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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3. 한글의 연구와 보급
1) 한글에 대한 자각
한글이 우리 민족의 문자로서 존중되어야 하며 이를 우리 민족의 문자생활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고, 이를 위한 연구와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세기가 다 저물었을 무렵이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의 한글 창제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한글에 대한 자각이 이처럼 늦은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기적이 그런 것처럼, 이 기적에도 그것이 일어날 만한 요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기적을 낳게 한 원동력은 우리 민족의 문자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대왕 개인의 강한 의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글은 모든 국민이 문자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대왕의 굳은 신념의 소산이었다. 이것이 그의 정치 이념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면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로 이 새 글자의 이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훈민’에 그의 정치 이념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그러나 아무리 이 의지가 강했다 해도, 우리 민족 사회의 밑바닥에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그 문화 전통에 대한 의식이 맥맥히 흐르고 있지 않았다면, 대왕의 모처럼의 기도도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자의 창제가 성공을 거둔 데는 그 높은 실용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국어를 표기하기에 더 없이 적합하고 편리한 문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글의 ‘기적’은 세종대왕의 개인적 의지와 우리 민족 문화의 깊은 기층(基層), 그리고 이 새 문자의 우수성이 합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처음부터 큰 제약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한자(漢字)·한문(漢文)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주변에서 우라나라만큼 한자가 뿌리를 내린 나라는 없었으니, 한글 창제를 반대하여 최만리(崔萬理)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올린 상소(上疏)는 그 당시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 계층의 다수 의견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 상소의 첫머리에 우리나라 문화가 중국과 같게 되었는데, 이제 한글을 만드심은 도리어 오랑캐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보인다. 이것은 사대부계층의 의식이 얼마나 우리 민족 문화의 기층과 동떨어져 있었던가를 보여준 것이다. 이 대목은 오히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바로 우리 민족의 ‘오랑캐’의 특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것임을 드러내 보인 것이기도 하다. 한편 대왕도 한글로써 한자를 전적으로 대신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한자와 한글의 병용을 처음부터 겨냥하고 있었다. 한글 창제 뒤에도 공용문(公用文)이 여전히 한문으로 이루어진 사실에서도 그렇거니와, 한글로 우리 국어를 표기하는 경우에 한자를 섞어 쓴 사실에서도 대왕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도 음소문자(音素文字)로 만들면서 음절(音節)로 모아쓰는 합자법(合字法)을 택한 것은 한자와 섞어 쓰는 경우를 생각한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면서 이 문자가 종래 한자가 차지해 온 영역의 일부를 담당하기를 희망했던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이 문자로써 이두(吏讀)를 대신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소를 올린 최만리등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너희들이 옛날 신라의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는 좋다고 하면서 어째서 너희 임금이 만든 한글은 좋지 않다고 하느냐고 책망한 데에 대왕의 이 생각이 비치고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에 실린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도 이두가 꺽꺽하고 불편한 사실을 강조하고, 이 때문에 소송사건 등에서 백성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있었음을 지적한 것도, 이두 대신 한글을 쓰려고 한 대왕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한글로 국어를 표기할 때에 한자를 섞어 쓰는 방법에 대해서도 대왕은 각별히 유념한 것으로 추측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낼 때에는 한자만을 그대로 썼지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는 한자음을 먼저 한글로 크게 쓰고 그 아래에 한자를 작게 넣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일 같지만, 될 수 있으면 한글로 주장을 삼으려고 한 대왕의 뜻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이런 의도는 그 뒤에 살려지지 않았고, 모처럼 창제된 민족의 문자는 불경(佛經)을 비롯한 책들을 번역한 이른바 언해(諺解)와 비공식적인 문자생활에 그 사용이 국한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름도 창제 당시에 이미 생겼던 ‘언문(諺文)’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한글이 창제된 뒤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한문이 널리 사용되었고 사대부들은 입으로는 우리말을 하면서 글로는 한문을 쓰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부 학자들의 말을 빌면, ‘언문이치(言文二致)’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글의 창제로 우리말을 적으면 그대로 글이 되는 ‘언문일치(言文一致)’에의 길이 트여 있었고, 이 길이 느리게나마 조금씩 닦이어 왔다. 언문이 차츰 깊게 넓게 뿌리를 내려온 것이다. 사대부계층은 한문을 주로 썼지만, 그들 중에도 시가(詩歌)를 지을 때 언문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언문으로 그들의 문자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이후에 부쩍 늘어난 서민을 위한 문학작품은 모두 언문으로 쓰여 보급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언문은 문학과 종교의 문자로서 그 기반을 더욱 넓히게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는 소설 작품들이 방각본(坊刻本)으로 간행되어 보급되면서 광범한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종교에 있어서는 천주교(天主敎)가 언문으로 선교사업을 벌였으며, 뒤이어 동학(東學)이 일어나 그 교리(敎理)를 언문으로 적어 민중 속으로 파고든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들보다 뒤늦게 기독교(개신교)가 들어와 역시 언문으로 성경과 찬송가를 번역하고 적지 않은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세기 후반에 들어 이 언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자라는 자각이 생기게 되었다. 언문이 다져온 기반 위에 개화사상이 불어옴으로써 이 자각의 싹이 튼 것이다. 이 자각을 분명히 표시 하는 말이 ‘국문(國文)’이었다. 따라서 종래의 ‘언문’ 대신에 ‘국문’이란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때를 이 자각의 한 지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이 버젓이 사용된 가장 초기의 예들은 1894년에서 1897년에 이르는 몇 해 동안에 나타난다. ‘국문’이 나타난 이른 예로는 1894년 11월 21일에 내린 ‘칙령 제1호’를 들 수 있다. 이 칙령에 대해서는 다시 자세히 논하려 하거니와, 이 뒤를 이어 ‘국문’이 자주 사용되었다. 1895년에 간행된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서(序)」에는 ‘아문(我文)’이란 말이 보이며,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에는 창간호의 「논설」에서부터 ‘국문’이 도처에 나타난다. 한편 이 신문에 깊이 관여했던 주시경(周時經)이 한달 뒤인 5월에 이 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한 사실은 특별히 기록할 만하다. 또 같은 해 11월에 간행된 『대조선독립협회회보』(1권 1호)에는 지석영(池錫永)의 「국문론」이 실렸으며, 1897년에는 이봉운(李鳳雲)의 『국문정리(國文正理)』란 단행본이 간행되었다. 주시경의 「국문론」이 『독립신문』(2권 47, 48 호 ; 2권 114, 115호)에 발표된 것은 이해 4월과 9월이었다.
