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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7년(1604) 1월의 어느 날,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청허당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 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왜 그런 외진 곳을 택하는지를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서산대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면서 그곳은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宗通)이 돌아갈 곳”이라고 말했다.
서산대사가 입적하자 제자들은 시신을 다비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했으며 금란가사(金爛袈裟)와 발우는 유언대로 대둔사에 모셨다. 이리하여 서산대사의 법맥은 대둔사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대둔사가 오늘날과 같이 큰 절로 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경내를
북원구역(대웅보전, 명부전,응진전, 산신각),
남원구역(천불전, 동국선원),
표충사, 대광명전으로 세군데로 나눈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둔사는 남쪽 바닷가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었다. 절이 들어앉은 두륜산의 옛이름이 한듬이었으므로 절도 오랫동안 한듬절로 불렸다. 옛말에서 ‘한’이란 ‘크다’라는 뜻이고 ‘듬’이나 ‘둠’ 등은 ‘둥글다’라거나 ‘덩어리’라는 뜻을 가진다. 바닷가에 갑자기 큰 산이 솟아 있으므로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도 대듬절, 대둔사로 바뀌어 불렸다. 한편,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한반도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계속 뻗어내려와 마지막으로 맺은 산이라 하여 다시 백두의 두(頭), 곤륜의 륜(崙)을 따서 두륜산(頭崙山)이 되었다.
두륜산 대둔사의 이름 바뀐 사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崙山은 頭輪山으로 바뀌었고 대둔사는 대흥사(大興寺)로 고정되었다. 절이 두륜산 대둔사(頭崙山 大芚寺)라는 이름을 회복한 것이 겨우 1993년,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도 대흥사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에도 대흥사라고 적혀 있다.
대둔사가 처음 생긴 것은 언제일까? 대둔사의 내력을 적은 것으로는 순조 23년(1823)에 초의(草衣)선사와 수룡(袖龍)선사가 편집해 낸 『대둔사지』가 있다. 이 책은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 그전부터 내려오던 대둔사에 관한 책들의 내용을 살리면서 거기에 포함된 잘못들을 지적한 종합적인 사지이다.
우선 『죽미기』에서는 양(梁) 천감(天監) 13년(신라 법흥왕 1년, 514)에 아도화상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였다. 또 『만일암고기』에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나라 안에 절 500개를 짓는 것이 좋다고 상소할 때 대둔사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은 혜장선사는 아도화상이 절을 지었다는 시기가 그가 활약한 시기(신라 미추왕 2년, 265)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다는 것, 도선국사가 당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헌강왕 원년은 도선이 태어난 해라는 것을 지적하며 두 설을 모두 일축하고, 대둔사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보았다. 지금 절 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과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이 모두 나말여초의 것임을 보더라도 대둔사는 나말여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가 의발(衣鉢)을 전하고부터 대둔사의 사세는 크게 일어났다. 서산대사라면 흔히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활약한 것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선(禪)과 교(敎), 더 나아가서는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만을 최고로 치던 당시 불교계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갈파하며 선과 교가 서로 다른 둘이 아님을 주장,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대둔사는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아 왔다.
막상 대둔사로 향할 때 먼저 가슴에 다가드는 것은 그 입구의 울울한 나무와 숲이다. 계곡물을 왼편에 끼고 10리나 되게 이어지는 절 앞길은 군데군데 적송이 치솟고 아름드리 벚나무와 참나무, 느티나무, 동백, 단풍나무 등이 장엄하고 장엄한 터널을 이룬 속으로 뻗어 있다. 서산대사가 내다보았던 대로 이곳은 병란을 만난 일이 없어서 해묵은 나무들은 싱싱하고 울울창창하다.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이라는 동네 이름이 거저 생기지 않은 것이다. 숲길 중간쯤에 임업시험장에서 특별 관리하는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식지역도 있다.
피안교를 건너고 일주문을 지나면 곧 부도밭을 만난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대둔사에서 배출된 역대 종사와 강사 스님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나지막한 돌담에 둘린 채 가지런하다. 불교사에서는 모두 쟁쟁한 분들이지만 보통 사람으로서 이름을 들어 봤음직한 분으로는 13대 종사인 초의선사, 12대 강사인 혜장선사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일주문을 지나면 낮은 돌담장 안에 서산대사의 부도와 함께 대둔사에서 배출된 역대 종사와 강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 모두 50여 기의 부도와 14기의 부도비가 있다.
다시 해탈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대둔사 가람이 펼쳐지는데 돌담에 둘린 건물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얼핏 보아 어디가 어딘지 어리둥절해진다. 절 전체가 한눈에 잡히지 않는 것은, 큰 절이라서 당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체 경역이 네 구역으로 나뉘어 각각 건물들이 들어앉았고 각 구역이 돌담으로 둘리어 떨어져 있어서 각각 독립적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절 안은 두륜산 골짝에서 흘러내린 물(금당천)을 경계로 하여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뉘고, 다시 남원 뒤편으로 뚝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들어가면서 보아 맨 왼쪽, 심진교 건너에 있는 건물군이 북원이다. 어째 저쪽이 북쪽인가 하고 혼동이 일기도 하는데, 보통 절터들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 데 비해 대둔사의 경우에는 들어가는 입구가 서쪽이다. 그러나 해탈문에서 절 안을 바라보면 중심축이 북원, 대웅전 쪽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진교를 건너면 대둔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전과 침계루, 백설당 등이 있는 북원이 나온다.
