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우님의 글입니다.
: 김은숙님의 글입니다. : : : 남자친구가 허 씨 인데요 : : 집에서 족보상으로 자꾸 허씨랑은 결혼이 안된다고 하는데........ㅡㅡ;;;;;;;;;;;;;;;;;;; : : : : 집에서 어른들이 안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 왜 안되는지 다음을 다음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 *** : 金海金氏와 許氏와의관계 (김해김씨와 허씨와의 관계) : : : 서기 42년(신라유리왕19년)에 金首露大王(김수로대왕)께서 경남 일원에 駕洛國(가락국)을 세우고, : 印度 아유타국(阿踰他國)의 공주 許皇玉(허황옥)을 서기 48년에 왕비로 맞이 하셨다. : : 수로왕께서는 普州太后(허황후의號)와의 사이에 열분의 왕자를 두셨는데 첫왕자 태자 居登은 가락국 제2대 道王이 되고 : 둘째왕자 거칠부는 어머니 허황후의 姓을 따라 명월성의 성주가 되었다. : : 세째왕자 明 또한 어머니의 姓인 許氏姓을 따랐으며 : 나머지 일곱왕자는 印度에서 온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入山하여 七佛寺의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 : 許氏는 居住地에 따라 양천(陽川), 태인(泰人), 하양(河陽), 김해(金海)등으로 관향(貫鄕)을 달리하고 있으나 : 모두가 보주태후 허황후의 후손들이다. : : 현존하는 許氏는 위 許氏四本이 大宗을 이루고 있으며 : 각 始祖 貫鄕祖는 허황후의 30세손, 33세손, 35세손이다.
답 변
안녕하세요 김은숙님! 홈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해(本)김씨(姓)와 김해(本)허씨(姓)는 동성동본(同性同本)이 아니기 때문에 혼인(婚姻)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김해김씨와 허씨는 이성동본(異姓同本)으로서 김해김씨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이며 허씨(許氏)는 연원을 멀리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양성(兩姓)간에 혼인(婚姻)을 꺼려 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김해김씨 족보(族譜)에는 양성간 금혼(禁婚)하여야 한다는 기록은 발견 할 수 없습니다.
허씨(許氏)관련 기록을 발췌하여 보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16세(서기48년)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다.]
위 내용은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그 중 허황후의 성(姓)을 따른 분은 2분이라]
위 내용은 허목(許穆), (1595(선조 28) ~ 1682(숙종 8))이 찬(撰)한 보주태후릉비음기(普州太后陵碑陰記)와 보주태후허씨릉비음기(普州太后許氏陵碑陰記)에 있는 내용이며, 2명의 아들에게 허씨 성을 사성하였다는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했다고 한다.]
위 내용은 1910년에 하동 칠불암 현판에 쓰여진 내용중 일부입니다.
또 허묵(許穆)이 찬(撰)한 가락왕납릉비음기(駕洛王納陵碑陰記)에 의하면 황명만력8년(1580년)에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 허엽(許曄)(1517(중종 12) ~ 1580(선조 13))이 왕묘(王墓)를 크게 보수하였는데 13년 뒤 임진왜란 때 왜구(倭寇)가 이를 파혜쳐 그 지방 사람들이 다시 봉축(封築)하고 58년 뒤에 순찰사(巡察使) 허적(許積) 1610(광해군 2) ~ 1680(숙종 6))이 증수(增修)하고 묘비(墓碑)를 세워 가락국수로왕묘(駕洛國首露王墓)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전(許傳), 1797(정조 21) ~ 1886(고종 23))이 찬(撰)한 김해 숭선전신도비문(金海 崇善殿神道碑文)에서도 허태후(許太后)의 아들 10분 중 2분에게 허씨성(許氏姓)을 내렸고, 후세에 김해(金海), 양천(陽川), 하양(河陽), 태인(泰仁), 한산(漢山) 등으로 나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해김씨 족보의 맨 앞에 실리고 있는 소전공구보유기(少전公舊譜遺紀, 소전공=김덕승(金德承1595∼1658)에 의하면 제일 윗대 할아버지를 금녕군파 2세 보(普)까지만 알았는데 양천허씨(陽川許氏) 족보에 의하여 보(普)위에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이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금녕군부터 파조(派祖)로 삼는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해김씨의 최초 인쇄본 족보인 1754년 갑술보 범례에 의하면 [김해김씨에는 김시흥파가 있으나 가락의 후예가 아니고, 허씨도 동보(同譜)하지 말 것이며 타성으로 구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허씨는 당시 높은 벼슬의 힘을 빌어? 허씨의 연원을 가락국기에 있는 허황후까지 끌어 올리기 위하여 시조 수로왕릉과 황태후릉을 보수하고 허씨 관련 내용을 담은 비를 세우는 등 대단한 집착?을 보인 반면, 김해김씨는 허씨를 동원(同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http://kimheakim.com.n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