무엇보다도 『독립신문』을 순국문으로 간행하게 된 취지를 밝힌 창간호의 「논설」은 국문에 대한 이 신문 편집자의 자각이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 아직도 한문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던 때에 국문으로 신문을 간행할 생각을 한 것 자체가 혁명적이었지만, 창간호의 논설은 이 생각이 민족적 자각에서 우러난 것이었고 민주적 사상과도 직결된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 신문의 주필(主筆)은 서재필(徐載弼)이었고 주시경은 국문 담당 조필(助筆)이었는데, 위의 논설은 이 두 사람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한글에 대한 자각은 주시경에 의하여 이론적으로 심화되었다. 주시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어문민족주의(語文民族主義)라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은 한 민족은 ‘지역’〔域〕, ‘혈연’〔種〕, ‘언어〔言〕의 세 요소로 이루어진 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지역’은 독립의 ‘터전’〔基〕이요, ‘혈연’은 독립의 ‘몸’〔體〕이며, ‘언어’는 독립의 ‘성(性)’ 즉 본바탕이라고 보았다. 이중에서 ‘성’인 언어야말로 한 민족의 본질이라고 그는 믿었다.
여기서 주시경은 언어와 문자를 엄격히 구별하면서도 그 중요성을 다같이 인정하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학자들이 혼동하는 이 둘을 분명히 구별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오랫동안 언어학자들이 언어만 중요시하다가 요즈음에 와서 문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주사경이 처음부터 문자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은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는 한글이 세계의 여러 문자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점을 과학적인 고찰을 통하여 확신하였고, 우리 조상들이 이처럼 우수한 문자를 돌보지 않고 한자만 숭상해 왔음을 개탄하였던 것이다. 그가 어느 의미에서 국어보다도 국문을 더욱 중요시한 데는 이런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주시경의 어문민족주의의 핵심은 민족의 흥망과 언어·문자의 성쇠는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 민족이 독립을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어와 국문을 잘 닦아서 빛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신념으로 국어 및 국문의 연구와 보급에 온 생명을 불태웠던 것이다. 1910년 8월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한 뒤에도 그의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젊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심어 주었던 것이다.
끝으로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한글 이란 이름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기로 한다. 이 이름은 1910년 이후에 ‘국문’이란 이름에 대신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의 침략으로 ‘국어·국문’이란 말을 쓰지 못하게 되고, 그 대신 ‘조선어·조선문’으로 쓸 수밖에 없게 되면서 ‘한글’이란 말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한’은 ‘하나의’, ‘큰’의 뜻을 가진 말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의 칭호였던 ‘한(韓)’으로 해석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한글’은 주시경과 최남선(崔南善)이 지은 것으로 그 가장 이른 용례는 1913년에 나타난다. 이것이 굳어져 우리 문자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2) 한글의 보급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는 한 마디로 한글과 한자의 정면 대결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세기에 한글의 세력은 여러 모로 크게 신장되었으나, 수천년 동안 쌓여온 한문의 위세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하나의 커다란 혁명이 없이는 이 한문의 위세를 꺾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공문식(公文式) ’ 제14조는 다음과 같다.
법률·칙령은 총괄하여 국문을 근본으로 하고 한문은 부역(附譯)하며, 간혹 국한문을 혼용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공적인 문자생활에 있어 국문, 즉 한글을 기본으로 삼는다는 최초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문화혁명이 이 법령 하나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위의 칙령은 국문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한문을 덧붙일 수 있으며 국한문, 즉 국한문 혼용체도 사용할 수 있음을 허용하고 있으니, 국문을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는 느낌을 준다. 비록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해도, 예전에는 한글로 정부의 공문을 쓸 수 없었음을 생각할 때 이 칙령을 내린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 칙령에 이어 나온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이 국문, 한문 및 국한문의 세 가지 글로 되어 있어, 이 칙령을 시행에 옮기려한 정부 당국의 노력이 입증되기도 한다.
이 칙령과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 칙령은 일본이 중국의 세력을 밀어낸 뒤에 이루어진 이른바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내려진 것으로, 갑오경장의 기본 성격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갑오경장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의 하나인 바, 그것이 친일세력에 의해서 주도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에 중국의 오랜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민족자주를 향한 열의가 드러난 것도 또한 사실이었다. 문자에 관한 이 칙령은 실제로는 한문의 세력이 아직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전개될 새 시대에는 한문이 부정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역사적인 당위성 내지 필연성을 말한 것이었다.
