올바르게 지출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30) 이후 서한에서는 선교에 있어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경비 지출이 생긴다는 점을 상세히 설명하며, 자신은 결코 돈을 헤프게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31)
이처럼 “빚을 지고는 못사는 성품”32)을 지닌 브뤼기에르 주교는 개인적으로 소유한 것을 언제나 선교 여행을 위한 경비로 기꺼이 내어놓았고, 주교로서 공적인 재산을 매우 투명하게 관리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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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한집』, 10신, 127쪽.
24) 여행기를 살펴보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을 떠나 싱가포르로 가는 여정에 앞서 자신의 소유를 이미 모두 버렸다. “클레망소 신부는 내게 25 피아스터를 빌려주었습니다. 뱃삯을 치를 돈이 내겐 없었습니다. 샴 선교지를 떠나면서 나는 아무것도, 응당 내 몫이랄 수 있는 것조차 챙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행기』, 91쪽)
25) 참조: 『서한집』, 20신, 177-178쪽.
26) 참조: 『여행기』, 107쪽.
27) 참조: 『여행기』, 191쪽. “난징 주교가 350테일을 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베이징이나 마카오에서 갚기로 서로 합의했습니다. 움피에레스 신부님에게 요청하건대 이 편지를 받는 대로 이 빚을 청산해주시기 바랍니다.”(『서한집』, 30신, 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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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예와 권력의 욕망으로부터의 자기 이탈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복음적 가난의 실천은 개인적 소유의 기꺼운 희사와 공적 재산의 투명한 관리뿐만 아니라 세속적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한 그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출신 교구인 카르카손(Carcassonne)교구의브루동클(J.-Camille Bourdoncle)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사제로 서품을 받은 후,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신학교의 교수로, 그리고 철학 의장(chaire de Philosophie)까지 맡으며 재능을 인정받았고, 서품을 받은 지 4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교구의 명예 참사회(chanoine honoraire) 사제가 될 만큼 명예로운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보장된 영예와 애착들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이 원하신다(Dieu le veut)”34)는 확신 아래, 선교사의 소명을 받아들인다.
선교사가 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암 교구를 떠날 때, 페낭 교우들에게 어떠한 송별의 인사없이 조용히 선교지로 떠난다.35) 또 싱가포르의 교우들과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인간적인 마음에 단순한 끌림으로 어떤 특정한 파벌에 매여 공동체가 와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하는데,36)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개인적인 영달이나 혹은 인간적인 애착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태 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본다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물질적인 절제와 가난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착과 명예, 권력에서 비롯되는 탐욕을 늘 경계하며 일관된 모습으로 가난의 덕행을 보여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내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복음적 가난 – 자기비허(自己卑虛)를 통한 하느님께 완전한 의탁브뤼기에르 주교는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남들에게 좋은 표양이 되고자 절제와 가난의 삶을 살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삶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내적인 차원의 복음적 가난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실천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을 위해 노력했다. 부르동클 신부는 그가 어려서부터 프랑스 혁명 때 충직한 사제들과 신심 깊은 그리스 도교 신자들이 잔혹한 고문의 고통 앞에 보여준 영웅적 행동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하면서, 이는 분명 “그의 영혼을 불태웠고, 마음을 무장시켰으며,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강한 결심”37)을 어려서부터 갖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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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참조: 『여행기』, 239쪽. 이때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서만자(西灣子)로 가는 길에서 교우들을 만나고 그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를 위해 여행 경비를 봉헌한다.
29) 참조: 『여행기』, 325쪽.
30) 참조: 『서한집』, 31신, 254-255쪽.
31) 참조: 『서한집』, 41신, 290쪽.
32) 최인각,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96쪽.
33) 그렇다고 가난에 대한 자신의 엄격한 잣대를 타인에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향하는 동행인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저를 장난에서 데리고 온 마지막 사람이 저에게서 60냥을 받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 수레, 말 한 마리, 당나귀 두 마리를 팔아 자기가 가져가 버렸습니다.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여행기』, 290쪽)
34) J. C. Bourdoncle, Monseigneur Barthélemy Bruguière du diocèse de Carcassonne,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 (1792-1985), Morderne de Chartre, 1938, p.12.
35) 참조: 『여행기』,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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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열망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카르카손의 대신학교에서 수학을 하던 시절에도 완전함과 성덕에 대한 큰 열망을 지녔었고, 특히 차부제로 서품을 받으며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며 세속적인 모든 즐거움을 영원히 포기”38)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선교지로 떠나기 직전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해에 “거의 빵과 물로 목숨을 이어 나갔고, 아무리 충고하여도 은수자와 같은 이 식사”39)를 했다는 그의 오랜 친구의 증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애착에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가난의 덕행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1825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를 앞두고 부모님에게 남긴 고별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선교를 결심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는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도 아니며,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도” 아니며, 남겨진 부모님께 대한 효성에서 나오는 “육정의 소리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더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그의 결심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40)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자기비허는 조선 입국의 과정에서 더욱 빛을 발한 다. 그는 긴 여정 중에 발생한 모든 어려움, 곧 사람들의 몰이해, 비난, 거짓 호의와 약속들을 마주할 때마다, 끝까지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그 모든 어려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길 을 걸어갔다. 1832년 10월 18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위해 페낭을 출발하여, 싱가포 르,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하는데, 파리 외방전교회는 그가 전교회를 떠나서 포교성성 파견 선교사의 자격으로 조선으로 간다고 오해하고, 전교회의 극동대표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브 뤼기에르 주교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41)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로부터 받게된 오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본부로 편지를 보내어 자신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가고자 하며, 결코 전교회를 탈퇴할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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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참조: 『여행기』, 100쪽.
37) Cf. J. C. Bourdoncle, Monseigneur Barthélemy Bruguière du diocèse de Carcassonne,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 (1792-1985), p.8.
38) Ibid., p.10.
39) C. 달레, 안응렬·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 中』,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221쪽.
40) 참조: 『서한집』, 1신, 68-69쪽.
41) “나는 그(움피에레스)를 통해 우리 전교회의 지도자 신부들이 내린 단호한 대책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르그레즈와 신부는 “갑사(Capsa) 주교님께서 마카오에 오시면 집으로 맞아들이지 마십시오. 이 일은 교황청 포교성성이 관여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부터)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간결한 표현으로 축약해 보면,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말라’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니 프랑스인도 아니고 동료들도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냉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내가 놀랄 이유가 있겠습니까?”(『여행기』, 108쪽)
42) “저는 애정과 인정으로 고마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고, 더구나 법적으로 단단히 매어 있는 프랑스(파리)외방전교회의 회원으로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서한집』, 19신, 156쪽) “저는 이 선교 임무를 수락함으로써 우리 회에서 탈퇴하는 것을 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서한집』, 20신, 177쪽)
43) “내가 마카오에 도착하기 전에 성 요셉 신학교의 (포르투갈) 사제들은 나를 만난다는 것에 매우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것을 알고 나서는 전에 보여줬던 열성을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여행기』, 114쪽.
