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없다 3. 임종도 국장은 국장실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회전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리모콘으로 채널을 바꾼 그의 눈에 낮익은 정원이 비춰졌다. 저녁뉴스 시간이었다. 임국장은 기댔던 허리를 똑바로 펴면서 화면에 비치는 별장 내부를 근심스런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진이 숨진 테이블과 바닥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마이크를 든 보도국 기자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놓인 동형의 칵테일 잔을 마시는 시늉을 해보였다. 기자의 사건보도는 독수리 눈처럼 정확하고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그때였다. 책상 위의 전화기에서 부드러운 벨이 울렸다. "국장님, 곤란한 전환데요. 어떤 남자가 미스코리아 진 독살사건에 대한 제보를 할 게 있다고 하면서 국장님 좀 바꿔달라고 하는데요." 짜증섞인 방송국 여직원의 음성이 임국장의 귓가에 들려왔다. "보도국으로 걸라고 그러지." "꼭 국장님한테 전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나를 찾아? 내 이름을 대면서?" "네." "연결시켜." "3번 전ㅎ니다." 임국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임국장은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임종도 국장님?" 젊고 음흉한 음성이었다. 동시에 생소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 지금 단계에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구요, 요즘 방송국 광고 수입은 좋습니까?" "이것 보세요. 전화를 건 용건이 있을 것 아닙니까?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임국장은 장난 전화라는 느낌이 들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한테 기가 막힌 비디오 테이프가 하나 있는데 그림이 아주 좋습니다. 지금 텔레비전 보고 계십니까? 하얀 별장 뉴스 말입니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상당히 세련되어 있었다. 이런 전화에는 전문이라는 듯 여유있고 침착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바쁘면 끊을테면 끊으라는 식의 느긋한 음성이었다. "도대체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 "당신? 다아앙신? 국장, 우리 광나는 말만 하고 삽시다. 임구욱자앙님." 상대방은 님자에 힘을 주며 몹시 불쾌해하고 있었다. 임국장은 들고 있는 수화기를 부서지도록 내려놓고 싶었지만 장난 전화는 아닌듯 싶어 한두 마디만 더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국장님, 내가 들고 있는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미스코리아가 죽어가는 장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모습이 처절하도록 아름답더군요. 이 테이프를 전국에 내보내면 광고주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겁니다." "당신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거요? 도대체 당신 누구요?" "당신 당신 하지 마시오. 당신이 정 그렇게 나오면 나도 화끈하게 무식하게 나오겠소." 상대방은 인격에 대한 손상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 같아보였다. "아, 성함을 알아야 존칭을 붙이든지 할 것 아니오. 내가 괜히 처음에 당신의 성함을 물어본지 아시오." 임국장은 길어지는 전화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상대방의 목소리 하나 하나에 신경을 썼다. 그러면서 음색도 귀에 익히고 있었다. "아하, 그랬습니까? 그럼 제가 무식한 소리를 들어도 싸군요. 하하하......" 상대방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파안대소를 했다. 임국장은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내며 참을성의 한계를 느꼈다. 저쪽에서 다시 변색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국장님 볼룸댄스 솜씨가 형편없으시더군요. 성주라양이 진땀을 빼던데요. 춤을 배우신지 얼마 안 되셨나보군요. 하하하......" 임국장은 성난 얼굴을 했다. "이것 보세요. 당신 혹시 캠코더 기사 아닙니까?" "오, 이제서야 감을 잡으셨군요." "당신 지금 전화거는 데가 어딥니까?" 임국장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긴 어딥니까? 전화 거는 곳에 있지요." "한번 만납시다." "개인 일로요, 아니면 직책상으로요?" "아무튼 만납시다." 임국장은 다급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 난 개인 일로 임국장님을 만날 용의가 전연 없습니다. 이 점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문제는 국장의 직권만으로는 안 됩니다. 방송국 고위층과 상의를 해봐야 합니다. 일단 한번 만납시다." 임국장은 매달리듯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임국장님께서 뭔가 켕기시는 게 있나 보군요. 이 테이프에 임국장님의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요?" "뭐라구?" 임국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진정하세요, 임국장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개인 일로는 만날 필요가 없다구요. 이 테이프의 화면은 임국장님과 상관이 없는 테이프다 이 뜻입니다." 상대방은 임국장을 어린애 다루듯이 다루고 있었다. 임국장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졌다. "그건 그렇고, 당신 어젯 밤에 왜 사라진거요? 죄가 없으면 떳떳하게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니요?" "오라, 그러니까 임국장님 말씀은, 이 몸이 범인이니까 튀었다라는 얘긴데, 천만에요. 나는 머리가 아주 비상하지요. 순간적인 판단 또한 번개보다 빠르지요.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는 이 테이프, 한 마디로 황금 테이프지요. 이걸 경찰에 넘겨줄까요? 내가 아니지요." 상대방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당신 지금 뭔가 황당무계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테이프는 무용지물이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미스코리아는 진에 당선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세인의 관심 밖에 있는 여자란 말이오." 그 말에 상대방의 숨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당신 지금 나한테 수작을 부리려고 돌대가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그럼 나 서운하지. 역대 미스코리아들 중에서 최고의 미녀로 인정되는 윤보혜양의 마지막 순간도 센세이셔널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당신을 포함한 저명인사들 또한 화제거리로는 만점이지. 호,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나를 귀빈 대우해줄 다른 방송국을 찾아갈 수밖에. 이거 실례했시다." "잠깐, 잠깐만요!" 임국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화장지가 필요하십니까?" 임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시요, 농담은 그만하고...... 당신 지금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거 아시오?" "수배요? 내 안 그래도 이 전화 끊고 수사본부, 아니 내무장관님한테 직접 전화를 걸 거요. 무능 경찰 모가지 자르라고요. 국민이 민주주의 경찰하라고 세금 낸거지 선량한 시민들을 죄인으로 만들라고 경찰복 입혔느냐고요." "이거 전화로 계속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만나서 얘기합시다." 임국장은 인내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럴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난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인 성격이라놔서. 이 테이프 필요합니까, 원하지 않습니까?" 임국장은 잠시동안 침묵을 지켰다. "좋소. 그럼 이따 21시에 다시 전화를 주세요. 윗분들과 상의하고 나서 결과를 알려드리리다." "임국장님두, 진작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래야 주고 받는 대화 속에 따뜻한 사랑이 피어나지요." "그럼." "아, 잠깐. 