둘째로 맨끝에 ‘국한문’을 들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이것은 유길준(兪吉濬)이 주창한 것으로 그 뒤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문체인데, 이것이 이 칙령에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순한문과 순국문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1886년에 간행된 『한성주보(漢城周報)』에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있었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이 칙령이 내린 뒤에 『관보(官報)』와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1985년 2월)가 이 국한문체로 되었으며, 정부에서 간행한 교과서들 역시 국한문체를 채택한 사실이다. 국문체를 기본으로 삼는다 하고서 실제로는 맨 나중에 든 국한문을 택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에 비하여,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국문체를 택한 것은 참으로 커다란 용단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서재필(徐載弼)과 주시경(周時經)의 합작으로서, 이들이 아니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대담한 모험이었다.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이 관련되어 있던 독립협회와 배재학당(培材學堂)이 당시 국문체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배재학당 학생들의 조직체인 협성회(協成會)의 기관지 『협성회보』(1898년 1월 창간)와 이것이 발전한 『일신문』을 비롯하여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尹致昊)가 창간한 『경셩신문(京城新聞)』(1898년 3월 창간, 4월에 『대한황셩신문』으로 제목을 고침) 등이 모두 국문체로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대한황셩신문』이 『황성신문(皇城新聞)』으로 바뀌고(1898년 9월), 장지연·유근(柳瑾)과 같은 유학자들이 이 신문에 관여하면서 문체가 국한문체로 바뀌었다. 이는 우리나라 신문 문체의 역사에서 볼 때,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결과 국문체의 『뎨국신문』과 국한문체의 『황셩신문(皇城新聞)』의 양립 상태가 몇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 양립 상태는 1904년 8월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가 국한문체를 채택함으로써 깨어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국한문체가 우리나라 신문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창간 이후 몇해 동안 국문체가 지배한 신문이 국한문체의 지배로 넘어간 것이다. 그 뒤 오늘날까지 이것이 우리나라 신문의 문체가 되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리하여 20세기에 들어 신문과 잡지, 그리고 교과서를 비롯한 단행본들도 대부분 국한문체로 간행됨으로써, 국문체의 세력은 극도로 위축 되었다. 이 문체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였던 주시경은 고군분투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이때에도 문학(그중에서도 소설)과 종교는 국문체의 튼튼한 기반이었다.
20세기 초두에 우리나라의 뜻있는 학자와 문인들 중에는 문체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문에 대신할 문체로서 유길준이나 주시경과 같이 국한문체나 국문체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졌던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옳은가를 결정짓지 못하고 고민한 사람들도 있었다.
먼저 유길준의 국한문체에 관한 주장은 그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원고는 1889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국한문체로 쓴 이유로, 첫째 말뜻을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한 것, 둘째 자기의 글 짓는 법이 미숙하여 쓰기에 편한 길을 택한 것, 세째 우리나라의 칠서언해(七書諺解)의 법을 본뜬 것을 들고 있다. 이중에서 세번째가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한문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간행된 여러 책에서 사용되었으니 결코 유길준의 새로운 고안이 아니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125장의 가사는 국한문체의 효시였고, 그 뒤의 허다한 언해(諺解)들도 이 문체를 보여준다(다만 한자의 발음을 적은 점이 다르다). 유길준이 이러한 전통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문체가 통용되고 있는 사실이 국한문체를 주장하게 된 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의 내용에도 일본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음을 본다.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건, 정부가 국한문체를 즐겨 썼고 이것이 점차 국문체를 누르게 된 데는 일본의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이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강요로 해서 이 문체가 일반화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용적으로 편리하고 유익하지 않았다면 이 문체의 보급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시경의 국문체에 대한 주장은 『독립신문』에 실린 그의 「국문론」이래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그는 짧은 생애를 통하여, 국어의 음운과 문법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개척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이런 학문적인 연구 못지않게 국문체의 발전을 위한 실천운동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는 당시의 국한문체 문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문체의 문장들도 한문에 토를 단 것에 불과함을 지적하고, 우리가 실제로 말하는 대로 글을 씀으로써만 ‘언문일치’를 성취할 수 있음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고 스스로 그런 문장을 써보기도 하였다. 그의 『국어문법(國語文法)』(1910)의 ‘기난날’ 이하의 부분과 『말의 소리』(1914)는 오늘의 기준으로 보아도 혁신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이 한자로 된 학술용어 대신 우리말로 새 말을 만들어 썼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여기에는 그의 강렬한 민족주의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그가 만든 새 말들이 그의 국문체의 특징처럼 알려졌고, 이것이 도리어 국문체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킨 면도 없지 않았다.
끝으로 국문체와 국한문체의 선택을 놓고 고민한 지식인의 예로 이광수(李光洙)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태극학보(太極學報)』(21호, 1908년 5월)에 「국문(國文)과 한문(漢文)의 과도시대(過度時代)」란 논설을 이보경(李寶鏡)이란 이름으로 기고하였다. 그는 세 종류의 문체, 즉 한문체·국한문체·국문체에 대하여 장단점을 간단히 논한 뒤에 “일시의 곤란을 무릅쓰고라도 국문체를 택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10년에 『황성신문(皇城新聞)』(3430~3432호, 7월 24일~27일)에 기고한 「금일(今日) 아한(我韓) 용문(用文)에 대(對)야」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체로서 국문체를 택하고 싶고 또 하면 될 줄을 알지만, 그것이 심히 곤란할 것이 예견되며 특히 새로운 지식의 수입에 방해가 되므로, 부득불 국한문체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비록 곤란하더라도 이것(국문체)이 만년대계로 단행해야 한다는 사상”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주시경의 주장을 가리킨 것이요, 그 자신이 2년 전에 가졌던 생각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한문이 물러난 뒤 국문체와 국한문체 사이에 일어난 심한 갈등에 대해서 훑어보았거니와, 실은 이 두 문체는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하느냐, 그것도 한글로 표기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한글에 기초를 둔 점에는 다름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느 문체를 채택하거나 한글이 크게 신장되게 마련이었다.