44) 이에 대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유럽 출신의 선교사 2명이 시도하는 여행이 가져올 위험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1833년 4월 18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내는 서한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선교지를 지나서 조선으로 가는 여정을 거북하게 여기고 있고, 어떤 두려움 때문에 조선으로의 선교 여정을 자꾸 늦추게 만드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여하튼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이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참조: 『여행기』, 129-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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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를 향한 그의 외로운 싸움은 입국 시도 과정에서 포르투갈 선교사가 보여준 비협조적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 경로를 모색하고 있을 때, 이전에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던 포르투갈 사제들은 그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자 약속 이행을 전혀 서두르지 않았고, 나아가 예전에 보여주던 열성마저 보이지 않았다고 그는 설명한다.43) 강남(江南) 지방으로 가기 위해 복건성(福建省)에 정착했을 때,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동행했던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년) 신부는 강남 지방을 통과할 수 없고 오로지 브뤼기에르 주교만 가능하다는 항의서를 받기도 했고,44)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반대로 자신을 안내해 주던 ‘아중’(Ajoung)을 해고하고 돌려보내야 했다.45)
북경을 향해 길을 떠나 산동(山東)과 직예(直隸)의 경계에 해당하는 교우 마을에 유숙하고 있을 때 북경(北京) 교구장 서리였던 남경의 피레스-페레이라(C. Pirés-Pereira, 1769-1838년)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또다시 비협조적인 태도로 그의 입국을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태도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분석이필요하지만,46)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7-1839년) 주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피레스-페레이라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을 방해하였고, 심지어 그를 “죄수처럼 구금하게 했다”라는 증언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이라할 수 있겠다.47)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을 여행하며 성사 관련 허가를 받기 위해 지역 교회의 직권자인 피레스-페레이라 주교에게 이를 요청했는데, 이에 아무런 답변도 주지 않아서 곤란을 겪고 있었음을 토로하였다.48)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이라는 위험한 여행을 감행하면서도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충분한 도움과 정보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 방해까지 받은 상황에서, 오로지 조선의 입국로를 마련하겠다는 신념과 의지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였다.49)
이뿐 아니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먼저 조선에 입국하여 자신의 입국을 도와야 할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1795-1854년) 신부의 불순명으로 괴로움을 겪었고,50)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여러 차 례 간청했던 조선의 교우들마저 박해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그의 입국을 주저하는 모습 을 마주하는 아픔을 겪었다.51) 또한 1833년 4월 23일 북안(北安)을 출발하여 북경 부근 직예 지방의 교우촌에 도착하기까지 당시 박해 상황으로 서양인 선교사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는데, 이때 무더위, 허기, 갈증, 먹을 수 없는 중국 음식 등에서 비롯된 육신의 고통으로 결국 병까지 얻게 되었고,52)
나아가 여행을 도와주던 중국인 안내자들의 지나친 소심함과 두려움으로 온갖 무시와 모욕, 심지어 선교지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위협까지 견뎌내야 했다.53)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결국 병을 얻었고, 그 병은 점점 악화되었다.54) 심지어 황하 를 건너가는 도중에는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겪었으며,55) 습한 날씨에 수종증(水腫症) 증상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56) 또한 서만자에 머물면서 천주교 신자들, 특히 서양인 선교사들을 겨냥한 것으로 여겨진 박해 때문에 두 번이나 산속 토굴로 피신해야 했다.57)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는, 모방 신부가 그의 선종을 알리기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서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교님은 우선 인도의 작열하는 기후 아래서, 그리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북상하면서 궁핍과 피로와 온갖 고통을 겪으신 나머지 기운이 쇠잔하셨던 것입니다...
혹한으로 병이 악화되어 주교님은 참혹한 몰골이 되셨습니다. 온몸이 얼어서 어떤 음식도 소화 시키지 못하셨습니다.”58) 이러한 극심한 고통 중에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 기신 조선 입국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달렸지만, 그토록 원했던 조선의 땅을 밟지 못한 채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5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신의 극심한 고통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반대와 박해로 겪게 된 정신적 차원의 고통 앞에서도 자신의 본성에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 의 섭리를 믿고 그분께만 의탁하려 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음적 가난의 덕행이다.
“이렇게 길고도 험난하며 위험한 여행에 따르는 불편들인 것을요. 현재까지 저로서는 놀랄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선 선교 임무를 요청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수락했을 때 저는 앞으로 닥칠 모든 일과 위험을 예견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덜 겪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명령과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기획은 언제나 숭앙할 일입니다. 제 임무는 그러한 것을 납득하여 복종하면서 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상이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으면서 제가 세운 굳은 결심입니다. 제가 가는 길은 제가 모두에게 버림받을 때, 그러니 제가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는 게 불가능해질 때라야 비로소 멈출 것입니다.”60)
브뤼기에르 주교는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의 양 떼를 버리지 않는 참된 목자의 모습으로 온갖 고통과 박해 앞에서 결코 조선 교우들을 포기하여 도망치지 않았고,61) 인간적인 도움보다는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며, 그분께서 당신이 뜻하시는 좋은 일을 이루시리라 굳게 믿었으며, 그분께만 희망을 걸었다.62) 사실 당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가겠다는 뜻은 이미 순교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교우들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았다.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 온갖 고통과 죽음이 뒤따를 것임을 잘 알면서 도 자발적으로 또 기꺼이, 그리고 흔들림 없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곧 인간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복음적 가난의 모습이 보여주었다.
있는 주관적 표지이고, 또한 개인의 양심과 판단 역시 인간적 불완전성으로 인한 오류의 가능성 이 있기에 “사심과 감정을 떠나 교회와 수도회의 가르침을 토대로”67) 올바르게 판단할 필요가 있는 주관적 표지가 된다. 이러한 순명의 신학적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와 하느님께 대한 순명의 모습을 구분하여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순명의 영웅적인 측면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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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그가 “말이 많고 거칠고 정직하지 않다는 둥, 난징 선교지 도처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으로 판단하여 남경에 데리고 가는 것을 금지시켰고, 이에 위반할 시, 남경 교구의 총대리의 권한으로 그를 배에 억류하게 할 것이라 공식적으로 통보한다. 결과적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아중을 해고하여 돌려보내야만 했다. 참조: 『여행기』, 130쪽.
46) 참조: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敎會史硏究』 44, 2014, 201-205쪽.
47) 참조: 수원교회사연구소 편,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239쪽.
48) 참조: 『서한집』, 40신, 286쪽.
49) 참조: 최석우, 조현범·서정화 역,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1592-18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40-150쪽;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209쪽; 최병욱, 「조선대목구 설립 전후의 중국 교회 상황」,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자료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 67쪽.
50) 참조: 『서한집』, 30신, 283-284쪽; 56신, 371-372쪽.
51) “그들은 이토록 약속도, 선교사들과 주교를 얻기 위해 교황님께 간절히 청원했던 것마저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산과 바다도 넘고, 청하던 바(선교사들과 주교)도 얻었지만, 그들은 무지하게도 위험에 대한 공포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서한집』, 40신,
281) “파치피코 신부가 저의 선두 주자가 되어주고 저의 길을 닦아 줄 것이라고, 저만 빼고 모두들 믿었지만, 그는 저의 입국에 또 다른 장애물이 되어버렸습니다.”(『서한집』, 46신, 317) “현재 저는 파치피코 신부에게 기대할 것이 전혀 없으며, 포르투갈 신부들에게는 더욱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미 절망적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은, 공포 때문에 성공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또는 다른 이유에서든지, 제게 도움을 주기는 고사하고 간접적으로 자꾸 새로운 반대 근거를 대고 있습니다.”(『서한집』, 47신, 325쪽)
52) “피로하고 무더운 데다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은 결과, 복부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이질이 분명했습니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 바람에 나는 기진맥진하여 계속 눕거나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나에게 휴식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여행기』,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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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음적 순명
교회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요한 4,34; 5,30; 히브 10,7 참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필리 27; 히브 5,8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적 순명을 권고한다. 일반적으로 순명은 다른 누군가의 밑에서 그의 명령이나 의사를 그대로 따르는 복종으로 간주하여 인간의 자유, 인권, 개인적인격을 방해하는 요소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순명은 하느님께서 불완전하여 죄로 멸망할 인간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순명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완성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마련한 선물이다.63) 그래서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이하 『수도자 교령』)은 순명이 “인간 존엄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자녀로서 더욱 폭넓은 자유를 누려 성숙에”64) 이르게 하는 덕행이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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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그들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소심했습니다.”(『여행기』, 170쪽) “어느 길잡이는 많은 은수 성인들도 하지 않는 고행을 내게 시키려 들었습니다. 내가 피로에 기진맥진한데다 작열하는 햇볕에서 거의 질식할 지경이 되어 그늘에 가서 앉으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어떻게 고통을 피하려고 하실 수 있지요? 주교님이 쉬어야 할 곳은 햇볕 아래, 그리고 쓰레기더미입니다...이런 종류의 논리는 다만 침묵으로 응수할 일입니다.”(『여행기』, 171쪽) “내 길잡이들은 기겁하여 나를 심하게 꾸짖고 형언 할 수 없는 위협을 해댔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말했습니다. “제가 조선 사람들에게 말해서 주교님이 조선에 입국하지 못 하도록 막고 말 것입니다. 로마에게도 편지를 쓸 것입니다.””(『여행기』, 183쪽)
54) “이날 이후 내 병은 악화 일로로 치달았습니다.”(『여행기』, 178쪽)
55) “우리가 배에 올랐을 때 나는 보통 때보다 훨씬 심해진 열로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입술이 말라 아래위로 어찌나 착 달라붙었던지 손으로 떼어내야만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임종에 처한 해수병자처럼 숨을 헐떡였습니다. 숨이 어찌나 꽉 막히던지 거의 20분 동안은 꼭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공기를 마시게 한답시고 햇볕이 쨍쨍내리쬐는 밭 가운데로 나를 보냈고… 그나마 붙어 있던 숨길마저 끊어질 뻔했습니다.”(『여행기』, 181-182쪽)
56) “다리가 부었다 가라앉았다 하는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 습한 날씨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수종에 걸렸거나 아니 면 걸리게 될 것이라고들 말합니다.”(『서한집』, 46신, 322쪽)
57) 참조: 『여행기』, 327-336쪽.
