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nostikos 그노스티코스 해제(2) 】 Evagrius Ponticus, (345-399)
3. 가르침을 위한 조건
관상생활은 아파테이아 혹은 어느 정도의 아파테이아 획득을 전제한다. 사실 에바그리우스는 아파테이아에 대해 매우 미묘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 아파테이아에는 단계가 있다. 즉, 영혼의 욕망부(慾望部 the concupiscible part)에서 오는 욕정 혹은 ‘육체의 욕정’을 극복했을 때 이르게 되는 ‘작은 아파테이아’ 혹은 ‘불완전한 아파테이아’ 이후, 정념부(情念部 the irascible part)에서 오는 욕정 혹은 ‘영혼의 욕정’을 포함한 모든 욕정에 대한 승리를 통해서 얻어지는 ‘완전한 아파테이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단계를 포함한다. 관상생활은 우리가 아파테이아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 시작되며, 완전한 아파테이아를 향해 나아가면서 발전된다. 실제로 관상생활은 고유하게 천사적인 삶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 조건 안에서는 충만히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 즉 영혼의 정화는 어느 정도 관상생활에서도 계속된다. 관상가는 수행의 덕들을 계속해서 실천하면서 그것들을 계발하기를 그쳐서는 안 된다. 에바그리우스가「수도승생활의 토대」에서 수행자에게 준 권고들은 관상가를 위해서도 유효하게 남아있다.
많은 사람과의 잦은 교제에서 오는 분심(11장)과 음식과 의복에 대한 모든 걱정(38장)과 같은 근심(10장)을 경계하라. 성 바울로가 그랬듯이 엄격한 규율로 자기 육체를 굴복시켜라. 그러나 만일 모든 덕들이 관상가에게 길을 평탄하게 해준다면(5장), 관상가는 무엇보다도 관상생활에 나아가기 위해서 영혼의 정념부에서 오는 욕정들, 그리고 우선 영적 인식에 주된 장애인 분노 그 자체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오류가 외적 인식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분노는 영적 인식에 장애가 된다(4장). 또한 관상가는 분노와 증오와 슬픔에서 자유로워야 한다(10장). 슬픔은 분노에 밀접히 연결된 영혼의 한 욕정이다. 관상가는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특히 소송을 피하고 모욕(불의)을 당해야 한다(8장). 동일한 이유 때문에 그는 험담과 비난이 악령에게서 오는 유혹임을 알고 그러한 것들에 초연해야 한다. 악령들은 인식을 맛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관상가 안에 증오와 원한을 일으키려고 노력한다(32장). 따라서 그는 온갖 분노를 없애야 한다(5장). 영혼의 정념부가 평온한 이 상태는 에바그리우스가 다른 곳에서 애덕에 매우 근접한 ‘온유’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아파테이아의 딸’과 ‘인식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온유는 관상가의 탁월한 덕이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아파테이아, 애덕, 그리고 인식은 서로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애덕은 우선 자선이다(7장). 관상가는 가르치면서, 하지만 이익이나 복리 혹은 지나가는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 없이 가르치면서 사랑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성전에서 쫓겨난 상인과 같을 것이다(24장). 덕들의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하여 지나친 관대함 없이(6장)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 대하여 상냥하고 친절한 관상가는 그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22장). 사실 어떤 욕정에 의해서 영감을 받거나 오직 선을 위해서 행해지지 않는 모든 탐구는 특히 ‘관상가의 죄’인 그릇된 인식에 이를 수 있다(43장).
4. 가르침의 내용
이미 본 바와 같이 관상가는 확실히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가 어떻게 계속해서 욕정에서 정화되는지를 부단히 가르친다(3장, 31장). 그러나 관상가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획득한 영지 혹은 역적 인식을 받을 능력을 갖추게 된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를 통해 이 영적 인식 혹은 관상에 접근(45장)하게 되지만, 또한 하느님의 은총을 매개로 육체적이고 영적인, 또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피조물들을 이해하게 된다. 즉, 피조물의 ‘로고이’(logoi)를 알게 된다. 사실 한 피조물의 ‘로고스’(logos)는 그의 원리, 즉 존재이유이다. 한 피조물의 ‘로고스’를 관상하는 것은 그것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였던 그 개념 안에서 그것을 통찰하는 것이며, 따라서 피조물을 그 본질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로고이’ 중에는 에바그리우스가 ‘신적 섭리와 심판의 이유’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에바그리우스의 우주론과 종말론에 대한 큰 주제들에 부합하면서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구원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취하신 태도와 세계의 형성과 관련된 것들이다(36장, 48장).
영적 인식에서 또한 성서 해석이 이루어진다. 성서 해석은 관상가의 가르침 안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며, 이 작품의 여러 장들이 성서 해석에 바쳐진다.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 그것의 감각적인 모습을 넘어 그 존재이유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의 충실한 제자인 에바그리우스가 관상가에게 권고하는 해석 역시 성서 텍스트의 문자를 넘어 그 영적 혹은 우의적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관상가는 오리게네스가 이미 권고한 바와 같이 성서의 ‘관습’을 설명하면서(19장) 텍스트의 참된 의미를 밝히고자 노력한다. 또 관상가는 에바그리우스에게 친숙한 삼중 구분에 따라(18장) 수행이나 윤리에 관한 것이든, 자연학(피조물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이든, 신학(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이든 자신이 들추어내는 교훈적인 영역을 결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 텍스트의 우의적 의미가 반드시 문자적 의미와 동일한 영역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20장). 에바그리우스는 우의적인 해석에 어떤 제한을 두고 있다. 그는 성서 본문에 언급된 모든 말씀에 대해 영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21장) 또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세세한 것들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지도 말라고 관상가에게 권고한다(2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