3) 한글의 연구
19세기 후반에 개화의 물결이 밀어 닥치고 한문이 뒤로 물러나면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우리나라의 말과 글의 표준화 과업이었다. 국문체를 택하거나 국한문체를 택하거나,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실현은 표준어를 정하고 한글의 체계와 맞춤법을 확립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연구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법의 연구와 문자 체계 및 맞춤법의 연구가 그것이다. 이 두 연구가 위에서 말한 표준화와 관련이 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표준어에 대한 관심은 아직 미약했었고 가장 큰 관심이 국문체계에 쏠려 있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간행된 국어학 관계의 글 3편이 모두 국문에 관한 것이었음을 그 증거로 들 수 있다(제1장 참고). 그중에서 지석영과 이봉운의 글은 모음의 장단(長短), 고저(高低)의 표기 문제를 주로 다루었음에 대하여, 주시경의 글은 오늘날의 말로 하면 한글전용의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문자개혁에 관한 그의 기본 태도가 이미 확립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는 맞춤법에 관한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거시’나 ‘이것시’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며 ‘이것이’라고 써야 옳다는 주장이다. ‘먹으로’〔墨〕, ‘손에’〔手〕, ‘발을’〔足〕, ‘밥을’〔飮〕, ‘붓에’〔筆〕와 같은 예들을 들면서 “말의 경계를 다 옳게 찾아 써야” 한다고 한 것이다. 체언과 조사를 구별하여 적어야 함을 분명히 지적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주시경은 진작부터 매우 중요한 두 연구를 행했었다. 그 하나는 새로운 한글체계의 수립을 위한 것으로 ‘ㆍ’자의 본래 음가(音價)에 관한 연구였다. 그 당시 ‘ㆍ’는 일반적으로 ‘아래 아’라고 하여 ‘ㅏ’와 혼동되었으므로, 주시경은 이 문제의 해결이 시급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연구는 1892년에 시작하여 1894년에 결론을 얻었다고 하니, 이것이 그가 학문에 뜻을 두고 행한 첫 연구였던 것이다. ‘ㆍ’의 음가에 대한 그의 결론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ㆍ’를 폐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 뒤에도 계승되어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와서 드디어 실현되었다.
그의 또 하나의 연구는 맞춤법의 가장 큰 문제인 받침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는 ‘ㄱ, ㄴ, ㄹ, ㅂ, ㅅ, ㅇ’의 홑받침을 쓰고 있었고 간혹 ‘ㄺ, ㄻ, ㄼ’의 겹받침을 쓰고 있었는데, 주시경은 이밖 에도 홑받침으로 ‘ㄷ, ㅌ, ㅈ, ㅊ, ㅎ’ 등을 쓰고, 겹받침으로 ‘ㄲ, ㅄ, ㄵ, ㅀ’ 등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가 정확히언제 이런 받침 이론을 깨달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자신이 1895년 5월에 독립신문사 안에 조직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에서 이 이론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무렵 그는 『국문식(國文式)』이란 책도 썼다고 하는데 이 책은 간행이 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으나, 필시 ‘ㆍ’자의 음가와 받침에 관한 그의 이론을 적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런데 그의 이론은 국문동식회 회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이 이론이 그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혁신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맞춤법의 핵심을 이루는 받침에 관한 그의 초기 연구의 결과는 그의 첫 저서인 『대한국어문법』(1906)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맞춤법은 우리말의 ‘본음(本音)’을 나타냄을 원칙으로 삼아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그는 용언(用言)의 예를 들어 이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우리말의 활용체계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먼저 ‘먹―’〔喫〕의 예를 들어 이것은 ‘ㄱ’으로 끝난 어간이요, 여기에는 ‘어도, 으면, 고, 는’과 같은 어미가 붙으므로 ‘먹어도, 먹으면, 먹고, 먹는’과 같이 쓰는 것이 당연함을 지적하고, 이와 같은 이치로 ‘좇’〔從〕은 “ㅊ’으로 끝난 어간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좇아도, 좇으면, 좇고, 좇는’이라 적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먹다’의 경우는 종래에도 위와 같이 쓰는 일이 간혹 있었으니 ‘좇다’의 경우나 ‘맡다’〔任〕, ‘덮다’〔覆〕, ‘좋다’〔好〕등의 경우에도 이렇게 쓰는 것이 이치에 당연함을 밝힌 것이다.
종래 이렇게 일관되게 쓰지 않은 것은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ㅋ, ㅌ, ㅍ, ㅈ, ㅊ, ㆁ, ㅎ’은 초성에만 쓰고 종성에는 쓰지 못하도록 규정한 사실에 말미암는다는 것에 주목하여, 그는 『훈몽자회』때문에 받침 표기에 큰 병폐가 생겼음을 누누이 지적하였다. 그의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1908)에 의하면 그가 『용비어천가』를 처음본 것은 1907년 말이었는데, 여기에 ‘ㅈ, ㅊ, ㅍ’이 받침으로 사용된 예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세종대왕의 받침 이론이 자기의 이론과 부분적으로 같음을 알게 되어 크게 기뻐하였으며, 『훈몽자회』때부터 큰 잘못이 생겼음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훈몽자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는데, 이것은 15세기 중엽에 간행된 책들, 『석보상절(釋譜詳節)』과 그 이후의 언해(諺解)들을 보지 못한 데서 온 잘못이었다. 이 책들에 이미 『훈몽자회』가 말한 8자가 종성(받침)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리고 8종성에 관한 규정이 『훈민정음』「해례(解例)」에 이미 있었음이 1940년에 이 책이 발견됨으로써 드러나게 되었다. 『용비어천가』의 ‘ㅈ, ㅊ, ㅍ’ 종성은 이 규정과는 다른 특이한 예임을 주시경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훈몽자회』의 저자 최세진은 16세기 초의 관습을 적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써온 셈이다.