58) 『서한집』, 54신, 361-363.
59) 브뤼기에르 주교가 겪은 수많은 고통은 1835년 8월 7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잘 요약되어 있다. “3년 이상 땅과 바다를 떠돌며, 중국에서 방황하고, 만주에서도 이리저리 헤매는 불쌍한 당신 종의 처지도 기억하십시오. 제가 발을 쉴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밀쳐지노라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어떤 사람들은 주저하면서도 받아들여 주지만, 제가 쉴 곳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공경할 만한 중국인 사제가 저를 초대해 받아주었는데, 그 즉시 난징 주교는 편지를 보내 제가 선교지의 평화를 뒤흔들러 만주로 왔다고 아우성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디로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아무 말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환영까지 받으며 어디든 지나가는데, 저 혼자만 원성을 듣지 않고는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습니다.”(『서한집』, 47신, 336쪽)
60) 『서한집』, 30신, 247쪽.
61) 참조: 『서한집』, 47신, 333쪽.
62) “모든 인간적인 도움은 금방 지나갈 것이요, 하느님의 섭리만이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입니다. 낙담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저는 추기경께서 저희 처지에 대해 아시리라 믿고 더더욱 오직 하느님께만 제 희망을 두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미 시작된 일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임을, 인간적 시도를 바라고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오른손으로 놀랍게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을 믿는 것보다 주님을 믿는 것이 선(善)입니다.”
(『서한집』, 47신, 337쪽) “저는 그런 지원군(동행하는 이들)에 거의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저의 의지처는 주님인 것입니다. 성모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제 편이 되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믿음이 어긋나지 않게 되기를 굳게 소망합니다.”(『서한집』, 48신, 340쪽) “저는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희망을 겁니다. 저의 희망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 선하신 하느님게 기도해주십시오.”(『서한집』, 49신, 33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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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록 신부에 따르면, 수도 생활에 있어 복음서는 “모든 수도회의 최고의 회헌”이며, 교황은 “모든 수도회의 최고 장상”66)으로 객관적 표지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교회와 수도회의 장상들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주관적 표지이고, 또한 개인의 양심과 판단 역시 인간적 불완전성으로 인한 오류의 가능성 이 있기에 “사심과 감정을 떠나 교회와 수도회의 가르침을 토대로”67) 올바르게 판단할 필요가 있는 주관적 표지가 된다. 이러한 순명의 신학적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와 하느님께 대한 순명의 모습을 구분하여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순명의 영웅적인 측면을 살펴보겠다.
이러한 순명의 본질은 복음적 가난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차원과 소극적인 차원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65) 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며, 후자는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는 자기의 뜻과 생각을 희생하고 이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적극적인 차원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표지들을 객관적인 차원과 주관적인 차원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객관적 표지’로서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하느님의 말씀’, 곧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그리고 ‘교회법’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회칙’ 또는 그에 준하는 ‘공식적 가르침’에 대한 순명이다. 그다음, ‘주관적 표지’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기는 하지만, 때론 객관적으로 틀릴 수도 있기에 개인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순명이다.
1) 교회에 대한 복음적 순명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이자 주교로서 자신이 맡은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 언제나 하느님 말씀, 곧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특별히 교회의 통치에 철저하게 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1828년 1월 6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새로운 선교지로 조선 교회를 맡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회원들에게 회람을 보냈는데,68)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에 대한 찬성 의견을 제시하면서, 만약 지원자가 없다면, 자신이 직접 조선에 가겠다는 의향을 밝힌다.69)
또한 1829년과 1830년에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어 조선의 선교사로 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70) 이러한 태도는 충동적이거나 자신이 소속된 시암 교구장의 통치를 거스르는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으로 떠나고자 하는 열망이 오히려 소임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깊이 고민하였고,71) 시암 대목구의 플로랑(Esprit Florens, 1762-1834년) 주교에게 의견을 묻고 또 그의 허락을 받았다.72) 또한 조선의 선교를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북경에 체류하던 프랑스라자리스트회(Les Lazaristes) 소속 라미오(Louis Lamiot, 1767-1831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는데, 이때 브뤼기에르가 묻는 질문들을 살펴보면 그의 결심은 결코 충동적이지 않고 신중하고 치밀하게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검토한 결과라 할 수 있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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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Cf. J.-M. Tillard, “Obéissance”,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 t.11, Beaushesne, 1982, pp.543-546.
6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Perfectae Caritatis, 196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3, 14항.
65) 참조: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IV) - 복음적 순명」, 『신학전망』 85, 1989, 107-114쪽;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V) - 복음적 순명」, 『신학전망』 86, 1989, 131-139쪽.
66)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IV) - 복음적 순명」, 113쪽.
67) 같은 곳.
68) 참조: 『여행기』, 77쪽.
69) 참조: 『서한집』, 10신, 126-127쪽.
70) 참조: C.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中』, 231-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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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었는데,74) 이때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본부로부터 받은 공한에 대해 자신의 행위는 결코 전교회를 무시한 태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자 노력했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책임자에게 무례했거나 도를 넘는 말과 행동이 있었다면 용서해달라는 진심 어린 청을 드린다.75)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포르투갈 선교사들과의 갈등 속에서, 그 무엇보다 ‘모 든 수도회의 최고 장상’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의 결정에 철저히 순명했다. 그는 1832년 7월 초 아직 자신이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편지를 보 내어 자신이 조선으로 떠나는 것이 교황청 포교성성의 공식 의향인지 재차 물으면서, 만약 자신 의 의지가 받아들여졌다면, 교황 성하의 공식 파견 명령을 받길 청하는데,76) 이러한 그의 모습 은 교회의 통치에 어긋나는 독립적인 활동을 펼친 것이 아니라 상급 기관, 특히 그리스도의 대 리자인 교황의 결정에 따르는 철저한 순명의 태도였음을 보여준다.77)
“저는 제 선교 임무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교황 성하께서 저를 직접 파견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까닭에 오직 하느님만 믿습니다. 저는 강제로 도중에 도리 없이 체포되기 전까지는 제가 가야 하는 땅을 향해 하느님 섭리의 품에 몸을 묻고 머리를 숙이며 위험을 헤쳐 나갈 것입니다.”78)
이러한 교회에 대한 순명은 조선 입국 과정에서 성사 금지령과 브뤼기에르 주교 혼자만 국경 을 넘으라는 남경 주교의 명령에 따라 그 명령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모습에서도 발견된다.79) 그는 포교성성이 조선 대목구의 관할권을 명시적으로 확정해 주지 않아 생긴 오해에 자신의 권한에 대한 분명한 결정을 간청하면서도, 명확한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언제나 교회법에 따른 재치권(裁治權)을 존중했고 교회에 순명했다.80)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결코 인간적인 측면의 기교나 책략이 아니라, 언제나 교회의 통치, 특히 교황에게 순명하며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2) 하느님께 대한 순명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에 도착한 후, 자신이 몸담았던 카르카손 대신학생들에게 아시아 선교를 독려하기 위한 편지를 보내는데, 선교 열망을 누그러뜨리는 인간적 충고와 반대를 경계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오로지 하느님께만 순종하는 선교적 열망을 지니라고 권고한다. 그는 당시 누군가 먼 고장으로 선교를 떠나려 할 때, 온갖 반대 이유를 들며 사제가 고향에서 사목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에 “살과 피를 지닌 인간들이 여러분의 계획을 반대하는 소리에 귀를 막으십시오.”81)라고 강한 어조로 권고하며,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훨씬 값진 것임을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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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저는 조선 교우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여러 번 있었지만, 제게 맡겨진 소임(샴 교구 사목)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으로 가려고 제 소임을 버리는 것은 변덕스러운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서한집』, 6신, 84쪽)
72) “나의 주교이신 소조폴리스(Sozopolis) 명의 주교님(샴 교구장 플로랑)께 그 일에 대한 내 원의를 말씀드렸고, 그분께서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시며 이 청원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교님은 내가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는 의향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여행기』, 77쪽) 이후, 플로랑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계획에 찬성하며 1829년 6월 20자로 여기에 동의한다는 서한을 포교성성에 보낸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만일 필요하다면 가엾은 조선 사람들을 구원하러 가겠노라고 진심으로 자진하여 나섰고, 나도 그것이 주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면, 그를 기꺼이 내 놓겠습니다.” 참조: C.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中』, 232쪽.
