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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둘레길 길동무 원문보기 글쓴이: 수명산
낙동정맥 종주 2구간(산줄기 150일째)
일 자 : 2002년 12월 18일
구 간 : 개금사거리 ~ 백양산 ~ 산성고개 ~ 북문
날 씨 : 맑음
도상거리 : 17.5km
개금사거리 - 4.6 - 백양산(641.5m) - 4.5 - 만덕고개 - 4 - 산성고개 - 2.8 - 의상봉 - 0.7 - 원효봉 - 0.9 - 북문
밤새 비가 내리더니 하룻밤을 보낸 회운장 여관을 나서며 새벽하늘을 보니 별들이 쏘다진다. 종주 두 번째 날, 어제 내려섰던 엄광산에서 백양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풀리지 않아 숙제로 남는다. 주변이 도시화되고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가야로가 확장되면서 낮아져 지금은 평지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부산시 자료에 보면 엄광산과 백양산이 이어지는 능선에 냉정고개가 있었다고 한다. 냉정고개는 사상구의 주례동과 부산진구의 개금동 사이에 있었던 고개로 서면쪽에서 김해와 구포방면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고 한다. 고개 아랫마을이 냉정골이라 해서 붙여졌는데 그 냉정은 주례초등학교 아랫마을로 60년대까지만 해도 냉정에서 솟는 물이 차서 여름철 발을 오래 넣고 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07시 개금전철역 지하도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보행로를 따르다가 육교에 올라 경부선 철도와 고가도(도시고속국도)를 가로지른다. 정맥꾼들은 LG아파트를 통과하고 이어 개림초등학교 교정을 빠져나와 왼쪽으로 능선에 붙는데 이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린다. 개림초등학교에서 능선을 붙는 과정이 물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우측의 철탑이 보이는 능선이 정맥일까?
산책로를 따라 한동안 오르다가 이정표(건강공원 : 1.2km, 삼각산 : 2.3km)를 만나면서 임도를 버리고 나무계단을 따라 오른다. 동녘에 슬며시 떠오른 둥근 해, 능선길에서 만나는 ‘우리의 산하 1대간 9정맥을 완주에 그 날까지’라고 쓰여진 구정맥산악회의 노란색 리본이 정겹다.
바위길을 따라 모습을 들어낸 백양산을 보며 힘겹게 바위봉에 오르니 탁 트인 조망이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며 뿌듯한 만족감이 밀려온다. 엄광산 아래 아파트와 빌딩숲이 대단하고 서쪽으로 낙동강과 김해평화가 끝없이 펼쳐진다. 우측으로 개림초등학교 왼쪽으로 올라서는 능선이 선명한데 이 것이 낙동정맥의 능선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08시 18분 사상산악회에서 세운 표지석이 서있는 높이 454m의 삼각봉에 오른다. 조망은 거침없는데 바람이 정맥군들의 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방향을 북동쪽으로 바꾸어 송전탑을 겨냥하며 잠시 내려섰다가 키 작은 소나무사이로 억새밭을 가르면서 오른다.
송전탑을 지나 십자로안부를 가로지르고 날등의 묘지들이 을씨년스러운 정맥길은 바위길을 따라 오르내림으로 이어간다. 산불초소와 돌탑이 있는 봉(08:42)에 오르니 우측으로 부산진구의 빌딩숲과 아파트단지 그리고 백양산터널로 이어지는 도로의 흐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이라 했다는 동평현, 당감동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08시 50분 정맥능선에 넓게 자리잡은 공원에 내려서니 헬기장과 깨끗하게 단장한 화단 위에 얘진봉(愛鎭峰)이란 커다란 표지석이 서있다. 부산진구를 사랑하는 봉우리라고 효산이 귀뜸을 해준다. 잠시 다리쉼을 하고 완만하게 시작되는 능선길을 따라 한차례 올라선 곳이 삼각점(부산 301, 95년 재설)과 돌무더기 위에 작은 표지석이 서있는 백양산(09:03)이다.