맞춤법에 관한 주시경의 새로운 주장의 기초를 이룬 것은 그의 음운 이론이었다. 위에서 든 ‘본음’의 이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된소리와 거센소리에 대한 그의 이론도 맞춤법과의 관련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된소리는 ‘ㄱ, ㄷ, ㅂ, ㅅ, ㅈ’이 둘씩 겹친 ‘쌍음(雙音)’이며, 거센소리는 각각 ‘ㄱ, ㄷ, ㅂ, ㅈ’과, ‘ㅎ’이 합한 ‘합음(合音)’임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의 당면한 귀결로, 된소리는 ‘ㄲ, ㄸ, ㅃ, ㅆ, ㅉ’으로 표기하기를 주장하게 되었고 ‘쌓’〔積〕, ‘낳’〔生〕등과 ‘잃’〔失〕, ‘앓’〔痛〕등에 ‘ㅎ’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맞춤법의 크고 작은 원리들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주시경에 의해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주시경 이외에 국문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우두신설(牛痘新說)』(1885)의 저자요,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이었던 지석영(池錫永)을 들 수 있다. 그가 일찌기 1896년에 「국문론」이란 짤막한 글을 발표했음은 위에서 든 바 있다. 그 뒤 그는 주시경의 ‘ㆍ’에 관한 학설을 듣고 ‘ㆍ’자는 ‘ㅏ’와 혼동되므로 이를 없애고, 그 대신 ‘ㅣㅡ’ 합음을 나타내는 ‘〓’자를 새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05년 봄에 쓴 「대한국문설(大韓國文說)」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 「대한국문설」을 정리하여 정부에 소청(疏請)하였고, 이것이 재가되어 1905년 7월 19일자로 「신정국문(新訂國文)」이란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이것은 국문체계에 관하여 정부가 채택한 최초의 표준안이었다. 그러나 「신정국문」은 공표되자마자 큰 물의를 자아내게 되었다. 받침으로는 8자(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만 쓰고 된소리는 된시옷을 쓰도록 규정한 것은 「신정국문」의 보수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것이라면 ‘ㆍ’자를 없애고 ‘〓’를 신설한 것 뿐이라고 할 수 있는데, ‘ㆍ’자 폐지에 대해서도 당시 학자들 사이에 찬반 의견이 엇갈렸지만, ‘〓’자의 신설은 전반적으로 큰 반대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애당초 한 개인의 제안을 아무 심의과정도 거치지 않고 정부의 표준안으로 공표한 데 불씨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관심있는 학자들의 지혜를 모아 국문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를 행하여 국가적인 통일안을 작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6년에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의 교사였던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정부에 제출한 것도 이런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의견」에서 이능화는 국문의 체계와 맞춤법을 정할 것과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일이 시급함을 논하였던 것이다. 「신정국문」의 가치는 그 내용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문의 연구와 통일에 대한 공통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분명히 일깨워 준 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1907년에 학부(學部) 안에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이 연구소에 대해서는 다음 장(章)에서 따로 말하려 하지만, 나라 안팎의 급박한 정세로 경황이 없었던 정부가 이 연구소를 세운 것은 그 당시 우리 사회에 국문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국어와 국문의 연구와 교육에 관한 주시경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 졌다. 사실상 그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그는 1900년 봄부터 1년간 상동사립학숙(尙洞私立學塾)에서 가르친 것을 시작으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여러 학교와 학원에서 스스로 연구한 바를 학생들에게 전하였다. 그중에서도 1905년부터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었다. 그의 첫 저서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어문법』(1906)은 이 학원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교재였다. 그리고 1907년부터 이 학원 안에 하기국어강습소(夏期國語講習所)를 개설하여 국어와 국문 전반에 관하여 가르쳤는데 그 성과가 자못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두번째 저서인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1908)은 제2회 하기강습소에서 가르친 교재 중에서 음학(音學)에 관한 부문을 이 강습을 받고 큰 감명을 받은 박태환(朴兌桓)이 간행한 것이었다.