73) 참조: 『서한집』, 11신, 137-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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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순명의 태도는 자신이 목숨을 바쳐 투신한 선교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모습에서 더욱 빛난다. 프랑스 리옹의 전교후원회에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자신의 선교를 위해 기부한 봉헌금에 감사를 드리며 조선의 교우들과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를 청한다. 그러면서 선교의 결과가 어떻든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려는 열망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끄심과 헤아릴 길 없는 섭리를 알 수 없으므로 너무 따지지 말고 경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친히 영감을 불러일으키신 원의를 이루어주지 않으실 때도 있고, 당신 친히 마음속에 심어주신 소원을 충족시켜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선의와 노력을 요구하실 따름입니다. 성공 여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당신 기획을 이루도록 간구하는 분수를 지킵시다… 조선 선교 결과가 어찌되든지, 저는 언제나 자족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자족하렵니다.
제가 일생일대 목표에 도달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는 혜택을 누린 셈이 될 것입니다. 제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진다면 비록 제가 쟁취하지는 못했더라도 (다른 선교자들이 쟁취할) 승리의 열매를 미리 맛보며 즐길 것입니다.”82)
여기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추구하는 선교사가 지녀야 할 참된 순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결코 인간적인 명예나 명성을 얻기 위해 조선의 선교사로 자청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 신의 양심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고,83)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자기 봉헌이었다. 그는 자신의 봉헌이 어떠한 결과를 맺든 자신은 선교사로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것에 자족하는 영웅적인 순명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영웅적 순명의 태도는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온갖 비협조적인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 선교자가 가져야 할 태도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아무런 대꾸 없이 복종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는 게 올바른 처신입니다. 선택된 선교사들은 난관과 위험에 대해 노심초사하지 않고 자기네 상관이 내린 명령을 마치 하느님의 명령처럼 기꺼이 수행해야 합니다. 실로 상관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니까요. 선교사는 일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부지런한 일꾼처럼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상관이 그를 다시 부르면 똑같이 순종하고 똑같이 신속한 태도를 보이면서 되돌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전자의 경우나 후자의 경우나 내가 맹종이라
고 부르는 이렇나 순종이야말로 선교사라면 마땅히 지녀야 하는 소명의 시금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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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파리 본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의견과 태도에 어떻게 반응하고 응대했는지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조현범,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자료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 42-46쪽.
75) 참조: 『서한집』, 20신, 168-171쪽; 『여행기』, 83쪽.
76) 『여행기』, 83-84쪽.
77)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 과정에서 여러 논란으로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조선 선교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이고, 또한 교황에 의해 파견된 것임을 확신했기에 오직 하느님께 의탁하여 좌절하지 않았다. 참조: 방상근,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자료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 86쪽.
78) 『서한집』, 48신, 341쪽.
79) 참조: 『서한집』, 40신, 285-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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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신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해서 오로지 죽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제는 사도들의 흔적을 밟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늘 확인받게 됩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들로부터 깨끗하게 벗어납니다. 게다가 자신의 선교 임무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이 보상받게 될 것에 대해 확신합니다.”84)
브뤼기에르 주교는 전 생애를 통해 언제나 하느님께 순명하였고,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신 교황과 교회에 순명하였다. 때론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교회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히 자신을 낮추고 언제나 교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결정에 따랐다. 이처럼 그가 전 생애를 통해 보여준 순명의 덕행은 가히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느님 은총으로 얻어진 순명의 열매라 할 수 있겠다.
4.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음적 정결
교회는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마태 19,12)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동정이나 독신 생활을 통해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1코린 7,32-34 참조) 더욱 수월하게 오직 하느님께만 헌신”85)하는 정결(淨潔)을 권고한다. 정결은 인간의 마음을 자유롭게 만들어 하느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은총의 탁월한 선물이다.86)
그래서 정결은 혼인과 가정 생활에 대한 경시 또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참된 정배이신 그리스도께 바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 위해 그분의 일에 더욱 마음을 쓰고, 이로 써 세상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사랑의 표지와 자극제”87)가 된다. 이러한 정결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지만, 이 은총의 상태를 보존하고 완성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도움을 신뢰하며 자기 힘을 과신하지 말고 극기하며 관능을 절제”88)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결의 본질 역시 가난과 순명과 마찬가지로 소극적인 차원과 적극적인 차원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89) 전자는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포기와 모든 종류의 성적인 만족을 포기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이는 성(性)과 관련하여 부도덕한 성행위를 거부하는 성욕의 절제뿐만 아니라, 모든 성적인 행위를 스스로 금욕하는 독신의 동정성을 포함하고 나아가 정신적인 차원의 정숙함을 포함하는 것으로, “성(性)이 인격 안에 조화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고 이로써 육체적이고 영적인 측면이 온전한 통합을 이루고 있는 상태”90)라 할 수 있다. 후자는 하느님만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나아가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서,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에게는 서약을 통해 정결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정결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정결의 복음적 덕행을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아울러 그 안에서 드러난 영웅적인 모습을 제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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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저희는 모든 인간적인 도움에서 버림받았으니 오직 하느님과 사도좌만을 믿고 있습니다… 저는 교황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이 수천 명의 새 교우들의 구원을 간청합니다… 저희는 교황 성하의 명시적인 명령이나, 물리적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가 아니면,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입니다.”(『서한집』, 40신, 284쪽)
81) 『서한집』, 8신, 99쪽.
82) 『서한집』, 21신, 196쪽.
83) 브뤼기에르 주교가 5가지 이유를 대며 선교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양심’에 순종하기 위함이라고 밝히는데, 이 양심에 대해 최인각 신부는 그가 “순종해야 할 신앙”이라고 표현하면서, 오로지 신앙에 순종하고자 목숨을 걸고 조선으로 향한 것이며, 그의 여정은 “신앙을 증거하는 장한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참조: 최인각,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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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극적인 차원의 정결
–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포기, 그리고 성적 만족의 포기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성적 만족을 포기는 그가 남긴 서한들과 여행기에서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정결을 위해 노력한 그의 영적 태도가 어떠했는지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91) 그럼에도 브루동클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시절과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경건함을 잃지 않았고, 완전함과 성덕을 향한 큰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92) 이성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성적 욕구와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의 본능을 포기하고자 노력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정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태도는 그가 선교사로서 해외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애정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결심하는 모습에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선교사가 되려는 그의 결심 앞에, 사람들은 연로한 부모님의 애정, 그리고 그분들이 받게 될 충격 등을 거론하며 그를 말리고자 했지만, 부모님에 대한 애정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더 강력했기 때문에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효를 저버린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온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요구되 는 희생을 받아들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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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여행기』, 322-323쪽.
85) 『교회헌장』 42항.
86) 참조: 『수도자 교령』 12항.
87) 같은 곳.
88) 같은 곳.
89) 참조: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II) - 복음적 정결」, 『신학전망』 83, 1988, 148-153쪽;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III) - 복음적 정결」, 『신학전망』 84, 1988, 119-126쪽.
90) 이용훈, “정결”, 『한국가톨릭대사전 10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7510쪽.
91) 여행기를 보면, 자신이 선교하는 지역의 여성들을 묘사하는 부분이 드물게 나타나는데, 이는 선교의 대상으로서 여인들이 속한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태도이지 결코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참조: 『여행기』, 133-135쪽.
92) Cf. J. C. Bourdoncle, Monseigneur Barthélemy Bruguière du diocèse de Carcassonne,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 (1792-1985), pp.8-10. 전기에 따르면, 1812년 삭발례를 받은 뒤, 21세의 나이에 차부제로 서품을 받는 과정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면서 “세속의 즐거움을 영원히 포기”했다고 증언한다.