정상에서 휘둘러보는 조망은 막힘이 없다. 서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북쪽으로 이어지는 정맥의 능선들, 멀리 상계봉(638.2m) 뒤로 금정산이 멀어만 보인다. 우뚝 솟은 산과 봉우리들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도심의 빌딩숲은 바다와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백양산(白楊山)은 높이 641.7m로 부산진구와 사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산도심의 주요하천으로 우리나라 상수도의 시초가 된 성지곡수원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천의 발원지가 된다. 백양산은 1740년 이후 금용산에서 나누어지면서 생긴 이름으로 보이며, 백양사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백양산 남쪽 기슭에는 삼국시대 때 동평현(현 당감동)의 치소가 있었던 동평현 성터가 있다. 동쪽 아래 선암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선암산이라고도 부른다나...
백양산을 뒤로 밋밋한 봉우리(09:15)를 하나 넘어서고 이어지는 정맥의 능선은 봄이면 푸른 초원으로 바뀔 넓은 방화선을 따라 오르내림이 완만하여 마음껏 달리 수 있다. 구포가 집이라는 50대 부산아즈매, 틈만 나면 산에 오른다는 그녀와 잠깐이지만 동행이 된다. 좌측으로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보기 좋은 정맥길은 한차례 바윗길을 올라선 곳이 돌탑이 있는 능선분기점이다.
부산사람들은 이곳을 불태령이라 부른다. 불태령은 초읍동 성지곡 수원지에서 북구만덕동으로 이어지는 높이 610.9m로 낙동정맥의 주능선에 있는 산정의 하나로서 사면이 급한 험준한 고개이다. 여기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상수도원의 수원지였던 성지곡의 전설을 들어보고 가자.
신라시대 유명한 풍수지리 지관이 성지(聖地)라는 사람이 전국 명산을 유람하면서 명산을 찾던 중 경상도지방에서 가장 빼어난 골짜기를 이곳에서 찾고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성지곡으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09시 27분 능선분기점에서 송전탑이 보이는 좌측의 능선으로 부산아즈매를 보내고, 오른쪽(북동)으로 산불초소가 있는 봉을 향하여 내려서는 길은 넓고 완만한 길이다. 멀게 보이던 돌무덤과 산불초소도 길이 좋다보니 금새 다가서고 이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밤새 얼었다 녹아 미끄러운 돌발길의 긴 내리막, 군데군데 바위지대를 통과하며 내려선 곳이 편의 시설들이 갖추어진 만남의 숲이다.
정맥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남문 쪽이다.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자세로 쉬고 있는 만남의 숲을 뒤로 밋밋한 언덕을 넘어서면서 정맥길은 직선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통나무계단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순간 길을 놓쳐버리고 잠깐이지만 과외공부를 해버린다. 앞서가는 꼴을 못 보는 혁산 구용회가 바로 뒤를 따랐는데...
다시 되돌아와 내려선 십자로안부에는 향토순례 표시석이 있다. 지도상에 불태령(10:07)이라 표기된 곳이다. 순례길을 버리고 흰색페인트를 칠한 산불초소를 통과하며 한차례 힘겨운 가파른 오름길로 능선마루인 능선분기점(10:17)에 오른다. 우측으로 금정봉(408m)으로 이어지고, 정맥은 왼쪽(북)으로 방향을 바꾸며 내리막길이 된다. 이어 황해도 해주 벽성군민회에서 세운 망향비를 만날 수 있다.
정맥길은 향토순례길이 되어 오르내리면서 이정표(금정산철학로 : 1,300m, 한신APT : 650m)를 지난다. 정맥의 마루금은 송전탑이 서있는 봉에서 오른쪽(동)으로 곧이어 다시 왼쪽(북동)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어 밀양박씨 쌍묘를 지나 한차례 오름길은 향토순례길을 벗어나 잠시 철탑을 향해 368.5봉(10:38)에 올라서니 억새밭에 삼각점을 확인할 수 있다. 멀어만 보이던 금정산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우측으로 동래구의 빌딩숲이 빤히 내려다보며 내려서니 돌밭 사이에 판독할 수 없는 삼각점(도근점?)이 있고 바위 전망대에 서니 만덕고개로 오르는 도로가 내려다보인다. 3분 가량 내려선 곳이 만덕고개(10:48)다.
북구 만덕동과 동래구 온천동의 경계를 이루는 만덕고개는 옛날부터 구포방면과 동래방면을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으며,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산아래 동네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데 모여 넘어야 했을 정도로 산적 떼들이 자주 나타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해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고개 아래에 피난민 1만 여명이 피신을 하여 모두 화를 면하는 덕을 입었다고 만덕고개라 했다나, 믿거나 말거나...