임국장님한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게 있는데, 이 전화 끊고 나서 경찰에 연락을 하든지 말든지 그건 당신의 자유요. 어차피 나도 경찰에 자진출두해야 할 몸이니까요. 그러나 거래가 끝난 뒤에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요. 서로가 행복하게 살려면 말이오." 저쪽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 임국장도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좁은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와 콧잔등에 묻은 땀을 여러 번 닦아내고는 주저없이 전화를 들었다. 곧 신호음이 울렸다. 전화를 드는 소리가 긴장된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권중혁 의원님 사무실이죠? 권의원님 계십니까?" 사무실 여비서는 상냥한 목소리로 의원님은 자택에 계신다고 알려주었다. 임국장은 권의원의 전용 전화번호를 눌렀다. 권의원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의원님, 임국장입니다." "오, 임국장. 방송국이오?" "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허허허...... 임국장 목소리가 꽤나 급한 모양이오. 허허허......" 권의원의 느긋한 음성에 임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편안해짐을 느꼈다. "어제 밤에 별장에서 사라진 캠코더 기사가 방금 저에게 협박에 가까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임국장한테 협박전화를요? 허허,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홀에서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방송국에 제공해 주는 대신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요? 허허, 그 도망간 기사 배포 한번 크군요." "제 느낌으로는 전문적인 사기꾼 같습니다. 전문가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소?" "이따 21시에 다시 연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임국장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기사 봉 잡았구만. 허허허......" "웃을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의원님. 미스코리아 진이 독살되는 장면이 담긴 테이프가 전국에 방송되면 의원님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됩니다." "원, 임국장도. 아, 우리가 결백하면 그만이지 두려울 게 뭐 있겠소. 허허허......" 권의원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임국장, 그 비디오 테이프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도록 막을 자신이 있소?" "그건 불가능합니다. 경찰의 손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결국 부메랑처럼 방송국에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뉴스를 들어셔서 아시겠지만 각 매스컴, 신문, 주간지 등 대서특필입니다. 마치 3차 세계대전이 터진 양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화제거리가 별로 없었거든요." "세상도 우리 편이 아니군. 테이프 공개가 불가피하겠어. 방송국 간부들도 테이프 입수에 이의가 없겠군요." 권의원의 음성은 체념에 가까웠다. "그 캠코더 기사가 엄청난 액수를 요구해오지 않는 한 회의 결과는 자명한 일입니다. 타 방송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테이프를 단독 입수해서 내보내면 시청률이 엄청날 겁니다. 간부들간의 약간의 의견대립이 있을지는 몰라도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명분론과 방송사에 막대한 이익을 준다는 현실론까지 합쳐져서 한 시간이라도 빨리 테이프를 입수하라고 특별지시가 내려질 겁니다." "헌데 임국장, 한 가지 이상한 건, 그 테이프에 어떤 진실이 담겨져 있다면 그 기사가 굳이 방송국을 상대로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개인에게 요구하는 게 더 안전하고 조용하지 않을까요?" "저도 그 점에 대해서 그 작자에게 우회적으로 계속 만나자는 식으로 심리를 유도해 보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다면서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더군요. 그 자는 살인사건 현장 자체의 흥미성에 큰 의의를 두고 있었습니다." 임국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그 테이프에 진실이 찍혀져 있었으면 좋으련만......" 권의원은 말끝을 흐리며 근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임국장, 임국장 입장에서는 테이프 공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소?" "무슨 말씀이신지......" "임국장 본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나요?" "아, 네...... 저한테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의혹의 시선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방송사를 위해서도 유익한 일입니다." "그럼 얘기는 끝났군요. 그 기사가 매우 치사하긴 하지만 그 또한 기회를 잘 포착한 것 아니겠소.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오. 우리 자신 또한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서야 할 입장이구요." "그렇긴 합니다만......" "허허허. 임국장이 내 생각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대세의 흐름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그러고보니 시간이 다 되어가는구만." 권의원은 초연한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어디 약속이 있으십니까?" "허허허. 위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어요." "청와대로 올라가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호된 질책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비서실장님을 통해서 어젯 밤의 불미스런 일을 보고드렸는데, 대통령께서 진노하셨나봐요." "그럼 테이프를 공개하면 더욱 난처한 입장에 빠지시는 거 아닙니까?" "허허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거죠. 진실이 문제인거죠." "이거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임국장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전화 줘서 고맙소, 임국장. 전화 끊기 전에 한 마디 당부하겠소. 진실을 외면하지 마시오, 임국장. 진실의 세계는 아름다움이라오." "네, 잘 알겠습니다, 의원님."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임국장은 한참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굳게 결심한 듯 회전의다에서 솟구치듯 일어서서 사장실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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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2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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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혜
08.05.1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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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봤읍니다~!
핫커피
08.05.22 13:37
참으로 햇갈리네요..누가 범인인지?
공삼삼
15.10.06 14:17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공삼삼
15.10.06 14:17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성갑
17.11.20 15:46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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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잘봤읍니다~!
참으로 햇갈리네요..누가 범인인지?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