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실망한 모양이에요. 나라는 남자한테...
아직도 내 전화를 받지 않네요.
하지만 나도 진짜 화가 났었어요.
그녀에게 미안해서였는지, 창피해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는 게 맞는 말일 거예요.
그녀에게..힘들 때마다 찾아와 쉴 수 있는
뿌리 깊고 이파리 무성한 나무가 되어 주고 싶었는데,
나무는 커녕 짐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그리고 창피했습니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어요.
며칠 전 그녀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습니다.
"오빠, 나랑 같이 일하는 피디가 내일 면접 와 보래.
안 그래도 모델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쇼핑 호스트 중에서 제일 실적이 좋은 그녀의 부탁을
피디 되는 사람이 거절할 수 없었던 거겠죠.
그녀는 잘 나가는 쇼핑 호스트고,
난 별 볼일 없는 무명 모델입니다.
물론 자격지심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얘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화를 내 버렸어요.
남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 친구 후광으로 먹고 사나 싶은 게,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거든요.
그래서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 대신 화를 내 버린 거죠.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부탁 했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은 하고 그래?
내 입장은 생각도 안 해?"
그렇게 다투고 헤어졌는데, 그 날 새벽 문자가 왔습니다.
[마음대로 해. 진짜 자존심이 뭔지 모르는 것 같으니까..]
그녀가 말하는 진짜 자존심이 뭘까에 대해 밤새 생각하다가,
다음 날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일단은 그녀의 실망이 절망이 돼버리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행이 담당 피디와 얘기가 잘 돼서 오늘 첫 방송을 했습니다.
상품은 레이스 장식의 침대 커버였고,
난 그 침대커버가 씌워져 있는 침대에 앉아서
여자 모델과 다정히 얘길 나누는 역할이었어요.
물론 쇼핑 호스트는 그녀였습니다.
오늘도 역시 그녀는 매진 사례를 기록했죠.
근데 방송 내내 나하고 눈 한 번 마주쳐 주지 않더라구요.
내일은 골프웨어 모델을 하기로 했는데,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이대로 허무하게 그녀가 날 떠나 버리게 될까봐..
사실..두렵습니다.
사랑이..사랑에게 말합니다.
자존심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 줄 때 진짜 자존심이 되는 거라고,
그녀의 자존심도 지금 산산조각이 나버렸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