93)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로서 해외로 출발하기 전, 선교지의 박해로 순교에 이를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않고 떠났다. 이에 대해 브루동클 신부는 이는 분명 “속임수일 수도 있었고, 정직하지 않아 보였지만, 효심을 다한 행동”이었으며,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고통스러워할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주 편지를 보냈다고 증언한다. Ibid., p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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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극적인 차원의 정결
- 하느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조선 교우들에 대한 사랑
적극적인 차원의 정결이란 하느님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온전히 봉헌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인간적 사랑과 감각적 만족을 스스로 희생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 자체이신(1요한 4,16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정결인 것이다. 나아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사랑하도록 이끄는 원천이 된다. 이러한 사랑으로 완전한 정결의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정결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94)
브뤼기에르 주교는 언제나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은 그가 남긴 서한과 여행기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분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고,95) 비록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때마다 용기를 잃지 않고 더욱 하느님만을 굳게 믿었으며,96) 인간적인 기대보다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 하고자 했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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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참조: 김보록, 「영성생활 – 신학적 전망 (XII) - 복음적 정결(I)」, 148-149쪽.
95) ”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서한집』, 1신, 68쪽), “이 세상에서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추구해서야 되겠습니까?”(『서한집』, 1신, 69쪽)
96) “저희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제게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일을 매듭지으시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저희가 엄청난 위험들을 겪은 것은 맞지만,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저희를 그것들에게 구해주셨습니다. 그 성스러운 이름이여, 찬양받으소서!”(『서한집』, 32신, 261-262쪽)
97) “모든 인간적인 도움은 금방 지나갈 것이요, 하느님의 섭리만이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미 시작된 일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임을, 인간적 시도를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오른손으로 놀랍게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을 믿는 것보다 주님을 믿는 것이 선입니다.”(『서한집』, 47신, 337 쪽) “저는 그런 지원군에 거의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저의 의지처는 주님인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제 편이 되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제 편이 되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믿음이 어긋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합니다.”(『서한집』, 48신, 340쪽) “저는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희망을 겁니다. 저의 희망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서 선하신 하느님께 기도해주십시오.”(『서한집』, 49신, 343-344)
98) 참조: 『서한집』, 10신, 20신.
99)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지에 대한 소식을 접한 상세한 경위는 다음을 참조하라. 조현범,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28-34쪽.
100) 참조: 『서한집』, 6신, 82-84쪽.
101) 『서한집』, 7신, 92쪽.
102) “천주교를 위해 그렇게도 많은 공을 세운 수많은 신입 교우들에게, 더구나 신덕이 아직 약하고 갖가지 유혹에 둘러싸여 있는 수천 명의 교우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일이야말로 애덕의 의무가 중히 명하는 것 아닙니까?”(『서한집』, 10신, 129쪽) “저새로운 교회, 귀양살이와 종살이를 하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도 망나니들의 도끼날 밑에서 아직 복음을 전하고 신입 교우의 숫자를 끝없이 불려가는 용감한 증거자들을 아직도 수많이 가지고 있는 저 교회, 그래 저 교회가 버림을 받아야겠습니까? 아니,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자마자 공경하고 사랑한 조선인들에게 엄하고 매정하게 하시겠습니까?”(『서한집』, 10 신, 132쪽) “여러분이 이런 선교지를 포기하면, 구원도 위도로 받지 못하는 불쌍한 신입 교우들은 실망하고 낙담하여 옛날 미신에 다시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먼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할 희망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 니다.(『서한집』, 10신,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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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에 대해 주저하고 있는 전교회 본부의 신부를 설득할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전교회가 언급한 다섯 가지 이유에 선교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며, 동시에 끊임 없이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조선 교우들을 위한 더 큰 사랑을 드러내자고 호소한다.98)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온전한 사랑은 조선 교우들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선교지인 시암 대목구로 떠나기 전, 마카오에서 움피에 레스 신부와 라미오 신부를 통해 조선의 교우들이 교황님께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내 고 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99)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소식을 카르카손 교구 총대 리 귀알리(E. de Gualy, 1786-1842년)에게 전하면서 만약 포교성성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맡긴다면, 자신이 즉시 조선으로 출발할 것을 밝히면서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100)
또한1827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루아(C. F. Langlois, 1767-1851년) 신부에게 자신이 맡은 선교지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 선교지에 대해 언급하는데, “어째서 저 불쌍한 조선 교우들을 돌볼 사제가 온 유럽에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101)라고 말하면서 조선 교우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이러한 애정은 1829년 파리 본부에 처음으로 자신이 조선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힌 서한102)과 파리 본부의 오해를 해결하고자 보낸 1832년 서한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특히 1832년 서한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태도로 조선 교우 들이 더욱 불행한 상황에 놓이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은 조선 교우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감동적인 장면이라 여겨진다.103)
브뤼기에르 주교는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구원을 위해 온갖 어려움과 인간적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을 모두 견디어 내었다. 여행길에 조선을 입국할 수 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 의견들과 그의 입국을 방해하려는 많은 이의 비협조적 태도, 심지어 박해에 대한 두려움과 소심함으로 그를 받아들일 상황이 못 된다고 밝히는 조선 교우들의 모습에,104) 비록 이에 대해 인간적인 실망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105) 브뤼기에르 주교는 결코 조선의 입국 포기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에 맡기고 죽기까지 그 길을 달려간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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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조선 사람들에게 목자로 파견된 이 사람의 실수 때문에 조선 교우들이 손해보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그들은 이미 더없이 불행한 상황인 만큼, 그들의 불행이 더욱 깊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서한집』, 20신, 171쪽)
104) 이와 관련된 내용은 1883년 유(길진) 아우구스티노 등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들과 1834년 말경 (남이관) 세바스티아노가 브뤼기에르 주교께 보낸 편지에서, 그리고 1834년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브뤼기에르의 서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참조: 『서한집』, 40신, 280-284쪽; 『여행기』, 277-284, 357-365, 385, 371-375쪽.
105) 방상근은 조선 교우들이 거절에서 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완곡한 어법으로 조선 왕이 공개적으로 주교를 입국 허가를 내주는 방식을 제안한 것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쫓겨났다’, ‘교우들이 약속도 선교사와 주교를 얻기 위해 교황께 간절히 청원했던 것 마저도 저버렸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고 해석한다. 참조: 『서한집』, 40신, 281쪽; 방상근,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81쪽.
106) 죽음까지도 각오한 그의 결연한 모습은 1834년 파리 본부의 랑글루아 총장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어떻든 간에 저희는 모두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을 결심이 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진지를 유지한다는 희망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가 이 모든 과업과 여로의 끝에서 천국을 만나도록 해주십시오… 저희가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굳건히 버텨내고 그리하여 결국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게 되도록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빌어주십시오.”(『서한집』, 39신, 277쪽)
107) 『여행기』, 353-356쪽.
108) 『서한집』, 54신,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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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교우들에 대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깊은 사랑은 1832년 9월 26일 첫 번째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잘 요약되어 있다.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앞으로 너희 나라에 집을 짓고 살면서 죽음에 이를 준비를 이미 하였노라… 이제 나는 날마다 너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며 진복 동정녀 마리아와 하늘의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을 부르며 너희를 천주께 부탁하고 있노라. 나는 이제 너희 교우들에게 강복하노라.”107)
분명히 조선 교우들을 향한 브뤼기에르의 사랑과 기도는 모방 신부가 증언하듯 지금도 천국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주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많이 겪으셨으니, 큰 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교님이 천국에서 당신이 맡으셨던 선교지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계시리라는 확고한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108)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 앞에서도 조선의 교우들을 끝까지 사랑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 그래서 그분 뜻에 더욱 일치하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셨던 예수님 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였다. 모방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가장 좋아하는 덕행은 고신극기와 기도였는데, 그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매주 기도를 드렸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날마다 묵주기도를 바쳤을 뿐만 아니라 성모칠고 묵주기도와 기타 여러 가지 기도를 바쳤으며, 조선 선교를 위해 매일 특별 기도를 바쳤다.