또 한가지 만덕고개는 고려사열전에 보면, 충혜왕의 서자인 석기(釋器)를 공민왕이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유배시켰다고 한다. 석기가 유배당한 곳이 바로 만덕고개 아래 지금의 만덕동에 있는 만덕사(萬德寺)로 보고 있다. 따라서 만덕고개는 그 만덕사가 있던 고개였기 때문에 만덕고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고개는 1969년 20m로 확장 포장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졌고, 1973년에는 총연장 820m에 이르는 만덕 제1터널이 개통되었고 1988년에는 제2터널이 개통되어 경부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와 연결하는 통로로 등장하면서 고개의 옛 모습과 정취는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부터 북구입니다 라는 표지판을 보며 도로를 가로지른다. 산책로를 버리고 소나무숲으로 들어서서 연이어 십자로안부를 가로지른다. 좌측으로 부전교회 부활동산 묘지를 지나 향토순례길을 버리고 올라서는 길목에서 만나는 샘터의 물 한 모금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한차례 가파르게 올라선 봉우리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너무나 싱그러워 보이고 돌탑이 쌓여있는 봉(11:12)에 올라서서 전망대 바위에서 보는 지나온 정맥의 능선은 그저 정겹기만 하다. 다시 한차례 이리저리 바위지대를 따라 오르다보니 과외공부를 시키고 도망 같던 혁산과 효산이 너럭바위에 다리 쉼을 하며 약을 올린다.
주인이 없는 천막과 평판들이 널려있는 넓은 쉼터가 있는 510봉에 오른다. 정맥꾼들은 여기서 때 이른 점심식사(11:20/11:40)로 20여분의 시간은 흘러간다. 방향을 북쪽으로 틀며 잠시 내려선 십자로안부에는 ‘여기부터는 금강공원입니다’라는 안내판과 이정표가 기다리고 있다.
정맥은 북쪽인 산성고개 방향으로 넓은 산책로를 따르다가 산책로를 버리고 올라선 544봉, 전망대 바위에는 곽연기 대장이 이끄는 부산 백두산산악회의 노랑 리본이 반갑다. 낙동정맥 첫걸음에 많은 도움을 준 소산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부산대학교의 넓은 캠퍼스와 동래구 장전동과 부곡동 일대가 발아래 펼쳐진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있는 안부에 내려선다. 좌측으로 남문으로 내려서서 상계봉(638.2m), 파리봉을 오를 수 있는 갈림길이 있는 곳이다. 정맥은 금정산 역사탐방로 안내판(북문:6.2km, 동문:2.6km, 남문:0.3km, 케이블카:0.5km, 온천장 2.4km)을 보며 잠시 올라선 곳이 제 2망루다.
두 번째 금정산 역사탐방로 안내판(북문:4.9km, 동문::1.4km, 제2망루:1.2km, 남문:1.8km, 남문연못:0.9km)에서 2분 거리에 있는 평평바위에 도착하니 남녀 등산객들이 모여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사람이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묘기를 부린다. 대륙봉에 올랐다가 금정의 문화유산이란 안내판이 서있는 산성고개(12:26)에 내려선다.
산성고개는 동래구 온천동과 금정구 금성동(산성마을)으로 올라 북구 화명동에 이르는 고개이다. 해발 390m의 고개로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산성마을까지 오가는 버스가 운행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험한 고개였다. 좌측에 있는 산성마을에는 산성막걸리와 염소불고기가 특산물인데 이곳 누룩은 일제강점기 때 산성에서 동래로 다니는 학생들이 세무서의 단속을 피해 책가방 속에 넣어 동래에 공급하며 학비조달 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유명하다.
커피 한 장으로 서로의 정을 나누다가 올라서는 정맥길엔 새로 복원한 산성이 눈길을 끈다. 뒷정리를 시멘트를 발라놓아 보기가 흉하다. 혁산이 한마디 “설계가 잘못 된 거여, 아니면 시공이 잘못된 거여”
산성고개에서 10여분 거리의 동문에 닿는다.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마을에서 어린이들이 이리저리 뛰어 놀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산성마을이라 부르는 금성동에는 옛날 3개의 마을이 있는데 남쪽방향의 맨 위쪽이 공해마을로 옛날에 군관건물과 식량창고가 있었고, 가운데 마을이 중성문이 있었던 중리, 서쪽방향의 아랫마을이 화살 만드는 대가 생산된 죽전마을이라고 한다.
