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거듭나야 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전에 부르던 찬양 중에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여뻐도, 맘 착해도 못가고 벼슬로도, 지식으로 못가고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거듭나야 가는 나라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죠지 휫필드' 목사님은 이 본문으로 300번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한 성도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같은 설교를 계속 반복하십니까?'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거듭나기 위해서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격인데 전국에 72명인 종신제 국회의원입니다. 바리새인은 주전 2세기에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바리새파'라는 이름은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구별된 자' 즉 '참다운 이스라엘'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율법의 의무를 지키면서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의인이라고 자부하고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함을 단호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 중에도 진실로 하나님을 바라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중에 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가 낮에 당당하게 예수님을 만나러 올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꺼렸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맨 처음 한 말이 이렇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에 니고데모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듭나라'고 하시니 이해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3절과 5절과 11절입니다. 성경에 ‘진실로’라는 단어는 수없이 쓰였지만 ‘진실로 진실로’처럼 겹쳐 사용한 적은 25번입니다. 그런데 그 25번이 모두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는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말로 정말로’인데, 단지 나의 진심을 믿어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진리를 말한다, 내가 하는 말이 진리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정말로 진리를 말하노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전하는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람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3절 후반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듭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거듭나다'라는 헬라어 ‘겐네데 아노덴’인데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겐네데’는 '태어나다‘란 뜻과 ’아노덴‘은 '다시' 또는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위로부터 태어나다', ‘다시 태어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남은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형수술하여 얼굴이 싹 바뀌었다고 거듭남이 아닙니다. 산삼 먹고 회춘했다고 거듭난 게 아닙니다.
'거듭나다'를 다르게 말하면 '중생'입니다. 딛3:5절에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했고,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하는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씨앗이 심겨져서 새로운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롬11장에서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잘라 참감람나무 줄기에 접붙이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뿌리로부터 새 생명이 들어오는 것처럼 우리를 예수님께 접붙여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인 육신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속사람인 영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죄 가운데서 부모를 통해 났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육신으로 혈통으로 어느 가문에 어떤 부모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처음엔 육신으로, 부모에 의해 났으나 두 번째는 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요1서 5:12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생명에는 하나님의 본성, 성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본성이, 성품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 자녀들의 열매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닭은 꼬끼옥 하고 고양이는 야옹하며 개는 멍멍 하면서 짖어댑니다. 누구에게 배웠나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닭에게는 닭의 씨가 있고,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씨가 있고, 개에게는 태어나서부터 개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와 말을 유심히 본 적이 있습니까? 소는 앉았다가 일어설 때 뒷다리부터 일어섭니다. 그런데 말은 앞다리부터 일어섭니다. 누가 가르쳐 주었나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의 씨, 본성이 있습니다.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의 씨, 본성이 있습니다.” 콩의 모양은 다 비슷해도 심어보면 각각 종류대로 다른 모양으로 자라고 다른 열매가 맺힙니다. 콩 안에 각각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도 치어는 다 비슷해도 자라면서 그 씨가 무엇이냐에 따라 대방어도 되고 고등어도 됩니다. 씨대로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 성품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 전까지는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고 죄의 열매를 즐거워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거듭난 다음부터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죄를 이기려고 하고 죄에서 돌아서려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 육신에 져서 넘어지기도 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 찔려서 다시 회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증거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아직 이룬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녀로 이루어 가는 상태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6절에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명문대학교는 그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 요구하는 실력이 준비되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를 가려면 그 나라의 비자를 받지 않고는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조건에 맞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비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에 들어갈 때 물로 씻지 않고 들어가면 즉시 죽었습니다. 출30:20절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엡1: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고 계1:5절에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고 했습니다. 물로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보혈로 씻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는 하나님이 주신 샘물입니다. 슥13:1에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라고 했는데 성령은 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입니다. 음식을 담을 때도 더러운 그릇을 깨끗이 씻은 후에 음식을 담듯 하나님은 죄로 더럽혀진 우리를 먼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기시고 거룩한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역사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신비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릅니다만 바람이 불고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쓰러지고 풍랑이 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고 싶고 하나님을 찾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어집니다. 자신의 죄가 발견되고 회개가 있고 눈물과 용서가 있고 감사와 기쁨이 있게 되고 평안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분명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거듭난 사람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 모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