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두려워하시나요?/ 마태복음 10:26-31
우리의 머리카락을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이 무섭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를 돌이켜 보면서 벌 받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물론 당장 벌이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점점 익숙해졌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에 무감각해졌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불행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극에 달하겠지요.
오늘 본문에 “두려워하다.”라는 동사가 네 번 나옵니다. 처음 두 번은 제자들을 음해하는 바리새파나 권세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로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영혼도 몸도 다 파멸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반전이 시작됩니다. 바로 그분은 “너희의 아버지”이며, 참새 한 마리, 즉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그분 모르게” 땅에 떨어지지 않으니, 제자들에게 “그분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세 번째 두려움에 관한 어록이 끝을 맺습니다.
<두려워하다>라는 동사는 포베오(φοβέω)인데, 여기서 포비아(Phobia)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정신과에서 사용하는 “공포심”입니다. 극한의 경험을 한 사람은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극도의 포비아를 느낍니다. 고소공포증이나 폐쇄공포증도 그렇고, 교통사고 때문에 운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해당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늘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 번 분석해 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정말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라!”라고 말할 수 있는데, 놀랍게도, 정말 두려워할 대상에 대하여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해하면 “하나님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운 동시에 두렵지 않은”(simul timendus et non timendus) 분입니다. 이것이 어떤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어렸을 적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세고 계신다는 말이 무척 두렵고 무섭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성장해서도 여전히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생의 가까운 곳에서 만나고 느끼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아는 초월적인 존재로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John A. T. Robinson이라는 성공회 주교가 1963년에 쓴 Honest to God(신에게 솔직히)라는 책도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교리가 아닌 사랑으로 이해하고,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나가며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이 되기를 권면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녀야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막연한 두려움이나 또는 두려워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이라는 말속에 담긴 아버지 되시는 분에 대한 자녀된 자의 경외심입니다.
“신에게 솔직히”라는 말은 “신 앞에 겸손히”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거룩성 앞에 선 유한한 인간이 지녀야할 두려움은 겸손으로 표현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하게 아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게 되고, 주님의 가르침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삶으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동시에 두렵지 않은”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세상 앞에서도 당당하게 산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당신의 가르침을 당당하게 살아내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신 것입니다. 그런 용기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2024년 11월 24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