또한 산 이와 죽은 이 가릴 것 없이 프랑스의 친절한 교우들과 전교후원회 회원들을 위해서도 날마다 특별한 기도를 바쳤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을 맞기 직전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는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109)
이처럼 완전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기도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힘입어 자신의 양 떼들을 목숨을 바쳐 사랑하였고, 이는 인간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정결의 실천이라 할 수 있겠다.
5.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음적 겸손
하느님의 종의 구체적 덕행을 묻는 ‘질문의 서식’은 가난, 순명, 정결의 복음적 권고뿐만 아니라 겸손의 덕행도 함께 검증하도록 요구한다.110) 일반적으로 겸손은 오만, 허영, 자기도취 등과는 반대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며,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안에서 겸손은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한 이들이 갖는 태도로서 더 깊은 차원에 근거한다.111)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구세주의 자기 비움을 언제나 본받고 증언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112)
이러한 겸손 역시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겠는데,113) 먼저, 나약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 존재임을 고백하는 자기 인식의 차원이다.
그다음, 온 삶으로 겸손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겸손의 모습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에 대한 불의한 비난에 대해 당당하게 맞섰기도 했지만,114) 이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권력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조선의 입국을 방해하려는 불의한 태도에 명백히 항거하기 위함이었다.115) 하지만, 행여 자신의 태도가 불손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켰거나 올바르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용서를 청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조선의 선교를 맡지 않았다는 사실을 큰 잘못이라 책망했을 때, “이제 보니 제가 여러분을 모함한 것이 되는군요. 정말 유감 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무례했거나 도를 넘은 모든 말을 모두 진심으로 취소합니 다.”116)라며 용서를 청한다.
여기서 앞서 짧게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잘못된 태도로 행여 조선 교우들이 손해 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회원들에게 간곡히 청하는 겸손한 모습까지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서한에 답장을 보낼 때도 “제 마지막 편지가 신부님께서 들으시기에는 지나치게 항의조였던 것 같습니다. 용서를 빕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썼던 점 용서 해주시기 바랍니다.”117)라고 말하는 데, 이는 자신의 태도를 깊이 있게 성찰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나올 수 있는 겸손한 용서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자신의 명령적 어조에 대해 조언해 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의 충고를 깊이 명심하겠다고 말하며 그의 자비로운 충고에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한다.118)
나아가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행동에서 “질책받아 마땅한 것이 여겨지는 것이 있으면 빠짐없이 지적해 주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119) 청하는 모습은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지 않고 언제나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고치려 최선을 다하는 그의 깊은 겸손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를 위한 열정으로 인하여 자신의 태도가 어떤 부족함을 지니 고 있었는지 늘 성찰하고 죄를 뉘우쳤으며, 이를 감추거나 변명하기에 앞서 언제나 자신을 낮추 고 겸손하게 잘못을 표현하고 용서를 청하는 겸손의 덕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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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참조: 『서한집』, 54신, 362-364쪽.
110) 참조: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시복 시성 절차 해설』, 316-317쪽.
111) Cf. P. Adnès, “humilité”,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 t.7, Beaushesne, 1969, pp.1135-1138.
112) 이러한 겸손의 자기 비움이라는 특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대 세계에서 필요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에서 그리스도의 ‘굴욕’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겸손은 여러 굴욕을 통해서만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굴욕 없이 어떠한 겸손도 어떠한 성덕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주시는 성덕은 당신 아드님의 굴욕을 통해 왔습니다. 그분께서는 곧 길이십니다. 굴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데에 불가피한 측면입니다.” 교황 프란치 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2018.3.1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 118항.
113) 참조: 변종찬, 「아우구스티누스 사제직의 근본정신: “Ubi humilitas, ibi caritas”」, 『신학전망』, 195, 2016, 28-32쪽.
114) 예를 들어, 페낭 신학교의 롤리비에(Michael Lolivier, 1764-1833)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고소한다는 편지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서 받았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한 고소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사제들이 한 주교의 처신을 심판대에 올리려고 할 때는, 고소 내용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 했고(『서한집』, 20신, 181쪽), 난징 주교의 불의한 태도에 움피에레즈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선에 대한 재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모든 일을 명확하게 밝혀 로마로 전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한다(『서한집』, 45신,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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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목적 덕행
앞서 『교회헌장』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화의 보편적 부르심을 받았지 만, 성덕을 실현하는 방법은 부름을 받은 이의 삶과 직무에 따라 다양하다. 주교의 경우,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자신의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자신을 위한 성화뿐만 아니라 “목자다운 완전한 사랑”120), 곧 양들을 위해 용기 있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 바치며, 이러한 자신의 모습으로 교회를 더욱 큰 성덕으로 이끌고 나가야 한다고 『교회헌장』은 강조한다. 토마스 성인 역시 수도 자는 자신의 고유한 구원을 위한 성덕에 힘쓰지만, 주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이의 성덕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완전성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121)
그러므로 주교직을 수행하는 이는 자신의 완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완덕까지 돌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래서 주교는 중대사를 결정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 때문에 언제나 고뇌해야 하고, 양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염려해야 하며, 가장 적합한 참모들과 협력자들을 선발하여 파견할 수 있는 사목적 지혜를 지녀야 한다.122)
그러므로 복음적 덕행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덕을 향한 그의 노력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주교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어떤 열정과 지혜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했는지, 그가 사목을 수행하며 보여준 덕행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사목적 덕행들을 다음의 몇 가지 특징 들로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책임감 있는 직무 수행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을 받기 전, 시암 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를 보좌하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언제나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조현범 박사에 따르면,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시암 대목구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으로 그는 그곳에서 라틴어와 철학, 그리고 신학까지 다양한 수준의 수업을 진행하였다. 둘째, 본당 사목으로서, 자신이 거주하던 주교좌 성당뿐만 아니라 주일에 방콕 시내의 다른 성당들에서 미사와 성사들을 베풀었다.123) 셋째, 플로랑 주교가 직접 맡긴 일은 아니지만, “선교사로서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활동”124)도 열심히 수행하였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 지침에 따라125) 선교사로서 자신이 맡은 지역을 치밀하게 관찰함으로써 필요한 선교 목표와 전략을 세우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였다.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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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내가 난징 주교를 심하게 모욕했다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인 언쟁과 모독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보편적인 이익에 직결되는 조선 선교 사업에 해를 끼쳐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여행기』, 319쪽)
116) 『서한집』, 20신, 171쪽.
117) 『서한집』, 45신, 311쪽.
118) 참조: 『서한집』, 46신, 316쪽.
119) 『서한집』, 51신, 350쪽.
120) 『교회헌장』, 41항.
121) Cf. Thomas de Aquino, Summa Theologiae, II-II. q.185, a.4, p.2271. “주교 직무의 완덕은 하느님을 위한 사랑으로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헌신할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 수도 생활의 완덕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데 있다. 주교의 완덕은 다른 이의 구원에 대한 염려에 기인한다.”
122) 참조: W. 패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해설서 III』, 721-7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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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맡은 주교 직무의 중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교회의 왕자라 고 자처하는 주교는 자신이 교회에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127) 이러한 주교로서의 확고한 자기 인식과 책임 의식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을 받은 후, 조선 입국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조선 입국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여러 의견을 수렴하고 또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 입국로를 단호하게 결정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여정 가운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함께하는 이들을 격려하면서 오로지 조선 입국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늑대가 오더라도, 참된 목자는 그에게 맡겨진 양떼를 버리지 않으니, 도망가는 것은 오직 삯꾼입니다. 박해가 있다고 해서 선교사가 큰 유익이 있을 수 있는 구령 사업을 포기하고 도망을 생각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128)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언제나 책임감 있게 수행했다. 이는 어떤 조건과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만 자신의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더 큰 열정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한 영웅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2) 사목적 혜안과 선견지명
브뤼기에르 주교가 보여준 사목적 혜안은 우선 1829년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기 어렵다는 이유에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며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129) 그의 주 장은 무모하고 맹목적인 선교적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교회의 궁극적인 설립 목적, 선 교 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정치적 상황들을 면밀하게 살핀 후,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의견의 제시였다. 정양모 신부는 이 서한을 ‘논쟁 서간’이라 표현하면서, 브뤼기에르의 “치밀한 논리와 넘치는 박력”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설명한다.130)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을 받고 조선으로 향했지만, 실제로 자신의 권한을 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황청 포교성성에 서한을 보내어 자신의 사목과 관할권분명하게 확인받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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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조한건 신부에 따르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구청 업무도 병행하면서 매일 철학과 신학 2시간, 매주 성경 2시간과 라틴어 4학급의 강의도 맡았고 본당 사목까지도 겸했는데, 이는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참조: 조한건, 『브뤼기에르주교 바로 알기』, 생활성서사, 2024, 17쪽.