침계루를 지나 북원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남쪽을 바라고 앉았고 그 좌우에 명부전과 범종각, 응진전이 나란히 있다. 마당 서쪽의 지붕이 첩첩한 커다란 건물은 승방인 백설당이다.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이 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응진전 앞 삼층석탑
높이 4.3m의 그리 크지 않은 단아한 통일신라 때의 삼층석탑이다. 대둔사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에 속한다.
대웅보전은 고종 광무 3년(1899)에 불이 나서 다 타버린 후 새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당당한 팔작 다포집이다. 정면 계단 아래 소맷돌에 얹힌 깐깐한 표정의 돌사자, 기단 위의 쇠고리 뒤에 새겨진 어벙한 돌짐승 얼굴이 눈에 띈다.
●표충사
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유교 형식의 사당이다. 서산대사, 그의 제자인 사명당과 뇌묵당의 화상을 모시고 있다.
표충사 구역 앞의 유물전시관에는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서산대사의 유물과 정조가 내려 준 금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고, 한편 고려 시대 종인 탑산사 동종(보물)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 서산대사의 부도
부도밭의 다른 부도들과 달리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표충사 뒤편으로 300m 가량 더 들어간 곳에 호젓하게 자리잡은 대광명전 구역은 지금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아한 맞배집 대광명전과 8칸짜리 일자집인 보련각, 그리고 요사채로 이루어졌다. 대광명전은 헌종 8년(1841)에 초의 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1810~1884)와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2)이 합심하여 김정희의 유배가 풀리기를 축수하며 지었는데, 편액은 신관호의 글씨이며 초의선사가 직접 단청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 대둔사에는 초의선사의 발자취가 어린 일지암,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이 있는 북미륵암과 남미륵암, 진불암 등 암자들이 딸려 있다.
● 천불전의 꽃창살
정면 3칸 분합문 전체에 아름다운 꽃창살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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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내의 천불상
옥돌로 만든 불상 천 개가 법당 내부를 빽빽이 채우고 있다.
천불전을 재건한 완호스님은 쌍봉사 화승(畵僧)이던 풍계(楓溪)스님에게 경주 불석산에 가서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오도록 했다. 석공 열 사람이 6년이나 걸려 마침내 천불을 다 만들자 배 세 척에 나누어 싣고 해남으로 출발했는데 그중 한 척이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 나가사키 현으로 흘러갔다. 옥불이 잔뜩 실린 배를 맞은 일본 사람들은 절을 지어 모시려고 했는데, 그들의 꿈에 불상들이 나타나 자기들은 원래 해남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에 머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천불이 모두 돌아와 봉안된 것이 순조 18년(1818)이었다. 이때 일본에 갔다 돌아온 불상 768구에는 어깨나 좌대 아래에 일(日)자를 써 넣어 표시했다고 한다. 이것은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적힌 내용이다.
●천불전
남원 구역의 중심 건물이다.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건물의 맵시가 경쾌하다.
남원의 담장을 끼고 무염지 옆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들면 표충사 구역이 나선다. 문을 들어서면 의중당 등 제례와 추모 행사 등을 위한 건물들이 있고 다시 안쪽의 작은 문 안에 표충사와 조사전, 비각이 있다.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 형식의 사당인데,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활약했던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처음 표충사가 건립된 것은 정조 13년(1789)이지만 지금 건물은 철종 12년(1861)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이고 금물로 쓴 표충사 편액은 정조가 직접 써서 내려 준 것이다.
●대둔사 대웅보전
정면5칸 측면4칸의 당당한 팔작 다포집으로 북원 구역의 중심 건물이다.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것이고 맞은편 침계루 현판도 마찬가지다. 대웅보전 현판은 개성 있는 이광사의 글씨도 글씨지만, 추사 김정희의 일화가 얽혀 있어 다시 한번 보게 된다.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귀양 가던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둔사에 들렀던 김정희는 이광사 글씨의 ‘촌스러움’을 타박하며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 내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뒤 김정희는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다가 다시 대둔사에 들렀다. 이때, 햇수로 9년에 걸친 춥고 서글픈 귀양살이 속에서 인생관이 바뀐 김정희는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백설당 지붕 밑에는 귀양 가기 전 김정희의 글씨로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과 무량수각 현판
대웅보전 현판은 인근 신지도에서 귀양 살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는 획에 구불구불한 원교 특유의 필법이 잘 드러나 있다. 무량수각 현판은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면서 써 주고 간 글씨로 획이 기름지고 구성의 변화가 두드러져 있다.
남원은 가장 면적이 넓다. 법당으로는 천불전 하나가 있고 동국선원이나 용화당 등 강원과 승방 몇 채가 각각 돌담으로 구획되어 들어앉아 있다. 남원 앞에는 너른 터가 열려 있어 예전에 다른 건물들이 있었을 법한데 지금은 초의선사가 만들었다는 무염지(無染池)만이 그 가장자리에 있다. 입구의 가허루에 걸린 편액은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5)의 글씨이고, 둥글게 휘어진 나무를 건너지른 가허루 문턱이 멋있다.
천불전은 이전의 건물이 순조 11년(1811)에 일어난 화재로 없어진 후 완호(琓虎)스님이 재건한 것이다.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 규모이며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다. 이 현판 글씨도 역시 원교 이광사의 것이며 현판 양옆의 용머리 장식과 앞쪽 분합문살을 가득 메운 꽃무늬 조각이 화려하다. 툭 터진 천불전 안 불단 한가운데는 목조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에 옥돌로 만든 불상 천 개가 빽빽이 자리잡고 있다.
● 돌사자와 돌짐승
대웅보전의 계단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는 깐깐한 표정의 돌사자가 있고, 기단 모서리에는 쇠고리를 입에 문 어벙한 표정의 돌짐승이 있다.
[카카오맵] 대흥사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삼산면 구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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