이 하기국어강습소는 1914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개최장소도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하다가 곧 황해도 재령(載寧)의 나무리강습소, 경상도의 동명학교(東明學校), 명정학교(明正學校) 등으로 번졌으며, 강사도 처음에는 주시경 혼자서 도맡아 하다가 나중에는 그의 제자인 박태환(朴兌桓), 박제선(朴齊璿), 장지영(張志暎), 이규영(李奎榮), 박준성(朴俊成), 최현이(崔鉉彛:나중 이름 최현배), 권덕규(權悳奎) 등이 서울과 지방에서 스승을 돕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제2회 강습이 끝난 뒤(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가 조직된 것이 가장 큰 열매였다.註 011011 주시경의 「이력서」에는 ‘國文硏究會’라 기록되어 있으나, 『한글모죽보기』에는 ‘國語硏究會’ 또는 國語硏究學會’로 나타난다. 『한글모죽보기』는 1907년에서 1917년에 아르는 동안의 국어국문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筆寫本으로 주시경의 제자인 李奎榮의 손에 된 것으로 추측된다. 高永根, 「開化期의 國語硏究團體와 國文普及運動」, 『韓國學報』30호(1983) 참고.닫기 주시경이 1896년 독립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일이 있음은 위에서 말한 바 있는데, 국어연구학회는 그 앞날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동안 그의 애국정신과 학문 연구를 이해하고 찬동하는 동지와 제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학회와 3·1운동 뒤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이에 직접적인 연맥이 이어짐을 생각할 때, 이 학회설립이 큰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국어연구학회가 1909년 한 해 동안에 모두 7회의 총회를 연 것만 보아도 그 활동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글모죽보기』에 기록된 회의록을 보면, 국어와 국문에 관한 여러 사업을 논의한 가운데 고어(古語) 및 방언(方言)의 채집까지 들어 있다. 그 당시에 이런 데까지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 주는 소중한 증거라고 하겠다.
이 학회가 벌인 사업의 중심은 강습소의 설치 운영이었다. 1909년 10월 10일자 회의록에 “강습소를 설립하되 기한은 1개년, 시간은 매 일요일 하오로 결정하고 강사는 주시경선생이 피선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결의에 따라 그해 11월 7일에 제1회 강습소가 상동청년학원에서 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상 주시경이 여러 해 동안 혼자서 경영해 온 하기강습소를 계승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강습소는 첫해(1909~1910)에 20명, 두번째 해(1910~1911)에 5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졸업생들 중에는 김두봉(金枓奉), 최현이(崔鉉彛:최현배) 등 후일에 주시경의 학문을 계승한 대표적인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학회는 1911년 9월의 총회에서 ‘배달 말글 몯음〔朝鮮言文會〕’으로 명칭을 바꾸고, 강습소의 이름을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으로 하기로 의결하였다. 여기서 ‘국어’ 대신 ‘조선어’, ‘국문’ 대신 ‘조선문’을 쓰게 된 사실과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 나타난 사실이 주목된다. 1910년 8월에 국권(國權)을 일본에게 침탈당함으로써 ‘국어’와 ‘국문’이란 말을 쓸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 이름의 사용을 부추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순수한 우리말 신조어(新造語)는 역시 주시경이 짓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시경은 『국어문법』(1910)을 간행하면서 많은 문법 술어를 새로 만들어 썼는데, 이 운동이 일반 용어에 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조선어강습원도 1914년에 ‘한글 배곧’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국권을 침탈당한 뒤에 우리의 것을 되찾으려는 구국정신이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말한 『국어문법』은 주시경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1910년 4월에 간행되었다. 이 책의 초고(草稿)가 이루어진 것은 1898년이었으니, 12년 만에 간행된 셈이다. 이 동안에 초고에 많은 수정이 가해졌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주시경의 연구는 날로 발전을 거듭하였고 그때마다 초고에 손을 대었던 것이다. 저 위에서 말한 『대한국어문법』의 상당 부문과 『국어문전음학』은 이 『국어문법』첫머리의 ‘음학(音學)’ 부분의 원고가 단행본으로 간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통일이 되지 않은 흠이 있다. 음학부분, 즉 ‘국문의 소리’(1~26면)는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고 술어도 대부분 종래의 한자어로 되어 있음에 대하여, 그 뒤의 ‘기난갈’(27면 이하)부터는 국문체로 되어 있고 술어도 주시경 특유의 신조어(新造語)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뒤 『조선어문법』으로 이름을 고쳐 두 번 간행 되었는데(1911, 1913) 그때마다 내용에 개정이 가해졌으나 음학부분에는 개정이 거의 없었다. 『국어문법』에서 자음과 모음을 ‘웃듬소리’와 ‘붙음소리’라 했던 것을 1913년의 재판에서 ‘홀소리’와 ‘닷소리’로 고친 것이 눈에 뜨일 뿐이다. 그런데 주시경은 『국어문법』을 내고 곧 음학부분의 개정에 착수했었다. 그 결과가 1910년 6월에 간행된 『보중친목회보(普中親睦會報)』 1호에 실린 「한나라말」로 나타났고, 마침내 『말의 소리』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1914년 4월에 스스로 붓글씨로 써서 석판(石版)으로 인쇄한 아담한 책으로 그의 일생의 학문을 마무른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내고 곧(7월 27일) 작고하였다. 그에게 몇 해만이라도 삶이 더 허락되었다면, 아마도 이 『말의 소리』와 같은 형태로 그의 『국어문법』전체를 완성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4) 국문연구소
국문연구소는 학부(學部)대신 이재곤(李載崐)의 청의(請議)로 각의(閣議)를 거쳐 1907년 7월 8일에 개설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년의 정음청(正音廳)을 제외한다면, 국문 즉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적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소를 개설하게 된 동기는, 크게 보면 19세기 말엽부터 문자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들이 있었으나 공동 연구에 의한 통일된 한글체계 및 맞춤법을 확립할 필요성이 분명해진 데 있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동기로는 앞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석영(池錫永)이 소청(疏請)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정부가 재가하여 공표한 결과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고,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학부에 제출하여 한글체계의 통일을 촉구한 일을 들 수 있다. 특히 「신정국문」은 하나의 개혁안으로는 여러 가지 결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정부로서는 이런 한 개인의 안을 그대로 공표한 데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과오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국문연구소가 설치된 것이다.