124) 참조: 조현범,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35쪽.
125) 일반적으로 ‘선교사를 위한 지침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모니타”(Monita ad Missionarios)는 1664년 팔뤼(Francois Pallu, 1626-1684년)와 드 라 모트(Pierre Lambert de la Motte, 1624-1679년) 주교가 자신의 선교지인 시암에 도착한 후, 자신들이 경험한 선교 지식들을 “성경과 교회법, 교황 문헌들, 교부들의 가르침, 성인들의 모범, 특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모범”에 근거하여 동료들과 함께 마련한 일종의 ‘선교 활동 지침서’이다. 이 지침서를 토대로 1700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회칙이 만들어 졌기에, ‘모니타’와 1700년 회칙은 초창기부터 일관되게 가지 있던 전교회의 선교 정책과 영성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모니타’ 제2장 4절은 선교 지역의 상황, 지역민의 성향, 지역적 전통과 관습, 기호, 전통 종교들, 그리고 지역법 등을 반드시 파악하라고 지침을 내린다. 이런 이유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 지역의 특징들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이를 여러 서한과 여행기에 담아놓았다. 선교사로서 지켜야 할 행동뿐만 아니라 사목활동을 펼치는 데 필요한 지침들을 담고 있는 ‘모니타’와 회칙은분명 브뤼기에르 주교의 덕행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인준을 받아 라틴어로 출간된 ‘모니타’는 1893년과 2000년에 파리 외방전교회가 ‘포교성성 선교사들 지침서’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Cf. F. Pallu, P. L. de la Motte, Monita ad Missonario - Instructions aux Missionnaires de la S. Congrégation de la Propagande, Paris, Archives des Missions étrangères, 2000, pp.6-7.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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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피레스-페레이라 주교와의 관계에서 분명하 게 나타나는 포르투갈 선교사들과의 갈등, 그리고 북경 교구와 조선 대목구 사이의 미묘한 긴장 을 브뤼기에르 주교는 지혜롭게 해결하고자, 움피에레스 신부와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어 요동 지방을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하고 그 지역을 조선 대목구에 예속시키거나 파리 외방전교회가 맡겨주도록 요청한다.132)
또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조선 입국의 여정 중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맡은 지역의 복음화가 지속될 수 있도록 자신의 후임자를 물색하고 추천하였으며 그들을 목자적 사랑으로 돌보았다.133) 그는 조선의 선교를 지망하던 모방과 샤스탕(J. H. Chastan, 1803-1839년) 신부가 온전히 새로운 선교지에 투신할 수 있도록, 파리 본부과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어 그들의 교회법적 신분과 지위를 허락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교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사람들로부터 받게 된 불만과 불평에 대해 다 자신의 탓이기에 그들을 탓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부분은 자신의 협력자를 끝까지 지키려는 목자의 충직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134) 또한 조선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진 앵베르 신부를 추천하고 훗날 그를 교구장 서리나 부주교로 삼고자 했던 모습은135) 그가 조선 입국의 어려움 속에서도 늘 조선 교회가 성장해 나가길 바라며 준비하는 목자의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목적 혜안은 그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 신학생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세웠다는 점에서,136) 나아가 조선의 복음화를 발판으로 일본의 선교까지도 계획하고 있었던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137) 실제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갑작스러운 선종으로 북경 교구로부터의 독립적인 조선 대목구 설정에 관한 계획이 수포가 될 수 있었지만, 그의 사목적 지혜와 덕행으로 사전에 모방 신부를 자신의 부주교로 임명하여 조선 대목구를 관할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한 위임하였고, 마침내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13일 조선에 입국을 성공하였고, 조선의 복음화는 지속될 수 있었다.138) 이처럼 브뤼기에르 주교는 비록 생전 그토록 바라던 조선의 입국을 실패했지만, 자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조선 교우들의 구원을 위한 섭리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이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지혜로운 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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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서한집』, 7신, 87-95쪽.
127) 『여행기』, 221쪽.
128) 『서한집』, 47신, 333쪽.
129) 참조: 『서한집』, 10신, 126-136쪽.
130) 정양모,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성품」, 51쪽.
131) 참조: 『서한집』, 26신, 33신, 34신, 35신, 36신, 37신, 40신, 45신.
132) 참조: 『서한집』, 31신, 40신, 41신, 45신
133) “선교 임무를 착수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여부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고 검토하는 일은 대목구장이 할 일입니다. 또한 그 계
획을 성공시키는 데 적합한 인물들을 선택하는 것도 그의 몫입니다.”(『여행기』, 322쪽)
134) “사람들은 조선 선교를 자원한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저 혼자입니다. 샤스탕 신부를 불러들인 것도 저입니다.”(『서한집』, 44신, 305쪽)
135) “제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진다면 비록 제가 쟁취하지는 못했더라도 (다른 선교자들이 쟁취할) 승리의 열매를
미리 맛보며 즐길 것입니다.” (『서한집』, 24신, 196쪽)
136) 참조: 『서한집』, 47신, 333쪽.
137) “일본으로 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조선에 가는 것입니다. 그곳을 기점으로 하면 길은 충분히 열릴 것으로 봅니다. 우선 조선의 남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인들을 시작으로 선교 활동을 펼칠 것이고, 그렇게 하고 난 후, 일본 열도로 들어가게될 것입니다.”(『서한집』, 46신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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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제나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며 자족하는 열정적인 선교사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구 사제로 살면서 선교사로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왔다. 이때부터 그는 하느님에 의해 파견될 선교사라는 의식 아래 언제나 자신이 파견될 선교지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시암 교구에 파견되었을 때,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에 순명하며 자신의 맡겨진 교구의 신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보호권’(Padroado) 아래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제국주의적 침탈에 기반한 선교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복음 선교, 그래서 선교 지역의 지배자 가 아니라 겸손한 선교사로서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고 존중하며,139) 선교 지역에 참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페낭 북쪽 지역인 케다(Kedah)에 머무는 동안 선교를 시도했을 때, 무턱대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언급하기보다, 선교지의 사람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 경청하면서 선교적 대화를 시작했다.
이어서 지역민들의 지적인 능력의 정도에 맞추어 그들이 믿는 신앙이 부족함이 있음을 밝혀주었는데, 이때 그는 유일신과 유일신의 속성 과 창조 등을 이야기하였고, 만약 반응이 있다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140) 물론 이러한 자신의 선교 방법이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었음을 고백하지만, 분명 그는 포교성성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정신에 따라 단순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압적으로 이식(移植)시키려 하지 않고, 각 민족의 의식과 관습을 존중하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참된 구원의 의미와 보편적 가치를 전해주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141)
그가 보여준 선교 영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적 지혜가 아닌 철저하게 하느님의 섭 리에 의탁하는 선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려고 할 때,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했고, 또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이를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선교사란 하느님에 의해 파견된 하느님의 도구이기에,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주사위는 인간이 던지지만, 그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잠언 16,33 참조)처럼 복음의 참된 힘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며, 선교사는 단지 그분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확신하였고, 그래서 선교의 결실은 오직 하느님께서 이루실 일임을 확신하였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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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참조: 이영춘,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조선대목구 설정』, 기쁜소식, 2010, 135쪽.
139) 브뤼기에르 주교가 시암 대목구에 머물며 선교 지역을 면밀하게 관찰했던 모습, 그리고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을 건너가던 도중 그 지역을 선교사의 관점으로 관찰한 내용에 대한 분석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참조: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 기록에 나타난 샴과 중국」, 『동국사학』, 49, 2020, 139-176쪽.
140) 참조: 『서한집』, 9신, 105-106쪽.
141) 참조: 이영춘,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조선대목구 설정』, 22-24쪽.