금정산 역사탐방로를 따라 이어가는 정맥길은 좌우로 출입을 막는 밧줄을 설치되어 있는 뻔뻔한 길이다. 나비바위 0.2km 지점을 알리는 안내판을 통과하면서 나비바위와 제3망루는 출입금지구역이라 그대로 통과한다. 한해의 생명을 다한 키 작은 억새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군데군데 바위지대, 그리고 키 작은 소나무들, 멀리 제4망루가 보이고 그 뒤로 금정산의 최고봉인 고담봉이 정맥꾼들을 부르는 듯하다.
13시 11분 한차례 내려선 넓은 공터의 안부에는 먼저 도착한 정맥꾼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허기를 메꾸고 있다. 정맥을 시작한 이래 처음 맛보는 풍요로운 길, 무거운 배낭이 어색할 정도다. 다시 한차례 넓게 단장한 계단길을 오르다가 산성을 따라 능선마루에 오르니 북쪽으로 두구동의 모습이 시선에 와 닿는다. 두구동은 예전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회식장소로 양어장에 몇 차례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제4망루(13:19)에 도착한다. 트로(Tor) 안내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금정산릉에 형성된 기암들이 트로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문에 적혀있다. 우측으로 회동저수지가 빌딩숲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회동저수지는 부산 시민의 급수원으로 1967년 완공되었으며 주변에 예로부터 오륜대라는 부산시민의 휴식공간이 있는 곳이다.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망대의 역할을 했다는 의상봉을 지난다. 우측으로 무명바위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다시 올라선 삼각점이 있는 원효봉에는 돌무더기 속에 높이 687m라고 쓰여 있는 금속판을 확인할 수 있다. 원효봉은 금정산 동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가장 먼저 어둠을 해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는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동녘, 서녘, 밝음, 광명 즉 신선한 아침 풍정의 산봉우리 의 명칭을 ‘으뜸의 새벽' 원효봉이라 불렀다. 원효는 불교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면 서 금정산에서 높은 교화력과 깊은 감화력인 신술로 5만 왜구를 물리친 호국의 주인공이었다.
원효봉을 뒤로 안부에 내려서며 보는 우측으로 흐르는 암봉과 소나무의 어울림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한동안 같이 걸어주는 연산동이 집이라는 산 친구, 한세상 살아가면서 잠깐동안의 만남이지만 낙동정맥이 완주하는 날까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혁산이 그녀를 노란 머리라고 했다.
13시 45분 북문에 내려선다. 금정 대평원, 산 능선 넓은 벌판에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잘 복원된 북문, 금정산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있다. 사적 제215호 금성산성은 길이 17.377m, 성벽높이 1.5~3m이며, 면적이 8.2k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한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동래산성인데 금정산 위에 있다 해서 금정산성이라 부른다. 1703년(숙종29년)에 개축되었으며 그 후 수 차례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금정산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 문헌상의 기록은 없는데 다만 고대에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 때 지은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종주 두 번째 구간이 끝나는 순간이다. 어서 오라 손짓하는 고담봉을 오르지 못하니 아쉬운 마음을 버릴 수 없어 한동안 떠날 줄을 모른다. 북문(14:00)을 빠져나오면서 이제 하산길이다. 돌계단을 따라 많은 등산객의 물결에 파고든다.
금강암을 지나 대성암을 만나고 한 겨울을 범어사 경내는 고즈넉하다. 금정산 범어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화엄 10찰로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송두리째 불타 10년 동안 폐허로 버려졌던 수난의 역사를 겪기도 하였다.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세워진 호국 사찰인 만큼 임란의 국가 전체의 재난에 이 사찰인들 온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02년 폐허이던 범어사를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광해군 5년(1613년) 법당과 요사채 불상과 십왕상(十王像) 등을 갖추어 중창하였다.
그 뒤로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원의 규모를 넓혔으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는 선찰대본산이 되어 민족적인 사찰로서 우리의 불교를 수호하는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근대 민족불교를 지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낙락장송이 우거진 송림 사이를 빠져나온다. 2박 3일간의 낙동정맥 종주를 마치기까지 걷기도 많이 하고 땀도 많이 흘렸으나 몸도 가뿐하고 마음도 흔쾌하여 산행 뒤의 기분이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훌쩍 떠나오기가 아쉬운 부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