이 연구소의 목적은 「국문연구소 규칙」제1조에 “본소(本所)에서는 국문의 원리와 연혁과 현재 행용(行用)과 장래 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한글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현재의 상태에 대한 광범한 연구를 행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체계를 정립하고자 한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국문연구소의 개설과 함께 위원장에는 학부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가 임명되고, 위원에는 학부 편집국장 장헌식(張憲植), 한성법어학교 교장 이능화(李能和), 내부(內部) 서기관 권보상(權輔相), 현은(玄櫽), 주시경(周時經) 및 학부 사무관 상촌정기(上村正己:우에무라 마사오또)의 6인이 임명되었는데, 한달 뒤에 학부 편집국장이 갈리어 장헌식이 해임되고 어윤적(魚允迪)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먼저 이 위원 구성은 그 당시 우리 학계가 무척 빈약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두 가지 의문을 자아내 준다. 첫째, 지석영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점이다. 아마도 이 연구소가 주로 그의 「신정국문」을 검토하게 될 것이므로 그를 제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둘째, 일본인의 이름이 끼어 있는 점이다. 이 연구소의 개설은 이른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기 직전이었는데, 이때는 이미 일본이 학부에 사무관을 파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문 연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본인을 관여시킨 사실은 우리 정부가 일본의 심한 간섭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본인은 실제로 아무 활동도 한 흔적이 없다.
국문연구소의 첫 회의는 1907년 9월 16일에 있었다. 여기서 「국문연구소 규칙」을 작성하고 위원의 보선(補選)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종일(李鍾一)·이억(李億)·윤돈구(尹敦求)·송기용(宋綺用)·유필근(柳苾根)의 5인이 새로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지석영이 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1908년 1월이었다. 아마 많은 망설임 끝에 그를 참여시키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원으로 임명되기는 했으나 연구소의 사업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이억·현은·이종일·유필근 등은 곧 물러나고, 그 대신 간사 일을 보던 학부 서기관 이민응(李敏應)이 위원을 겸임하게 되었다.
연구소의 운영은 「국문연구소 규칙」을 따랐다. 이 규칙은 12조로 되어 있는데 그중 제5조가 구체적인 회의방식을 규정한 것으로 주목된다.
[제5조] 연구하는 방법은 제1조에 기인하여 연구문제를 의정하여 차례로 각 위원이 연구안(硏究案)을 제출 논결(論決)하되,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1회, 문제를 위원장이 제출하되 위원의 의견을 요한다.
제2회, 각 위원이 연구안을 제출하거든 각 안을 수집하여 모든 위원에게 배부하여 참호(參互) 연구하게 한다.
제3회, 각 위원이 참호연구안을 제출하거든 위원장이 수집 열람하여 평 안(評訂案)을 갖춘다.
제4회, 위원장이 참호연구안에 평정안을 첨부 제출하여 토론 의결하되 가표(可票)의 다수(多數)를 따른다. 단, 가표의 다수를 요하되 출석원 3분의 2 이상으로 한다.
이 제5조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규정이었던 탓으로, 첫 문제에 대해서만 실행되고 다음과 같이 개정을 보게 되었다(이때에 제4조가 추가되어 제6조가 되었다).
[제6조] 연구하는 방법은 제1조에 기인하여 연구문제를 의정하여 차례로 각 위원이 연구안을 제출 의결하되,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1회, 문제를 위원장이 제출하되 각 위원의 의견을 요한다.
제2회, 각 위원이 연구안을 제출한다.
제3회, 각 위원에게 연구안을 배부한다.
제4회, 의안을 토론 의결한다. 단, 가표(可票)는 다수를 요한다.
위원들의 참호연구안과 위원장의 평정안을 없애고 의결을 다수결로 한 것이 주목된다. 위원장의 평정안이 공정성을 지키기 어렵고 2/3 이상의 의결이 실제로 불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국문연구소는 1907년 9월 16일에 제1회 회의를 연 뒤로 모두 23회의 회의를 열었는데, 그 최종회의는 1909년 12월 27일에 있었다. 이 동안 위원장이 10회에 걸쳐 14문제를 제출하였고, 토론과 의결을 거쳐 최종회의에서 보고서를 작성하여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과 마지막까지 남은 여덟위원의 「연구안」으로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3년에 걸친 협동적 노력의 결정이었던 이 「의정안」이 세상에 공표되지 못하고 만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의정안」은 앞서 토의에 붙였던 14문제를 10문제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었다.
① 국문의 연원과 자체(字體) 및 발음의 연혁:한글의 역사를 요약한 것이다. 훈민정음 이전에 고대문자가 있었다는 설을 부인한 점, 훈민정음의 자체가 “상형(象形)이니, 고전(古篆)을 모방한지라”라 하여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서문의 말을 그대로 인정한 점 등이 주목된다.
② 초성 중 ㆁ, ㆆ, ㅿ, ◇, ㅱ, ㅸ, ㆄ, ㅹ 8자의 부용(復用) 당부(當否):이들 여덟 글자는 다시 쓸 필요가 없다는 데 모든 위원의 의견이 일치하였다.
③ 초성의 ㄲ, ㄸ, ㅃ, ㅆ, ㆅ 6자 병서(並書)의 서법(書法) 일정(一定):이것은 된소리 표기에 관한 문제인데, 이런 동자(同字) 병서가 다수표로 결정되었다. 이 병서가 타당한 이유로서 “음리(音理)에 맞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 제자(制字)의 본의(本義)”이기도 하다는 것은 주시경의 주장과 일치한다. 다만 ‘ㆅ’은 국어에 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④ 중성 중 ‘ㆍ’자 폐지, ‘〓’자 창제의 당부:이것은 지석영의 「신정국문」에서 가장 크게 말썽이 된 문제인데, 새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것은 부당하며 ‘ㆍ’는 ‘ㅏ’와 혼동되기는 하나 폐지함은 부당하다는 결정을 보았다. 지석영의 주장에 찬동한 것은 이민응뿐이었고, 이능화·송기용·윤돈구는 반대하였으며, 어윤적·주시경·권보상은 ‘〓’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되 ‘ㆍ’는 폐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아마도 위원장이 이능화 등의 의견을 택하여 위와 같이 결정된 듯하다.