142) “우리는 하느님의 이끄심과 헤아릴 길 없는 섭리를 알 수 없으므로 너무 따지지 말고 경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친히 영감을 불러일으키신 원의를 이루어주지 않으실 때도 있고, 당신 친히 마음속에 심어주신 소원을 충족시켜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선의와 노력을 요구하실 따름입니다. 성공 여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서한집』, 24신, 196쪽)
143) “뒤브와 신부가 쓴 편지 한 통을 받고서 나는 내가 조선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습니다. 이 편지는 나의 망설임에 종지를 찍었습니다.”(『여행기』,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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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미 조선의 선교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래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조선의 선교를 끊임없이 열망했고, 자신이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것처럼(마태 4,22 참조),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즉시 조선 입국을 위해 출발하였다.143) 조선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수많은 어려움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그분의 뜻과 자신을 파견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뜻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144)
비록 고된 여정으로 병을 얻게 되어 삶의 마지막 순간 그토록 그리던 조선의 땅을 밟지도 못하고, 자기 양들조차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145) 브뤼기에르 주교는 언제나 자족할 줄 알았다.146) 오직 자신의 양들인 조선의 교우들만을 바라보고 험난한 여정을 이겨냈지만,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은 말 그대로 열정적인 선교사의 ‘순직’(殉職)147)이며, 정양모 신부의 표현대로 ‘무혈순교’라 할 수 있겠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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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고, 모든 위험을 모면하게 해주셨소. 이것은 미래에 대한 하나의 보장이오. 하느님의 섭리가 요구하는 대로 가능한 모든 주의를 게을리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만일 내가 잔뜩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친다면 나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교황 성하께서도 나를 책망하실 것이오. 나는 내 행로의 종착점에 이를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쓰기로 결심했소.”(『여행기』, 190쪽)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명령과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기획은 언제나 숭앙할 일입니다. 제 임무는 그러한 것을 납득하여 복종하면서 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이상이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으며 제가 세운 굳은 결심입니다.”(『서한집』, 30신, 247쪽)
145) 도나타(Alfonso-Maria di Donato, 1783-1848년) 산시 보좌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의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나는 외지 타타르에서 죽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라고 편지에 남겼다. 참조: 『서한집』, 53신, 360쪽.
146) “저는 그것을 맡아야겠지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제 계획이 성공하든 못하든 저는 언제나 만족할 것입니다.”(『서한집』, 23신, 187쪽) “조선 선교 결과가 어찌 되든지, 저는 언제나 자족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자족하렵니다. 제가 일생일대 목표에 도달한다면 하느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는 혜택을 누린 셈이 될 것입니다.”(『서한집』, 24신, 196쪽) “저희는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행할 것이고, 모든 일과 모든 것에서 지선하신 주님의 더 큰 영광을 찾을 것입니다. 저희에게는 선한 양심의 증언이면 충분합니다.” (『서한집』, 45신, 312쪽)
147) ‘순직’이란 직무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을 뜻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수행한 직무를 검토한 최인각 신부는 그의 죽음을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다 맞이한 죽음으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여기며, 나아가 박해 중에 직무를 수행하다가 맞이한 죽음이기에, 그의 죽음을 ‘순교’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참조: 최인각,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100-110쪽.
148) 정양모 신부는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죽음을 맞이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가기 위해 40년간 시나이 광야와 모압 땅을 헤매다가 그곳 이르지 못한 채 운명한 모세의 삶을 떠올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중국에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광동(廣東) 앞바다 상천도 해안 초막에서 외로이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르에르(1506-1552년)와 12년간 조선 팔도를 숨어 다니며 선교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숨을 거둔 가경자 최양업 신부(1821-1861년)을 거명하며,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은 ‘때론 순교보다 더 힘들고 더 장한’ 순직이라고 설명한다. 참조: 정양모,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성품」, 60, 6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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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던 사도 요한은 자기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글로 남기며, 마지막으로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을 낱낱이 기록하려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요한 21,25)고 고백한다. 이는 남겨진 사료만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품, 그리고 그의 영성을 완전히 파악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고 일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과 죽음, 말씀과 행적을 살피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한국 천주교회에 중요한 의무이며 동시에 축복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 대목구가 설치될 수 있었고, 이로써 조선 교회는 참다운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보편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한국인 사제가 없었던 때, 머나먼 이국땅 조선 교우들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성사를 베풀고 영혼을 돌보았으며 목숨을 바쳐 그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던 서양 선교사 들은 바로 조선 입국을 앞두고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조선에 입국한 후배 선교 사들이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 안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단지 역사적 중요성에 의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덕행을 검토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보여준 덕행들, 곧 앞서 살펴본 가난과 순명, 정결과 겸손, 그리고 사목적 덕행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푸신 고귀한 신앙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과 같기 때문이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선교사로 파견되어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온갖 육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고통을 달게 받아들여 전히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삶을 브뤼기에르 주교는 보여주었다. 주교로서 맡겨진 책무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사목적 혜안로 조선의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코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고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교회에 순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보여준 삶은 바오로 사도와 같이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도록(갈라 2,20 참조) 자신을 완전히 봉헌한 삶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보여준 덕행은 단순한 인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앙 안에서 ‘영웅적인 덕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그가 하느님의 은총과 자신의 죽음으로써 조선 교회에 심은 밀알(요한 12,24 참조)은 비록 순교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지 몰라도, 순교와 같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신앙을 전하고 증언한 ‘증거자의 밀알’이라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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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 동포들에게 보내는 서한」(Message du Pape Jean-Paul II à ses compatriotes polo- nais, 1978.10.23.)
150) 참조: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 24항.
151) 서울대교구 교구장들은 2011년부터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라는 표제 아래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는데, 특별히 2013년 신앙의 해 이후, 신앙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하느님 말씀’, ‘기도’, ‘교회의 가르침’, ‘미사’, ‘사랑의 실천’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5년간 새로운 복음화의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고, 이를 토대로 2019년부터 선교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3년간 ‘가정’, ‘본당’, ‘교구’ 공동체의 선교적 양성에 주력하였다. 이후 ‘코로나 19’(COVID-19)를 극복한 현 시점에, 서울대교구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선교적 동력을 마련하기 위한 사목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매년 사목국에서 발간되는 『서울대교구 사목지침서』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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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복음적 덕행과 사목적 덕행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인에게 어떠한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일까? 오늘날 현대 교회는 ‘선교’의 새로운 국면, 곧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sation)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신 ‘새로운 복음화’는149) 급격한 사회 변동의 영향으로 종교적 무관심과 세속주의에 물든 현실 속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열정, 새로운 방식, 새로운 표현’으로 복음화 사명을 실천하려는 현대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이 사명을 이어받은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교회 의 존재 이유가 복음 선포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교회의 활동을 선교적 차원에서 쇄신하는 ‘출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150) 서울대교구는 이러한 보편 교회의 지향에 따라 2014년 ‘신앙의 해’를 기점으로 교구 사목의 방향 전체를 ‘새로운 복음화’에 맞추어 모든 교회의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151)
하지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언급한 것처럼, 이는 단순히 기존에 해오던 선교 방식을 수정, 보완하여 특정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에 옮기는 차원을뛰어넘는다. 모든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만남과 친교를 통해 변화되고, 이를 바탕 으로 온갖 종류의 과도한 개인주의에서 파생되는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성과주의와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사고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이 체험한 복음의 기
쁨을 삶의 자리에서 증거하려는 열정, 곧 신앙의 새로운 ‘태도’를 갖추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직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머나먼 조선 교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살아간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덕행은 오늘날 한국 교우들이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갖추어야 할 참된 신앙인의 ‘태도’가 무엇인지 밝혀주는 빛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복음화는 단순히 현대인의 변화된 사고를 고려하여 새로운 전략을 세우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성당에 오게 만들고 교회 구성원을 늘리려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모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덕을 깊이 묵상하고 그가 보여준 복음적 가난과 순명, 정결과 겸손, 그리고 사목적 태도를 닮고자 노력할 때, 신앙의 근본적인 쇄신을 통한 참된 신앙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느님의 도구가 될 것이며, 바로 그러한 노력에서부터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가 수행해야 할 참다운 모습의 새로운 복음화가 시작될 것이다.
[참고문헌]
1. 교회 문헌
Benedicti Papae XIV, De Servorum Dei Beatificatione et Beatorum Canonizatione, Bruxellis: Typis Societatis Belgicae, 184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196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Perfectae Caritatis, 1965), 한국천주교중앙협의
회, 2018.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 동포들에게 보내는 서한」(Message du Pape Jean-Paul II à ses com- patriotes polonais, 1978.10.23.)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sultate, 2018.3.1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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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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