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세찬 바람에 모자가 날려갔다. 천 길 낭떠러지 나무 끝에 걸린 모자에 발만 동동 구른다. 구경꾼들도 한마디씩 건넨다.
“바람에 아까운 모자 날려 먹었군.”
모자는 잡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가기가 일쑤다. 바람에 날아간 모자는 다시 잡을 수도 있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곳에 떨어져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잘 관리하지 않으면 평생 쌓은 공적도 모자처럼 날아갈 수 있다.
모자는 쓰다가 쓰지 않으면 허전하다. 모자는 한여름 뙤약볕을 막아 준다. 뿐만이 아니다. 한겨울 귀가 떨어져 나가는 추위를 견디게 한다. 아버지는 모자 사랑이 유별났다. 아버지가 모자를 쓰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 그러니 철에 따른 모자 외출에 따른 모자가 달랐다. 그 시절은 요즘처럼 모자를 만드는 천과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다.
단순한 철에 따른 구분보다는 용도에 따른 구분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용도는 크게 두 구분이다. 하나는 일을 할 때와 외출 할 때가 확연히 달랐다. 외출용 모자는 주로 중절모자로 둥글게 생긴 꼭대기의 가운데를 눌러서 쓰는, 챙이 둥글게 달린 모자였다. 중절모자는 겨울용은 주로 갈색이요 여름용은 흰색이었다. 다른 것보다도 이 두 종류의 모자에는 특별히 신경을 썼다. 외출해서 만나는 모든 만남을 소흘히 하지 않음의 출발이었다.
‘의관(衣冠)’은 선비들이나 관리들이 입는 옷과 갓을 뜻한다. ‘의관하다’라고 하면 예의에 맞게 격식을 갖추어 옷과 모자를 차려입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때 쓰는 모자는 주로 갓을 의미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모자는 점잖고 격식 있는 차림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악세사리의 성격이 짙고, 다만 경찰이나 군인과 같은 일부 직업에서만 그 기능이 남아 있다. ‘정제(整齊)하다’는 격식에 맞게 갖추어 가지런히 다듬는다는 뜻이다. 관리나 선비들이 두루마기와 같은 옷과 갓과 같은 모자를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것은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옷을 차려입고 관을 정제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모자의 나라’로 불려질 만큼 모자가 다양했다. 모자의 역사는 아주 길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에는 는 모자는 햇볕을 가리거나 추위를 막아 주는 정도의 실용적 용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보호 기능을 넘어 사회적 지위 종교적 권위, 집단이나 직업에 따른 상징이 되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쓰는 모자의 종류가 엄격하게 구분이 되었다.
아버지가 모자에 이렇게 신경을 쓴 이유는 외출해서 만나는 모든 만남에 가문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가문을 대표해서 만나는 모든 만남이 잘못되면 가문을 욕되게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의관의 정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자 사랑이다. 한학을 한 아버지는 의관의 정비에서 모자를 소흘히 할 수가 없었다. 모자는 양반과 상놈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아버지에게서 모자는 신분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 할 때는 여름에는 메꼽모자나 수건을 동여매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주로 양쪽 귀가 덮는 털모자를 썼다. 문제는 그 털모자였다. 아버지는 나의 모자를 살 때는 어김없이 그 털모자를 샀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10도가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에 온 종일 바깥에서 지내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고육지책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릴때에는 그 모자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그 모자는 독립군들이 만주 벌판의 칼바람을 막아 내기 위해 쓰던 생존의 모자였다. 그러니 멋을 부리기 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람에 날아가지도 않아야 하며 전투에 방해가 되어도 안된다.
그 당시 우리 또래는 주로 양털로 짠 모자를 썼다. 생긴 모양이 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그 모자를 빵모자라고 불렀다. 빵모자는 베레모나 사극에서 일본 순사들이 쓰는 나까오리 모자를 지칭한다. 빵모자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주로 누나나 어머니가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가을부터 만드는 수제품이다. 어머니는 한가하게 손뜨게를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테니스를 즐기던 나는 퇴직을 하고부터는 관절에 무리가 오는 것을 느꼈다. 운동을 꾸준하게 해야겠는데 걷기나 헬스장을 가 보아도 무료하고 답답하여 오래가지 못하였다. 혼자서 하는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걷기도 하며 외롭지도 않고, 쓰지 않는 근육도 깨워주는 파크골프에 입문하였다.
파크골프가 인기 이유 중 하나는, 배우기 쉽고 특별한 기술이나 경험이 없어도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 골프보다 훨씬 간단한 규칙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또한, 공원이나 개방된 공간에서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며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지 않으며, 골프 클럽 한 개로 시작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가벼운 걷기와 공을 치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신체 전반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친구나 가족, 동료와 함께 할 때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친구가 좋아 강남까지 같이 가 준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파크골프를 하면서 친구도 사귀고 온동도 할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문제가 하나 있다. 강바람은 몹시차다. 파크고프장은 강변에 있다. 귀가 떨어질 듯 불어대는 강바람을 이길 방법은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옷과 모자다.
모자를 사기 위해 모자점을 들렸다. 각양각색의 모자가 즐비하다.어떤 모자를 살까 고민 끝에 마음에 든 모자를 골랐다. 손에 들린 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손에 들린 모자는 놀랍게도 아버지가 골라주던 그토록 싫어하던 모자였다. 이제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되었음이 경이롭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