⑤ 종성의 ㄷ, ㅅ 2자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6자도 종성에 통용 당부:이것은 주시경이 주장하여 제기된 문제인 바, 그와 주장대로 의결되었다. 이에 전적으로 찬동한 위원은 주시경외에 어윤적·권보상·윤돈구였고, 반대한 위원은 이능화·지석영·이민응이었다.
⑥ 자모(字母)의 7음(七音)과 청탁(淸濁)의 구별 여하:이것은 음성학 내지 음운론의 문제로서 자음의 분류에 관한 옛 체계를 다시 정리한 것이다.
⑦ 사성표(四聲票)의 용부(用否) 및 국어음의 고저법(高低法):이것은 지석영의 「신정국문」과 관련된 문제인데, 사성은 국어음에 없으므로 사성표는 쓸 필요가 없고, 장단(長短)의 구별은 있으므로 장음을 글자의 좌견(左肩)에 1점을 가하여 표시하기로 의결하였다.
⑧ 자모(字母)의 음독(音讀) 일정:한글 자모의 명칭을 새로 정한 것이다. 전통적인 명칭은 ‘기역, 디귿, 시옷’ 등의 제2음절에 불규칙성이 있었는데, 이들을 ‘기윽, 디읃, 시읏’으로 고쳐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⑨ 자순(字順)·행순(行順)의 일정:자모의 순서가 『훈민정음』이후 여러 책에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초성은 아(牙), 설(舌), 순(唇), 치(齒), 후(喉)의 순서로 하되 청음(淸音)을 먼저 놓고 격음(激音)을 뒤에 놓으며 중성은 『훈몽자회』의 것을 따르기로 하였다. ㆁ(이응), ㄱ(기윽), ㄴ(니은), ㄷ(디읃),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읏), ㅈ(지읒), ㅎ(히읗), ㅋ(키읔), ㅌ(티읕), ㅍ(피읓), ㅊ(치읓) ; 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ㅣ(이), (). 이것은 어윤적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⑩ 철자법(綴字法):“철자법은 『훈민정음』예의(例義)대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당시의 학자들은 철자법이란 말을 초성·중성·종성을 결합하는 방법이란 뜻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국문연구의정안」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훌륭한 한글의 통일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ㆍ’자를 그대로 쓰기로 한 점을 제외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체계와 맞춤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보다 훨씬 앞서 이런 원칙에 도달했음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주시경이 줄곧 주장해 온 된소리 표기법과 새로운 받침의 이론이 채택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어윤적과 권보상이 그의 주장을 적극 지지한 덕분이었다. 어윤적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권보상에 대해서는 내부(內部) 서기관이었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으며, 국문연구소의 보고서에 첨부된 연구안에서 그의 연구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5) 한글과 독립운동
한글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문자로서, 우리말과 함께 우리 민족을 특징짓는 가장 뚜렷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이웃한 우리 민족이 독립된 국가와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연면히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것은 우리 민족의 전반적인 역량에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우리말이 중국어와 다르다는 사실이 민족의식을 굳건히 지키는데 큰 힘이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로 독특한 문자까지 가지게 되어 우리민족의 독자성은 더욱 뚜렷하게 된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민족 의식이 강하게 싹텄을 때, 우리말과 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글이 새 시대의 문자생활을 담당하게 되면서 그 체계와 맞춤법의 확립이 시급하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몇 몇 선각자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었고 그 노력이 1907년에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로 집결되었던 것이다.
이 연구소는 2년여에 걸친 연구 성과를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으로 마무리지어 정부에 보고했으나, 이것이 공포·시행되지 못하고 만 것은 못내 한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계승되어 1933년에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그때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글에 관한 연구와 운동에서 가장 뚜렷한 존재는 주시경이었다. 그는 한 민족의 흥망성쇠가 그 말과 글을 잘 다듬어 쓰고 못씀에 달렸다는 생각에서, 우리말과 글을 잘 가꾸는 것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길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였고, 그 연구에서 얻은 결과를 실천에 옮기는 일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이러한 충정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그가 꿈꾸었던 우리말과 글의 정리사업(표준말과 맞춤법의 확정)이 1930년대에 성취되었으니, 한 진정한 선각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 침략자들의 혹독한 압박 밑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한민족 독립운동사상에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한 운동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생각할 때, 주시경을 비롯한 선각자들의 활동은 미약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그 당시 문화와 학문에 대한 깊은 인식이 아직 적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독립을 위해서 당장 중요한 것은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나라의 독립을 인정받는 일도 중요하였다. 시급한 일은 너무 많고 일꾼이 너무나 적었음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민족 문화의 핵심이 되는 우리말과 글, 민족정신의 근원인 말과 글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너무나 적었다. 몇몇 이름들이 있기는 하나 사실상 주시경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고군분투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성이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를 따른 제자들이 그와 못 이룬 뜻을 이루었던 것이다. 실로 주시경에서 싹트고 조선어학회에서 열매 맺은 한글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거둔 가장 빛나는 업적의 하나로서 길이 기록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